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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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을 입은 이가 가져다준 반구형 기기를 머리에 쓰고 잠깐 눈을 감았다 뜨니 예전에 와봤던 초원이었다.
“오랜만이군요.”
머리칼이 발목까지 오는, 내 키의 절반이나 될까 싶은 아이가 웃으며 나를 맞았다.
반가움이나 선의의 웃음이 아니라 악의가 짙게 묻어나는 웃음이었다.
어떻게 하면 나를 ‘요 자르고, 저 잘라서’ 요리할 수 있을까 기대하는 기색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런 긴장감을 해소할 겸, 스트레칭을 위해 팔과 허리를 돌리며 건성으로 물었다.
“여긴 당신의 공간이랬죠?”
“질문은 제가 합니다.”
무시하고 내 할 말을 이어갔다.
“문득 생각난 건데 방식이나 느낌이 딥스페이스랑 굉장히 유사한 것 같네요.”
마고의 기다란 머리칼이 물결치더니 그는 곧장 내 말에 반박했다.
“그런 조잡하고 보안도 취약한 곳에 내 공간을 가져다 대지 마시죠!”
내가 자기를 은밀한 성 취향을 가진 비밀파티 중독자로 몰아가도 당황은 하되 이렇게 발끈하지는 않던 마고다.
마고가 딥스페이스를 규제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 같다는 매티슨의 말을 듣고 ‘진짜 동족 혐오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것이 어느 정도 맞아들어가는 것 같다.
“하긴, 많이 다르죠. 딥스페이스는 수많은 사람이 안경 정도 크기를 가진 기기로 세계 곳곳에서 접속해서 이용하는데 여긴 다이브 기기보다 훨씬 커다란 기계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들어와야 하던가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마고 씨의 허가나 승인이 있어야 들어올 수 있는 것 같고요. 보안은 모르겠지만 폐쇄성이 너무 심하네요. 가상 공간의 장점은 개방성과 높은 자유도 아닐까요?”
내 말에 마고는 팔짱을 끼고 얼굴에 불쾌하다는 표정을 만들어냈다.
“각자의 용도와 편의성에 맞는 방식을 채택했을 뿐입니다.”
“사실은 당신도 딥스페이스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건 아닌가요? ‘머지않아 딥스페이스가 네오-서울의 네트워크 그 자체인 마고를 넘어설 것이다.’ 이런 말이 들리던데요.”
“하루살이의 머지않아는 몇 분에 지나지 않지만, 흡혈귀의 머지않아는 몇백 년 이상일 겁니다. 넘어서지도 못할 거고요. 더 이상 비전문가의 말은 듣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저번 만남에서 앙금을 잘 털어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오메가 씨는 맺힌 게 남아있는 모양이군요.”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이전 만남에서 마고가 나를 나름대로 정중하게 대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마고의 논리를 내가 논파한 결과인 것 역시 사실이다.
확실한 증거 없이 마음대로 사람을 심신미약 상태로 만들어 취조하는 것이 옳으냐, 그 행동의 근거가 내가 퓨어라는 점이라면 이건 차별금지조례에 어긋난다, 수사기관이면 이렇게 다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일을 진행해도 되느냐고 내가 쏘아붙이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능력 제한 법령 대상자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해결사 일도 제대로 못 했겠지.
능력 제한 법령 대상자가 되면 네오-서울에서 제공하는 여러 사업이나 이권 분배에 우선순위로 참여할 수 있는 등등의 혜택이 있어서 사실상의 초인 우대 정책 아니냐는 일각의 소리도 있지만, 상당수 초인이 대상자 지정 이후 몇 년 버티다 수많은 혜택을 포기하고 반反-능력 제한 법령 운동가가 되는 경우가 즐비해 여러 논란이 많은 법령 중 하나였다.
템페시르나가 기거하는 집이 네오-서울이 아닌 WSS 남부 교외에 있는 이유 중 하나도 능력 제한 법령 때문이라 들었다.
그래서 수십 년 동안 아무 소리 없이 네오-서울에 협조 중인 야스민 가문의 첫째, 젠이 아주 독특한 케이스였다.
야스민 공의 사업적 추진력이 항상 깨끗하지만은 않고 어딘가 켕기는 부분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젠의 깨끗하고 정순한 도사 이미지 때문에 그런 어두운 부분이 많이 희석된다는 사실을 신시아도 부정하지 않았다.
여하튼, 눈을 부릅뜨고 내 잘못만을 찾으려 애쓰는 마고에게 나도 부드럽게 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마고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한 가지 이유를 더 꼽자면 그건 역시 마고가 트라이포드와 관련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나무를 흔들지 않으면 열매도 떨어지지 않는다.
지금은 공중 분해된 브리가드의 수장인 마데르노가 어딘가와 협력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도 오로지 나를 죽이기 위해.
그걸 해낸 집단이 트라이포드고, 라미아인 수연을 비롯해 그 가지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트라이포드에는 구성원들이 ‘그분’이라 부르는 수뇌가 있다.
그들의 칼날이 나를 향해 있는 이상, 나도 그들의 존재를 더 빠르게 알아채기 위해서 한발 앞서 더 과감히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계속해서 마고를 긁었다.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하다는 말.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것 같은데요. 그걸 완벽히 조졌으니 좋게 보일 리가 있나요. 앙금을 털어낸 것도 엄밀히 따지면 마고 당신이 저를 더 압박할 거리가 없던 거 아닌가요? 이번에 저를 소환한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것 같은데요.”
주름 한 가닥 없는 앳된 얼굴로 마고는 위아래 어금니를 마주 갈며 볼을 일그러트렸다.
“본인이 지금 선을 넘고 있다는 걸 인지하길 바랍니다, 오메가 씨. 당신에게 관심을 보이던 위타천은 물론이고 요새 나다도 당신 얘기를 종종 꺼내더군요. 심지어 직접 조사를 나섰던 노덴스도 당신이 하는 일이 모두 합법의 영역이라 할 수는 없지만 당신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아 보인다고도 하고요.”
오우.
생각했던 것보다 평이 꽤 좋은데.
열심히 구르며 살아온 일부를 보상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지려던 찰나.
“공공 집행자들과의 사적인 친분을 만들었다고 이렇게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거, 절대 가볍게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 말을 듣기 무섭게 머리에 열이 훅 올라 쏘아붙였다.
“제가 막무가내로 하는 건 안 괜찮고, 그쪽이 고압적으로 하는 건 괜찮습니까? 사적인 친분? 내가 같이 밥 먹자고 로비를 했습니까? 아니면 술 한잔하자고 지인한테 소개를 부탁하길 했습니까? 다 일로 만나고 일로 헤어진 거 아닙니까. 그리고 말은 바로 합시다.”
마고가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나는 손을 들어 제지하는 것과 동시에 바로 말을 이어나갔다.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미디어는 잘 틀어막은 것 같던데, 글라드 일족의 수장인 그웨지안과 그 아들이 네오-서울까지 와서 위타천의 약혼녀를 암살하려고 했던 거. 미리 파악했습니까? 네오-서울에 있는 모든 정보상이 당신 하나를 못 당한다는데 당연히 파악하셨겠죠?”
“그······건······.”
“지능범죄수사니 뭐니 해서 저랑 이렇게 노닥거릴 시간에 그런 걸 추적해서 예방하는 게 공공 집행자의 존재 의의에 부합하는 행동 아닙니까?”
“······.”
“그 플라워즈 호텔 사태에서 나다의 봉이 부러졌고, 그 봉을 고치러 저와 동행했다는 얘기는 나다가 안 하던가요? 그리고 우연히도 나다는 저를 이미 알고 있더군요. 어떻게? 저번에 당신이 나를 여기로 데려왔다가 제가 스스로 나갈 때 인지했답니다. 그럼 당신도 저와 나다 간의 사적인 친분에 관여했다고 생각해도 됩니까?”
부들부들 떨며 나를 노려보는 마고에게 쐐기를 박았다.
“마고. 정말 중요한 건 애써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저는 그런 의심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무슨······!”
“글쎄요 그건 나보다 당신이 더 잘 알겠죠.”
내 가슴이 갈라지며 그 틈에서 빛이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홀딩 마인드]
“내가 오겠다 했으니, 갈 때도 알아서 나가겠습니다.”
마고의 모습이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더 했다.
“누군가 그랬다죠. ‘알았으면 공범, 몰랐으면 무능’. 차라리 후자였으면 합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마고는 얼굴을 잔뜩 뭉갰고, 빛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눈을 감았다 뜨니 처음의 그 방이었다.
아주 절도 있고 재빠른 동작으로 머리에 쓰고 있는 반구형 기계를 벗어 테이블에 내려놓고 뒤도 안 돌아보고 밖으로 나왔다.
‘좆됐다. 좆됐다. 좆됐다. 적당히 긁어서 반응만 보려고 했는데 그 꼬맹이가 하도 꼴받게 굴어서 되는대로 다 뱉어버렸다. 좆됐다. 좆됐다. 좆됐다.’
나가던 길에 복도에서 마주친 위타천의 부관, 장이 웃으면서 인사를 해도 뻣뻣하게 팔만 흔든 채 로비로 걸음을 재촉했다.
상당히 넓은 로비도 뜀걸음에 가까운 잰걸음으로 통과해서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누군가 내 어깨를 거세게 잡았다.
“오메가쿤! 오늘 올 거라는 얘기는 들었는데 벌써 가는 거냐능?”
나다였다.
그냥 서 있기만 해도 공공 집행자라는 특성 때문에 주위의 시선을 바락바락 긁어모을 게 뻔한데, 나다는 심지어 불법佛法 소녀 사천왕이 프린트된 티셔츠를 입고 있어서 시각을 지닌 종족이라면 누구나 시선을 한 번쯤은 돌려보고 싶을 비주얼이었다.
얼른 여길 벗어나고 싶은 내 마음을 알 리가 없을 나다가 내게 가까이 붙어 속삭였다.
“머리 다 밀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된 거냐능! 드디어 오메가쿤이 불가의 정체성을 드러내나 했는데!”
머리 밀지도 않았고 나는 불가도 아니야 임마.
그리고 오덕 티 풀풀 내고 다니는 당신이 머리 좀 밀고 계인 좀 찍고 다닌다는 이유로 불가의 정체성 어쩌구 운운할 그럴 처지가 돼?
앞니와 입술 사이의 작은 공간까지 벌컥 채워버린 가슴속의 말을 일단 눌러 앉히고 답했다.
“저 불가 아니라니까요. 머리는 사정이 있었어요.”
“여래여래······정말 지독한 컨셉이라능. 내가 오메가쿤처럼 극한의 컨셉을 유지하는 플레이 중이었다면 컨셉과 현실을 구분 못 하는 지경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랄까?”
이미 당신은 당신 상상 속의 오메가와 진짜 오메가를 구분 못 하는 지경에 이른 것 같다······랄까?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면 안 될까요? 제가 조사를 마치고 나와서 좀 힘들어요.”
“그렇게 하자능! 아! 라나쨔응이 곧 네오-서울에 올 것 같다는데 같이 만나보겠냐능?”
“나다 씨가 타고 다니는 차는 늘 네오-서울에 있는 거 아닌가요?”
“그건 사쿠라쨩이라능!”
“그럼 라나는······.”
아! 내 바이크랑 나다의 머슬카를 만든 사람.
내 바이크는 헤지르 대주교가 이래저래 만져놔서 원작자가 보면 뭐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그러자고 했다.
“그래요. 날짜 정해지면 연락주세요. 그날은 최대한 비워볼게요. 그건 그렇고 오늘은 진짜 저 여기 조금만 더 있으면 쓰러질 것 같거든요? 나중에 사무실로 놀러 오든가 해요. 아셨죠?”
어지러우면 자기가 불경을 읊어주겠다는, 이 순수하고 착하지만 조금 어리숙한 승려를 간신히 떼어놓고 밖으로 나와 심호흡하니 그제야 조금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광화문 에어리어에는 각양각색의 종족들이 제각기 바쁜 걸음으로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고 하늘은 참으로 푸르렀다.
그 하늘을 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인생 정말 불지옥 하드모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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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조사 끝나고 같이 돌아가기로 해놓고 왜 혼자 택시 타고 먼저 갔냐.’, ‘한 짓은 똑같은데 왜 자기 추징금이 신시아보다 3배는 높냐.’ 등등 하루 온종일 울분을 토하던 이수련과 ‘나는 차명계좌에 대한 건 적당히 잘 무마해서 그런 거다.’, ‘원래 투자에 대한 판단은 스스로가 하고 그 책임도 스스로 지는 거다.’ 등등 이수련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꼬박꼬박 반박을 하는 신시아 사이에서 정신 쇠약에 걸릴 뻔한 걸 간신히 버틴 하루였다.
이수련과 신시아가 먼저 돌아가고 앨리스가 말했다.
“정확히는 말 안 해도 수련 언니 추징금이 어마어마한 것 같던데 우리 사무실은 용케 혐의 대부분을 벗었네요. 언니가 이건 자본가, 기업가에 대한 탄압이라면서 난리를 피우던데. 사장님은 공공 집행본부 가셔서 누구 멱살이라도 잡으셨어요?”
“윽.”
어제 생각을 하니 간신히 진정됐던 속이 다시 뒤집혀서 위에 찌릿찌릿한 통증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왜 저러실까.”
마감 준비를 하는 사이, 앨리스의 패드에 벨이 울렸다.
누군가 사무실 문 옆의 벨을 눌렀다는 신호.
“오늘 누구 오기로 한 사람 있어?”
“아뇨. 없는데요?”
“그럼 확인하고 사무실 지침 말씀드려.”
“네.”
신규 고객은 기존 고객의 소개가 아니면 받지 않는 쪽으로 지침을 정했지만 그걸 모르고 이렇게 직접 찾아오는 사람들이 왕왕 있었다.
패드에 대고 이런저런 말을 하던 앨리스가 내게 쪼르르 다가왔다.
“얘기 잘했어?”
“사장님을 꼭 뵈어야겠다는데요?”
앨리스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무능’이라고 사장님한테 말씀드리면 알 거래요.”
“윽.”
진짜 통증이 위를 강타했다.
마고다.
마고가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