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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캐여도 너보단 강함-172화 (173/258)

172.

172.

아침부터 사무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아침 일찍부터 가동을 시작하는 앨리스는 물론이고, 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사무실 등장 시간이 나보다 빠른 신시아와 이수련도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들에게 묵직하게 말했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앨리스가 가장 먼저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정현과 자코가 사설 집행자 일을 하다가 어디서 주워들었다며 말도 안 되는 사업을 같이하자며 찾아올 때 내가 그들에게 보내는 눈빛을 앨리스도 하고 있었다.

간략히 말해, ‘저 새끼 또 지랄병 도졌네.’ 하는 눈빛이었다.

씹던 오일 샌드를 넘긴 앨리스가 건성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출근하셨으면 뭐부터 하라고 했죠? 사장님 데스크에 앉아서 제가 정리해 놓은 간밤 소식이랑 의뢰 목록 먼저 보라고 정확히 666번째 말씀드리고 있네요? 악마 소환 중이신가요?”

앨리스가 손가락 마디를 뚜두둑 거리며 풀었다.

얇고 날카로운 재질의 검이 앨리스의 손가락이 꺾일 때마다 관절에서 나왔다 들어갔다를 반복했다.

이수련 저 미친 구미호는 사무용 안드로이드한테 무슨 파츠를 구해다 끼워주는 거야.

사무실 전기 요금이 계속 상승세던데 분명히 앨리스가 달고 있는 저런 파츠를 가동하기 위해서 전기가 많이 필요한 걸 거다.

하지만 지적하지는 않았다.

명품에 빠져서 스스로의 노동 기대 시간의 몇 배를 소모해도 갚을 수 없는 돈을 대출받아 파산한 안드로이드들도 꽤 있다는데 저 정도는 취미 생활로 이해하고 넘어가 줄 수 있다.

근원적······공포를······느껴서가······아니라······나는······이해심······많은······사장이니까······.

여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앨리스의 포스에 쫄아서 자동으로 발걸음이 내 책상으로 향할 뻔한 걸 극기에 가까운 의지로 멈췄다.

천천히, 하지만 아주 확실하고 정확한 움직임으로 손을 머리 위의 모자로 가져갔다.

신시아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고, 이수련의 귀가 위로 바짝 섰다.

모자를 벗었다.

“구했노라, 발랐노라―”

마지막 짧은 문장을 완성할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났노라.”

봄을 맞아 땅을 뚫고 올라오는 새싹처럼, 내 머리에는 검고 짧은 머리카락이 가득했다.

“드디어!”

이수련이 경탄을 터트리며 기뻐했다.

“정말 다행이네요. 그동안 풀 죽어 계신 것 같아서 보기 안쓰러웠는데.”

신시아도 맞장구쳤다.

주먹을 꼭 쥐었다.

마데르노 악독한 새끼.

가려면 곱게 가지 이렇게 악독함의 끝을 알 수 없는 짓을 하다니.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내 머리칼이 날아간 건 저주도 흑마술도 아니고 <융화 갑옷>의 부재료로 쓰인 정황이 거의 확실하지만 마데르노가 날 납치하는 희대의 개짓거리만 안 했어도 저 아이템을 사용할 일도 없었을 것이 분명하니 이건 무조건 마데르노, 그 머리칼을 다 뽑아서 불태운 다음 그 재를 퍼먹여도 시원치 않을 최악최흉의 악당 때문이다.

“왠지 쓰다듬어보고 싶게 생겼구나.”

“나도 그 생각했는데.”

이수련과 신시아가 내 머리를 향해 손을 뻗어오자 재빠르게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어떻게 다시 자라게 한 머리인데요!”

“새 신발을 사면 밟는 것처럼 새 머리도 만져줘야 잘 자라는 것이다! 낭군은 낭만도 없고 대범함도 없구나!”

“이수련 말이 맞아요. 온실 속 화초처럼 귀하게 자란 머리카락은 금방 다시 빠지지만, 들판의 잡초처럼 거칠게 자란 머리카락은 역경이 또 다가온다고 해도 이겨 낸다고요.”

둘 다 만져보고 싶어서 아주 그냥······.

잠깐 고민하다 천천히 머리를 내줬다.

“그래도 조심해서 만져요.”

나도 알고 있다.

이 짧은 머리를 쓰다듬을 때 느껴지는 기묘한 까칠거림의 중독성을.

내 머리를 만지며 즐거워하는 신시아와는 다르게 이수련은 눈을 감고 아주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벡이 나를 쓰다듬는 대신 나는 낭군을 쓰다듬었으니 그것으로 된 것이다······.”

아직도 벡에게 강아지 취급당한 게 속에 맺혀있나 보다.

둘의 손길이 조금 잦아들었다 싶을 때, 다시 모자를 쓰고 커피를 타서 가져와 사무실 소파에 앉으니 앨리스가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태백 권역에서 돌아오신 지 이제 일주일 아닌가요? 이틀 전에 연고 받으셨고요. 그럼 닷새 만에 머리가 그렇게 빽빽하게 나요? 찾아보니까 최소 1주일에서 2주일은 발라야 몇 가닥 나기 시작한다는 후기가 많던데.”

커피를 홀짝이고 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끼 전달해준 첫날 저녁에 모나쉬 씨한테 연락받았어.”

신시아가 앨리스에게 모나쉬가 누구냐고 물었고 ABT의 탈모사업부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지금은 에어리어 의원이 된 에이들리의 소개로 만났다고 하니 신시아는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쪽 연구소에서 내가 가져다준 이끼를 분석했는데 기존 이끼에서 추출한 것보다 더 효능이 좋은 물질을 뽑아낼 수 있을 것 같다더라고. 나한테 준 게 그 첫 번째 시제품이야. 리필이 아니라 슈퍼 리필인 거지. 그 효과가 바로. 짜잔.”

다시 모자를 벗어 머리칼을 보여줬더니 신시아가 팔짱을 낀 채 손가락을 까딱이며 스스로의 팔뚝을 두드리며 말했다.

“근 며칠 동안 ABT에서 네오-서울 식품의약안전관리처에 대규모 로비 중인 정황을 포착했는데 기존 약의 개선 버전에 대한 출시 과정을 줄이려는 꼼수였군요. 이 정도 효과라면······.”

신시아의 말을 들은 이수련이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만지니 바이저가 이수련의 얼굴 전체를 덮었다.

얼핏 보이는 이수련의 바이저 안쪽에 그래프와 막대가 가득했다.

앨리스가 외쳤다.

“수련 언니 ABT 주식 사두려고 하는 거죠!”

“보, 본좌 개인 재산으로 하는 것이니라. 이 정도 여흥은 즐길 수 있지 않겠느냐.”

신시아가 팔짱을 풀지 않은 채로 고민하다 말했다.

“ABT 임원 출신 에어리어 의원, 현 ABT 직원······금융감독원에서 내부자거래로 판단할 소지가 다분한데······. 어쩌면 공공 집행본부 지능범죄수사팀이 붙을지도 모르고······.”

어느새 패드를 꺼내 들고 신시아 옆에 앉은 앨리스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언니, 그래서 사요 말아요. 그것만 알려줘요.”

머지않은 시일, 야스민 공의 칼춤 이후 활기가 사라진 네오-서울 소재 제약 바이오 섹터에 정체 모를 대규모 자금이 두 번 흘러들었다.

물론 자금의 정체는 이수련의 프라이빗 계좌에서 흘러간 것과 야스민 가문의 차명계좌에서 신시아가 만질 수 있는 자금이었다.

거기에 둘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안 되지만 앨리스가 관리하는 사무실 자금도 조금.

일주일 뒤, ABT는 슈퍼 리필의 판매를 발표했다.

지속 가능한 생산을 위해 슈퍼 리필은 분기마다 한정 생산된다는 말, 슈퍼 리필 판매액의 5%는 태백 권역 북부의 자연 보전을 위해 쓰인다는 말도 함께였다.

후자는 내가 이끼를 건네주며 제시한 조건이었다.

해당 자금 집행의 감시는 선봉연대에서 맡게 된다.

ABT는 대충 시늉만 하고 말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물 밑에서 자연인들에게 협력하는 스펜서라면 아마 눈에 불을 켜고 허점을 찾아내 보완을 요구하리라.

게다가 ABT가 이끼 채취를 위해 태백 권역의 자유인들과 따로 협의한 것도 있을 테니 적어도 자유인들이 더 불편해질 일은 없을 것이다.

당연히 ABT의 주가는 상한에 상한에 상한을 거듭했다.

야스민 공의 칼춤 이전의 주가를 회복한 것은 물론이고 그 이상으로 치고 올랐다.

심지어 말도 안 되는 헛소문과 기대감으로 ABT가 아닌 다른 제약, 바이오 기업들의 주가가 폭등했다 폭락하는 일도 드물지 않게 일어났다.

#

그렇게 약 두 달 뒤.

나, 신시아, 이수련이 에어로 택시에서 내렸다.

내린 곳은 광화문 에어리어, 공공 집행본부 앞이었다.

고개를 높게 들어 봐야 하는 웅장한 건물 앞, 나는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왜 날 소환하냐고······돈 넣은 건 앨리스인데······.”

“사무실 법인 대표가 오메가 님이니까요. 또, 안드로이드 전용 계좌는 금융 흐름이 너무 선명하게 보여서 오메가 님 계좌 써도 되겠냐고 앨리스가 물었더니 그러라고 하셨다면서요.”

당당한 신시아와는 다르게 이수련은 귀를 접고 이를 달달 떨고 있었다.

“그 돈을 기술 개발이나 인재 영입에 써야 했는데. 하다못해 기부라도 했으면 세금 공제라도 받았을 건데, 땅을 샀으면 마음이라도 뿌듯했을 텐데! 본좌는 왜 그런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을꼬······. 그간 더러운 짓 한 번 하지 않고 퓨전 코프를 키워냈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이더냐.”

그랬다.

현재 우리 셋에게는 ABT 내부자거래 및 주가조작 혐의가 있었고, 공공 집행본부 지능범죄수사팀의 수사 협조 요청을 받아 이 자리에 와 있었다.

“둘이 엄청난 자금을 단기간에 때려 박고 또 단기간에 빼니까 주가조작 혐의도 걸렸잖아요!”

내 말을 들은 신시아의 시선이 이수련에게 향했다.

“분명 시간 두고 천천히 매집하라고 조언까지 했는데 하루아침에 시장에 풀린 걸 다 주워 들이니 당연히 금감원의 주목을 받지!”

“발표까지 겨우 일주일이지 않았느냐! 시간이 없었다!”

“발표 전부터 발표날까지 오른 것보다 발표날 이후부터 지금까지 오른 게 훨씬 많잖아!”

“그건 결과만 가지고 얘기하는 것 아니더냐!”

“으으으······. 탈모 치료 연고가 재판매되는데 상식적으로 당연한 거 아니냐고. 그리고 왜 그렇게 급격하게 올랐겠어. 네가 자금을 쏟아붓는 바람에 알려지지 않은 ABT 내부의 인물이 경영권 확보를 위해 자사주 매집한다고 소문나서 더 급격하게 상승 흐름 탄 거 아니야! 던져도 던져도 계속 받아먹는 존재가 있으니까! ABT에서도 정말로 급하게 나서기도 했고! 그러더니 뺄 때는 왜 또 쫙 뺀 거야. 퓨전 코프 경영권 방어도 이런 식으로해?”

“목표가 달성에 따른 이익 실현이었느니라! 그리고 퓨전 코프는 비상장이라 걱정할 필요가 없느니라! 90% 이상 본좌가 들고 있기도 하고! 그리고 신시아 너도 걸리지 않았느냐!”

그 말에 나도 신시아를 바라봤다.

의심과 수사의 빌미를 준 건 이수련이 맞을지라도 어쨌든 신시아도 여기 같이 와 있지 않나.

“저······는 장기 투자 목적이었어요. 오래 넣어두고 배당금만 노릴 생각이었다고요. 근데 제가 개인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차명계좌에 있는 금액만 넣어두기에는 아쉽다고 생각해서 실명계좌에 있는 걸로 물을 조금 탔더니 바로 걸렸어요. 이렇게 직접적으로 움직이는 일이 많이 없다 보니 스스로 야스민 가문의 이름값을 간과했던 거죠.”

“야스민 공께서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안 하느니만 못한 투자를 했다고······아버지였으면 태백 권역의 이끼가 나는 산을 산 다음 그걸 들고 ABT와 협상하셨을 거라고 하셨어요. 발표를 미루게 한 뒤 탈모사업부를 자회사로 분리하게 한 다음 그 지분을 받았으면 이렇게 일이 커질 일은 없지 않았겠냐고요. 더 복잡다단한 과정이 많이 들어갔지만, 아버지가 말씀하신 것의 요약은 이래요.”

최소 몇 년은 걸릴 것 같은 과정이고 들어가는 돈도 어머어마 할 것 같았지만 돈 많고 시간 많은 어떤 흡혈귀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별다른 문제가 안 될 것이다.

투입 대비 이득이 얼마나 나오는가가 중요할 뿐.

야스민 공. 확실히 범인凡人은 아니다.

그런데 지금 중요한 건 우리다.

우린 범인犯人이 되게 생겼으니까.

공공 집행본부로 들어서기 전, 신시아가 우리를 단단히 정신무장 시켰다.

“따라하세요. ‘모르겠다.’.”

“모르겠다.”

“‘오래되어 기억이 잘 안 난다.’.”

“오래되어 기억이 잘 안 난다.”

“‘우연이지 않겠나.’.”

“우연이지 않겠나.”

어미 새의 입만 바라보는 새끼 새처럼 신시아를 보고 있던 나와 이수련을 향해 신시아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증거가 있으면 이미 구속했을 건데 협조 요청만 하는 걸로 봐서는 저기도 아직 긴가민가한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쫄지 말고 잘하고 와요. 특히 이수련 너!”

“보, 보, 본좌는 쫄지 않았다!”

신시아의 말처럼, 내부로 들어선 우리는 생각보다 정중한 대우를 받았다.

나는 내부가 깔끔한 방으로 안내받았는데, 특이한 것은 테이블 옆에 놓인 의자가 하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그때, 천장에 달린 스피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제로 재울까도 생각했었는데, 또 그러면 이번에는 제게 무슨 죄목을 뒤집어씌울지 짐작할 수 없어서 일단은 그냥 모셨습니다. 저번처럼 한 번에 통할지도 의문이었고요. 경제사범 오메가 씨.”

마고의 목소리였다.

“이 상태로는 저나 오메가 씨나 불편할 것 같은데, 제 공간으로 넘어오시는 건 어떠실지요?”

“마고 씨가 여기 담당이라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요.”

“네오-서울에서 저보다 지능범죄수사에 열의를 가지고, 열심히 하는 족속은 드물 거라는 생각, 안 해보셨나요?”

나는 조금 긴장했다.

네오-서울로 돌아온 이후 브리가드의 기함에서 건져낸 유물을 감정하기 위해 야스민 저택을 제법 많이 들락거리는 중이었고, 바로 며칠 전, 야스민 공이 나를 따로 불러서 했던 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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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권 권역의 자금 유입과 비윤리적 연구소, 열도에서 시도했던 사이버스페이스 탈취까지. 윤곽이 드러나고 있네. 일단 나다와 노덴스는 아니야. 나머지 셋을 의심하고 있네.”

“위타천, 마고, 야타가라스. 셋 말씀이죠?”

“그렇네. 아직 셋 중 누구라고 확언하기는 어렵지만, 아무래도 사건들과 가장 가까이 할 수 있는 이는 마고이니 주의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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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을 꿀꺽 삼켰다.

좁혀진 목울대가 잠시 기도를 압박했다 푸는 감각이 생생했다.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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