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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캐여도 너보단 강함-171화 (172/258)

171.

171.

웨리바흐가 절벽 아래로 사라진 이후, 자유인들과 도시인들의 대치는 급전환을 맞았다.

스펜서 대령이 태백 권역의 대책 회의에 참여해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는 논리를 설파하며 네오-서울의 쓰레기를 자유인들의 터전에 묻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주장한 덕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 행위로 인해 많은 인력적, 자원적 손실이 발생하고, 작금의 상황으로는 정상적인 부대 운영이 불가능해 태백 권역 최북단의 치안 유지가 힘들다고 반쯤 협박이 섞인 호소를 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손자를 잃었음에도 잉그리드가 슬픔을 내비치지 않으며 분명 피해를 본 건 자유인들이 맞지만, 그럼에도 포용과 관용을 보여야 한다고, 그게 대자연이 자신들에게 준 가르침이라고 외쳤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건 모두 누스러스디가 파악해 알려주는 정보였고, 사실 나는 큰 관심이 없었다.

내 관심사는 오로지 탈모 치료 연고에 쓰이는 이끼에 쏠려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근래 들어서 내 가장 큰 걱정거리의 해결을 앞두고 있었다.

-머리 위 왼쪽이 그나마 안전해 보이네요.

스펜서 대령의 부대에서 지원받은 외골격 내부에 타고 있는 내게 누스러스디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지시한 방향, 누스러스디의 드론이 강풍에 맞서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외골격의 한쪽 손을 그쪽으로 뻗고 갈고리 로프를 발사했다.

단단히 고정된 것을 확인하고 몸을, 정확히는 외골격을 날렸다.

‘닿았······다?’

착지점의 발이 닿은 부분이 부서지며 미끄러졌다.

-오메가 씨!

외골격의 밸런스를 재조정하고 다른 갈고리 로프로 고정해 위험한 순간을 넘겼을 때, 그제야 발 언저리의 부서진 부분이 낙하를 끝내고 아래쪽과 충돌하는 소리가 들렸다.

제대로 의지할 곳도 없는 빙벽을 오르는 지금, 직접 아래를 내려다보기는 꺼림칙해서 외골격 액정에 외부 관측 카메라를 띄워 아래를 비췄다.

눈이 계속 쌓여 얼핏 봐서는 다른 설원과 다를 것 없어 보였지만, 방금의 충격으로 눈이 벗겨져 드러난 곳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변의 다른 지형과는 색이나 질감이 조금씩 달랐다.

이런 혹한의 기후에서는 보기 힘든 총천연색 반팔이나 반바지, 식료품 포장지, 손만 좀 보면 멀쩡히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가전제품, 누구의 신체에 달려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의수와 의족, 심지어 일련번호가 지워진 무기 파츠 등등.

네오-서울에서 나와 이곳에 버려진 쓰레기들이었다.

눈이 덮여있어 일부만 보일 뿐 이 일대 대부분이 저런 꼴이란다.

그래서 이끼를 구하러 왔다고 말했을 때 잉그리드는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이끼 자생 군락이 대부분 쓰레기에 먹혀 복구할 수 없는 상태라나.

왜인지 모르겠지만 시야가 뿌옇게 변해버린 나를 본 잉그리드는 크게 당황해서 자유인들에게 이끼를 구할 수 없겠냐고 수소문했다.

그 결과 쓰레기가 버려진 곳에 있는 빙벽 너머의 작은 동굴에 이끼가 자라고 있다는 걸 본 사람이 나왔다.

적어도 10년 전의 일이라 기억이 확실하지 않을 수도 있고, 올라야 하는 빙벽이 높고 거친데다가 예측하기 힘든 바람도 불어대는지라 잉그리드마저 다시 생각해보라고 만류했지만, 그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었다.

그렇게 스펜서에게 연락해 외골격까지 지원받아 용감하게 길을 나섰다.

“괜찮아요. 계속 갑니다.”

빙벽의 정상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계속 도와드리고 싶지만, 드론을 더 이상 움직이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아서 저는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바람이 무슨······.

“알겠습니다. 이따 뵙죠.”

계속해서 휘청이던 드론이 아래로 멀어졌다.

“그곳에 산이 있으니 오른다? 나는 이끼가 있으니 오른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주 미세하고 정교하게 외골격을 움직인 결과, 마침내 빙벽의 끝에 오를 수 있었다.

턱 끝에 맺힌 땀방울이 토독하고 떨어졌다.

태백 권역에 와서 줄곧 쓰고 있었던 비니와 이마가 닿는 면이 축축했다.

멀지 않은 곳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있는지도 모르고 넘어갈 것 같은 작은 구멍이 있었다.

“동굴······동굴이다.”

가슴이 설레는 것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빙벽 위의 넓지 않은 공간에 외골격을 눕혔다.

워낙 무거운 녀석이라 이렇게라도 접지면적을 넓혀 무게를 분산해야 했다.

그리고 사출되었던 로프보다 더 강력한 기세로 외골격 밖을 향해 뛰쳐나갔다.

동굴로 다가갈수록 걸음이 빨라졌다.

내부는 습했고 어두웠다.

잉그리드에게서 받아온 램프를 켜니 동굴의 벽과 천장이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램프를 흔들 때마다 푸르스름한 물결이 따라 움직였다.

잉그리드가 말해준 이끼의 특징과 완벽히 일치했다.

“으흐······으흐흐······.”

도저히 참기 힘든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 나왔다.

그때, 빛 때문에 바위틈에 숨어있던 작은 벌레들이 슬그머니 기어 나와 이끼를 갉작대는 것이 보였다.

“나와! 다 내 꺼야! 내 꺼라고!”

벌레를 몰아낸 뒤 램프를 그대로 둔 채 외골격으로 달려 나가 조종석 발치에 뒀던 보온보습 박스를 들고 허겁지겁 돌아왔다.

그리고 이끼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손으로 떠서 박스에 넣고 밀봉했다.

이끼의 추출물이 필요한 거라 소량만 있어도 된다니까 이 정도면 충분할 거다.

금덩이라도 되는 것처럼 박스를 소중하게 품고 동굴 밖으로 나왔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여전히 바람은 시리도록 차고 눈은 언제 그칠지 기대하지 말라는 듯 펑펑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아름답게만 보였다.

옆에 끼고 있는 박스 덕이었다.

“뭐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게 없구만.”

#

“그래서 그렇게나 그 박스를 애지중지하는 것이냐?”

네오-서울로 돌아가는 기차 안, 일을 마치고 다시 만난 이수련이 내 옆에 놓인 박스를 가리키며 물었다.

“애지중지 안 하게 생겼어요? 보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올라서 터지지는 않을까 걱정될 정도인데?”

올 때와 다르게 개별적으로 분리되어 외부 방음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1등급 객실이라 우리는 굳이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누스러스디는 이번 사태에 대한 선봉연대의 입장과 자유인들의 입장을 담은 후속 기사를 써보겠다며 뒤에 남았다.

네오-서울로 돌아가면 밥 한번 먹자며 내 손을 꼭 잡는 그의 손에서 집념과 집착이 느껴졌었다.

혹여나 흔들림에 안에 있는 이끼가 놀라실까, 조심히 내려놓으며 이수련에게 물었다.

“퓨전 코프 일은 어떻게 됐어요? 선봉연대에서 보유하고 있는 외골격들을 하나하나 다 깐 것 같더니?”

“현지 실정에 맞게 보강하거나 개조된 것들을 발견하긴 했으나 대부분 개조 지침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문제 될 것은 없었느니라.”

“무기로 사용할만한 건 없었다는 거죠?”

“그래. 일단은 그랬느니라.”

“외골격을 받아서 개조해 무기로 사용한다는 것 역시 자유인, 아니 웨리바흐 그 늑대인간 쪽이 만들어 퍼트린 가짜 뉴스로 보는 게 맞겠군요.”

“본좌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아예 수확이 없는 것은 아니었느니라.”

설마 스펜서가 몰래 감춰둔 게 있나?

그게 들켰고?

다행히 내 예상은 빗나갔다.

“태백 권역의 한 산업체가 구매한 굴착, 채굴용 구버전 산업 로봇 몇 기가 사라진 것을 알아냈느니라. 네오-서울로 다시 흘러 들어간 것 같은데 당시의 담당자가 모두 퇴사한 상황이라 추적이 쉽지 않더구나.”

이수련이 사납게 눈을 떴다.

“운영체제를 리뉴얼하면서 업데이트되는 시점의 잠깐을 노려 빼돌린 것 같은데, 감히 어떤 간 큰 놈들이 그런 짓을 한 건지 본좌는 매우 궁금하구나. 그것들의 간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질 정도로.”

기술과 인력 유출을 극도로 경계하는 퓨전 코프의 분위기로 보았을 때 굉장히 중대한 문제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건 본좌가 알아서 할 것이니 낭군은 신경 쓸 것 없다.”

“네. 신경 안 쓰려고 마음먹고 있었어요.”

“어허! 어찌 그리 무미건조하단 말이냐! 이럴 때 걱정하지 말라고, 잘 될 거라고 따스한 말이라도 한마디 건네주면 본좌도 진한 감동을 받을 것이 아니더냐!”

“확실하지도 않은 말, 뭐 하려고 밖으로 꺼내요. 입만 아프지.”

“낭군은 낭만이 없구나. 괜찮다. 낭만은 본좌에게 많으니. 부부는 서로 보완하며 살아가는 둘이라고 하였다.”

“또 시작이네.”

슬슬 질릴 때도 된 것 같건만 도무지 끊일 생각을 하지 않는 부부 타령을 한참 듣다 보니 이수련이 다시 내 옆에 놓인 박스에 관심을 가졌다.

“그럼 이번에 이 추운 태백 권역까지 와서 낭군이 가져가는 거라고는 그 이끼가 전부이냐?”

씨익 웃었다.

“아니죠.”

그리고 천천히 숨을 몇 번 들이쉬고 내쉬고를 반복하고 이수련에게 물었다.

“한식 드실래요? 아니면 양식 드실래요?”

“그걸 지금 왜 묻는단 말이냐.”

똑똑하고 우리 객실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승무원이 문을 열고 물었다.

“식사 준비해드리겠습니다. 한식과 양식, 어떤 게 좋으십니까?”

이수련이 동그래진 눈으로 나와 승무원을 번갈아 바라보길래 내가 대신 답했다.

“한식 둘이요.”

“네,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식사가 준비되고 문이 닫히자 이수련이 말하기 전에 먼저 말했다.

“어떻게 된 거냐고요?”

“······설마 남의 마음을 읽는 것이냐?”

“세상에 그럴 리가요. 냄새죠.”

[기막 펼치기]와 [기감 확산]을 비롯해서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어 주는 스킬을 사용한 결과였다.

이전의 나였다면 너무 많은 정보가 흘러들어와 오히려 내가 버티지 못하거나 엉망이 되어버렸겠지만, 잉그리드가 알려준 감각 사용법으로 인해 집중할 것은 집중하고 버릴 것은 버리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잉그리드는 이런 방법을 사냥꾼의 직감이라고 불렀는데, 자유인 중에서도 제대로 익히는 이가 드물지만 제대로 익힐 수만 있다면 아주 유용한 기술이 될 거라면서 내게 아낌없이 전수해주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감도 못 잡았지만, 이수련이 선봉연대를 조사하는 며칠간 계속해서 스킬의 도움을 받아 비슷하게라도 따라 하려고 노력한 결과, 나만의 방식으로 어설프게나마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설명을 들은 이수련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과거에는 그것과 비슷한 걸 이용하는 자들이 많았느니라. 하지만 지금의 네오-서울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지. 본인의 감각을 이용하기보다는 다른 것에 의존하는 편이 빠르고 쉬우니 말이다. 이 땅에 남아있을 줄은 몰랐다. 낭군은 아주 귀한 것을 익혀 가는구나.”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오로지 후각만 사용하는 것이더냐?”

“아뇨. 오감을 전부 사용해요. 심지어 그 이상의 무언가도요. 무언가가 뭔지는 들어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한 번 해볼까요?”

감각을 넓히는 순간, 반대편 선로에서 다른 기차가 우리가 타고 있는 기차 옆으로 지나갔다.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나긋하면서 어딘가 불쾌한 기분이 확 몰려왔다.

어디서 이런 느낌을 받았더라.

누구······.

기억났다.

기계 교단의 성당,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별도의 방에서 수연을 처음 만났을 때였다.

교차한 기차는 어느새 멀어져 꽁무니도 보이지 않았다.

“왜 그러느냐?”

이수련이 나를 보고 말했다.

“익숙하지 않아서 좀 헷갈렸나 봐요. 식사나 하죠.”

한 입 뜨더니 지금 제공된 한식보다 우리 사무실 앞 국밥이 50배는 더 맛있다고 중얼거리는 이수련의 불평을 배경음악 삼아 묵묵히 밥을 먹었다.

괜히 더 생각해서 좋은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

절벽 아래, 그곳은 암흑과 차가움만 존재하는 세계였다.

웨리바흐는 성치도 않은 몸으로 그런 곳에서 버티고 있었다.

평생을 태백 권역에서 산 그도 이름을 알 수 없는 괴수들이 어둠과 그림자에 몸을 숨긴 채로 그의 숨통을 노렸다.

그때마다 사투를 벌여야 했다.

죽을 ‘만큼’의 싸움이 아니라 죽음 그 자체가 걸린 싸움.

괴수들은 밤이 오면 더 극성을 부렸다.

이제 웨리바흐는 체력이 바닥나서 몸에 난 생채기 하나도 제대로 아물게 하지 못했다.

늑대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쓴 채 숨만 쉬는 무언가에 가까웠다.

그의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차츰 잦아들 무렵, 호시탐탐 그가 죽기만을 기다리던 괴수들의 기척이 사라졌다.

웨리바흐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오메가 그 자식이 이쪽으로 향했다길래 따라와 봤는데, 재밌는 일이 있었다지 뭐예요.”

웨리바흐는 간신히 목을 가누어 고개를 들었다.

많은 손전등이 그를 비추고 있었다.

며칠 만에 보는 빛은 고통스러웠지만 한 편으로는 반가웠다.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우는 건가요?”

웨리바흐는 아주 짧고 빠르게 규칙적으로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마음이 녹아내렸다.

지금 그의 앞에서 매혹적인 입술 사이로 붉은 혀를 날름거리는 이 여인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다는 마음이 절로 솟았다.

행복한 표정의 웨리바흐가 마침내 기절하자 수연은 꼬리를 떠는 것을 멈췄다.

“데려가요.”

수연의 말에 그녀를 지원하기 위해 함께하는 톈진 권역의 요원들이 축 처진 웨리바흐의 몸에 로프를 걸고 위쪽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있던 수연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진짜 개새끼를 주워갈 줄은 몰랐는데, 쓸만한 개새끼로 만들어야겠네요. 주인을 물던 이전 개새끼들과는 다르게 말이죠.”

감히 자신에게 반기를 든 진오와 샴록, 그리고 무엇보다 대계大計를 휘청거리게 만드는 오메가까지.

그녀는 빌어먹을 개새끼가 참으로 많은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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