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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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면 몸이 튼튼하면 머리까지 굴릴 필요도 없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그랬다.
[역발산기개세]
커다란 육모방망이처럼 변한 검을 휘두르니 가슴팍과 어깨에서 근육이 팽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대로 때려 박았다.
몸을 웅크린 채 몽둥이, 아니 검이 향하는 곳을 곤충의 외골격처럼 변형한 웨리바흐가 보였다.
엇갈려 교차한 그의 팔 틈새로 아주 격하게 흔들리는 웨리바흐의 동공이 보였다.
그래, 어디 가서 이렇게 맞아보겠어.
우지직 소리와 함께 외골격이 깨졌다.
담고 있던 것들을 꾸역꾸역 내뱉는 깨진 장독처럼, 깨진 외골격 안에서 살점과 체액이 울컥 솟았다.
[약점 포착]
[집중 공격]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웨리바흐의 살점을 물고 나온 피얼음 검을 똑같은 자리에 다시 한번 휘둘렀다.
검을 들었다 내리는 그 짧은 시간에 상처를 복구하기 위해 생성되었던 얇은 피막과 연한 외골격이 질퍽한 소리와 함께 다시 깨졌다.
결국 이대로 맞기만 하다가는 육질만 연해지고 말 거라는 판단을 한 건지 웨리바흐가 뒤쪽으로 몸을 굴렸다.
눈밭 위에서 그가 한 바퀴씩 몸을 굴릴 때마다 피나 살점 같은 부산물들이 만드는 흔적이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대여섯 바퀴를 구른 이후 다시 몸을 일으킨 웨리바흐는 처음보다 덩치가 조금 작아지고 뺨을 비롯한 전신이 조금 홀쭉해지기는 했으나 몸에 있는 상처 중 치명적이라고 할만한 것은 없었다.
처음 조우했을 때보다 많이 당황한 기색이 느껴지긴 하지만 무엇보다 아직 눈빛이 살아있었다.
그가 숨을 고르고, 내가 혈계조검술을 해제하는 짧은 시간, 시선이 교차했다.
“누구냐. 군인은 아닌 것 같은데. 기차에서 외골격을 조종한 인간이 그쪽인가?”
“좀 맞고 나니까 궁금해? ‘나한테 이런 건 네가 처음이야.’ 이런 건가?”
“네가 지금 하는 짓을 이해하고 있나? 자유인들의 오랜 염원과 갈망이······.”
회복하려는 시간을 벌기 위한 얕은 수작이다.
밀어붙여야 했다.
[고속 이동]
[답설무흔]
눈 위를 미끄러지며 이동했다.
웨리바흐가 몸을 몇 바퀴나 구르며 벌린 간격이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발굽처럼 변한 웨리바흐의 손끝이 내 머리를 부수기 위해 날아들었다.
[트야치]
왼손 날을 타고 생성된 얼음의 검으로 놈의 두 발굽을 한 번에 꿰뚫었다.
그리고 왼손과 연결된 얼음을 분리한 뒤 몸을 돌려 놈에게 접근한 뒤 광자 검날이 번쩍이는 검을 웨리바흐의 어깨에 꽂았다.
나와 웨리바흐의 뜨거운 숨 때문에 하이얀 김이 확하고 터져 나왔다.
검을 쥔 손에 힘을 단단히 줘야 했다.
놈의 어깨에 난 상처가 회복하며 검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 염원과 갈망 때문에 멀쩡한 할머니도 감금하고, 아주 대단한 혁명가 나셨어?”
“그걸······어떻게!”
웨리바흐의 호흡이 떨리나 싶더니 곧 안정되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낮게 그르렁댔다.
“때로는 아는 게 있어도 모르는 척하는 게 도움 될 때가 있는데 너는 그걸 모르는 것 같군.”
이죽거리며 반박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놈한테 그런 소리를 들으니까 기분이 좀 그렇네.”
대치하는 사이, 다른 늑대인간들이 내 주위로 접근하거나 투사체를 날려대는 것을 불덩이를 뿜어 막아주던 스펜서 대령이 외쳤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됩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산 위에서 스노모빌 여러 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늑대인간들이 얼굴을 구겼다.
“선봉연대 놈들이다!”
웨리바흐가 크게 외쳤다.
“다들 물러나!”
그리고 손을 들어 어깨에 꽂힌 내 검을 덥석 잡았다.
칼등 부분을 잡았지만, 그의 손가락 끝은 광자 검날 부근에 닿아있었다.
바지직 소리를 내며 털이 일그러지고, 곧 피부와 살점을 태우는 매캐한 냄새가 퍼졌다.
허연 뼈가 드러나기 직전, 웨리바흐는 손에 쥔 검을 부서트리려는 듯 팔에 엄청난 근육이 불거졌다.
하지만 검은 끄떡하지 않았다.
위올란트의 마지막 작품이다.
그렇게 쉽게 부서질 리 없다.
“하는 거 보니 너는 몸 고생 많이 하겠네.”
칼자루를 틀어 검을 역전개했다.
온 힘을 다해 쥐고 있던 검이 사라지자 웨리바흐의 중심이 순간 휘청했다.
[잡기雜技 - 육체의 대화 제1장. 뺨 때리기]
손바닥으로 놈의 뺨을 후려쳤다.
굉장한 속도로 뻗어나간 내 손바닥이 타격 지점에 닿기 직전, 다시 한번 [대력장].
여러 번의 타격음이 아니라 단 한 번.
잔뜩 부푼 풍선이 터지는 소리가 나더니 웨리바흐의 피 묻은 이빨이 후두둑 빠져 공중을 날았다.
그 이빨들이 눈밭에 떨어질 무렵에는 정통으로 뺨을 맞은 웨리바흐도 산간 도로 아래 저 어디쯤으로 구르고 있었다.
“피······피해! 일단 후퇴해!”
어느 늑대인간의 외침이었다.
웨리바흐를 비롯한 그들을 뒤쫓지 않았다.
늑대인간들이 모두 사라지고 얼마 되지 않아 군용 스노모빌과 설상차, 심지어 산악 구조용 외골격까지 줄줄이 ‘연대장님 괜찮으심까!’를 외치며 등장했다.
불의 망토를 말끔히 없앤 스펜서가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게 내게 깃털을 돌려주며 입술을 달싹였다.
“왜 따라가지 않았습니까. 충분히 그럴 능력이 될 것 같던데요.”
“저야말로 묻고 싶더군요. 불을 그렇게나 정교하게 뿜어대면서 한 번도 다리를 맞추지 않더군요. 마치 유사시에 도망갈 수 있게.”
“······.”
“제가 따라가서 한 놈이라도 생포했다고 칩시다. 그놈이 겁에 질려 ‘잉그리드의 손자가 스펜서 대령을 죽이려 했다.’라고 말이라도 뱉으면 이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굴러갈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도 심각한 사태긴 하지만 이 정도면 당신 선에서 묻을 수도 있을 거고 말입니다.”
“······폭설로 인해 습격자들의 인상착의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이유를 생각 중인데, 어때 보입니까.”
“무슨 헛소리인가 싶겠지만―.”
스펜서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계급이 깡패인 군대에서 대령이 그런 소리 하면 부하들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지. 별 수 있겠습니까.”
스펜서가 가볍게 웃고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며 말했다.
“큰 도움 받았습니다.”
그의 손을 맞잡은 순간, 귀걸이가 작게 진동했다.
스펜서가 속삭였다.
“놀랄 것 없습니다. 강제 발송 메시지입니다. 긴급 명령이나 재난 대비 상황에 쓰이죠. 보는 눈이 많아 얘기를 더 나누기 힘들 것 같아 간략하게 전송했습니다. 혼자 있을 때! 확인하시면 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악수를 위해 맞잡은 손을 떼자 무장한 군인들이 내게 무기를 겨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스펜서가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예의 그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운 톤으로 군인들에게 일갈했다.
“비상 출동이 너무 늦잖아! 평상시 훈련을 어떻게 하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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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나는 숙소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옆의 침대에서는 먹은 것을 하루종일 위아래로 내보내느라 화장실을 쉬지 않고 들락거리던 누스러스디가 몸을 웅크리고 간신히 잠들어있었다.
도시에서 스노모빌을 빌린 이후 자기는 도저히 못 따라갈 것 같다길래 숙소에 던져놓고 갔는데 결과적으로는 내게나 누스러스디에게나 괜찮은 판단이 아니었나 싶다.
낮의 그 난장판에서 전투 능력 하나 없는 누스러스디를 지키며 싸우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고 스펜서와 현 상황에 관련한 대화를 나누지도 못했을 테니까.
소리 나지 않게 조심히 베란다로 나와 문이 닫힌 걸 확인하고 귀걸이를 조작해 스펜서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재생했다.
딱딱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좌표를 전송했습니다. 명일 03시 30분까지 해당 좌표에서 뵙겠습니다.
귀걸이를 만지자 베란다 바닥에 군사용으로 보이는 세세한 주변 지도와 기계음이 말했던 것이 분명한 좌표 위치가 표시됐다.
“귀걸이, 현재 시각.”
내장된 기본 어플리케이션이 답했다.
앨리스의 목소리가 아니라 조금 이상했다.
-02시 43분. 입니다.
메시지를 어제 받았으니 명일 03시 30분은 지금으로부터 약 47분 후일 것이다.
입에서 김이 확 퍼졌다.
“허어······내가 혹시라도 늦게 확인했으면 어쩌려고······.”
숙소로 들어와 외투를 입고 풀어두었던 칼자루를 차고 있으니 옆에서 뒤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으으······어디 가요? 지금이 몇 신데······.”
누스러스디가 내 인기척에 일어난 것.
엉거주춤 일어나는 누스러스디의 상반신을 눌러 눕혔다.
“꿈이에요. 꿈. 다시 자요.”
“꾸움······.”
이불을 끌어 덮는 누스러스디가 코를 고는 소리를 뒤로하고 방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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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의 숲과 밤의 숲은 다르다.
특히나 그 숲이 설산의 초입에 있다면, 낮에는 그나마 으슥한 가운데도 볕이 들어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겠지만, 어둠이 내리는 밤이 되면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 나무들이 바람에 흐느적거리는 모습이 마치 삼도천 너머의 망자들이 생자를 유혹하는 모습 같기도 하다.
적막이 찾아올 법하면 한 번씩 귓가를 훑고 가는 바람 소리, 그 바람에 이끌려 얼기 시작한 눈 표면이 내는 기이한 소리 역시 목덜미에 소름이 돋게 하기에는 충분하다.
낮에 와도 그 기묘한 긴장감에 침이 꼴깍 넘어가지 않을까.
이런 곳에 새벽 3시 30분에 와달라는 부탁이 좀 너무하게 느껴졌다.
그렇기에 더더욱 오로지 목적지만 보고 나아갔다.
[답설무흔]으로 눈에 빠지지 않고 나아가며 [지도 분석], [최단 거리 설정], [길찾기]로 오직 앞만 보면서.
절대 무서워서 그런 거 아니다.
아무튼 아니다.
그러다 스킬의 인도가 뚝 끊겼다.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이전에 딱히 있다고 할만 한 게 없었다.
나무 몇 그루와 바위만이 멀뚱히 서 있을 뿐이었다.
“뭐야.”
그때, 커다란 바위가 꿈틀거렸다.
같은 말을 다른 어조로 반복했다.
“뭐야!”
바위가 갈라지고 안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안쪽에서 꿈틀대는 그림자가 나오나 싶더니 곧 원래의 모습을 보였다.
군복이 아닌 두터운 옷을 입은 스펜서였다.
“오셨군요. 어서 들어오시죠.”
주춤주춤 들어서며 물었다.
“이건 뭡니까?”
빛이 밖으로 나가지 않게 찰랑이는 섬유 같은 것을 잘 여민 스펜서가 답했다.
“사냥꾼들이 쓰는 위장 쉘터입니다. 잉그리드 님을 직접 만나야 할 때는 이런 빈 쉘터를 이용합니다.”
“오호······.”
안쪽에 있던 잉그리드가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부의 조명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얼굴이 낮에 봤을 때보다 훨씬 피곤해 보였다.
자리에 앉기 무섭게 잉그리드가 입을 열었다.
“자네가 많이 애썼다지? 고생했네.”
“손주분이 보통 말썽꾸러기가 아니던데요.”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잉그리드였다.
“일단 나와 웨리바흐 사이의 일을 모르고 웨리바흐에게 협력을 약속했던 이들 대부분의 마음을 돌렸네. 다들 더는 움직이지 않을 걸세. 다만 대령이 먼저 물러서야 이쪽도 움직이지 싶어.”
스펜서가 얼른 답했다.
“돌아가는 대로 상황 해제하겠습니다. 지원 배치한 부대들도 원대 복귀하겠습니다.”
“군인들만 고생시키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군그래.”
“진짜 피가 흐르는 것보다는 땀을 좀 쏟는 편이 백번 나을 겁니다.”
단호한 스펜서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그러면 일단 위급한 상황은 넘어갔다고 보면 될까요?”
“아직 가장 위험한 요소가 남아있네.”
“뭐죠?”
“웨리바흐가 가장 급진적인 이들과 함께 사라졌네. 다들 기존에 속해있던 집단으로부터 탐탁지 않은 눈길을 받았던 자들이니 반감에 무슨 일을 저지를지 전혀 알 수가 없어.”
잠깐 말을 끊은 잉그리드가 숨을 고르며 한 마디 한 마디 또박또박, 말을 잘근잘근 이어붙였다.
“녀석이 어디 있는지 짐작이 되네. 마지막으로 설득을 하려 가보려는데, 자네가 함께 해줬으면 하이.”
왜냐고 물어보기 전, 잉그리드의 뿌연 동공이 나를 향하는 것을 느꼈다.
애절한 감정이 내게 전해졌다.
“만약 내가 핏줄이라는 이유로 판단이 흐려지는 것 같거든, 자네가 나서서······자유인의 생존을 위협하는 잠재적 위험분자를 제거해주게.”
간신히, 몹시 어렵게 입술을 뗐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지만, 알겠습니다.”
밖에서 몰아치는 바람이 만들어 내는 소리가 가슴 깊은 곳을 훑어내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