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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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휘둘렀다.
콰직하는 소리와 함께 마지막 남은 드론이 부서지고, 잉그리드를 가뒀던 반투명한 벽이 사라졌다.
혼탁한 그녀의 동공이 내가 있는 방향을 정확하게 응시했다.
“변변치 않은 모습을 보인 것 같아 몸 둘 바를 모르겠군.”
“아닙니다.”
그리고 잉그리드는 사지 두어 군데가 부러진 채로 여기저기서 뒹굴고 있는 늑대인간들 사이를 거침없이 걸었다.
그리고 벽에 걸린 활을 풀어 만지작거리며 내게 말했다.
“절대 만만하지 않은 아이들일진대 상처 하나 없이 단신으로 제압할 줄은 몰랐네. 자네를 만나보는 게 좋을 거라는 템페시르나의 말도 이해가 가. 내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군, 그래.”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나이 좀 자신 분들은 하나 같이 날 보면 자기 젊을 적 생각이 난단다.
테오릭 경이 처음 그런 소리를 했을 때는 목에 핏대까지 높여가며 그럴 리가 있겠냐고 적극 반박했는데, 이것도 그분들 입장에서는 대단한 칭찬이라는 걸 이해하고 나니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찌 됐든 각자의 분야에서 대단한 위업을 이뤘거나 이뤄가고 있는 사람들 아니겠나.
“마음 같아서는 며칠간 사냥이나 다니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잉그리드가 몸을 내 쪽으로 돌릴 때, 어느새 그녀의 손에는 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진 활이 들려 있었다.
눈을 감은 그녀가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은 활시위를 놨다.
그리고 앞을 향해 뻗는 활시위를 다시 낚아채 다시 당기고 놨다를 두 번 더 반복했다.
일말의 군더더기 없는 완벽에 가까운 움직임.
그렇게 발사된 무형의 화살들이 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살벌하게 느껴졌다.
고개를 뒤로 돌리니 정령처럼 반투명한 형태의 매 하나와 소형 드론 두 기가 화살에 맞아 추락하고 있었다.
바위틈새로 엉금엉금 기어가던 늑대인간 몇이 그걸 보고 분한 신음을 숨기지 못했다.
여기 상황을 다른 곳에 알리려 하다가 실패한 것이 분명했다.
솔직히 말해 나는 뒤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주변의 이상을 알아채기 위해 감각을 돋우는 스킬을 사용하고 있었음에도 그랬다.
잉그리드의 감각과 궁술은 실로 엄청난 수준이었다.
템페시르나가 불안정한 신체 밸런스에도 불구하고 기의 흐름과 폭발을 포괄하는 기공 운용의 괴수였다면 잉그리드는 날숨과 들숨 그 짧은 사이에 몰아치는 기류를 읽어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 줄 아는, 다른 방향의 괴수였다.
‘간신히 위타천 턱 끝에 닿았나 싶더니 괴물들이 줄줄이 나오네. 이 정도는 되어야 은거기인 소리 듣는 거냐고!’
호흡을 고른 그녀가 잇몸 사이 여전히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말을 마무리 지었다.
“보다시피 상황이 매우 혼잡해 사냥을 나갈 여유가 없네그려. 이미 도움받고도 참으로 염치가 없는 소리이긴 하지만 나를 좀 도와주지 않겠나? 위기가 경각에 이르렀네. 일이 마무리되면 섭섭지 않게 사례함세. 내가 밟아온 산과 눈에게 맹세하겠네.”
태백 권역 자유인들이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긴다는 산과 눈의 맹세다.
나도 목숨보다 소중한 걸 다시 틔우려고 왔으니 이 정도는 걸어줘야지.
“좋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맙네. 일단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내 손자인 웨리바흐를 막는 걸세. 녀석은 자유인들을 모아 태백 권역의 병력과 맞붙으려고 하고 있네. 그 전에 선봉연대의 스펜서라는 녀석을 죽이려 할지도 모르고 말이네.”
“그건······하책 같은데요. 잠깐의 혼란을 불러올 수는 있지만 군 지휘관을 죽이는 건 결국 자유인들의 위험성이 주목받지 않겠습니까.”
“자네가 여기서 평생을 산 웨리바흐보다 낫군. 하지만 스펜서가 죽어서는 안 될 더 중요한 이유가 있네.”
“뭐죠? 스펜서 대령은 자유인들에게 굉장히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들었는데요.”
주변을 둘러보던 잉그리드가 나를 바위 틈새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여전히 몰아치는 눈 폭풍 속, 그녀가 손을 한 번 휘두르자 바람이 더욱 거세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네가 나를 실망하게 하지 않을 것 같아 하는 말이네. 일이 마무리되더라도 새어 나가서는 안 되네. 알아듣나?”
오늘 처음 본 내 실력만을 보고 서슴없이 자신을 도와줬으면 한다는 부탁을 할 정도로 털털한 잉그리드가 이렇게 나를 밖으로 끌고 나와서 새어 나가서는 안 된다고 강조할 정도의 말이 뭘까.
일단 알겠다고 했지만 그래도 불안한지 잉그리드는 입술만을 달싹였다.
그래도 그녀의 목소리는 하나의 누락 없이 내 고막에 선명하게 다가왔다.
“스펜서는 우리들, 정확히 하면 내게 협력하고 있네. 그가 보여주는 위협적인 행위는 상부에서 요구하는 것에 비하면 요식행위에 불과해. 그런 요식행위를 해줌으로 인해 도시인들의 불만을 가라앉히고 동시에 우리에게 위험을 경고하는 걸세.”
나도 모르게 눈을 부릅뜨고 중얼거렸다.
“그럼 이번 일도 역시······!”
“이미 합의된 쇼에 불과하네. 다만 이 사실은 나와 스펜서 말고는 누구도 몰라. 이제 자네가 알게 됐지만, 앞으로도 새어 나가서는 안 되네.”
“그럼 혹시 이것도 합의된 겁니까?”
잉그리드에게 내가 타고 온 기차가 강도들의 습격을 받았다는 소리를 했더니 그녀는 송곳니를 더욱 드러내며 이마를 감싸 쥐고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있겠나. 웨리바흐 이노옴······.”
그런 잉그리드에게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잉그리드 씨는 다른 자유인들에게 찾아가 손자에게 말려들면 안 된다고 설득하세요. 거긴 제가 가도 설득될 것 같지 않으니까요.”
“자네는?”
“저는 스펜서 대령에게 가서 지금까지의 상황을 설명하고 본인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걸 알릴게요.”
“그게 좋을 것 같네. 부탁함세.”
“제가 잉그리드 씨의 부탁을 받고 왔다는 걸 증명할 증표 같은 게 있을까요? 다짜고짜 찾아가면 안 믿을 것 같아서요.”
잉그리드가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오더니 뭔가를 내게 건네주었다.
“스펜서라면 알아볼 걸세.”
상당히 기다란 깃털이었다.
부러지지 않게 조심히 갈무리한 후 마지막으로 확인을 받았다.
“잉그리드 씨가 가시는 쪽에 손주분이 있다면 좋겠지만 저와 마주치게 될 경우······.”
잉그리드가 단호하게 내 말을 끊고 들어왔다.
“아주 혼쭐을 내주게. 다만 죽이지는 않았으면 하네.”
“알겠습니다.”
“웨리바흐를 쉽게 보지 말게. 내 핏줄 중에서 가장 탁월한 녀석이야.”
들어가 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나왔다.
“가시게. 각자의 일을 마친 뒤 봄세.”
그녀가 숨을 뿜자 거친 눈폭풍이 잠시나마 사그라드는 것처럼 보였다.
“이게 무슨······.”
고개를 돌렸을 때, 그녀는 어느새 가지에 눈이 두텁게 쌓인 나무 꼭대기에 올라 있었다.
아우우우우--
산신의 울음소리가 골짜기와 능선을 울렸다.
그리고 그녀는 훌쩍 몸을 날려 나무와 나무 사이를 노닐며 멀어졌다.
흔들림은커녕 그녀가 밟는 자리에서 눈송이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나도 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저런 할머니한테 개기는 손자라니. 안 봐도 멍청하겠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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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우엑- 우우웩-.”
산을 내려오는 내내 붙잡고 있던 누스러스디의 뒷덜미를 내려놓자 누스러스디는 과감하게 위장 내부에 있던 음식물 역류를 선보였다.
내려오는 내내 저러더니 아직도 게워 낼 것이 남았나보다.
하긴, 올라갈 때 누스러스디를 두고 갔던 곳에 다시 가보니 내가 남겨두고 간 레토르트 식품은 물론이고 자기가 바리바리 싸 온 것까지 신나서 먹고 있었으니 아주 위장이 빵빵한 상태였을 것이다.
“무슨 우억, 일인지 그에엑, 설명은 우우욱, 해주지······.”
“스펜서 대령이 위험할지도 몰라요. 그의 위치를 파악해서 확보해야 합니다.”
“갑자기요?”
“얘기 길어집니다. 일단 선봉연대 연대본부로 다시 갑시다.”
다시 손을 뻗어 뒷덜미를 우악스럽게 잡으니 누스러스디가 몸을 뒤틀며 반항했다.
“걸어갈 수 있어요! 다 내려왔잖아요!”
“느립니다.”
그대로 한참을 달리다 연대본부가 보일 때쯤 뒤를 돌아보니 드문드문 누스러스디가 만들어 낸 흔적이 멀찍이 보였다.
“드러워 죽겠네.”
“당신이······우억······그러면······끄으윽······안 되는······푸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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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장님 현재 부재중이십니다.
연대본부의 위병소에서 대기 중에 전해진 말이었다.
“지금 안에 안 계신 건가요?”
-그렇습니다.
“어디 가셨죠?”
-휘하 부대 시찰 가셨습니다.
“그러니까 거기가 어디냐고요.”
-······보안 관련으로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원하신다면 방문기록부에 이름 남기시겠습니까? 추후에 연대장님께서 확인하시고 별도의 연락이 갈 수도 있습니다.
“지금 당장 위······.”
위험할 수도 있다는 말이 입 밖으로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스펜서 대령은 잉그리드와 모종의 관계를 맺고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당장의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새어 나가서는 안 된다고 당부까지 한 잉그리드의 당부를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었다.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위병소를 빠져나오자 부대에서 스노모빌과 스노우체인을 감은 차량들이 나와 쌓인 눈 위에 각자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 보였다.
“종류도 다양하네.”
정신이 좀 돌아온 누스러스디가 그걸 보고 말했다.
차량들의 꽁무니를 보고 있던 내가 중얼거렸다.
“우리 처음에 여기 역에 도착하고 스펜서 대령이 먼저 갔었죠.”
“그랬죠?”
“그때 탄 차량, 저것들보다 작았었죠.”
“당연하죠. 연대장만 타는 1호차······!”
서로 마주 본 나와 누스러스디가 허겁지겁 뛰쳐나와 부대에서 나온 차들이 갈라지는 교차로로 향했다.
눈이 계속 오고 있어 흔적이 덮이고 있었지만, 아직 바닥에는 차량의 타이어나 스노모빌의 스키날, 무한궤도가 만들어 낸 자국이 역력했다.
누스러스디가 재빨리 훑고는 하나를 손으로 가리켰다.
“이겁니다!”
“확실한가요?”
“제가 종군기자인데 지휘관들 이용 차량 정도는 빠삭하죠.”
[흔적 각인]
[추적]
타이어 자국이 조금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다시 한 번 누스러스디의 뒷덜미를 잡으니 그가 기겁했다.
“도시에서 스노모빌을 빌려줄 겁니다. 그 비용도 제가 낼 테니 이것만은 제발······!”
좋은 생각 같았다.
힘도 덜 들고, 어쩌면 더 빠를지도 모르고.
그래서 누스러스디를 든 그대로 도시로 뛰었다.
그가 절규하다가―
“아, 진짜 말을 하면 좀 들어 처먹기를······우웨엑!”
다시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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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사.”
웨리바흐의 신호에 옆에서 어깨에 음파바주카를 메고 있던 늑대인간이 방아쇠를 당겼다.
음파 탄환이 주위를 훑으며 날아갔고, 타겟인 선봉연대 1호차가 멀지 않았다.
하지만 1호차 운전병은 기가 막힌 솜씨로 핸들을 틀었고, 그 덕에 차량의 옆면에 음파바주카 탄환이 직격하는 대신 뒷바퀴만 스칠 수 있었다.
그러나 1호차가 달리던 길은 폭이 넓지 않은 산길이었던데다가 눈까지 오고 있던 상황, 결국 1호차는 기우뚱하며 중심을 잃고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말았다.
웨리바흐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내가 처리하겠어.”
그가 거침없이 몸을 날렸다.
전설적인 사냥꾼인 잉그리드의 자손 중 탁월하다는 말이 과언은 아니었는지 제법 커다란 덩치에도 불구하고 웨리바흐가 움직일 때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그가 1호차에 거의 도달했을 무렵, 조수석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이마에서 피를 흘리는 스펜서가 밖으로 나왔다.
스펜서가 웨리바흐를 확인하고 탄식했다.
“멍청한 놈. 잉그리드 님이 네가 하고 있는 짓을 알면 탄식하실 거다.”
“할머니의 이름을 입에 담지 마라. 도시인의 더러운 개 주제에.”
“그래, 그렇게 차라리 무지한 때가 행복할 수도 있겠지.”
다른 늑대인간들도 차츰 다가서서 차량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스펜서가 불꽃을 내뿜으며 하는 말에 분노가 가득 실렸다.
“훗날, 많은 이들이 너를 조모가 이룩한 영광을 무너트린 천하의 멍청이로 기억할―.”
부우우웅-
스노모빌 특유의 거친 엔진소리가 급격히 가까워졌다.
자리에 있는 모두의 의식이 그쪽으로 쏠린 아주 짧은 순간, 스펜서는 불을 뿜어 몸에 둘러쳤다.
불을 다루는 도마뱀인 살라맨더 종족에게 내려오는 일종의 비전이었다.
그의 몸에 이식된 장치들이 불을 더욱 돋웠다.
굉장한 화력 때문에 늑대인간들이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는 사이, 스노모빌에 타고 있던 오메가가 칼자루를 뽑아 쥐며 중얼거렸다.
“구조 신호 한 번 화끈하구만.”
그대로 밀고 들어가 포위망을 뚫어버린 오메가의 눈에 덩치가 크고 잉그리드처럼 흰 털을 가진 늑대인간이 보였다.
잉그리드가 말한 그녀의 손자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스노모빌에서 그대로 뛰어내린 오메가가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외쳤다.
“너희 할머니가 보낸 사랑의 매 도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