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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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만요! 잠시······!”
바위산을 오르는 길, 나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몰아치는 바람 소리에 섞여 끊겨 들렸다.
팔다리가 멀쩡하게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저체온증으로 인한 환각이나 환시는 아니었다.
그대로 서 있자니 눈에 파묻힐 것 같아 주위를 둘러봤더니 눈 무게를 못 이겨 부러진 나무 아래 공간이 조금 있었다.
잘 보이지도 않는 뒤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불 피워놓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와요!”
뒤쪽에서 무언가 대답이 있었으나 바람은 다시 한번 그것을 흩트려 놓았다.
“같이! 같이······!”
나무 아래 쌓인 눈들을 얼추 정리하고 메고 온 배낭을 풀어 아래쪽 도시에서 부랴부랴 준비해 온 버너니, 코펠이니 하는 캠핑용품을 풀어놓고 간단하게 몸을 데울 준비를 했다.
버너 위의 코펠에 담긴 눈이 녹아 가는 걸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나왔다.
“게임이나 주구장창 하던 인생이라 평생 캠핑이랑은 연이 없을 줄 알았더니 생각지도 못한 설중 캠핑을 하고 있네······.”
그때 전신이 눈에 파묻힌 누스러스디가 거의 구르듯이 안으로 들어와 숨을 헐떡이며 나를 향해 원망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같이······같이 가자고 그렇게나 말했는데······!”
“같이 천천히 가면 둘 다 동태 되는 겁니다. 그리고 힘들 거 분명하니까 오지 말래도 본인 몸 하나는 챙길 수 있다면서요. 태백 권역 출신이라면서 산을 이렇게나 못 탈 줄은 또 몰랐네.”
숨만 헐떡이는 누스러스디가 멘 배낭을 벗겨 내 배낭과 함께 바람구멍을 막으며 가볍게 타박했다.
방풍 고글과 마스크를 거의 던지다시피 벗은 누스러스디가 여전히 헐떡거리는 숨과 함께 목소리를 뱉었다.
“이렇게 뒷번호 도시는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리고 애당초 여긴 도시도 아니고요. 저 나름 귀하게 컸습니다.”
배낭에서 작은 컵을 꺼내 눈이 녹아 보글보글 끓기 시작한 물을 따라 누스러스디에게 주었다.
입고 있던 방한 조끼를 더듬거리던 누스러스디가 개별포장된 핫초코 팩을 뜯어 물에 풀고 휘휘 저었다.
핫초코가 녹을 때까지 양손으로 컵을 꼭 쥔 누스러스디가 좀 살만해졌는지 예의 그 입과 성대를 또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메가 씨는 어떻게 그렇게 산을 잘 타죠? 추워 보이지도 않고요. 퓨어라고 들었는데 사실 피부온열유지 시술이라도 한 거 아닙니까?”
왜긴 왜야.
안에 입고 있는 마도공학 유물이랑 스킬 덕이지.
중간중간 쌓이는 눈만 털어내면 육체적으로 힘든 건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특히나 이 <깔깔이> 성능이 발군이었다.
몸을 덥혀주는 것 말고도 아예 쾌적하게 유지해주는 수준이라 야스민 공에게서 잘 빌려왔다고 생각했다.
빌려달라는 말을 하자 쿨하게 알겠다고 하면서도 야스민 공의 눈동자가 살짝 떨리던 게 기억난다.
곱게 잘 쓰고 돌려드리겠다는데도 말이야.
“정신력과 마인드컨트롤이죠. 추운 곳에 있어도 덥다고 생각하면 더운 겁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죠.”
“호오······.”
내 말에 감명받은 듯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며 핫초코를 홀짝거리는 누스러스디였다.
나도 그에게서 핫초코 한 팩을 받아 홀짝거리니 기분이 좀 좋아졌다.
역시 사람은 단 걸 좀 먹어줘야 한다.
어느새 핫초코를 다 먹고 입맛을 다시던 누스러스디가 몸을 풀며 말했다.
“확실히 직접 보니 심상치는 않군요.”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 가려지긴 했지만 얼마 전까지 사람이 살았던 흔적들이 있었죠.”
“네. 자유인들이 수렵이나 채집에 가까운 삶을 산다고 해도 지금처럼 눈이 많이 오는 철에는 정착하기 마련인데 말이죠. 그리고 아주 큰 일이 있는 게 아니라면 눈이 잦아들 때까지 정착한 곳에서 움직이지 않아요. 아무리 과거에 비해 기후나 지형의 영향을 덜 받게 되었다지만 아직 극복이나 정복했다고 하기엔 미비하니까요.”
“그것뿐만이 아니었죠. 군사 시설도 필요 이상으로 정비가 잘 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누스러스디가 워낙 힘들어해서 중간에 몇 번 쉴 곳을 찾다가 참호 진지나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일종의 방공호에 들어갔는데 근래에 말끔하게 정리한 흔적이 역력했다.
내가 자리를 정리하며 다시 움직일 준비를 하자 누스러스디가 죽는소리를 했다.
“꼭 정상까지 올라가야 해요? 아래쪽으로 내려가서 자유인들의 흔적을 찾아보는 편이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요?”
나도 꽤나 합리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당장 누스러스디의 말에 반박할만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가 잉그리드라는 사람을 만나러 온 것이며, 지금은 연락이 되지 않고, 마지막 신호가 잡힌 곳으로 가고 있다는 걸 줄줄줄 설명하기도 참 궁상스러웠으며, 누스러스디가 ‘그럼 왜 이런 시국에 잉그리드를 만나러 왔냐.’라고 하면 탈모 치료 연고의 원료를 구하기 위해 왔다고 하는 건 더 없어 보였다.
“높은 곳으로 가면 주위가 잘 보일 테니 일단 가죠.”
내가 내뱉고도 참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역시나 누스러스디도 얼굴을 구겼다.
“네? 올라가도 주위가 안 보이는 건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만 징징거리고 일단 일어나서······.”
콰아앙-
바람 소리를 타고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재빨리 배낭을 치우고 밖으로 나섰다.
계속해서 폭발 소리가 나고 있었다.
“선봉연대가 움직인 걸까요?”
누스러스디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뇨. 위쪽입니다.”
[시력 강화]와 [매의 눈]을 사용해서 바위산 꼭대기 근처를 바라보는 내 눈에 아주 작은 빛이 새어 나오는 바위틈이 보였다.
폭음의 발원지는 그곳이 틀림없었다.
얼른 배낭을 둘러멨다.
[무게 분산]
[답설무흔踏雪無痕]
발을 딛을 때마다 움푹움푹 패이던 느낌이 사라졌다.
“먼저 가볼 테니까 진짜 못 올라오겠다 싶으면 무리하지 말고 여기 있어요.”
나를 따라 배낭을 메려던 누스러스디가 눈가를 찌푸리고 잘 보이지도 않는 정상을 살피나 싶더니 다시 짐을 풀고 내게 말했다.
“챙겨 온 먹을 거 있으면 좀 놔두고 가요.”
혹시나 해서 챙겨온 레토르트 식품을 몇 개 던져주고 전력을 다해 설산을 뛰어올랐다.
폭음이 급격히 가까워졌다.
#
“안 됩니다, 어르신!”
잉그리드가 기거하는 바위틈 내부, 웨리바흐의 동료인 늑대인간들이 당황하고 있었다.
드론이 생성해낸 공간 안에 갇힌 잉그리드가 다시 한번 허공에 손을 뻗어 활의 시위를 당겼다.
분명 그녀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지만, 모두의 눈에는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시위가 팽팽해진 활과 그 시위에 기댄 화살의 모습이 스쳐 갔다.
자연에 흐르는 기운을 끌어내 만들어 낸 활.
그녀가 검사였다면 마음으로 검을 만들어 냈을 것이며 마법사였다면 영창과 마법진에 담긴 이치를 마음으로 그려냈겠지만, 그녀는 일평생을 사냥꾼으로 살았기에 가장 손에 익은 무기를 만들어 냈다.
시위와 화살 깃을 붙잡고 있던 손이 풀렸다.
보이지 않는 화살과 드론이 만들어 낸 격벽이 충돌하며 다시 한번 폭음을 만들어 냈다.
이미 과도한 출력 개조를 몇 번이나 마친 드론들이 부하를 견디지 못해 윙윙대는 소리가 제법 넓은 바위틈을 가득 채웠다.
이미 몇 개의 드론은 시커먼 연기를 뿜으며 제 역할에서 벗어난 지 오래였다.
하지만 남은 드론들 덕에 격벽은 아직 유지되고 있었다.
“후우······후우······.”
잉그리드는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흐린 눈과는 별개의 탁월한 감각으로 평범한 이들이 느낄 수 없는 것들까지 모두 읽어내던 잉그리드지만, 노쇠한 몸으로 오랜만에 너무 많은 힘을 끌어다 써 버린 탓이었다.
다른 늑대인간들이 당황해서 지르는 소리조차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르신이 못 나오게 해야 해!”
“드론 고쳐! 어서!”
잉그리드는 도무지 안정될 생각을 하지 않는 거친 숨과 함께 일어섰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한 발만 더······.’
화살을 한 발만 더 쏠 수 있다면 이 조잡한 공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짧은 식견과 치기에 차서 큰일을 저지르려 하는 손자를 막아야 했다.
다시 한번 시위를 당기던 손과 팔에서 작은 흔들림이 시작됐고, 그것은 이내 잉그리드의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결국―
“으으윽!”
반발력을 이기지 못한 잉그리드는 힘이 채 다 모이기도 전에 시위를 놓아버렸고, 화살은 벽을 깨지 못한 채로 사라졌다.
산신으로 숭배받는 전설적인 사냥꾼조차 세월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 자리에 무너지듯 쓰러져 간신히 숨을 뱉는 잉그리드를 확인한 다른 늑대인간들이 아주 조심성 있게, 천천히 접근했다.
“어르신······괜찮으신 거죠.”
웨리바흐의 의견에 일리가 있다 싶어 계획에 동참한 이들이지만, 이들 역시 늑대인간인 이상 잉그리드의 얘기를 동화처럼 듣고 자란 이들이다.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웨리바흐가 잘 알아서 할 겁니다. 다 어르신 힘드실까 봐 그 녀석도 독한 마음으로······.”
다 쉬어버린 잉그리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멀리 볼 수 있는 시야와 그것을 현실에 가져올 줄 아는 행동력이 있은 다음에야 독한 마음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마음만 독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해! 늦지 않았다. 어서 나를 풀어주거라.”
“그렇게는 안 됩니다······.”
그때, 여행객 차림의 누군가가 가벼운 발걸음과 함께 내부로 들어섰다.
오메가였다.
늑대인간들이 가득한 내부를 보고 오메가가 입을 열었다.
“어······초대받고 왔는데 마중 나오기로 한 분이 안 오셔서요. 여기 계신가해서 왔는데요.”
0.5초가량의 침묵.
늑대인간들이 전투 태세를 취했다.
몸을 낮춘 채로 손톱을 길게 빼내는 이, 등에 걸고 있던 접이식 활을 펴는 이 등등.
몇몇은 조상신의 가호를 받아 몸을 변형시키기도 했다.
“누구냐. 외부인이 올 곳이 아니다.”
“손님이라니까요.”
“물러서라.”
아주 작은 소리와 함께 오메가의 발밑에 화살이 꽂혔다.
담아낸 힘을 다 풀어내지 못해 원통하다는 듯 부르르 떠는 화살대를 본 오메가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는 발로 밟아 화살대를 꺾어버리고는 안쪽, 격리된 잉그리드에게 외쳤다.
“잉그리드 씨 맞으시죠? 저 매티슨한테 부탁해서 온 오메갑니다! 알고 계시죠? 지금 상황이 아무리 봐도 좀 이상한데 정리 좀 하고 얘기 나누시죠!”
그리고는 배낭을 내던진 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허리춤에 꽂혀 있던 칼자루를 손에 쥐고 다시 외쳤다.
“정리는 제 방식대로 하겠습니다!”
비틀린 칼자루에서 광자 검날이 솟아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오메가를 향해 늑대인간들이 쇄도했다.
거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욱 거칠어진 야성의 존재들이었다.
“내가 아는 늑대인간은 상당히 지적이었는데 여기 친구들은 그렇지 않은가 봐?”
얼굴로 날아드는 날 선 손톱을 모조리 베어낸 오메가가 가볍게 흘린 말이었다.
그리고 검을 역전개 하고, 손톱을 잃은 늑대인간의 팔과 자기 팔을 자연스레 엮어 바닥에 눕더니―
[근력 강화]
[사량발천근四兩撥千斤]
[암바armbar]
듣는 이에게 공포심을 새겨넣는 꾸드득 소리와 함께 늑대인간의 팔이 바깥으로 뒤틀렸다.
“으아악!”
“에이, 이런 고전 기술 가지고 엄살떨면 안 돼.”
그리고는 다시 몸을 움직여 다리로는 늑대인간의 몸통을 꽉 잡고 겨드랑이에 늑대인간의 목을 밀어 넣어 경동맥을 강하게 압박했다.
[길로틴 초크Guillotine Choke]
“크엑······크에에에······.”
스킬의 완벽한 자세와 예상치 못하게 쏟아지는 강한 힘 덕에, 버둥거리던 늑대인간은 곧 축 늘어졌다.
툭툭 털고 일어난 오메가가 앞에 있는 다른 늑대인간들에게 선전포고했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데 다짜고짜 어디 한 군데 으깨거나 죽여버릴 수는 없으니까 이 정도면 괜찮지?”
다른 늑대인간들의 시선이 거품을 뿜으며 바닥에서 경련하는 녀석에게 닿았다.
경련 중에 지렸는지 알고 싶지 않은 액체가 녀석의 사타구니에 진한 얼룩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저렇게는 되지 않겠다는 늑대인간들의 강한 의지가 불탔다.
전투의지를 꺾겠다는 오메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죽여어!”
결국 오메가는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이 몸을 움직여야 했다.
격리된 공간 안에서 이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던 잉그리드의 흔들리던 감각이 차츰차츰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녀의 감각에 들어선 오메가는 그녀가 만난 그 어떤 괴수보다도 단단하고, 장엄했다.
하지만 동시에 따뜻했으며 빛났다.
느껴본 적 없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와 동시에 잉그리드는 의문점을 가졌다.
“어째서 저기만······.”
머리, 특히 이마 위부터 정수리가 유독 밝게 빛난다는 느낌이 왜 이렇게 강하게 드는 것인지 잉그리드는 당장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