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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 말씀 잘 들었습니다. 여기서는 얼마나 머무실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시다시피 긴장 상태가 고조되고 있어서 여행하시기에 적합한 시기는 아닙니다.”
태백 권역의 도시 중 가장 최북단 제23 도시의 기차역, 스펜서 대령이 여전히 날카로운 눈매로 우리를 훑으며 말했다.
누스러스디가 제법 능글맞게 답했다.
“그래도 이 먼 곳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가기는 아쉽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오메가 씨?”
“그럼요. 저야 휴가는 아니지만 언제 이런 곳까지 와보겠습니까.”
제23 도시까지 오는 동안 기차 내부에서 사정 청취라 쓰고 압박 심문에 가까운 걸 겪는 동안 나와 누스러스디 사이에는 묘한 동료 의식이 싹터 있었다.
그만큼 스펜서 대령은 우리의 신분과 방문 목적, 열차 강도 사건에 대해 집요할 정도로 질문을 던져댔다.
그런 스펜서 대령에게 일단 나는 퓨전 코프의 영업사원이라고 열심히 어필해야 했다.
위장용 데이터 명함까지 확인한 스펜서 대령이었지만 ‘요새 퓨전 코프에서는 영업사원한테까지 외골격 조종 훈련을 시키냐?’라며 쉽사리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개인적인 흥미라고 얼버무리는 것과 동시에 허리춤에 꽂혀 있던 칼자루를 깔깔이 안쪽으로 밀어 넣어서 괜한 눈길을 끌지 않도록 주의했다.
그나마 나는 이 정도였지만 누스러스디는 거의 압수수색을 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짐을 모조리 열어 보인 것은 물론이고 촬영한 사진과 영상을 모두 보여야 했다.
놀랍게도 그 짧은 시간 무슨 짓을 한 건지 화물칸 내부를 찍은 건 단 하나도 없었다.
오로지 내가 조종한 외골격과 강도들 사진뿐이었다.
“제 취미가 다양한 용도의 외골격 촬영이어서요. 허허허······.”
스펜서 대령이 불꽃을 날름댔지만 뻔뻔한 얼굴로 변명하는 누스러스디였다.
결국 스펜서 대령은 강도들을 찍은 사진 정도만 따로 받아 갈 수 있었다.
스펜서 대령이 딱딱하게 말했다.
“두 분의 협조에 감사 드립니다. 도움이 필요하시거든 선봉연대 휘하의 부대를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처음 기차에 들어올 때처럼 절도 있는 걸음으로 역사 밖으로 빠져나가 대기하고 있던 군용차를 타고 쌩하니 사라졌다.
그걸 본 누스러스디가 추위에도 불구하고 패딩의 지퍼를 조금 내렸다.
“어후, 우리 편집장 상대하는 것보다 더 힘들었네.”
내가 말을 이어받았다.
“여전히 우리를 의심하고 있던 눈빛이네요. 행동에 제약이 많겠어요.”
“그렇다고 ‘화물칸에 있던 군수품은 뭔가요.’라고 물을 수는 없잖아요.”
“감추려고 애쓰는 것 같던데 그런 소리 했으면 아까 타고 간 차에 우리를 구겨 넣고 일단 부대로 끌고 가지 않았을까요.”
“에이, 제가 기자인데 그렇게는 못 하죠.”
누스러스디가 데일리 네오-서울의 종군기자라는 것을 알고 대령의 태도가 아주 조금 누그러지긴 했다.
주로 네오-서울에 집중적으로 분포된 내 인맥들을 활용하기 어려운 지금, 누스러스디는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기 좋은 신분이었다.
게다가 다른 도시들에 비해 규모가 아주 작긴 하지만 주위에 있는 부대들로 인해 유지가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제22, 23 도시라면 더더욱 그렇고.
무엇보다 누스러스디는 내 진짜 신분을 알게 되고 상당한 흥미를 보이고 있으니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을 것 같았다.
누스러스디가 내게 말했다.
“오메가 씨는 이제 어디로 가실 생각이시죠?”
“원래 계획대로라면 만날 사람이 있어서 여기까지 온 건데, 연락이 안 되네요.”
“만날 사람이 군인이거나 자유인인가요? 이런 곳까지 오실 정도면?”
짧은 시간에 급격히 가까워진 누스러스디지만, 내가 여기 온 이유가 잉그리드라는 늑대인간을 만나러 왔다는 것까지 다 밝히기는 그랬다.
“네. 자유인이라고 들었어요. 기차역에 나와 있을 거라고 했는데, 없네요. 기차 연착이 돼서 그런가······.”
“그래요? 그럼 그쪽이랑 연락이 될 때까지 저랑 같이 움직이시는 건 어떠세요? 며칠간 이 근방을 좀 돌아볼 생각이었거든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농담 삼아 말했다.
“호위로 쓰기엔 제 몸값이 좀 비싼데.”
킥킥거리며 답하는 누스러스디였다.
“아, 이걸 안 넘어오시네. 숙박비랑 밥값은 제가 내겠습니다. 이 정도로 봐주시죠. 저도 이래저래 고급 인력입니다.”
“제가 창문에서 머리 안 눌렀으면 그 고급 인력 지금 없을걸요?”
“계산 깐깐하시네.”
“목숨값이라고 생각하면 싸죠. 저는 급하게 온 거라서 여기에 대해 모르는 게 많거든요? 숙박비, 밥값 받고 누스러스디 씨의 지식까지.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요?”
“콜!”
“대신, 최대한 핵심만 간략하게.”
“기차에서 보셨잖습니까. 저만큼 핵심만 알려주는 일타 강사 드물어요.”
“강의하셨으면 쓸데없는 소리나 하고 진도 안 나간다고 학생들 항의받기 좋겠던데요.”
“예?”
그게 무슨 소리냐며 따지는 누스러스디를 뒤로하고 역사 밖으로 나섰다.
일단 잉그리드와 나를 중개해 준 매티슨에게 연락을 해보는 것이 먼저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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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습니다. 저도 연락이 안 돼요. 딥스페이스 접속 기록도 어제가 마지막이긴 한데, 며칠씩 접속 안 하시는 일도 있고 그래요.
“모르겠다고 하면 끝납니까? 거, 참 무책임하시네. 샌디 비치가 이것밖에 안 됩니까?”
-지금은 시기가 안 좋은 것 같으니 다른 분을 먼저 만나보시는 게 어떠냐고 그렇게 몇 번이나 말씀드렸는데 굳이 가셔야겠다면서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매티슨의 말에는 울분과 한이 묻어 있었다.
급하게 닦달하긴 했었지.
그런데 나도 급했다.
당장 이끼를 구해서 나 쓸 연고라도 만들어야 머리카락이 다시 날 텐데 안 급하면 그게 성인군자 아니겠냐고.
매티슨은 온몸에 털이 숭숭 난 오랑우탄 수인이라 이런 내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공감 ‘해 줘’.
지금의 풍성함이 내일의 풍성함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
버럭 화를 내려다가 한 번 참았다.
“일단 알겠으니까 그쪽에서 연락 오면 저한테 알려줘요.”
-지금 연결된 회선으로요? 태백 권역 군용 회선이던데요. 처음에 보고 어디서 장난치나 했습니다.
바깥에 눈 덮인 연병장이 보였다.
내가 현재 있는 이곳은 스펜서 대령이 연대장으로 있는 선봉연대 연대본부다.
태백 권역과 네오-서울은 통신 프로토콜이 달라서 당장 매티슨에게 연락을 하려면 위성 전화가 필요한데, 태벽 권역 제23 도시는 말이 도시지 그냥 눈 많이 오는 읍내랑 다를 게 없어서 고가의 장비인 위성 전화가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머리를 굴리다 떠오른 것이 기차에서 받아놓은 스펜서 대령의 데이터 명함이었다.
그래서 도시를 돌아다니는 군인 아무나 붙잡고 스펜서 대령에게 연결해달라고 한 다음, 연결되자 부대에 위성 전화 있냐고 묻는 내 목소리에 스펜서 대령은 황당하다는 속내를 그대로 내비쳤다.
그래도 박한 사람은 아닌지 연대본부에 있는 위성 전화를 사용하게 해줬다.
요금은 내 앞으로 달아둘 거라는 경고와 함께.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수신자 부담이라 돈 많은 매티슨이 낼 거다.
“이쪽은 말고요. 퓨전 코프 태백 지사로요. 저랑 관련되어 있다고 하면 알아서 할 겁니다.”
퓨전 코프 유령 사원인 나와 관련된 게 전달되면 이수련이 알아챌 거다.
-군용 회선에, 퓨전 코프에 복잡하기도 복잡하군요. 일단 알겠습니다.
궁금한 것이 많이 남은 듯한 매티슨이었지만 내게 빚진 게 많은 입장이니만큼 속 시원히 물어보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래요. 네오-서울로 돌아가면 한 번 찾아가겠습니다.”
-그······건 괜찮습니다.
그리고 통신이 불량인 듯 소리가 멀어지다 통화가 끊겼다.
이 오랑우탄 이거 연기하는 것 같은데.
수화기를 내려놓고 연병장에 쌓인 눈을 치우는 병사들, 그리고 엿이라도 먹으라는 듯 병사들이 치운 곳에 고대로 다시 쌓이는 눈으로 보고 감탄하고 있자니 잠시 부대를 둘러보고 오겠다며 나간 누스러스디가 들어왔다.
그의 주변에 눈이 달라붙은 촬영용 드론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볼일은 끝나셨습니까? 슬슬 돌아다녀 보죠.”
문이 닫히기 직전, 누스러스디의 뒤를 따라온 것이 분명한 누군가가 들어섰다.
“그렇게 마음대로 사진 찍고 다니시면 안 됩니다!”
누군가 해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더니 하사 계급장이 보였다.
하사가 나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외골격 타던 싸가지?”
음······?
계급장과 눈 주변이 익숙했다.
“융통성 없던 하사?”
그때는 방한 장비에 고글을 끼고 있는 데다가 목소리도 낮아서 몰랐는데 인간 여성이었던 모양.
누스러스디가 그런 나와 하사를 보고 빵 터져서 웃더니 말했다.
“이미 구면이셨군요. 인사하시죠. 이쪽은 퓨전 코프 영업사원 오메가 씨. 이쪽은 선봉연대 보급수송중대 연진 하사. 참고로 연진 하사랑은 오가다 만났습니다.”
“오가다 만난 게 아니지 않슴까! 군 시설 촬영은 금지된 사항입니다!”
“제가 뭐 극비문서 찍어가는 것도 아니고, 고생하는 장병들 생활하는 연대본부 좀 찍은 건데, 그게 문제가 됩니까?”
“부대 내 허가받지 않은 일체의 촬영 행위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보급수송중대라······군수품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초임 하사라고 해도 듣는 게 있을 테니 현재 상황에 대해 작은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여전히 누스러스디와 티격태격 언성을 높이고 있는 하사를 불렀다.
“연진 하사님. 잠깐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저는 드릴 말씀이 없······.”
그녀가 돌아볼 때, 입고 있던 외투를 거칠게 벗었다.
후드의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 올렸다.
[매력 발산]
[근육 펌핑]
[마초남]
핏줄이 잔뜩 선 팔을 들어 목 근처를 쓸어내렸다.
“조금······덥군요.”
내 목소리가 낮아지고 울림이 커졌다.
서리얼 시절에는 몇몇 유저들이 게임 캐릭터에게 저런 어필 스킬들이 왜 필요하냐고 했던 스킬들이었다.
현실에서 몸을 가꾸는 게 낫지 않겠냐는 말도 있었고 심지어 해당 스킬들은 NPC들도 잘 반응하지 않았다.
이 스킬들이 유저와 NPC 사이, 그것도 같은 종족이어야만 반응한다는 사실은 내가 저 스킬을 익히고 오만군데에 사용한 결과를 커뮤니티에 푼 이후였다.
물론 NPC들의 반응도 호불호가 극강이었다.
그러니 이건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의 도박 수였다.
눈 펑펑 오는 추운 날씨에 산을 뛰어다니면서 얻어걸리는 거 없나 하고 기대할 바에는 이렇게라도······!
제발 통해라!
나를 바라보던 연진 하사가 슬그머니 다가와서는 내가 앉아 있던 작은 테이블의 반대편 의자를 빼서 앉았다.
그녀의 시선이 내 팔뚝에 고정되어 있었다.
얼굴이 조금 붉어진 연진 하사가 말을 더듬거렸다.
“마, 마침 다른 분들이 담배 피우러 가셔서 잠깐 정도는······괜찮을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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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본부를 벗어나는 길, 누스러스디는 내 옆에서 연신 호들갑이었다.
“대림 에어리어, 아니 네오-서울 최고의 해결사라더니 최고의 카사노바였군요!”
“조용히 해요. 원래는 이런 식으로 일 안 하니까 이건 오프더레코드로 남겨두고 어디 풀 생각하지 말아요.”
이수련이나 신시아한테 이 일이 알려지는 건 부끄럽긴 하겠지만 어떻게 해명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앨리스에게 알려진다면······.
그 사악한 웃음소리가 내 머리를 장악하는 것 같다.
아마 꼬박 한 달은 시달릴 거다.
이건 누스러스디의 언론인으로서의 양심에 맡길 수밖에 없다.
그렇게 연대본부를 벗어나 기차역 근처의 숙소로 돌아와서 누스러스디가 연진 하사에게 캐낸 것을 정리했다.
“사실 그렇게 중요한 정보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것 같네요. 오메가 씨가 그렇게 애써주셨는데도 불구하고요.”
팔을 들어 올려 보디빌딩 자세를 취하는 누스러스디다.
내가 언제 저랬냐고.
우리 자기라고 내가 놀릴 때 나를 죽일 듯 바라보던 위타천의 기분을 알 것 같다.
위타천 미안해!
“하지만 괜찮은 정보도 있었죠.”
누스러스디가 임시로 그린 이 주변의 지도를 펴서 몇 군데에 체크를 하고 말을 이어나갔다.
“이쪽 부근에 터전이 있는 늑대인간 자유인 부족이 현재 파악되지 않는다고요. 분리독립에 가장 열의를 보이는 이들이기도 하고요.”
“군수품도 추적이나 포획 장비가 들어온 것 같다고 했었죠. 확신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체크한 위치의 중심 부근, 만년설이 있는 높은 바위산이 있다고 했다.
출발 전, 매티슨이 잉그리드의 위치를 확신할 수는 없지만 다이브 기기의 신호가 그 근처에서 잡힌다는 말을 했었다.
“며칠 후부터 선봉연대가 움직일 것 같다니까, 그 전에 돌아봅시다. 먼저 여기부터.”
내 손끝은 당연히 바위산을 가리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