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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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데르노를 죽이고 내 머리칼을 앗아간 <융화 갑옷>이 아주 가볍고 내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느낌이었다면 이 외골격은 그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아주 깊은 잠을 개운하게 자고 딱 눈을 떴을 때 온몸에 힘이 넘치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살짝만 움직여도 팍팍 치고 나가는 것이 아주 기가 막혔다.
밖에는 살을 에는 찬 바람이 씽씽 불고 있지만, 내부에 탑승한 내 가슴이 뜨거워질 정도라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다시 한번 뛰었다.
약 3m 정도는 될 것 같은 거대한 외골격이 체공하는 동안, 아래쪽에서 겁에 질린 얼굴로 블래스터를 연신 발사하는 놈들을 향해 외쳤다.
“하하하! 그걸로 되겠냐!”
깍지 낀 손을 머리 높이로 들어 올리자 블래스터를 쏘아대던 놈들이 타고 있던 스노모빌의 방향을 급히 틀었지만, 이미 늦었다.
콰아아앙-
스노모빌을 타고 있던 놈들이 허겁지겁 뛰어내려 눈밭을 구르는 동안 깍지 낀 손을 아래로 휘두르며 착지했고, 스노모빌은 단숨에 뭉개져 작은 폭발을 일으켰다.
외골격이 착지한 주변의 나무들이 충격에 떨며 가지마다 쌓여있던 눈을 털어냈다.
힘을 너무 준 모양인지 내 주변에서 눈이 쏟아져 내렸다.
작은 규모의 눈사태였다.
외골격이 자체적으로 균형을 맞추면서 액정 위에 몇 가지 선택지를 보여줬다.
“이걸로.”
고개를 뒤로 돌리자 외골격의 렌즈가 어느새 제법 멀리 떨어진 기차의 윤곽을 잡아냈다.
그리고 외골격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후크 로프 사출-
외골격 어디에 그렇게 많은 장비가 숨겨져 있었는지 빙벽등반에나 쓸 것 같은 날카로운 갈고리가 끝에 달린 로프들이 전면부를 향해 수십 가닥이나 발사되어 순식간에 팽팽해졌다.
대부분은 열차의 화물칸이나 선로 지지대에 감겨 있었다.
“피해! 눈사태에 휘말리면 그대로 압사다!”
누군가의 외침에 스노모빌이 속력을 올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쿠르릉거리는 소리와 함께 눈이 밀려오고 있었다.
액정에 붉은 글씨로 경고가 떴다.
-충격에 주의하십시오-
-윈치 가동-
-최대 토크-
무언가가 급격히 돌아가는 키리릭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외골격이 로프가 고정된 쪽으로 빨려가듯 앞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눈사태의 범위를 벗어나 선로의 지지대에 외골격을 고정하고 뒤를 돌아보니 그 많던 스노모빌이 단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도망가거나 다 쓸려갔나 보네.”
위로 올라가니 누스러스디가 춥지도 않은지 외투도 제대로 입지 않고 나와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작은 드론 몇 대가 돌고 있었다.
“다 찍어놨습니다! 대박입니다! 이건 대박이라고요! 구조용 외골격을 이렇게 잘 다루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그것도 이런 환경에서!”
그냥 두 발로 선 바이크라고 생각하고 움직이니까 딱히 어려울 건 없었다.
오히려 놀란 건 퓨전 코프의 기술력이다.
이수련이 로봇들을 조종할 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직접 타서 움직여보니 섬세함과 강력함이라는, 어우러지기 힘든 것들의 합의점을 잘 찾아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외골격의 해치를 열고 누스러스디에게 말했다.
“일단 이걸로 기차 앞에 눈 좀 치우고 올게요.”
탑재된 모드 중 한 손은 제빙, 다른 손은 제설을 적용하자 외골격이 변형됐다.
제빙은 날카로운 드라이버가 앞뒤로 왕복하는 형태였고 제설은 커다란 관이 눈을 빨아들여 옆으로 내보내는 형태였다.
진동과 소음이 어마어마해서 [진동 감쇄]와 [소음 제거], [청력 보호]를 사용해야 했다.
가끔씩은 해치를 열고 나가 화염계 마법까지 사용하면서 눈을 녹여냈지만 녹은 눈이 순식간에 다시 얼어버리는 걸 보고 그만뒀다.
‘악마의 비듬이라더니 틀린 말 아니었네.’
그렇게 외골격의 힘을 빌려 선로를 덮고 있는 눈을 치운 지 20분쯤 되었을까 앞에 있던 눈에 구멍이 뚫렸다.
강한 빛이 밀려들었다.
스킬을 모두 해제했다.
“뚫렸습니다!”
“나와! 제설 열차가 남은 눈 치울 거야!”
반대편에서 제설 작업을 하던 인원들이었다.
그들의 복식을 보던 나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군인?’
흰 설상위장복 위에 얼룩덜룩한 무늬는 군인들에게나 볼 수 있는 옷이 틀림없었다.
‘여기도 제설은 군인이 하는구만.’
일단 내가 할 일은 끝난 것 같아서 외골격을 원래 있던 화물칸에 집어넣으려는데 군인들이 기겁하고 막았다.
하사 계급장을 단 군인 하나가 외골격 옆으로 다가와 목소리를 높였다.
“그거 그대로 올리면 열차 퍼집니다! 따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바로 해치를 열고 여기서 어떻게 따로 가냐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따지는 사이 계급이 조금 높아 보이는 군인들이 화물칸으로 급히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외골격에서 뛰어내려 그중 하나를 잡았다.
신경질적으로 생긴 도마뱀 수인이었는데, 쉿쉿거리며 입을 열 때마다 작은 불길이 피어오르는 것으로 보아 살라맨더 같았다.
놀랍게도 대한민국 육군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계급장을 흘끗 살폈다.
“대령 아저씨. 저 기차 손님인데 이거 좀 탔다고 따로 오라고 하거든요? 어떻게 좀 해줘요.”
“누가 그럽니까?”
“여기 이 아저씨가요.”
하사가 사색이 되어 경례를 올려붙였다.
“추, 충성!”
살라맨더가 경례를 받아주고는 불길을 내뿜으며 병사를 갈궜다.
“여기 이분이 하신 말씀이 맞나?”
“그, 그렇습니다. 연대장님!”
“이분이 외골격 조종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할 일이 더 늘었을 건데 감사하다고는 못할망정 그렇게 무책임한 발언을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나?”
“아닙니다! 죄송함다!”
연대장이 내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전입한 지 얼마 안 된 하사라 조금 실수한 모양입니다. 다만 지금 당장은 외골격에 경량화 마법을 걸 마법사가 없습니다. 경량화 마법이 걸리지 않은 외골격을 열차에 실을 수도 없고요.”
“그럼 이대로 끌고 가라고요?”
“약 1.5km 떨어진 곳까지 이동하시면 저희 부대가 이용하는 전술도로가 있으니 거기에 외골격을 놓아두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외골격도 부대에서 발주한 것 같으니 확인 절차를 거치고 저희가 수거해가겠습니다.”
이것마저 거절하면 정말로 계속 이걸 타고 선로를 따라가야 할 것 같았다.
가다가 배터리라도 나가면 그대로 생존 영화 한 편 찍는 거다.
“그렇게 하죠.”
살라맨더가 고개를 끄덕이고 여전히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는 하사에게 명령했다.
“전술도로 초입까지 안내해드려.”
“넵!”
다시 외골격을 작동시키기 전, 괜히 미안해져 하사에게 사과를 건넸다.
“아까는 미안했습니다. 저만 고생하는 거 아닌데 밖에 오래 있었더니 순간 욱했네요.”
“아님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아까 저분은 누구죠? 급해서 아무나 붙잡았는데.”
“스펜서 대령님 말씀이십니까? 저희 연대장님이십니다. 참군인이시죠.”
그에 대해 더 자세한 내용은 정해진 위치에 외골격을 놓고 열차로 돌아온 이후에 누스러스디에게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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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도착한 제설 열차의 뒤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는 열차 안, 나와 누스러스디는 원래 타고 있던 칸이 아니라 그나마 습격의 흔적이 적은 다른 칸으로 옮겨타 있었다.
데이터를 전송하는 듯 안테나를 주렁주렁 단 드론 플랫폼을 만지는 누스러스디가 입을 열었다.
“스펜서 대령. 태백 권역 산악군단 선봉연대 연대장이죠. 타고난 군인이라는 평이 주를 이루는데 과거 이력이 재밌어요. 네오-서울 수도방위사령부에서 대위까지 마치고 인력 교류를 위한 파견 근무 때문에 태백 권역에 왔다가 소속을 아예 이쪽으로 옮긴 걸로 알려져 있어요.”
“그게 가능합니까?”
“본인의 의지, 상부의 허가. 이 둘만 있으면 안 될 건 없죠. 대부분은 의지가 없어서 시도조차 하지 않지만요.”
누스러스디가 킥킥거리면서 검지를 들어 빙빙 돌렸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죠. 태백 권역에서 네오-서울 소속이 되고자 하는 군인들. 의지는 충만하지만, 허가가 절대 안 나서 문제지만요.”
“누스러스디 씨는 여기 출신이라고 하셨죠?”
“네. 이렇게 뒷번호 도시는 아니지만요.”
“원래 제설 작전에 연대장이 참모들까지 다 끌고 나옵니까?”
“저도 그게 궁금하단 말이죠. 해결사 오메가 씨.”
움찔했지만 누스러스디는 그런 내가 재미있다는 듯이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었다.
“오해 마세요. 뒷조사 아닙니다. 외골격 조종 실력이 보통이 아닌 것 같아서 혹시나 해서 찔러봤죠. 포커페이스는 더 연습해야겠어요?”
기자라더니 촉이 보통 아니다.
이 정도면 발뺌도 의미 없다고 생각됐다.
“맞습니다. 일부러 숨겼는데 일이 이렇게 됐군요.”
“걱정하지 마세요. 휴가 중에 만났으니 본사에 알리지는 않겠습니다. 대신―.”
손을 들어 입을 가리고 은근한 미소를 짓는 누스러스디.
“좋은 소스 있으면 툭 던져주셔도 좋습니다.”
말이나 행동이 밉지는 않다.
누스러스디가 드론 플랫폼을 만지작거리자 작은 화면이 생기고 그곳에 드론이 찍은 사진과 영상이 차례로 떠올랐다.
그걸 넘기며 들으라는 듯 누스러스디가 중얼거렸다.
“그냥 말만 해서는 의미가 없으니 서로 협력을 위해 재밌는 걸 좀 보여드리죠. 아까 오메가 씨가 밖에 계실 때 몰래 찍은 겁니다.”
어두컴컴한 화물칸 내부, 태백 권역 산악군단 마크가 찍힌 박스가 한가득이었다.
“군수품?”
“맞습니다. 경량화 마법까지 걸고 운임 비싼 자기부상열차로 운송시킬 정도라면 식량은 아니겠죠.”
“그럼······.”
“우리, 너무 섣부른 추측은 자제하죠. 정말로 이런 물자들이 필요한 걸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일반 화물로 위장하긴 했지만요. 심지어 경계 인원도 안 붙여서요.”
누스러스디의 입에서 말이 줄줄 나왔다.
“설상 구조용 외골격도 그래요. 퓨전 코프꺼죠? 요새 퓨전 코프의 구조용, 산업용 로봇이나 외골격을 구매해서 개조한 다음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것 때문에 퓨전 코프 지사들이 골머리를 앓는다고도 하고요.”
하긴, 직접 타보니 말이 설상 구조용이지 무기 몇 개 달려 있으면 훌륭한 전쟁 병기다.
게다가 저런 이유라면 이수련이 여기까지 따라와서 일 보러 간다고 칼같이 내린 것도 말이 된다.
이수련 성격에 자기가 내놓은 걸 허가도 받지 않고 개조하는 걸 그냥 놔둘 리가 없으니까.
기차를 습격한 강도들, 자유인들과 도시인들 간의 대립, 대량의 군수물자.
뭔가 벌어지고 있다.
누스러스디가 신나서 떠들었다.
“무엇보다 스펜서 대령. 자유인들에게 부정적인 태도를 가진 걸로······아니, 뭐 하는 겁니까! 데이터 전송 중입니다!”
다급하게 화물칸 안쪽의 영상이 재생되고 있는 드론 플랫폼을 마구 만졌다.
버럭 화내는 누스러스디의 옆구리를 세게 찌르고 문 쪽을 가리켰다.
짜증 가득한 눈으로 내가 가리킨 곳을 본 누스러스디가 허겁지겁 플랫폼을 조작했다.
절도 있는 전투화 발소리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다가온 이의 몸에 붙어 있던 눈이 녹아 생긴 물이 기차 복도에 진한 얼룩을 만들어 냈다.
불꽃을 내뿜으며 그가 말했다.
“산악군단 선봉연대장, 스펜서입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열차가 도착할 동안 사정 청취를 요청할까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그의 날카로운 눈이 드론 플랫폼에 닿았다.
“촬영하신 것도 있으신 것 같은데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화면이 바뀌며 사진 하나가 떴다.
선로 지지대에 몸을 지탱하고 있는 외골격을 근접해서 찍은 사진이었다.
적당히 날아간 배경과 포커스에 잡힌 외골격 내부의 내 표정, 곳곳에서 윈치가 돌출된 외골격의 역동적인 포즈까지 마치 화보의 일부 같았다.
누스러스디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하. 퓨전 코프 홍보 모델 하셔도 되겠군요.”
그건 이수련한테 매주 권유받는 중이다.
고문으로 개발에 참여하고 있는 예공방과의 도의를 생각해 거절 중이지만.
그러는 사이 스펜서가 자연스레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의 눈빛이 매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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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의 불빛이 천천히 멀어졌다.
웨리바흐가 이를 갈며 멀리서나마 열차의 꽁무니를 바라봤다.
“정보가 샌 건가? 이런 적이 없었는데.”
산악군단에 있으면서 자유인들에게 협력하는 인원들이 있었다.
그들의 정보에 따르면 이번 군수품은 일반 화물로 위장해서 운반하기 때문에 호송 인력이 없을 거라고 했었다.
그렇기에 검을 휘두르는 걸로 모자라 외골격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인간의 존재는 계산 외였다.
다른 이가 답했다.
“그쪽에서는 그럴 리가 없다고 하는 중이야. 아까 그 인간이 누구인지도 파악이 안 되고.”
“내부에 있는 건 확인했어? 군수물자, 특히 병기를 옮기는 게 확인되면 우리가 명분을 쥘 수 있어.”
“뚫던 중에 공격받은 거라 내부를 확인한 사람은 없어.”
“없는 말이라도 지어서 흘려야 하나······.”
계속해서 내리는 눈이 마침내 기차의 빛을 모두 덮었다.
묵묵히 바라보던 웨리바흐가 입을 열었다.
“그 인간이 누구인지 파악해. 그리고 선봉연대의 움직임은 하나도 놓치지 마. 스펜서 그놈은 몇 번이고 주의해야 해.”
자유인들이 사는 곳에 툭하면 군사훈련이랍시고 병사와 장비를 몰고 들어오는 스펜서였기에 다들 스펜서의 이름만 나와도 으르렁댔다.
무력 충돌을 하게 된다면 스펜서만은 어떻게든 죽이리라 다짐하는 웨리바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