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잡캐여도 너보단 강함-163화 (164/258)

163.

163.

오메가가 탄 태백 권역 종단 열차가 눈사태로 멈춰서기 몇 시간 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폭설을 뚫고 한 늑대인간 무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오래전 선조들로부터 그들에게까지 전승되어 내려온 생존의 방식과 최첨단 현대 기술의 조화 덕에 당장이라도 동사하거나 죽을 지경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자연 앞에 그들은 작은 존재였다.

선두에 있는 늑대인간이 바닥에 몸을 바짝 붙이고 엎드렸다.

그리고 눈을 한 움큼 집어 입에 넣더니 으적거리며 씹었다.

그의 옷 곳곳에 달린 발열 장치 덕에 그가 엎드린 주변의 눈이 조금 녹나 싶더니 추위 때문에 다시 얼어붙었다.

다시 일어서서 몸에 붙은 얼음을 털어낸 늑대인간이 무리에게 말했다.

“조금만 더 가면 할머니가 계신 곳이다.”

뒤쪽에서 눈사람인지 늑대인간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눈에 파묻힌 일행이 불만 섞인 목소리를 냈다.

“확실한 거야? 잉그리드 님이 마음만 먹으면 세상 그 누구도 찾을 수가 없다던데. 그래서 이번에 모습까지 드러내셔서 인터뷰한 게 이례적이라고 떠들어대잖아.”

“예전에는 그랬겠지. 지금은 아니야. 할머니도 늙으셨어.”

잉그리드는 초월적인 감각과 끝을 모르는 체력으로 태백 권역의 눈 덮인 산을 제집 안방처럼 거닐던 전설적인 사냥꾼이다.

야생과 원시의 땅을 지배하며 문명의 진출을 막아 세우던 수많은 괴수가 그녀의 화살 앞에 명을 달리했다.

새하얀 털을 지닌 그녀가 거침없이 설산을 오르는 모습은 다른 늑대인간마저 경외심을 느낄 정도였으며 태백 권역의 요청을 받아 종단 열차 계획에 참여해 자기 가족을 이끌고 선로가 놓일 산길을 1,000km 이상 직접 답사한 일은 이미 태백 권역에서는 신화의 영역이었다.

태백 권역의 자유인이라면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잉그리드의 이야기를 듣고 자랐으며 몇몇 자유인 부족에서는 그녀를 산신으로 섬기기도 했다.

그렇게 태백 권역의 숙원사업이었던 종단 열차가 완공된 후, 잉그리드는 자신이 할 일은 다 한 것 같다며 다시 산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가족들 역시 좋은 대우를 약속하는 태백 권역 곳곳의 도시를 뒤로하고 자유인이 되어 산을 벗 삼아 살았다.

가끔 태백 권역의 아래쪽 도시에서 그녀를 본 것 같다는 목격담이 들리긴 했지만, 대부분은 개소리로 취급했다.

하지만 일행의 선두이자 잉그리드의 손자인 웨리바흐는 알고 있었다.

할머니가 딥스페이스를 이용한 지 좀 됐고, 심지어 샌디 비치 사에서 특별한 대우를 해주고 있다는 걸.

워낙 추운 곳에서 이용하기 때문에 다이브 기기가 고장 나는 일이 많았고, 그때마다 샌디 비치의 직원들이 와서 교환해주거나 수리를 하기 위해 태백 권역으로 찾아오고 잉그리드도 그에 맞춰 도시로 가는 것이었다.

간단한 부품은 웨리바흐가 조달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 웨리바흐가 할머니를 찾아가는 목적은 그게 아니었다.

계속해서 눈을 뚫고 걸어가는데 앞쪽에서 가느다란 온기가 느껴졌다.

세심히 보지 않고서는 잘 보이지도 않을 것 같은 바위틈에서 온기와 함께 작은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뒤쪽의 다른 일행들은 드디어 도착했다며 기뻐했지만, 웨리바흐는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그의 입가가 굳었다.

추위 때문은 아니었다.

긴장이었다.

철이 든 이후 웨리바흐는 자기 할머니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 줄 알게 되었다.

태백 권역의 땅 중 그녀의 발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은거에 가까운 삶을 보내는 지금에도 자유인들의 정신적 지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잉그리드다.

하지만 이번 네오-서울과 태백 권역 사이의 거래로 웨리바흐는 알았다.

‘이대로는 당하기만 할 뿐이다.’

도시인들은 계속해서 자유인들의 땅을 야금야금 침범해올 것이다.

처음엔 땅이겠지만 머지않아 침범당하는 것은 삶이 될 것이고 다시 얼마 후에는 정신마저 도시인들처럼 나약하게 변하리라.

발전과 진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웨리바흐의 몸만 해도 추위를 이기는 장치들이 붙어 있고 신체를 강하게 만드는 시술을 몇 번이나 거쳤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자유인이라는 삶의 방식을 영위하는 방법이었을 뿐이다.

그 삶이 외력에 의해 흔들리고 있다.

이번 네오-서울의 쓰레기를 들여오기로 하면서 태백 권역의 어떤 도시에서도 자유인들의 의사를 물어오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각자의 자취를 남기며 살아가는 공간이건만 도시인들에게 그곳은 그저 쓰레기를 버려도 괜찮은 자투리 땅일 뿐이다.

돈을 지불했다는 이유로 뻔뻔한 얼굴과 고압적인 태도를 견지한 채 식생과 자원을 캐가도 괜찮은 땅일 뿐이다.

웨리바흐는 고개를 들었다.

어찌 이 험한 곳까지 왔냐며 자기 친구들을 반기는 잉그리드의 모습이 보였다.

날 때부터 그랬다는, 잉그리드의 뿌연 동공이 정확히 손주의 친구 얼굴들을 하나하나 바라보고 있었다.

웨리바흐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할머니는 너무 무르다.’

종단 열차 완공 이후, 도시인과 자유인들 간의 갈등은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 모두에서 심화되었다.

그럴 때마다 잉그리드가 나와서 화합이니 노력이니 하는 말을 흘려주면 갈등은 사그라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까지는 도시에도 잉그리드를 존중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태백 권역을 개척하고 선로를 놓던 세대는 이제 대부분 죽거나 은퇴했다.

도시인들은 이제 잉그리드를 잊어가고 있었다.

잊혀져 가는 전설은 가슴을 울릴 수는 있어도 현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잉그리드가 이례적으로 희생이라는 강한 단어까지 꺼냈음에도 권역 내의 도시들은 이렇다 할 반응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제 신경도 안 쓰겠다는 건가.’

잉그리드를 가까이서 본 웨리바흐는 자신의 할머니가 정말로 산신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 있었다.

그건 아마 웨리바흐가 평생 노력해도 닿기 힘들 경지일 것이다.

하지만 산신이라고 산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아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신이 아닌 이들이 해야 하는 일이 있는 것이다.

웨리바흐는 그렇게 믿었다.

제법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도 좁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바위틈, 웨리바흐가 잉그리드에게 물었다.

“할머니, 이번에도 말씀만 하시고 넘어가실 거죠? 이제 그런 걸로는 안 돼요. 도시인들은 이제 우리를 산짐승보다 못하게 본다고요.”

“말 험하게 하지 말아라, 웨리바흐. 저들도 시간이 필요할 거다. 생각할 시간, 이야기를 나눌 시간, 이야기에서 나온 의견들을 조정할 시간이. 도시에 사는 이들은 우리처럼 명료하고 빠르지 않은 대신 신중하고 조심스러우니 말이다.”

“분리독립은 그저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허상이군요.”

온화하던 잉그리드의 눈가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애초에 분리독립에 손을 든 적 없다. 우리가 없으면 태백 권역이 어찌 이 험한 자연환경을 개척하고 나아갈 수 있으며, 그들이 없다면 어찌 우리가 작게나마 문명의 이기를 누릴 수 있단 말이냐. 분리독립은 관념으로만 존재해야 한다. 도시인들이 우리의 목소리를 듣게 하는 수단으로 말이다.”

잉그리드는 태백 권역 자유민 분리독립 운동의 지도자라 알려졌지만, 그것은 주위의 간곡한 부탁 끝에 억지로 쓴 감투일 뿐, 그녀가 직접적으로 분리독립에 대한 목소리를 내는 일은 거의 처음이었다.

인터뷰에서도 자유인들 내부에 그런 목소리가 있다고만 언급했을 뿐이었다.

애초에 종단 열차 공사에 적극적인 도움을 준 잉그리드가 분리독립을 주장한다는 것이 모순이었지만 자유인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와 더불어 그녀 하면 연상되는 이미지가 태백 권역의 자유인을 수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의문을 제기하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잉그리드의 원론적 발언에 웨리바흐가 툴툴거렸다.

“목소리를 듣기는커녕 대놓고 무시하고 있어요. 우리 땅에 쓰레기를 들이붓잖아요.”

“‘우리’ 땅이 아니다 웨리바흐. 우리의 땅은 없어. 그저 대자연으로부터 빌려 왔을 뿐이야.”

“그럼 저들의 땅도 아닌데 왜 마구잡이로 사용하는 건데요. 심지어 타 권역의 쓰레기를 묻는 용도로!”

“웨리바흐······.”

감정이 격해진 웨리바흐의 말이 터져 나왔다.

“관념으로만 존재해서는 안 돼요. 이제는 행동해야 할 때입니다.”

“그게 테러 단체인 리벨리온과 다를 게 무엇이냐.”

“그들은 생존이 위협받지는 않았죠. 하지만 우리는 생존이 위협받아요.”

“그럴 리가. 우리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쓰레기를 버린 것은 분명 도시인들의 잘못이다. 하지만 정녕 쓰레기를 버린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고 해서 생존이 위협받느냐?”

웨리바흐가 입술을 달싹여 길쭉한 송곳니를 드러냈지만, 딱히 반박하기 어려웠다.

그 사이 손자를 향한 할머니의 매서운 질책이 이어졌다.

“그 땅이 ‘우리 것’, 나아가 ‘네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분노하는 것이 아니냐.”

틈새로 들어오는 찬바람이 매서웠다.

“그들이 잘못한 것을 모른다면 알게 해주면 된다. 부끄러움을 모르거든, 존중을 모르거든 잊지 않고 있는 우리가 다시 알려주면 된다. 그게 관용이고 호연지기다. 대자연의 품속에 살아가는 우리가 지녀야 할 마음이란 말이다. 하지만 지금 웨리바흐 너는 네가 그리 미워하는 도시 사람들과 다를 게 없구나.”

뼛속 골수에까지 미치는 날카로운 바람에도 웨리바흐는 할머니를 향해 눈을 똑바로 떴다.

“할머니는 이렇게 산에서 사시면서 잘 내려오지도 않으시니까 그렇게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실 수 있는 겁니다. 세상은 변했습니다. 부끄러움과 존중을 모르면 알려주면 된다고 하셨죠? 알려줘도 우리를 거지 보듯 하는 도시인들이 넘쳐 납니다. 할머니가 한나절씩 걸어야 넘던 설산을 기차가 몇 분 만에 지나갑니다. 그 안에 탄 놈들이 할머니의 노고와 대단함을 알 것 같습니까? 전혀요. 그런 걸 되뇔 시간에 어떻게 하면 이 혹한의 땅에서 캐내 가져갈 것이 없나 고민하는 놈들밖에 없습니다. 쓸모없는 건 버릴 생각이나 하면서요.”

“말조심하거라, 웨리바흐!”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면 우리는 사라질 겁니다. 저는 그걸 그냥 보고 있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할머니께서는 악역이 되실 마음이 없는 것 같으니―.”

웨리바흐가 품에서 작은 드론을 꺼내 잉그리드를 향해 던졌다.

“뭐해!”

그의 질책에 머뭇거리던 일행들도 똑같이 생긴 장치를 꺼내 던졌다.

잉그리드는 재빠른 움직임으로 몇 개는 쳐내는 데 성공했으나 서로 링크한 드론들이 잉그리드를 둘러싸고 몇 겹이나 되는 반투명한 벽을 만들었다.

감옥에 갇힌 모양새가 된 잉그리드에게 다가간 웨리바흐가 말했다.

“이 손자가 나쁜 놈이 되겠습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웨리바흐!”

반투명한 벽 너머로 보이는 잉그리드의 뿌연 동공에 노여움이 가득했다.

그녀가 손을 뻗자 안쪽의 벽 몇 개가 콰드득소리를 내며 우그러졌다.

그러나 한창때의 그녀였다면 모를까 노쇠한 그녀의 힘은 거기까지였다.

잉그리드를 설득하는 것에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 웨리바흐가 준비한 것은 구속 공간 생성 드론이었다.

그것도 육체 강화 약물 중독자를 제압할 때 쓰는 특수용도 드론에 출력 강화를 위한 불법 개조를 몇 번이나 거친 물건이기도 했다.

재빨리 원상복구 되는 반투명 벽을 보며 웨리바흐는 자신의 할머니가 얼마나 괴물인지 새삼 다시 깨달았다.

하지만 주사위는 던져졌다.

“기다려야 한다고 하셨죠? 도시인들이 열차에 전투용 스노모빌을 비롯한 설상장비를 실어 나르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어요. 놈들도 우리를 제압할 생각인 겁니다. 지금이야말로 분리독립의 적기죠.”

계속해서 드론에 전원을 공급하라는 명령과 함께 웨리바흐는 다음 작전을 지시했다.

눈사태를 일으켜 선로를 막은 뒤 기차가 멈춰 서면 급습해서 화물을 터는 작전이었다.

몇 시간 뒤, 전해진 내용을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웨리바흐가 읊었다.

“열차에서 튀어나온 인간 하나가 검을 들고 설쳐대는 바람에 화물칸에 접근을 못 해? 거기 있는 놈이 서른 명은 될 건데 인간 하나를 처리 못 하는 게 말이 되냐고!”

-계속 잉그리드 님을 찾습니다. 초대받고 온 손님이라는데요.

“······거짓말이다. 할머니는 일이 있으면 직접 내려가셨으면 내려가셨지, 누군가를 초대한 적이 한 번도 없었어. 할머니 이름을 팔아먹다니, 갈 데까지 간 놈인 것 같으니 사정 봐줄 것 없이 죽여.”

다시 몇 분 뒤, 화물칸에 다가가려다가 부상자가 속출한다는 소식에 웨리바흐는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가지.”

#

같은 시각, 원래는 강도들을 족치려고 튀어 나간 오메가는 얼떨결에 화물칸을 방어하고 있었다.

그러다 구멍 뚫린 화물칸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어두컴컴한 안쪽에서 결속된 무언가를 보게 되었다.

<설상 구조용 외골격>이라 적힌 화물에 퓨전 코프의 마크가 찍혀있었다.

“이거면 저놈들 다 쫓아내고 앞에 쌓인 눈 치우기도 좋겠네.”

검을 가져다 대자 화물에 걸려 있던 보안 관련, 경량화 관련 마법이 우수수 깨져나갔다.

결속된 케이블도 잘라낸 오메가가 검을 역전개 하고 허리춤에 단단히 꽂고는 위장용 데이터 명함을 만들어 외골격의 액정에 가져다 댔다.

유령 사원이긴 하지만 정말로 오메가가 퓨전 코프의 영업사원으로 등록이 되어 있기에 외골격에 시동이 걸렸다.

액정에서 빛이 뿜어져 오메가의 몸을 스캔했다.

그리고는 오메가의 몸에 맞게 변형을 시작했다.

혹여나 머리에 쓰고 있는 비니가 벗겨지지 않게 조심히 탑승을 완료한 오메가가 중얼거렸다.

“이수련 씨는 매번 이런 기분이구나.”

수많은 정보가 액정에 떠올랐다.

“모르겠고, 일단 여길 나가자고.”

아주 살짝 힘을 주어 뛰었을 뿐인데.

우직-

오메가, 정확히 하면 외골격을 장착한 오메가가 화물칸 지붕을 뚫고 위로 떠올랐다.

예상치 못하게 강한 출력이었다.

잠깐 당황했던 오메가였지만 히어로 랜딩으로 착지할 때쯤에는 입에 사악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힘세고 좋은 아침, 아니 저녁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