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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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 권역 종단 열차를 이용하시는 승객 여러분께 안내 말씀드립니다. 저희 열차는 태백 제1 도시를 출발, 동쪽으로 향한 뒤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향하는 열차입니다. 목적지인 태백 권역 최북단, 제23 도시까지는 약 10시간이 소요될 예정이며 예기치 못한 기상 상황에 따라 운행 일정이 변경될 수 있다는 걸 고지 드립니다.
기차가 출발하기 전, 감정 없는 서비스직 말투로 읽는 안내가 울려 퍼졌다.
내가 있는 곳은 태백 권역 제1 도시의 센트럴 기차역.
태백 권역의 도시들에게는 고유 명칭 대신 숫자가 붙어 있는데 아무리 읊어봐도 입에 달라붙지 않는다.
앨리스가 챙겨준 한반도 지도를 보고 있으니 기억이 가물가물 떠오른다.
‘지금 여기가 원주쯤 되는 건가?’
휴전선이 없는 세계이기 때문에 강원도가 갈라지지 않았고 태백 권역은 그 강원도 곳곳에 퍼져 있는 도시들의 연합체다.
그나마 위로 올라갈수록 기온이 떨어지고 예측 불가의 눈폭풍이 거세져서 도시의 규모나 인프라 수준이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에 최북단인 제23 도시는 최북단이라는 상징성만 있을 뿐 기차역 말고는 별다른 것이 없다고도 들었다.
소수의 관광객과 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작은 가게나 좀 있는 곳이라고.
그렇기에 네오-서울의 쓰레기를 버리는 곳으로 낙점한 것인데 하필이면 그곳이 탈모 치료 연고의 원료가 되는 이끼가 나는 곳이고 자유인들의 터전일 줄이야.
“나비 효과도 이런 나비 효과가 없네.”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서는 폭풍을 부른다는 말이지. 본좌도 좋아하는 말이니라. 다만 혼돈 이론보다 나비 효과가 더 널리 알려진 게 조금 아쉽긴 하다만.”
이 추운 곳까지 따라온 이수련이 내 옆자리에서 말했다.
어찌나 꽁꽁 싸맸는지 이수련은 에스키모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기차가 출발하기도 전인데 어디서 샀는지 김이 펄펄 나는 호빵을 한 입 베어 문 이수련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래! 이 맛이다! 똑같은 호빵인데 추워야 더 맛있는 것은 정말 기묘하구나.”
“그런 거 안 먹고 로봇 안에 들어가 있거나 법술로 몸을 데울 수 있지 않아요?”
“낭군은 로망이 없구나! 제철 음식이 있는 것처럼 더울 때 먹는 찬 음식과 찰 때 먹는 더운 음식의 풍미가 있는 법이니라.”
호빵을 호호 불어먹는 이수련을 보고 생각했다.
‘말하는 거 보면 노인이라니까. 그것도 여간 아닌―.’
이수련의 두꺼운 모자 위에 불쑥 나온, 귀를 넣게 만들어진 부분이 바짝 섰다.
그리고 이수련이 나를 향해 말했다.
“지금 본좌를 늙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겠지?”
깜짝 놀랐지만 평온한 얼굴로 반박했다.
“그럴 리가요.”
‘여우 아니랄까 봐.’라고 생각하고 있자니 이수련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구미호 앞에서 거짓을 말하거든 간을 빼 먹힐 것이니 조심하거라.”
괜히 찔려서 간이 있음 직한 곳을 쓰다듬었다.
호빵을 한 입 더 넘긴 이수련이 그런 나를 흘끔 보고는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낭군이 짚은 곳에서 3cm 정도 위로 올라가야 간이 있느니라.”
야스민 저택에 있던 마도공학 유물 중 강풍으로 인한 추위에 저항하게 해주는 <깔깔이>를 티셔츠와 후드 사이에 입고 온 터라 그리 춥지는 않았지만, 왠지 등골이, 아니 간이 서늘해서 새로 장만해 입고 온 외투를 여몄다.
열차가 부드럽게 떠올라 서서히 움직였다.
눈 폭풍에도 견딜 수 있게 만들어진 자기부상열차라고 했다.
하나도 궁금하지 않던, 20년이 넘는 공사 기간을 거쳐 완성된 이 자기부상열차 선로 도입이 태백 권역의 숙원사업이었다는 사실도 앨리스의 주입식 교육 덕에 알게 됐다.
“산간에 이걸 용케도 깔았네요. 근데 자기부상열차면 막 시속 500km, 600km 이렇게 되는 거 아닌가요? 왜 10시간이나 걸리지?”
“이론상으로는 그렇겠지만 권역 내의 도시들이 자기네 도시에는 열차가 안 선다고 난리 난리를 피운 탓에 설치를 하고도 여러 번 수정을 거쳤다고 들었느니라. 그 결과 자기부상열차지만 제 속도를 낼 수 없게 된 것이지. 말이 해안을 따라가는 것이지, 내륙으로도 계속해서 들어오고 도시인뿐만 아니라 자유인들을 위한 간이역도 곳곳에 있다고 하더구나.”
“이럴 거면 바이크로 가는 게 나을 뻔했네요. 기차 잡아줘서 아무 생각 없이 기차 탄 건데.”
“바이크를 방한용으로 개조하는 데만 몇 개월은 걸리지 않았겠느냐? 태백 권역의 추위는 알아주니 말이다. 앨리스도 같이 오면 좋겠다 싶어서 방한 파츠를 구해다 주려는데 사무용 안드로이드가 쓸만한 파츠는 거의 없더구나. 있어도 대부분 산업용이거나 그마저 보증도 안 되는 조잡한 것이고 말이다.”
“그 정도라고요? 여기는 그냥저냥 바람 좀 부는 정도인데?”
“올라갈수록 급격히 추워진다고 하더구나.”
“그렇게 추운데 뭐하러 따라오셨대요. 저야 급박한 볼 일이 있어서 가는 거지만.”
“낭군과 단둘이 설경 데이트를 할 기회를 놓칠 것 같으냐!”
황당함에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이수련이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꼭······그런 것만은 아니고······태백 권역 곳곳에 있는 로봇들에 대한 현지 데이터 수집 및 임직원 격려 겸사겸사······해서 온 것이니라.”
“그거 맞아요? 신시아가 못 온다고 하니까 너무 티 나게 좋아하던데.”
신시아는 현재 서해에서 벌어지고 있는 브리가드 기함 인양작업의 책임자로 나가 있다.
야스민 공이 직접 갈지 말지 한참이나 고민했다는데 결국 신시아가 맡기로 얘기가 된 모양이었다.
“앨리스도 없고 신시아도 없으니 본좌가 낭군을 독점할 기회 아니더냐! 놓칠 수 없었다.”
“저는 심각하고도 위중한 문제로 여기 왔거든요?”
이수련의 눈길이 내 머리를 단단히 감추고 있는 비니에 닿았다가 내려왔다.
애써 무시하고 말을 이어갔다.
“잉그리드인가 하는 그 늑대인간과 얘기가 잘 돼서 무사히 이끼를 가지고 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분리독립 운동의 지도자라고 하였던가?”
“네. 템페시르나 님 말에 따르면 상당히 온건하고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하니 말은 통하지 않을까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 기차는 도시를 빠져나가 산을 타고 오르고 있었다.
그러다 터널 하나를 통과하자 저 멀리에 보이는 바다와 그 위의 빙하, 가까이에는 눈이 쏟아지는 별천지가 펼쳐졌다.
권역의 짧은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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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정차한 태백 제7 도시.
일단은 해안가를 따라 열차가 움직이고 있지만, 여기가 대한민국 기준 강릉인지 속초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면 설경에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휴전선 너머의 강원도로 진입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리기 위해 짐을 챙기던 이수련이 혼잣말을 했다.
“과거에는 이곳의 지명이 아슬라일 때도 있었는데······.”
강릉의 옛 지명이 아슬라였다는 소리를 어디선가 주워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럼 여긴 강릉이구나.
“본좌는 나중에 합류할 테니 위에서 보자꾸나.”
퓨전 코프 일은 핑계고 종일 내 곁에 있을 것 같다는 예상과는 달리 이수련은 지사 시찰이 예정되어 있다면서 덤덤한 얼굴로 짐을 챙겼다.
역시 기업 총수는 총수다웠다.
그런 이수련에게 말했다.
“따라오지 말고 이쯤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내려올 때 연락할 테니까. 통신 디바이스 로밍은 해뒀죠?”
“여기까지 와서 기다리고 있으란 말이냐.”
“오면서 못 들었어요?”
매티슨은 일등급 좌석을 준비하겠다고 했지만,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가고 싶다고 내가 윽박지른 탓에 우리가 타고 있는 좌석은 비즈니스 정도 되는 좌석이었다.
일반 객실보다는 좌석이 여유롭게 배치되어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대화나 통신 정도는 귀를 좀 기울이면 듣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나와 이수련 사이의 대화는 이수련이 법술로 모두 차단하고 있어서 새어나가지는 않았다.
여튼 그렇게 흘러 들어온 내용 대부분이 자유인들의 분리독립 요구는 늘상 나오는 얘기지만 이번에는 분위기가 조금 다른 것 같다는 말이었다.
당장 확인할 수는 없지만, 열차의 종점에 가까운 제22, 23 도시의 주변에서 전투가 있다는 말도 들렸다.
“괜히 휘말리지 말고 호빵이나 사 먹으면서 기다리고 있어요.”
“호빵은 이미 먹지 않았느냐. 아슬라에 왔으면 김이 뜨끈뜨끈 나는 두부를 먹어줘야 하거늘······.”
“뭐가 됐던지요.”
“기다리다 심심해지면 올라가 볼 터이니 그리 알거라.”
“말은 지지리도 안 들어요.”
킥킥거리며 웃던 이수련이 내게 말했다.
“낭군도 조심하거라. 초대받아 가는 것이긴 하다만 따지고 보면 위험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니 말이다.”
“충고 귀 기울여 듣겠습니다.”
이수련이 떠나고 기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이 더욱더 거세게 내렸다.
바람도 심해져 눈이 기차의 창문에 거의 직각으로 부딪혀온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꾸벅꾸벅 밖을 보다 졸다를 반복하는 사이 기차는 느긋하게 움직였고 객실에 제법 많던 사람들도 이제 몇 명 남지 않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 내게 가까이 앉아 있던 한 명이 무료했던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이것도 인연인데 말동무나 하는 게 어떻습니까. 어차피 도착까지는 1시간 넘게 남았을 건데 말이죠.”
머리 위에 난 뿔과 긴 수염으로 봐서 염소 수인 같지만, 염소 수인들의 특징인 네모난 동공이 아니었다.
인간의 얼굴에 염소의 뿔을 가진 종족인 사티로스다.
개별적 차이는 있겠지만, 종족 자체가 쾌활하고 장난스럽기로 유명했다.
나도 하품만 쩍쩍하며 가고 있던 터라 순순히 그러자고 했다.
기다렸다는 듯 사티로스가 자기 짐을 챙겨 내 반대편 좌석을 돌려 마주 앉았다.
붙임성이 썩 좋은 친구 같았다.
“저는 누스러스디라고 합니다. 친구들은 누스라고 부르죠.”
“오메가입니다.”
“오! 혹시 요새 네오-서울을 떠들썩하게 하는 해결사를 알고 계십니까? 서해에 브리가드의 기함이 침몰한 것도 그 해결사가 얽혀있다던데요. 그분과 이름이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들어는 봤습니다. 저도 네오-서울에서 오는 길이거든요.”
거짓말은 안 했다.
“이런 우연이! 저도 네오-서울에서 오는 길입니다. 가만있자······.”
누스가 손바닥을 비비자 데이터 명함이 만들어졌다.
받아서 귀걸이에 넣으니 명함에 대한 주요 정보가 귓가에서 작게 들렸다.
-누스러스디. 데일리 네오-서울 종군기자.
“종군기자시군요.”
명함을 받았으니 나도 일단 데이터 명함을 만들어서 건네줬다.
사무실 주소와 번호가 적혀 있는 명함이 아니라 대외적으로 필요할 것 같으면 쓰기 위해 만들어둔 위장 명함이었다.
“퓨전 코프에서 영업하시는 분이셨군요.”
이름은 그대로 쓰되 직장은 이수련이 도와줬다.
누스러스디에게 물었다.
“종군기자께서 태백 권역에 오셨다는 말은 아무래도 분리독립 요구가 격화될 거라고 보시는 건가요?”
“허허······가벼운 얘기나 하려고 말을 붙였는데 처음부터 훅 들어오시는군요.”
그렇게 말하는 누스러스디는 내심 말하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잘못 걸렸다는 느낌이 팍 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누스러스디의 태백 권역 자유인 분리독립 요구사史 강의는 거의 30분 넘게 이어졌다.
그쯤 되면 뭐라고 떠드는지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고 이 사티로스를 앨리스랑 붙여놓으면 아주 볼만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전으로 발전할 것 같지는 않지만 근래 한반도 권역 중 평양 권역과 개성 권역 사이를 제외하면 가장 긴장감이 높아지는 곳이니 한 번쯤 미리 봐두는 것도 좋지는 않을까 싶어서 마침 유럽 지사에서 본사 복귀하면서 준 휴가를 이용해서······또 마침 제가 태백 권역 출신이기도······.”
처음 말 걸었을 때 꺼지라고 하지 못한 과거의 내가 가슴 시리도록 미워질 즈음, 열차가 멈췄다.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기상 악화로 인한 작은 눈사태로 선로가 막혀 진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설 열차가 반대편에서 출발했으니 승객 여러분들께서는 동요하지 마시고 추가적인 지시가 있을 때까지 차분히 자리에 앉아 대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감정 없는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누스러스디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서부 영화 보면 꼭 이렇게 열차가 멈춰있을 때 강도들이······.”
“잠깐.”
눈이 쏟아져 한 치 앞도 구분하기 어려운 바깥, 무언가 깜빡거렸다.
‘인공적인 불빛······?’
누스러스디에게 물었다.
“23 도시가 종점이죠?”
“그렇죠.”
“여기서 거기가 보입니까?”
“절대 안 보이죠.”
“그럼 저건 뭡니까?”
창밖을 본 누스러스디도 뭔가가 깜빡인다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심지어 불빛은 천천히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어······이 주변은 아무것도 없는 걸로 아는데요.”
처음에는 별처럼 작았던 불빛이 라이터의 불꽃만큼 커졌을 때, 그것은 한 개가 아니었다.
불꽃 수십 개가 기차를 향해 접근 중이었다.
“헤드라이트! 스노모빌의 헤드라이트가 분명해요! 제설 작업을 위해 왔나 봅니다!”
누스러스디가 했던 말 중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불빛들은 스노모빌의 헤드라이트가 맞았다.
하지만 그들이 들고 있는 것들은 아무리 봐도 제설 장비라고 하기에는 어려워 보였다.
코가 눌릴 정도로 창문에 얼굴을 가까이 붙이고 있던 누스러스디의 머리를 억세게 쥐고 안쪽으로 잡아당겨 눌렀다.
“으악! 뭡니까!”
누스러스디의 비명이 끝나기도 전, 그가 얼굴을 대고 있던 창문이 안쪽을 향해 터졌다.
‘아무리 봐도 들고 있던 게 소형 블래스터 같더라니!’
곧 다른 창문들도 깨져나갔고 안쪽으로 거센 바람과 눈이 들이쳤다.
바닥에 바싹 엎드린 누스러스디가 소리쳤다.
“열차 강도는 황무지에서나 벌어지는 일인 줄 알았는데에!”
열차 안을 휘감는 바람 소리 때문에 나도 악을 썼다.
“내전 없다더니 이 상황은 뭡니까!”
“나도 몰라요오! 나 종군기자야! 죽이지 마! 나 죽이면 전쟁 범죄야!”
상황을 아는 놈과의 대화가 필요한 것 같았다.
그게 가능한 놈들은 아마 밖에서 스노모빌을 타고서 신나게 열차를 공격하는 놈들일 것이다.
너덜거리는 창문을 뜯어버리고 밖으로 나섰다.
뒤쪽의 화물칸에 스노모빌들이 바글바글했다.
허리춤에 꽂혀 있던 칼자루를 빼 들고 완전히 전개했다.
열차의 두터운 창문을 빠져나오자, 파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