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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캐여도 너보단 강함-161화 (162/258)

161.

161.

머리 위에 얹힌 모자를 괜히 만지작거리며 사무실을 빙빙 돌고 있자 못마땅한 눈빛으로 그런 나를 몇 번이나 보던 앨리스가 벌컥 소리 질렀다.

“정신 사나우니까 좀 앉아 있어요! ABT에서 사람 오기로 했다면서요!”

“올 때가 다 됐는데 안 오니까 그렇지!”

“약속 시간 30분이나 남았는데 뭐가 올 때가 다 돼요! 다른 일에는 다 무심하던 사람이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빨빨거리면서 돌아다니니까 저까지 불안하잖아요!”

“똥 마려운 강아지는 똥을 쌀 수라도 있지! 나는 머리가 자랄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기로에 서 있는 중이란 말이야!”

“가발이라도 하나 맞추시던가요. 요새 기술이 얼마나 좋은지 티도 안 난대요.”

“너는 빠질 일 없다고 그렇게 쉽게 얘기하면 안 돼.”

앨리스가 입을 비쭉 내밀고 아주 열받는 표정과 목소리를 지었다.

“느는 빼질 일 읎대고 그르케 쉽께 얘긔흐면 은 돼에~.”

아오, 얄미워.

넓은 아량으로 한 번 참고 차분히 설명했다.

“그리고 내가 얘기했지. 청운 선생님이 내 모근 아직 살아있다고 그랬단 말이야. 기특한 녀석들이 아직 있는데 이식이니 가발이니 하는 건 말도 안 돼. 그런 건 정말 꿈도 희망도 미래도 내일도 없는 대머리들이 최후의 수단으로 눈물을 머금고 손을 뻗는 영역이라고. 내가 발 디딜 일 없는 영역이지.”

“대머리가 다 대머리지 그 와중에 급 나누고 있네······.”

“다 들리거든!”

“들으라고 했거든요!”

그러다 앨리스가 뭔가 생각난 듯 내게 말했다.

“마도공학 유물로 어떻게 안 돼요? 아니면 야스민 공께 부탁드리면 뭔가 방도가 있지 않을까요?”

“신시아가 나보다 먼저 물어봤다는데 야스민 가문은 대대로 탈모가 없어서 신경 써본 적 없대.”

“하긴, 신시아 언니 머리만 봐도 엄청 풍성하죠.”

“유물은 야스민 저택 창고에 임시로 사용할만한 게 있긴 하던데······.”

“대머리가 신경 쓰이면 그거라도 빌려달라고 해요. 사장님이 달라고 하면 야스민 공이 안 내주실 분도 아니고.”

과거, 며칠에 걸쳐 야스민 공이 수집한 마도공학 유물 전수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중에 분명 지금 상황에 ‘쓸 수는 있는 게’ 있었다.

헤어스타일 룩템이었다.

비슷한 종류의 아이템을 착용했을 때의 경험으로는 이질감 같은 건 하나도 없고, 심지어 자는 시간에는 벗어둔다고 생각한다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기에 지속시간도 무리가 없었다.

다만 문제가 되는 점은······.

“머리 가운데 20cm 높이의 무지개색 모히칸 스타일. 모히칸 왼쪽 바짝 민 부분에는 스크래치로 LOVE, 오른쪽에는 PEACE라고 적혀 있―.”

앨리스가 더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단칼에 잘라냈다.

“그냥 한동안 모자 쓰고 다녀요.”

“그래. 나는 자연스러운 내 머리로 다니고 싶어.”

저런 머리를 하고 바이크를 타면 그거야말로 사이버펑크겠지만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

어떻게 남아도 저런 것만 남아있는지 용할 지경이다.

결국 계속해서 사무실을 빙빙 돌던 나는 앨리스의 강권에 못 이겨 소파에 앉긴 했으나 불안감에 다리 한쪽이 발발 떨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포기한 건지 패드를 들여다보던 앨리스가 내게 말했다.

“샌디 비치에서 메일 왔네요.”

“오랑우탄? 뭐래? 딥스페이스 계정 복구해주겠대?”

“음······. 제 계정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데 사장님 계정은 복구가 어려울 것 같대요.”

“왜!”

딥스페이스를 우습게 봤었는데, 한 번 경험해보고 이후에 딥스페이스에서 자유자재로 사용했던 스킬들의 열화판을 현실에서 어설프게나마 재현하고 있으니 부재가 매우 아쉽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최고, 최상의 수련장이었던 것.

“사장님 계정 데이터가 호테키 데이터랑 섞여버려서 한쪽만 완전 분리는 힘들고 전체 폐기해야 할 것 같다고 하네요.”

“그럼 내 계정을 다시 만들―.”

“다시 만들려고도 시도해봤는데 딥스페이스 러닝 머신이 자체적으로 퓨어인 사장님 데이터를 심각한 위협으로 분류했대요. 딥스페이스 유저 중 거의 유일한 표본이 혼자 그렇게 난리를 쳐댔으니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네요. 그래서 아마 사장님은 딥스페이스 접속이 앞으로도 불가능······할 것 같다고 하네요.”

“오랑우탄 새끼! 걱정하지 말라고 입 털더니! 처먹던 감자칩 다 부숴서 키보드 안쪽에 박아 놓을까 보다!”

내가 걸쭉하게 욕설을 뱉자 앨리스가 정리했다.

“그 의뢰 보상이······딥스페이스 마스터 계정이랑 딥스페이스를 수련장으로 이용하는 은거 기인들과의 만남 주선? 제가 의식 불명이었을 땐데 알차게도 챙기셨네요.”

“순서가 그게 아닐걸? 매티슨이 조건을 그렇게 걸었는데 네가 갑자기 의식 불명이 된 거 아니었나? 그리고 알차게 챙기긴 뭘 챙겨 리턴이 하나도 없는데.”

사실 그때 익히거나 실마리를 잡아 온 스킬들 쏠쏠하게 이용하는 중이지만 그건 내가 잘나서 얻은 추가 이득이다.

메인 퀘스트 중에 우연히 얻어걸린 서브 퀘스트 보상이 아주 좋은 그런 거라고.

그런데 서브 퀘스트 보상이 좋다고 메인 퀘스트 보상을 안 받을 수는 없지.

“그게 내용 전부야?”

“그랬으면 제가 반송시켰죠. 사장님 성질을 아는데. 그 은거기인이란 분들 중에 사장님을 직접 만나고 싶다고 하시는 분들이 계신가 봐요. 아마 템페시르나 님이 말씀을 잘해주신 것도 있겠죠? 최대한 사장님 일정에 맞춰서 만남 주선하고 기타 경비는 모조리 샌디 비치 쪽에서 지원하겠대요. 그리고 이건 추가적인 부분이고 기존의 보상을 대체할만한 방안을 마련 중이니 부디 노여워하지 마시라고까지 굳이 붙여놨네요. 뭐죠? 사장님한테 벌벌 기는데요?”

매티슨한테는 있는 대로 성질을 부려댔던 기억이 난다.

그건 내 문제가 아니라 그 오랑우탄 사회성이 너무 낮은 탓이다.

“그 사람들도 다 늙어가지고 기력이 예전 같지 않아서 딥스페이스에서 모이는 거 아니냐고······현실에서 봐서 뭐 해. 그리고 가상공간에서는 그냥 눈 마주치면 바로 주먹부터 꽂지만, 현실에서는 어색어색하게 인사하고 서로 눈치 보고······완전 별론데.”

“가상공간도 인사하고 눈치 봐요. 우린 그걸 예절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눈 마주치면 주먹부터 꽂는다는 건 처음 들어요. 그런 걸 원하면 나가서 아무 뒷골목이나 들어가면 되는 거 아니에요? 대림 에어리어만큼 상호 무력 교환이 자유로운 동네가 없을 건데.”

“네가 눈치를 본다고? 뻑하면 커뮤니티에 다중계정으로 여론 선동하는 네가?”

“뻑은 무슨! 딱 한 번 했어요. 한 번. 오일 샌드 만드는 회사가 가격은 올리고 내용물은 줄인대서 이건 좀 아닌 것 같다고.”

“그건······그럴 만하네.”

가격을 올릴 거면 가격만 올리고 내용물을 줄일 거면 내용물만 줄여야지, 두 개를 한 번에 하는 건 선 넘긴 했지.

갑자기 열이 오른 앨리스가 오일 샌드의 가격 정책에 불만을 쏟아내고 있을 무렵, 예약 손님이 사무실에 찾아왔다는 알림이 패드에 떴다.

내가 더 먼저 반응했다.

“왔다!”

이제 맨살에 모자가 닿는 기묘한 감촉을 더 느낄 일은 안녕이다.

그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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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필에 관해 문의해주셨는데, 저희도 굉장히 당황스럽습니다. 현재 약의 원료가 전혀 수입되지 않는 상황이고 비축분도 90% 이상 소모된 상태라 시장에서는 정가의 몇십 배나 되는 가격으로 유통되고 있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래도 없어서 못 구한다는군요. 혹시나 해서 말씀 드리는데, 제 머리도 다 리필 덕입니다.”

자신을 모나쉬라고 소개한 이 대머리수리 수인은 ABT 탈모사업부 유통팀장이었다.

한 가지 약만으로 사업부를 꾸리는 게 가능한가 싶기도 한데 탈모 치료제인 리필은 모근만 살아있다면 대머리가 풍성해지는 것이 가능해지는 기적의 약이어서 매출이 상당하다고 한다.

내 앞에 앉아 있는 모나쉬가 대머리수리 수인인데도 불구하고 머리를 치렁치렁 길러 뒤로 묶기까지 한 걸 보니 신뢰감이 미친 듯이 생겼다.

모나쉬가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작은 샘플 병이었다.

“리필 샘플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 있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신 에이들리 님께서 특별히 부탁하셔서 어렵게 구했습니다.”

혹여나 부서질까 샘플 병을 소중히 들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다만 샘플로는 효과를 크게 보시기 어려울 겁니다. 고객님처럼······.”

모나쉬가 말을 어렵게 고르는 것이 눈에 보였다.

“많이 진행된 분들께는 더더욱요.”

갑자기 개빡치네.

나는 말입니다.

진행되지 않았어요.

그런 적 없단 말입니다.

불의의 사고였을 뿐이에요.

“리필은 매일, 최소 3개월 이상 권장량을 두피에 도포하는 방식입니다. 그 후에는 머리카락의 자생력이 길러진 상태라 양을 점점 줄이면 됩니다만, 이 정도 양은 일주일도 가기 어렵죠.”

“그럼 일주일 후에는······.”

“조금 자라나던 새싹들이 우수수 빠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숨이 턱 막혔다.

간신히 숨이 트이자 간절하게 물었다.

“언제 정상화되나요.”

“알 수 없습니다. 주원료 원산지의 상황이 매우 불안정해서 유통라인 자체가 끊어졌습니다.”

“아이고······내 머리 다 죽는다 이놈들아······.”

내가 우는 소리를 내고 있을 때, 앨리스가 모나쉬에게 다가와 물었다.

“혹시 원료랑 원산지를 물어봐도 될까요?”

“아주 추운 지방에서 나오는 이끼를 사용합니다. 탈모이신 분들은 열이 머리에 오래 머무는데, 그걸 가라앉히는 역할을 하죠. 세계 여러 곳에서 그런 이끼가 자생하는데, 탈모에 효과가 있고 약으로 쓰이는 것은 태백 권역의 것이 유일합니다.”

“그렇게 다 말씀해주셔도 돼요?”

“그걸 연고로 만드는 기술력은 저희 ABT밖에 없으니 괜찮습니다.”

거기까지 듣던 나도 물었다.

“태백 권역이면 멀지도 않은데 왜 못 들여오는 겁니까?”

“얼마 전부터 한반도 중부 발사대가 가동되지 않는 건 알고 계시죠?”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와.

“알고는 있습니다만······.”

“거기서 처리하던 쓰레기를 기간 한정으로 태백 권역의 영구동토층에 묻기로 결정됐잖습니까. 그걸로 끝난 줄 알았는데, 해당 영구동토층 근처에 사는 늑대인간 자유인 부족이 권역 결정에 반기를 든 모양입니다. 도시인만 권역 사람이냐는 거죠.”

다른 권역들이 정말로 초거대 도시 하나만 있는 반면, 태백 권역은 대부분이 영구동토층과 눈폭풍이 치는 땅이긴 하지만 도시 하나로 커버할 수 없는 제법 넓은 땅이었다.

그래서 네오-서울의 한 개 에어리어 정도도 안 되는 크기긴 하지만 일단은 도시라 불리는 소규모 터전 수십 개가 권역 여기저기에 퍼져 있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도시인, 그렇지 않고 유목과 수렵 생활을 하는 이들을 자유인이라 불렀다.

그렇다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자유롭지 않냐는 의문이 들긴 하는데 자기네들 호칭이 그렇다는데 어쩌겠는가.

여튼 이 도시인과 자유인 모두를 통틀어 권역 사람, 혹은 권역 시민으로 부른다는데 이번에 충돌이 생긴 모양.

모나쉬의 말이 이어졌다.

“일이 커져서 이럴 거면 자유인들끼리 모여 분리 독립하자는 말도 나오나 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영구동토층이 이끼 생산지에 근접한 곳이라 접근조차 쉽지 않다고 합니다. 이전부터 삶의 터전을 위협받는다는 이유로 자유인들이 이끼 산지를 봉쇄해 리필 생산량이 줄던 차에 쓰레기가 불을 붙인 거죠.”

근심 섞인 표정으로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모나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섰다.

상황이 나아지면 바로 알려주겠다는 말과 함께였다.

그가 나간 뒤로 사무실 문이 닫히고, 앨리스가 한마디 했다.

“결국은 사장님 자업자득이네요. 발사대가 그 꼴 난 거, 사장님 작품이잖아요.”

“조용히 해. 머리에서 열 나려고 하니까.”

“덮고 있는 거 없어서 열 식히기는 좋겠네요.”

대꾸할 기운도 없어서 소파에 대충 구겨져 널브러져 있었다.

모나쉬가 얘기한 내용을 찾아보는지 앨리스가 ‘진짜네.’, ‘분리독립이 되려나? 쉽지 않을 것 같은데.’ 하고 혼잣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다 앨리스가 다가와 내게 뭔가를 내밀었다.

“이것 좀 보세요.”

매티슨이 보낸,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은거기인들의 리스트였다.

대충 훑어보고 옆으로 치우고 팔을 위로 올려 눈을 덮었다.

“이런 거 봐서 뭐 해. 이 사람들 5,000명을 데려와 봐라. 내 머리가 자라나.”

앨리스가 내 팔을 치우고 다시 패드를 들이밀었다.

“이것도요.”

인터뷰 기사가 있었다.

<태백 권역 자유인 분리독립 운동의 지도자, 잉그리드와의 단독 인터뷰 - 왜 우리만 희생되어야 하느냐>

“이 늑대인간이 뭐 어쨌다고오.”

“똑바로 앉아서 봐봐요. 사장님 만나고 싶다는 리스트에 이 잉그리드라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

벌떡 일어나서 리스트와 기사를 확인하고 말했다.

“오랑우탄 연락해서 이 늑대인간이랑 만남 주선하라고 해. 무조건 내가 가는 방향으로. 일단 거기까지 갈 수만 있으면 주머니에라도 이끼 가져올 수 있겠지. 못한다, 어렵다 소리 하면 입천장 다 까져서 피 질질 날 때까지 감자칩만 먹일 거라는 말도 전해주고.”

“뒷부분 강조해서 전달할게요.”

“굿.”

앨리스가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는 듯 싱글벙글 웃으며 매티슨에게 통신을 연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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