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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렇게 브리가드를 끝내버렸군. 전 세계에 있는 유물 탐사단들이 좋아하겠어.”
“당장 제일 신난 사람은 탐사단들이 아니라 야스민 공 아닐까요? 서해를 전세 내다시피 하고 인양 작업 중이잖아요.”
“그 정도 되는 인물이 나서줘서 오히려 혼란이 덜 한 걸세. 어중이떠중이들이 나섰으면 리벨리온이 서해를 장악하고 해적질을 하던 때보다 더 심한 혼란이 벌어졌지 않겠나?”
“대단하긴 하죠. 서해 권역에서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했다는데 다 씹고 인양선부터 보냈다고 하니까요. 상해 권역 함대가 접근하려고 하니까 크루즈 미사일 갈겼다는 루머도 있던데 신시아한테 물어봐도 제대로 답을 안 해주는 걸 보면 아마도 맞다는 뜻이겠죠.”
내 말을 들은 헤지르 대주교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한 가지에 미쳐 있는 사람은 그렇게나 무서운 법이지.”
나, 앨리스, 신시아, 이수련은 지금 기계 교단 대림 교구에 있는 성당에 와 있었다.
상당히 넓은 성당 부지 중에서도 한강이 한눈에 보이는 이곳은 네오-서울에서 기계 교단과 헤지르 대주교의 입지를 생각해 특별히 내어준 곳으로 일종의 외교 공관公館이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원래라면 헤지르 대주교는 자신에게 주어진 조그만 방을 쓰기 때문에 이 공관은 비어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성당 지하에 감금되었던 동안 자신으로 위장한 스펙터가 그 방을 사용했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대주교는 성당 내부의 다른 방을 사용했고, 무엇보다 벡을 맡게 되면서 외부의 시선과 차단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강해져 공관으로의 이주를 결정했다고 한다.
발코니에 앉아 밖을 보니 앨리스, 신시아, 이수련이 마당에서 벡과 놀아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네오-서울의 땅값을 생각하면 도심 한복판에 마당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긴 했다.
벡을 구해낸 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지 않은데 벡은 벌써 어설프게 뛰다 걷기를 하고 있었다.
“애들은 눈만 돌렸다가 다시 보면 쑥쑥 커져 있다고 하던데 그 말이 정말인 것 같네요.”
대주교가 재미있다는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
“벡은 실제로 빨리 자라니까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걸세.”
“그렇겠죠?”
“너무 빨리 자란다고 염려할 필요는 없네. 교단 내부 최고의 의료진들이 세심하게 관리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내가 사진을 열심히 찍어두고 있기도 하네.”
헤지르 대주교의 묵주에서 투사되는 영상과 사진은 대부분 벡이 톱니 맞추기 놀이를 하거나, 자동차를 보고 꺄악거리며 좋아하거나, 정교하게 움직이는 기계 장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대주교가 유독 빠르게 넘긴 사진 중에 벡이 작은 모형 톱을 들고 있는 걸 본 것 같은데, 잘못 본 거겠지?
영 아리까리해서 다시 한번 보자고 말하려는데 묵주를 챙긴 헤지르 대주교가 엄격 근엄 진지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그건 그렇고, 자네가 정치에 관심 있는 줄은 몰랐는데.”
“관심은 무슨 관심입니까. 저야말로 영감님이 그렇게나 세속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 줄 처음 알았습니다. 공돌이인 줄 알았는데 말이죠.”
“다들 공돌이니, 나라도 정신 차려서 최소한의 권익은 지켜야지.”
“종교인의 입에서 나올 말 같지는 않은데요.”
“우리는 기계 장치의 신의 말씀을 더 많은 이에게 전파할 의무가 있다네. 정치는 그 수단 중 하나일 뿐이야. 물론 적정선은 지키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네.”
헤지르 대주교가 나를 향해 다시 웃었다.
벡을 볼 때 내비치는 밝은 웃음이 아니라 어딘가 흑막이 지을 법한 미소였다.
“정치란 결국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다른 이를 이용하는 것이라네. 타인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명분이 중요하지. 브리가드를 처리하기 위해 에어리어 의원 선거를 이용한 자네가 한 게 정치가 아니면 뭔가. 그리고 상대 후보 이름이 뭐랬지?”
“러쉰요.”
“그래, 그 작자는 행방도 묘연하다며. 자네는 걱정거리 하나를 말끔하게 떨쳐냈고 자네가 지원한 후보는 선거를 거저먹게 생겼으니 서로가 윈윈이지 않나. 이게 훌륭한 정치의 표본 아니겠나?”
러쉰이 네오-서울에 데려온 게 브리가드라는 게 밝혀진 이후 여론은 연신 포화를 쏟아냈다.
특히나 에이들리는 자기 정책이나 비전을 설명하는 대신 러쉰 깎아내리기에 온 힘을 다했다.
결국 러쉰은 사라져버렸고 며칠 뒤에 치러질 의원 선거는 무난하게 에이들리의 손에 들어올 것 같았다.
그런데 헤지르 대주교가 에이들리의 당선을 덤덤히 말하는 것이 조금 이상해서 물었다.
“에이들리는 친 생명공학 쪽 인사입니다. 대주교님이 내년에 은퇴하면 차기 행정관 선거에 나설 거라는 얘기도 당연시되고 있고요. 대주교님은 에이들리의 낙선을 바랄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아니지. 그럼 안돼. 에이들리는 계속 존재감을 유지해야 한다네. 행정관 선거에도 계속 도전해야지. 물론 당선되지는 못하겠지만 말이야.”
“어째서요?”
“그가 계속해서 우리에게 반기를 들어줘야 대림 에어리어 내에 있는 신자들의 결집이 쉬워지니까. 게다가 대림 에어리어의 정치 지형이 편향되어 있지 않다는 증거로 이용할 수도 있지. 실제로 우리 측과 에이들리 측의 표 차는 내내 3~4% 안팎이었다네. 박빙이라고 하기에는 힘들지만, 압도적이라고 하기도 힘들지 않나? 그러니까 저쪽도 포기를 못 하고 악착같이 달려들 수 있는 거지”
정치공학 대주교라고 했던가.
누가 붙인 별명인지는 몰라도 기가 막히게 잘 지었다고 생각했다.
사령술 재능이 천재급이라 다른 방면의 재능이 묻혀서 그렇지, 사령술에 재능이 더럽게 없어서 다른 길을 찾아 나섰으면 대주교가 아니라 어디 선전부나 정당 사무처에서 휘어잡고 있을 것 같았다.
“듣고 있자니 머리 아프군요. 그런 것까지 어떻게 다 신경을 쓰고 사십니까. 저는 할 일 다 했으니 빠지렵니다.”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 걸세.”
“예?”
“러쉰과 브리가드의 뒤를 캐는 중에 루트와 야스민 가문이 그들을 감시 중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네. 루트와 야스민 가문의 교차점을 찾는 이들 중에는 자네를 찾아낼 사람들도 있겠지. 나도 함구 중이지만 자네에 대해 관심 가지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어. 게다가 퓨전 코프의 수송기가 긴급 출항해 브리가드의 기함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는 것도 밝혀졌고. 지금까지는 자네는 아는 이들만 아는 이름이었지만 이제부터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야.”
잠깐 생각하다 답했다.
결국 간단한 얘기였다.
“처신 잘하라는 얘기군요.”
“그렇게 줄이면 길게 말한 내가 민망해진다는 생각은 안 하나?”
“간단한 걸 둘러둘러 설명하니까 영감님 같은 공돌이들이 융통성 없다, 센스 없다는 오해와 오명을 부르는 겁니다.”
대주교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내가 잘못 생각했네. 내게 아무렇지도 않게 영감이니 공돌이니 하는 자네한테 처신을 기대한 것 자체가 무리지.”
내가 그런 호칭을 쓰는 이유는 어차피 은퇴할 대주교 자리, 미리 내려놓게 도움 드리는 거라고 밀어붙이고 있는 사이, 벡을 품에 안은 신시아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신시아의 곁에서 앨리스와 이수련이 벡의 간택을 받아보고자 온갖 재롱을 떨고 있었지만 벡은 신시아에게만 꼭 달라붙어 있었다.
그걸 본 대주교가 한마디 했다.
“아이들도 미인을 좋아한다는 거 아나? 오히려 순수하고 솔직해서 더 무섭지.”
“앨리스랑 이수련 씨가 들으면 좋아하지는 않을 발언인 것 같습니다만······.”
“오해 말게. 셋 사이의 우열을 가리려고 한 말이 아니니. 각자 미인이라네. 재밌는 건,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아들의 미적 관점은 대개 아버지와 비슷한······.”
그때, 재롱에 지친 이수련이 벌컥 화를 냈다.
“왜 본좌에게는 오지 않는 것이냐! 신시아가 무언가를 한 것이 분명하다!”
“무슨 말 하는 거야. 내가 뭘 했다고. 벡이 안 가는 걸 어떻게 해.”
그러자 신시아에게 안겨있던 벡이 이수련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수련이 반색하고 양손을 뻗었지만 이제 말문이 트이기 시작한 벡은 이수련의 의도와는 다르게 행동했다.
“멍멍이! 멍멍이!”
벡의 손이 이수련의 머리 위에 있는 삼각귀 주위를 쓰다듬고 있었다.
“본좌는 개과······지만 멍멍이가 아니다! 여우란 말이다! 긍지 있는 구미호 일족이다!”
“멍멍이! 멍멍이!”
대주교가 상황 해설을 했다.
“정서 교육 때문에 여러 동물이나 교단의 사제 중 수인들과 접촉 중이라 저러나 보이.”
분통을 터트리는 이수련을 뒤에 남기고 내게 온 신시아가 벡을 넘겨줬다.
“아빠한테 가자~.”
“아빠! 아빠!”
벡을 받아 들었다.
아부가 아니라 아빠라니.
많이 크긴 했다.
그래도 그 호칭은 아직 미묘하구나, 아가.
처음에는 어떻게 대해야 하나 고민이 많이 됐는데, 이제 어느 정도 정리가 됐다.
호칭은 아빠로 하되, 내가 벡을 대하는 자세는 아들이 아니라 조카를 대하는 자세다.
이 녀석이 나의 쾌락 없는 책임이라면, 이후는 책임 없는 쾌락이다.
귀여운 모습만 잔뜩 보고, 힘들고 고된 육아는 헤지르 대주교 몫으로 하는 것.
조카를 돌본다고 생각하니 어색한 마음도 많이 가신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헤지르 대주교도 말년에 손주가 생긴 것 같아 좋다고 하니 모두가 윈윈이지 않나.
“본좌에게도 엄마라고 하면 된다!”
“멍멍이! 멍멍이!”
모두라는 말은 취소다.
이수련은 아기한테도 지고 있는 것 같으니.
“아빠!”
내 품 안에서 움직이던 벡의 손에 닿은 것은 절대 만져서는 안 될 물건이었다.
“으아! 안돼! 그건 봐줘!”
성장이 빠르다더니 힘도 좋은지 벡은 손에 단단히 쥔 내 모자를 벗겨냈다.
한 줄기 바람이 맨머리에 닿았다.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엄숙함을 넘어 무거워졌다.
눈을 어디에 둘지 어려워하는 대주교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얘기는 들었네만······문제는 없다고 하던가?”
내 이마와 머리를 찰싹찰싹 치는 벡에게서 조심히 모자를 뺏어서 다시 쓰고 답했다.
“저주나 흑마술 계통은 아니란 걸 확인받았습니다.”
“그건 다행일세. 내 아는 사람이 부두교 샤먼과 시비가 붙어 모발이 다 빠지는 저주에 걸려 한참을 고생했다네.”
앨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럼 그분은 다시 머리 났어요?”
“아니. 모근이 다 죽어서 카본 파이버 머리카락을 이식해야 했단다.”
모두의 눈이 나, 아니 내 머리를 향해 있었다.
계속해서 모자를 벗기려는 벡의 손을 잡아서 못하게 막았다.
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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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근은 살아있습니다.”
서대문 에어리어의 종합 병원, 내 머리를 살핀 청운 선생님의 선고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양손을 하늘로 뻗고 만세라고 외치고 말았다.
“으아아아! 만세! 그럴 줄 알았어! 장하다 내 모근! 믿고 있었다고!”
조금 진정될 무렵, 이제부터 화타의 재림이자 히포크라테스 그 자체라고 믿기로 한 청운 의학 박사님께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모근이 살아있으면 머리가 조금씩 자라야 하는 거 아닙니까? 너무 매끈합니다.”
실제로 민머리가 된 지 사흘 정도 지났는데 머리는 여전히 매끈했다.
“예전 같으면 모근에서 머리카락을 틔우는 기치료를 해드렸겠지만 이게 허위, 과장 논란이 있어서 현재는 못 하게 되었습니다. 대신 비슷한 증상을 치료하는 약 처방을······.”
패드를 두드리던 트루 닥터, 의술의 신, 신농의 후예, 청운 선생님의 눈썹이 좁혀졌다.
“이 약이 왜 안 나오지?”
“뭔데요!”
“리필Refill이라고 모근만 살아 있다면 머리카락을 다시 나게 하는 연고입니다. 재생 효과도 좋아서 탈모인들의 희망이라고 불렸던 연고인데 몇 달째 재고가 들어오지 않고 있군요.”
“왜요!”
“그거야 저도 알 수가 없죠. 현재 네오-서울에서 탈모 치료로 임상 통과하고 시장에 출시된 약품은 이거 하나가 전부입니다. ABT가 전 세계의 의약 기업 중 시가총액이 가장 높아지게 해준 약이기도 한데······.”
“어디요?”
“네오-서울에서······”
“아뇨. ABT?”
“네. ABT. 초거대 생명공학 기업이죠.”
생명공학 기업들은 카르텔로 인해 초월적인 과징금을 두들겨 맞긴 했지만 그건 표면적인 일이고,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중화권 자금을 받아먹었거나 허용 범위 이상으로 비윤리적인 연구를 자행하던 기업들은 야스민 공이 직접 칼춤을 춰 도산시키거나 해체해버렸다.
다행히 ABT는 막대한 과징금을 냈지만, 후자의 칼춤에는 걸리지 않았다.
적어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 기업이라는 뜻 아닐까.
병원을 나서며 급히 어딘가로 통신을 쳤다.
신호가 두 번도 가기 전, 누군가 빠릿하게 받았다.
-네. 피츠입니다.
“에이들리 그 사람 ABT에서 오래 근무했다고 했죠?”
-예. 영업직으로 입사하셔서 10년 만에 임원 되신 건 샐러리맨의 전설······.
“그런 약력은 필요 없고, 그럼 나 ABT에서 탈모 관련된 부서랑 연결 좀 해줘요. 그걸로 서로 도움 주고받았다고 마무리합시다. 의원 되신 거 미리 축하한다고 말 좀 전해주시고.”
-그런 걸로 정말 괜찮으실지요?
“이 사람아! 그런 거 정도가 아니야! 나한테는 목숨 이상의 무언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