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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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우주선 내부를 찍은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몸을 띄운 우주비행사가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공중제비를 돌던 것이 굉장히 신기했다.
물이 담긴 팩을 공중에 짜내자 물이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 마치 슬라임처럼 뭉글뭉글한 형체를 유지하는 건 또 어찌나 신기하던지.
그런데 앞으로 그런 걸 보고 신기해할 일은 없을 예정이다.
내 주변, 아니 고래의 내부 전체에서 우주선 내부 영상과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름대로 분류를 거친 듯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던 마도공학 유물들이 제멋대로 떠다녔다.
재질을 알기 힘든 박스에 담긴 것들도 있었는데 그런 것들은 안쪽에서 떠다니는지 연신 쿵쿵거리는 소리를 내거나 아니면 아예 박스 채로 들어 올려지는 것도 있었다.
나 역시 이런 상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나마 바닥에 고정된 구조물을 붙잡고 밖으로 나와보니 아수라장 그 이상의 무언가가 펼쳐지고 있었다.
비행을 할 수 있는 놈들은 그나마 상태가 양호했지만, 수로에 흐르던 바닷물과 함께 공중에서 허우적대는 이들의 공포에 질린 비명소리가 고래 내부를 가득 채웠다.
“개발자 놈들, 적당히를 몰라. 적당히를.”
물론 이런 아수라장 속에서도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이들이 있었다.
나를 향해 덤벼드는 놈들이 있었다는 소리다.
허우적대며 나를 향해 접근하는 놈들과 그런 놈들을 피하고 베고 마법을 먹이기 위해 허우적대는 나.
아마 이걸 보는 사람들은 싸구려 무협 영화도 이따위로는 안 찍는다고 생각할 수 있는 광경이겠지만, 누구 하나 진지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행동거지는 비디오로나 유통될 것 같은 싸구려 영화지만 손에 들린 무기와 온몸으로 뿜어내는 기술은 영화와 다르게 서로의 목숨을 취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니까.
나를 향해 블래스터나 바주카를 발사한 놈들이 무기의 반동을 이기지 못해 공간 여기저기를 가로질렀다.
“나만 적용되었어야 의미가 있는 건데······.”
조금만 힘을 주어도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아버리는 몸의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며 일단 공간의 가장 위쪽으로 향했다.
고래의 살점과 핏줄, 힘줄이 질긴 건 이미 체감했지만, 혈계조검술을 사용해 광자 검날 위에 덮어씌운 피로 잘려 나간다는 것 역시 확인했다.
무식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계속해서 위로 향할 생각이었다.
숨이 통하는 통로를 찾는다면 숨구멍으로 나올 것이고, 일이 잘 안 풀린다면 등 쪽 어딘가로 나오지 않겠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뒤로 나가는 것보다는 그쪽이 아무래도 좋을 것 같았다.
<부력 생성기>를 이용해 나만 혼자 높이 떠서 재빨리 일을 처리할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지금 벌어진 상황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렇게 위로 향하던 중, 기계음이 공간 전체에 퍼져나갔다.
-정상 범위 이상의 빅웨일 체내 수분 손실
-항상성 유지 난조
-통제 시스템 이상
-의도되지 않은 돌발적 충격에 대비 요망
부워어어어어-
뱃고동처럼 온몸을 휘어감는 낮은 소리가 공간의 앞쪽에서부터 밀려들었다.
고래가 내는 소리였다.
고통이 잔뜩 묻은 그 소리와 함께 대량의 공기가 안쪽으로 유입되었다.
둥둥 떠다니던 놈들은 한정된 공간에서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바람에 저항할 수 없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그나마 고래의 살점을 향해 튕긴 놈은 목숨이라도 건졌지만, 공간 곳곳에 불규칙적으로 솟아있는 구조물에 감속도 하지 못하고 충돌한 놈들은 몸이 구겨지거나 철퍼덕하는 소리와 함께 피떡이 되어 버렸다.
경고음이 발생하기 직전 공간 가장 위쪽에 도달해 검을 박아넣은 덕에 그런 끔찍한 꼴은 면할 수 있었음에 안도했다.
벽면을 타고 내게 접근하는 놈들은 아직 있었지만 계속해서 고래가 만들어 내는 소리와 그에 따른 엄청난 양의 공기 유입이 내게 시간을 벌어주고 있었다.
‘멀쩡하던 고래가 왜 갑자기 발작하는 거야.’
검을 움직여 고래의 살점을 파내는 동안 다시 들려온 경고음이 내 의문을 해소해주었다.
-소화기관으로 대량의 공기 유입
-해수 유입 중단
고래의 몸 안쪽으로 해수가 들어오지 않고, 공기를 먹고 있다는 건가?
고래가 다시 엄청난 소리를 뿜어내는 것과 공간 전체가 출렁였다.
몸을 뒤틀고 있기라도 한 걸까.
‘설마 내부 공간만 이렇게 된 게 아니라 고래 자체를 띄운 거야? 물 밖으로 나온 고래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거고?’
고래의 생태는 잘 모른다.
하지만 평생 바다 안에 살던 엄청난 크기의 생물이 물 밖으로 들어 올려지는 것이 당사자, 아니 당사경鯨에게는 상당히 불쾌한 경험일 것 같았다.
어쩐지 선홍빛을 띠고 있던 주위의 살점들의 색이 조금씩 변하는 것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고래는 부위마다 색이 다른 생물이구나 하고 넘겼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
계속해서 고래가 질러대는 소리와 그와 비슷한 타이밍에 몸을 뒤트는 강도와 주기가 계속해서 짧아졌다.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부력 생성기가 아직 작동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아직 작동 중이었다.
만약 고래가 수면 밖으로 나와 있는 거라면, 상당히 높은 위치까지 올라가 있는 거라면 이 아이템의 지속시간이 끝나는 순간 고래는 그대로 수면에 떨어질 거다.
‘그렇게 되면 고래의 내부 외부 할 것 없이 박살이 나는 건가?’
높은 위치에서 물을 향해 사람이 떨어졌을 때, 배부터 떨어지게 되면 보기엔 멀쩡해도 내부 장기가 다 터져나간다는 걸 어디선가 주워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검을 쥔 손과 팔에 힘이 들어갔다.
여기서 탈출해야 했다.
검으로 할 수 있는 스킬들을 가리지 않고 사용해 고래의 위쪽으로 향했다.
조금 많이 절실했다.
[만사재시 매사필종]
[연하일휘]
[취중실천지]
.
.
.
[발골]
[정형]
[토막 썰기]
[먹음직스럽게 회 뜨기]
마지막 건 아니니까 시전 취소.
그러다 어떤 생각이 들었다.
‘고래가 지르는 비명에 내 지분도 좀 있는 건가?’
그에 호응하듯 다시 한번 주위의 고래 살점이 피를 뿜으며 푸들푸들 떨어댔지만 내 손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주머니라는 주머니에 한가득 챙겨나온 마도공학 유물들이 묵직했다.
‘맨날 훔치는 놈들한테서 훔쳤으니까 정당방위다. 나는 정의로운 도둑이다.’
마음이 평정을 되찾으니 칼질도 더욱 정교해지고 속도가 붙었다.
역시 육체를 지배하는 건 정신이다.
#
“어떻게 할까요?”
수송기 조종사가 이수련을 향해 묻는 목소리가 떨렸다.
수송기도 빅웨일의 탐색을 위해 평소의 이동을 위한 높은 고도가 아니라 바다 위 낮은 고도에 있긴 했지만, 그래도 비슷한 높이에서 두둥실 떠오른 채 온몸에 물을 뚝뚝 흘리는 고래를 마주하는 것은 하기 쉬운 경험이 아니었다.
그것뿐이면 좋으련만 몸 바깥에도 여러 구조물을 달고 있는 빅웨일이 거대한 눈을 꿈뻑거리며 몸을 뒤틀 때마다 조종사는 기겁해서 수송기의 고도를 높여야 했다.
탐색 중이던 원격 조종 로봇들을 불러 모은 이수련이 지시하려던 찰나, 아직 레이더를 끄지 않은 일부 로봇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
이수련의 확인 결과, 수중에서 빠르게 접근하는 미상 물체가 있었다.
레이더로 확인되는 것만 셋.
위장 체계나 은닉 체계를 발동해서 물고기 떼처럼 위장하거나 레이더에 잠깐 잡혔다가 사라지는 것이 최소 다섯이었다.
이수련이 조종사에게 지시했다.
“수송기 고도를 높이거라. 이대로면 위험할 것이다.”
그리고 로봇들과 함께 낙하를 시작한 이수련이 중얼거렸다.
“중화권 권역들의 진입을 막은 후에 서해 바다 어족 자원이 풍요로워졌다는 말은 익히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구나.”
법술의 힘으로 안력을 높인 그녀의 시야에는 수면 아래의 광경이 똑똑히 보였다.
“잠수함마저 이렇게 많이 보인다니 말이다.”
잔뜩 퍼지는 물보라는 수연에게 협력하는 톈진 권역의 잠수함들이 쏘아 올린 잠대공미사일들이 수면 아래에서 바닷물을 밀어내며 생기는 부산물이었다.
잠대공미사일들의 목적지는 퓨전 코프의 원격 조종 로봇들과 수송기.
협력 중인 브리가드의 기함을 목격한 자들을 살인멸구 하겠다는 것이 수연의 의도였다.
“가소롭도다.”
수면 위에 선 이수련이 꼬리를 모두 꺼냈다.
그녀의 몸을 덮고 있던 로봇 외장이 꼬리까지 모두 덮자 꼬리 하나하나가 주변에 떠 있는 원격 조종 로봇의 컨트롤 타워가 되었다.
마치 지면을 밀어 올리는 죽순처럼, 마침내 수면을 뚫고 나오는 잠대공미사일들의 한가운데, 이수련과 그녀의 완벽한 통제를 받는 로봇들이 일제히 가슴에서 빛을 뿜었다.
빛의 정체는 내장된 전자기 펄스.
흔히들 EMP(electromagnetic pulse)라고 불리는 무기였다.
이수련의 외장과 다른 로봇들은 전자기파를 흩어버리는 특수 도료가 칠해져 있어 EMP의 영향에서 자유로웠지만, 잠대공미사일들은 그렇지 못했다.
막 수면을 벗어나 2차 분사를 통해 치솟으려던 잠대공미사일 내부는 EMP의 영향으로 내부 회로가 다 타버린 상태.
기세 좋게 솟아오르던 잠대공미사일이 힘없이 고꾸라져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첨단무기 또한 본좌의 영역이니라.”
이수련의 꼬리를 덮고 있던 외장이 사라졌다.
정체를 간파당하고 공격수단까지 막힌 잠수함들이 속도를 높여 해당 수역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수련은 눈에 담았던 잠수함의 모습을 복기해봤으나 소속을 특정할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완전히 격퇴하지 못해 분한 마음을 다스리던 이수련의 머리 위로 붉은 비가 내렸다.
고래가 머리 위의 숨구멍을 통해 뿜어내는 숨에 피와 살점이 섞여 만들어진 붉은 비였다.
고개를 들어 공중에 뜬 고래의 배를 보는 이수련의 로봇 헤드 위로 붉은 줄이 그어졌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오래 살다 보니 저런 크기의 생물을 또 보게······.”
그때, 조종사의 목소리가 이수련에게 전해졌다.
-고래의 상부에 사람이 보입니다! 등을 찢고 나온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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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 성공!은 했지만 이제부터가 더 걱정이다.
내가 찢고 나온 등과 숨구멍에서 솟아오르는 피 때문에 고래의 등판은 온통 질척거렸다.
언어 그대로 피바다였다.
심지어 고래가 꿈틀대기까지 해서 중심 잡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설마설마했지만 정말 고래마저 띄워버릴 줄이야.
[동작 정지]나 [긴급 정지] 같은 스킬을 발동해 부력 생성기를 멈추려 했지만 어떤 스킬도 먹지 않았다.
가끔 이런 아이템들이 있었다.
한번 발동되면 끝을 봐야 멈추는 것들이다.
버그인지, 의도된 사항인지 알 수 없는 이런 아이템에게 유저들이 붙인 명칭은 오버 히트 아이템.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고민하고 있던 차에 부력 생성기에서 다시 한번 파장이 뿜어져 나왔다.
몸을 밀어 올리던 부력이 사라졌다.
‘부력이 사라졌다! 그럼 고래가 떨어지는······!’
충격에 대비해서 피할 곳이 없나 다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고래 등판에 숨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놀라운 일은 고래가 여전히 떠 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공중에 떠서 몸을 뒤트는 정도였는데, 이제는 꼬리와 지느러미를 이용해 한 방향을 향해 유영하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온통 바다밖에 없었다.
“골 때리네.”
그때, 내 주변에 익숙한 로봇이 착륙했다.
“낭군!”
해제된 로봇 헤드 안쪽에서 이수련의 얼굴이 보였다.
단언컨대 이수련이 이렇게나 반가운 적은 처음인 것 같다.
“이수련 씨! 어떻게 된 거예요!”
“본좌가 묻고 싶은 말이다! 어쨌든 이렇게 보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구나! 허나 재회의 회포는 조금 있다 푸는 것이 좋을 것 같으니라. 심각한 문제가 새로 파악되었으니 말이다!”
“무슨 문제요. 지금 이거보다 심각한 문제가 있을 수 있어요?”
“통신이 끊겨 100% 전달받았다고는 확신할 수 없지만, 앨리스의 말에 따르면 WSS에서 정체를 알기 힘든 여러 대의 비행정과 선박이 긴급 출항했다는구나. 신시아가 사람을 풀어 감시 중이던 브리가드의 인원이 감쪽같이 사라진 상황에 말이다.”
“그 말은······.”
“그들이 내려오는 방향이 고래가 향하는 방향과 얼추 일치한다는구나.”
놈들의 본대가 온다.
아마 그중에는 마데르노도 있겠지.
주머니에서 들어있는 것들의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나만 이걸 쓰는 게 아니라고 그랬던가.
그래봤자 이제 막 방법을 알아가는 뉴비면서 뭐가 그렇게 자신만만한 건지 원.
분명 심각한 상황이지만 왠지 마음 한편이 들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부는 걸로도 모자라서 자기 잘못은 생각도 안 하고 남 탓만 하는 마데르노 같은 시건방진 뉴비는 아주 따끔하게 혼이 나야 한다.
저번에는 혼내다가 도망치게 놔뒀지만, 이번에는 다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