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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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리 혈관에서 벗어났대!”
“그게 가능해? 거기 들어간 사람 중에 살아서 나온 사람 아무도 없잖아!”
“내 말이, 내 말이! 심지어 마데르노 님이 이번에 그놈을 죽이기 위해 손수 공들여 설계한 신형 격리 혈관이잖아.”
“잡아들이려고 유물도 소모됐을 텐데······.”
“그게 중요해? 그 미친 자식이 빅웨일 안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맞네! 어떻게 할 거래?”
“격리 혈관에 배치되어 있던 인원들 전부 동원해서 선내 수색 시작했어.”
“마데르노 님도 안 계신 데 이런 일이······.”
좀 가라.
“어쩔 수 없지. 유물을 다룰 수 있는 건 마데르노 님뿐이니까. 마데르노 님이 네오-서울로 가시지 않았다면 오메가 그놈을 잡지도 못했을 거야.”
“위험할 텐데도 몸소 가신 걸 보면 마데르노 님도 이번 일에 신경을 많이 쓰고 계신 게 분명해.”
그만 떠들고 좀 가!
눈알 따가워 죽겠어!
“그걸 말이라고. 마데르노 님이 다른 분들에 비해 류정 님을 아꼈잖아. 그런 류정 님을 죽인 자식을 처리하는 일이니, 전면에 나서실 만도 하지. 그리고 걱정하지 마. 애초에 벗어나는 것도 불가능하겠지만, 빅웨일 밖으로 나간다고 해도 놈이 할 수 있는 건 없어. 나가봐야 바다라고. 그것도 망망대해.”
“그렇······겠지?”
“그래. 아마 마데르노 님이 돌아오시기도 전에 전투 부대가 놈을 처리할 거야. 우리는 우리 일에만 집중하면 돼.”
승무원인지 연구원인지 알 수 없는 두 명의 인원이 그제야 멀어졌다.
[은신]을 위해 부릅뜨고 있던 눈을 깜빡였다.
눈 위에서 폭죽이 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노가리도 적당히 까야지. 하루종일 떠드는 줄 알았네.”
둘의 대화를 비롯해서 이곳을 좀 돌아다닌 결과 대충 내가 어디쯤에 있는지 알게 됐다.
여긴 브리가드의 본거지이자 기함이다.
움직이는 요새인 모양인데 자기들끼리는 빅웨일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서 고래가 아닐까 싶다.
내가 뛰어다니던 곳은 고래의 빈 혈관이었던 모양.
“이러니 못 찾는다 소리가 나오지.”
굉장히 고급 인력인 탐사단에서 인명피해가 나오는 것을 보다 못한 도시 권역 몇몇이 연합해서 브리가드 소탕에 나선 적이 있다고 한다.
그 결과, 지엽적인 피해를 주는 데는 성공했으나 본거지 타격에 실패해 브리가드의 뿌리를 뽑는 것에는 실패했단다.
사실 본거지 타격은커녕 색출에도 실패했다고 들어서 왜 그런 건가 했는데 움직이는 고래 안에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나를 잡기 위해 달려드는 놈들을 피해 안을 뛰어다니며 느낀 건데, 내부가 보통 큰 것이 아니다.
어떤 부분은 고래의 내장이나 혈관이 그대로 보이기도 하고, 인공적인 구조물이 들어차 있는 곳도 있는데, 아예 고래의 살을 파서 내부로 유입되는 바닷물이 흐르게 만들어 놓은 수로도 있는 걸 봐서 거대한 고래 안에 작은 마을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통신은 여전히 먹통이고. 네오-서울을 벗어나서 그런 건가.”
조력도 힘든 상황.
혼자만의 힘으로 여길 빠져나가야 할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까 대화에서 들었던 것처럼 당장은 마데르노가 이 안에 없다는 것이었다.
안에도 전투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유물까지 쓸 수 있게 된 마데르노 혼자를 감당하는 것보다는 전투원 수십을 상대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나가려면······역시 뒤인가?”
정말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이 고래도 생물인 이상 먹은 걸 내보낼 것이니 확실하게 ‘배출’되려면 아무래도 그쪽을 통해야 할 것 같았다.
고래가 숨을 쉬기 위해 수면으로 올라간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고래의 머리로 향하는 것보다 뒤로 향하는 것이 확실할 것 같기도 했고······.
“앞에서 먹으니까 나가는 쪽이 뒤겠지?”
수로를 따라 흐르는 바닷물인지 위액인지 모를 액체의 흐르는 방향을 확인하기 위해 난간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보트를 타고 수로를 오가는 놈들 중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조용히 있어주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저기 있다! Ta-9 섹터!”
재빨리 고개를 안쪽으로 집어넣었지만, 블래스터 탄환이 내가 있는 방향으로 날아왔다.
그리고 Ta 어쩌고가 내부 구획을 나타내는 것이었는지 촤르륵 소리와 함께 난간과 복도에 격벽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과생장]
내려오는 격벽 사이로 던져 넣은 씨앗이 순식간에 자라며 커다란 나무가 되었고, 나무와 격벽 사이의 틈으로 미끄러져 나왔다.
짠 물만 있는 이곳에 던져 넣은 건 나무에게 못 할 짓이지만 일단 나부터 살아야지.
그렇게 격벽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내가 향하던 앞쪽에서 또 다른 전투원들이 보였다.
민첩함과 이동속도에 주력한 이들인지 눈을 깜빡일 때마다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정도가 무시무시했다.
그들 일부는 품에서 부적을 꺼내 던졌고, 남은 일부는 수인을 맺고 방언을 읊기 시작했다.
팔랑거림 하나 없이 날아든 부적이 내 주변에 일종의 결계를 형성했다.
“골 때리는구만. 이 좋은 실력으로 왜 강도질이나 하고 있냐고.”
아무런 의심 없이 검을 전개해 결계에 꽂았다.
일렁이던 결계의 면이 무너져 내렸다.
아직 완전히 깨지지 않은 결계 사이로 몸을 들이밀고 빠져나왔다.
티셔츠에 무수히 그려지는 파동을 느끼며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파도천]
검의 궤적을 따라 결계의 파편이 생겼다.
자신의 기술을 그대로 돌려받게 된 결계술사들이 당황하는 사이, 빠져나왔던 이전 구역과 마찬가지로 격벽이 내려오는 난간을 향해 검을 휘둘러 격벽 일부를 찢어내 밖으로 빠져나갔다.
전투원들은 나를 향해 화력을 집중했고, 전투원이 아닌 이들은 소리 지르며 달아나기 바빴다.
“당황스러운 건 난데. 왜 지들이 소리를 질러. 그리고 나쁜 건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야!”
일단 배출되기 위해 뒤쪽으로 향하려던 찰나, 벽면에 붙어 있던 여러 구역 중 하나가 아예 별도로 격리되는 것이 보였다.
그쪽으로 향하는 길들이 접히는 것은 물론이고 격벽, 결계, 마법진 등등 보안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발동되고 있는 것 같았다.
“유사시에 저렇게나 보호해야 하는 곳이라 그거지?”
약 한 시간 이상 텁텁한 공기 속에서의 조깅, 그동안 내내 성질을 긁던 마데르노의 내래이션, 내 눈으로 확인한 건 아니지만 정황상 바다 아래 고래뱃속, 조금은 설렁설렁해진 나 자신에 대한 짜증, 마지막으로 거리에 풀린 흉악범 취급까지.
여러 요인이 얽히고설켜 지금 내 심리 상태는 폭발 직전이었다.
분출구가 필요했고, 그건 어떻게든 이놈들, 특히 마데르노에게 거대한 엿을 먹이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뭐가 있는지는 몰라도 망쳐주지.”
나는 지금 고래의 살점 벽면 사이사이 돌출된 창문 밖에 매달려 있었고 위와 아래에서 브리가드 전투원들이 마찬가지로 돌출된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고 어떻게든 나를 격추하려 했다.
비행이나 벽면에 붙는 것이 가능한 놈들은 내게 접근하려고 용을 쓰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미 포커스가 꽂혀 돌아버린 내 눈은 격리된 구역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은 내가 있는 곳보다 한참이나 위쪽에 있었고, 게다가 지금은 고래의 살점이 꾸물대며 그곳을 덮기 시작하고 있었다.
완전히 안쪽으로 파묻히게 된다면 생각보다 많은 힘을 들여야 할지도 몰랐다.
[클라이밍]
90도 경사에 가까운 절벽을 오르내리는 산양처럼, 나는 격리된 구역을 향해 훌쩍훌쩍 가까워졌다.
쏟아지는 블래스터, 탄환, 플라즈마, 하다못해 투척 무기까지 모조리 쳐내면서 올라가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제 살점에 거의 파묻힌 격리 구역이 오른쪽 머리 위쪽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하지만 그사이에는 아까의 결계술사들을 비롯한 사격수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이렇게 감추면 더 뜯어보고 싶어지잖아. 일기라도 있나? 아니면 천기누설 급등 종목? 그것도 아니면 마데르노의 은밀한 취향이 담긴 성인물?”
[빗방울 베기]를 통해 아래쪽에서 내 엉덩이를 향하던 화살비를 쳐내며 중얼거렸다.
마지막에 화살이 기묘하게 꺾이는 바람에 소중한 곳을 내어줄 뻔했지만, 다행히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내가 머뭇거리자 주변에서 환호성에 가까운 고함이 터져 나왔다.
“놈이 멈췄어!”
“몰아넣었다! 죽여!”
“마데르노 님의 숙원이다! 오메가를 죽여!”
서로 안지 얼마나 됐다고 숙원씩이나.
과장이 심하네.
솔직히 진퇴양난이긴 했다.
[클라이밍]이 끝나면 스킬의 보정 없이 순수한 내 근력과 균형 감각으로만 매달려 있어야 하는데 미끌미끌한 고래 살점을 붙잡고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나아가자니 결계가 있고 돌아가자니 엉덩이가 뚫릴 판이다.
“[순간 이동]만 사용할 수 있었어도 훨씬 편해졌을 건데.”
딥스페이스에서 사용 가능했던 [순간 이동]이지만 현실에서는 어떻게 해도 발동되지 않았다.
역시 현실은 밸런스 똥망의 정점이다.
그렇지만 [순간 이동]을 사용하지 못한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는다.
언제는 안 될 것 같다고 포기했나.
[각력 강화]
뛰었다.
격리된 구역이 있는 위쪽이나 갖가지 투사체가 나를 향하는 아래쪽이 아니라 비행하는 놈들이 있는, 고래 내부의 공중이라고 할 수 있는 쪽으로.
이런 선택지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내 눈에 담기는 사람들마다 얼굴에 황당함을 한가득 담고 있었다.
[표르긴]
시선이 닿는 공중에 얼음판이 생겼다.
생성 직후 떨어지는 얼음판 끝에 손을 가져다 댔다.
방향 전환을 할 잠깐의 틈만 있으면 된다.
고개를 돌리니 살점에 먹히기 직전인 격리 구역이 보였다.
위치를 확인한 후, 이번에는 발아래 얼음판을 만든 뒤, 힘껏 딛고 격리 구역을 향해 뛰었다.
불안정한 자세였지만 몸이 위로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
누티엘이 공중에서 보이지 않는 발판을 밟아 위타천의 가드를 피해 각도를 벌리는 것을 보고 착안해낸 방식이다.
그렇게 공중에서 얼음판을 이용해 도약하기를 몇 번, 격리 구역이 훌쩍 가까워졌다.
수십 개는 되어 보이는 마법진들이 격리 구역 주변으로 떠올랐지만, 검으로 다 찢어버렸다.
“막아!”
“못 가게 해!”
“격리 해제! 격리 해제! 당장!”
“한 번 발동되면 마데르노 님 말고는 해제할 권한이 없습니다!”
목이 터져라 외치는 소리가 귓가에 들릴 때쯤, 나는 검을 다시 한번 휘둘러 격리 구역을 덮는 살점은 물론이고 벽 일부까지 부수고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낙법]
멋지게 굴러 들어온 내 입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이래서 꼭꼭 숨겨 놓으려고 그렇게 애를 썼구만.”
격리 구역의 정체는 마도공학 유물을 모아 놓은 곳이었다.
못해도 수백 종은 될 것 같은 마도공학 유물, 아니 아이템이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작동을 멈춘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몇몇 개는 미미한 빛을 뿜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작동이 되는 것도 있긴 한 모양이었다.
부피가 작은 것들을 주머니에 쓸어 넣으면서, 나는 지금 상황에서 제법 유용해 보이는 걸 발견했다.
“이거 되나?”
만약 된다면 뒤가 아니라 위로 빠져나갈 가능성이 생기는 아이템.
<부력 생성기>였다.
‘같은 구멍이어도 똥구멍으로 나가는 것보다는 숨구멍으로 나가는 게 나을 것 같으니까!’
[동작]
아이템을 작동시킨 순간, 거대한 파장이 뿜어져 나와 고래의 전신을 향해 퍼져나갔다.
#
-수련······니. 사장······찾았······?
한반도 서해 상공, 퓨전 코프 수송기에 타고 있는 이수련에게 앨리스의 목소리가 끊겨 들렸다.
WSS와 서해 권역에 있는 퓨전 코퍼레이션 지사들을 이용해 중계 통신을 하는 것이라 품질이 상당히 좋지 못했다.
개인 비행기였다면 안에 설치된 위성 전화를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한 이수련이었지만 엎어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수련의 연륜은 어디 가지 않는지 좋지 못한 통신 품질에도 때려 맞추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아직이니라! 좌표 주변에 음파 탐지를 시행하고 있으니 기다려보거라!”
실제로 수송기에서 날아간 원격 조종 로봇들이 바다 위에 넓게 퍼져 아래쪽으로 음파를 쏴대고 있었다.
그때, 수송기 조종사가 날카롭게 외쳤다.
“잡히는 게 있습니다!”
“가거라! 어서!”
서해보다는 남해에 가까운 지점까지 날아간 수송기.
수면을 샅샅이 훑던 이수련의 눈에 믿기 힘든 광경이 보였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고래가 수면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숨을 쉬기 위해 머리와 등을 드러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수면에 배가 닿을 정도.
고래가 날고 있었다.
이수련이 중얼거렸다.
“난다······고래······.”
그걸 들은 앨리스가 하는 말이 띄엄띄엄 들렸다.
-수련 언······. 일본 출장······자주······. 나다······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