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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캐여도 너보단 강함-155화 (156/258)

155.

155.

구불구불한 터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좌우로 꺾이기도 하고,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하는 통에 내가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열기와 습기, 간헐적으로 전해져오는 진동까지, 때려죽여도 쾌적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환경이었다.

머리칼 끝에 맺혀있던 땀 한 방울이 목덜미로 흘러드는 감촉이 생생했다.

티셔츠에 닿기 무섭게 언제 그랬냐는 듯 흡수되어 사라진 땀이지만, 땀이 흘렀던 길이 계속해서 남아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밤새 악몽에 시달리다 눈을 번쩍 뜨고 몸을 일으켰을 때 이불이 땀에 젖어 몸에 감겨 있는 것 같은 불쾌함이었다.

아니, 이건 그 자체로 악몽이었다.

쿠르르르-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름 모를 모래 괴물의 아가리처럼 생긴 가시 벽이 다시 몸을 떨어댔다.

계속해서 나아가라고 나를 재촉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가시벽도 일정 거리 안쪽으로 접근하지는 않았다.

한 번 나를 삼킬 듯이 다가오길래 검을 휘둘러 가시두더지 몇 놈의 등판을 제모해준 덕이다.

다만 그 빈자리가 곧 메워지는 것으로 봐서 이 터널 근처에만 여러 마리의 가시두더지가 있는 것 같았다.

신경 쓸 것이 뒤에 있는 가시벽 뿐이었다면 여긴 그냥 지하 조깅 코스겠지만, 앞쪽에서도 나를 맞이하는 것들이 있었다.

블래스터 탄환이 쏟아지는 것은 예사고 갑자기 좌우의 벽이 사라지더니 나를 향해 기파가 날아오기도 했다.

그때, 깨달았다.

마데르노는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거다.

놈은 나를 갉아먹을 셈이다.

아무리 여러 가지 스킬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여긴 게임이 아니다.

아주 작은 피로가 조금씩 누적되며, 어느 순간 허기가 질 것이고, 나도 모르는 새에 눈이 감길 수도 있다.

나는 소모되고 있었다.

‘그 전에 이 터널의 끝에 도달해야······.’

끝이 있는 걸까?

걸음을 멈췄다.

미세한 광자 검날의 진동을 느끼며 천천히 심호흡했다.

비록 주변 공기는 여전히 텁텁했지만, 생각을 가다듬기에는 모자람 없었다.

그래, 내가 순진했다.

마데르노나 수연이 나를 죽이고 싶어 한다고 해서 그웨지안처럼 직접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속단했다.

이미 자기 세력이 있는 이들이 그래야 할 이유가 없는데.

이렇게 나를 함정에 밀어 넣고서 한참 후, 피로에 지쳐 숨을 깔딱거릴 때쯤 모습을 드러내는 편이 훨씬 더 이성적인 판단이지 않을까.

마데르노가 네오-서울에 모습을 보여서 마음 한편이 다급해졌다.

어쩌면 내가 마음대로 하고 다녀도 적당히 뒤처리해줄 사람이 있어서 쉽게 생각한 걸 수도 있다.

“이래서 초심, 초심 하는 거구만.”

나를 질책하는 혼잣말을 할 때, 이 터널에 들어온 후 계속해서 들려오는 마데르노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벌써 지친 건가요. 아직 유적지에서 보여주었던 것도 꺼내지 않았잖아요. 뭘 감추고 있는 거죠, 오메가?”

“감추고 있는 건 너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하루 만에 이런 터널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것도 한 시간 정도는 족히 뛰었을 기다란 터널이다.

터널을 통과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디론가 ‘이동’한 건 아닐까?

만약 그것이 마법이나 주술 같은 것이라면 검이 터널의 벽면에 닿았을 때 반응했을 것이다.

이런 함정을 판 것은 마데르노.

마도공학 유물에 미쳐 있는 브리가드를 이끄는 수장이다.

내가 내놓을 수 있는 결론은―.

#

오메가가 사라진 터널 아래로 몸을 던진 신시아와 이수련은 아래로 얼마 가지 못해 멈춰야 했다.

그들이 있는 곳은 터널보다는 땅굴에 가까워서 벽면에 손을 대기만 해도 흙이 후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오메가가 있는 터널의 벽과 천장 일부에 인공적인 흔적이 있는 것에 비하면 형편없는 마감이었다.

그리고 이수련의 로봇 헤드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그들 앞을 가로막고 있는 벽을 비췄다.

신시아가 벽에 다가섰다.

“이게······뭐야······.”

“접근하지 말거라!”

이수련이 달려와 신시아의 허리춤을 끌어안고 뒤로 잡아당겼다.

신시아가 향하던 벽, 시커먼 진액 같은 것들로 그려진 알아보기 힘든 글자와 그림이 가득했다.

이미 외견으로만 봐서는 거의 로봇과 다름없는 이수련이 양손으로 코를 싸잡고 말했다.

“사술邪術. 그중에서도 흑마술이니라. 무엇에 쓰려고 한 건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구나.”

신시아가 버럭 소리쳤다.

“오메가 님은 어떻게 된 거야!”

“낭군의 냄새는 여기서 끊겨있구나.”

그때, 벽에 가득했던 시커먼 진액들이 힘을 잃고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그것들의 중심부, 작은 나침반이 파삭하는 소리를 내며 깨졌다.

멀찍이 떨어진 상태로 그걸 본 신시아가 인상을 썼다.

야스민 저택의 창고에는 저것과 똑같은 물건은 아니지만 비슷한 부류로 묶일 수 있는 것이 가득했다.

“마도공학 유물?”

#

확신에 가까운 추정을 내놓았다.

“여기, 대림 에어리어 지하가 아니지? 나를 이동시킨 건가? 빨지도 않는 더러운 두건 말고도 다룰 수 있는 유물이 늘어났나 본데. 이거 축하할 일이네.”

조금 길게 느껴지는 잠깐의 침묵.

마데르노의 기꺼운 웃음이 터널을 가득 채웠다.

“드디어 알아챘군요. 하하하하. 당신이라면 알아챌 것 같았습니다. 굉장하지 않습니까? 오메가 당신만 마도공학 유물을 만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마데르노가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거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아마 흑마술을 응용해서 가능하게 된 것이겠지.

설마 모든 아이템을 다 다루는 건가?

브리가드가 탈취하거나 약탈한 유물의 수가 박물관 몇 개는 우스울 정도라고 했는데?

마데르노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슬픕니다. 당신을 죽여야 한다는 사실이요.”

조금 전 웃음소리는 어디 가고 분노가 한가득 묻은 그의 목소리가 터널을 뒤흔들었다.

“왜! 내 제안을 거절해서! 왜 유적지에서 류정을 죽여서! 이런 파국을 만드는 겁니까! 왜!”

“첫 만남을 생각해봐. 그쪽에서 기획한 사기극이었어. 감정이 좋을 수가 있겠어? 그리고 나는 너희랑 협력할 이유가 없다니까.”

“이건 오메가 당신이 편협한 탓입니다. 마도공학을 꽃피울 찬란한 시대로 나아갈 수 있었는데! 왜 대의를 짓밟는 겁니까!”

말이 안 통한다.

마도공학에 미쳐 있는 범죄자라 그런지 사고방식 자체가 우리와는 다르다.

하긴, 유물은 훔치면 되는데 왜 발굴하냐는 식인데 정상일 리가 없지.

내가 답을 하지 않자 마데르노의 거친 호흡도 점점 가라앉았다.

가볍게 물었다.

“그래서, 여긴 어딘데.”

“글쎄요.”

마데르노의 목소리에 다시 즐거움이 묻어났다.

감정 기복을 따라갈 수 없었다.

조현병인가?

“맞춰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지 않습니까. 이 계획을 위해 들인 품이 제법 많습니다. 당신의 동선도 파악해야 했고, 제가 직접 네오-서울까지 가서 당신과 협력 중인 루트의 눈도 속여야 했죠. 무엇보다 당신이 움직이지 않으면 소용이 없으니 러쉰을 보내 충동질도 해야 했고요. 다녀와서 어찌나 징징대던지 들끓던 살심을 억누르느라 진 뺐습니다.”

“러쉰이 너희를 불러들인 게 아니군. 너희가 러쉰을 택한 거였어.”

“무지렁이 사업가가 저를 택한다니, 그건 주제넘은 소리죠. 당신은 분명 굉장합니다, 오메가. 하지만 명심하세요. 하늘 위에는 하늘이 있습니다. 아무리 대단해도 홀로 하늘을 부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이렇게 말이 많았나? 하긴, 뒤에 숨어 떠들기나 하는 게 네겐 어울려. 자기를 지키려는 부하도 내버려 둔 채 내빼던 모습이 생생해.”

“감히 류정을 입에 담다니······좋을 대로 떠드시죠. 마음 같아서는 직접 찢어 죽이거나 저주에 먹혀 썩어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 이런 방법도 썩 괜찮군요.”

“저주? 저번에 보니까 나한테 쪽도 못 쓰던데.”

검을 단단히 잡았다.

“내가 이걸로 벽을 왜 안 긁은 줄 알아?”

[혈계조검술 - 에스피나]

팔뚝에서 터져 나온 피가 검을 타고 위로 흘렀다.

검의 표면에서, 핏방울들이 날카롭게 곤두서서 가시를 이루었다.

조금 더 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자, 내 생각에 반응하듯 검신이 좁아지는 대신 길이가 더욱 늘어났다.

이전에는 없었던 일.

피가 빠져나가 한순간 머리가 핑 도는 와중에도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이건 강화가 아니잖아, 위올란트. 재창조 수준이야.’

[로타시온]

톱상어의 위턱처럼 길고 예리하게 변한 피의 체인소드가 회전을 시작했다.

“옆에 가스관이라도 건드리면 다 죽을 것 같았거든.”

체인소드를 터널의 벽면에 박아넣자, 이번에도 상처가 차오르듯 구멍이 메워지려 했다.

피의 톱날이 맹렬하게 회전하며 구멍을 넓혀갔다.

그리고―

“그런데 대림 에어리어도 아니라고 하고, 어차피 죽을 거라면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같지 않겠어!”

내 말을 들은 마데르노의 목소리에 악이 서렸다.

“뭘 하려는 겁니까!”

[즉참]

검을 쥔 손을 내려그었다.

벽에 박힌 검이 아래로 향해 바닥을 긋고서, 처음 꽂았던 벽의 반대편까지 도달했다.

더 이상 터널은 복구되지 않았다.

대신 중심을 잡기 힘들 정도의 진동이 몰려왔다.

터널이 잘려 나가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빛 너머로 보이는 것은······.

#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던 신시아와 이수련의 귀에 앨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떴어요! 아주 잠깐이긴 하지만 사장님 위치 떴어요!

“통신은?”

-통신 범위 밖이래요.

“지하 깊이 들어간 건가?”

-아뇨!

이어지는 앨리스의 말.

-한반도 서해 공해에서 사장님 신호가 잡혔어요! 잠깐 움직이다가 지금은 또 안 잡혀요!

“그럴 리가 있느냐. 1시간 정도 전만 해도 네오-서울에 있지 않았느냐.”

다급한 이수련과는 달리 팔짱을 낀 채로 깨진 나침반을 보고 있던 신시아가 중얼거렸다.

“마도공학 유물과 흑마술의 쓰임새는 짐작할 수 없지만, 오메가 님을 어디론가 데려갔다면······? 마지막 위치는 바다······. 브리가드는 잠수함을 이용해 세계 전역을 돌아다닌다는데 설마 그 잠수함으로 공간 전이를 한 건가?”

그게 쉽게 가능할 것 같냐며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려던 이수련도 마도공학 유물을 보고 멈칫했다.

과거 문명의 신비라는 이름으로 전해지는 서리얼의 아이템은 지금에 와서 제대로 동작하는 것이 많지 않았지만 작동하는 것들은 가히 불가사의, 불가해의 영역에 있는 것들이라 부를 만했다.

뛰어난 로봇공학자이자 술법에 있어 일가一家를 이룬 이수련도 마도공학 유물에 대해서는 쉬이 속단할 수 없었다.

오메가가 사라진 지금, 작은 가능성이 있다면 파고 들어야 했다.

“앨리스, 좌표를 전송하거라. 본좌가 가겠다.”

이수련의 뒤를 따랐던 로봇들이 다시 밖으로 나가 네오-서울 강동 에어리어 비행장에 있는 퓨전 코프 수송기로 날아갔다.

로봇들이 날아가는 것을 지켜본 이수련이 신시아에게 당부했다.

“낭군이 사라졌으니 놈들이 사무실을 노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느니라. 여긴 네게 맡겨도 되겠느냐.”

“걱정하지 말고 가. 대신 올 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메가 님 데리고 와야 해.”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말을 마친 이수련이 몸을 위로 띄워 로봇들이 간 방향으로 날아갔다.

구미호는 네오-서울 내 비행 허가 종족이 아니기 때문에 딱지가 발부되었지만, 마지막 수호자의 특권으로 일종의 치외법권을 적용받아 해당 사항이 없는 이수련이 통지서를 모두 모아 위타천에게 보낸 것은 조금 나중의 일이다.

물론 이수련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기 때문에 미리 허가받지 않은 로봇 비행에 대한 과태료는 얄짤 없이 다 내야 했다.

이수련과 로봇을 실은 퓨전 코프의 수송기가 오메가의 마지막 위치인 서해 공해를 향해 날아갔다.

한편, 신시아의 추측처럼 오메가는 흑마술에 잠식된 마도공학 유물로 인해 어디론가 전이된 상황이었다.

위화감이나 변화를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정교한 조작.

ODC의 유적지에서 신뢰하는 부하를 잃은 마데르노가 각성하며 얻게 된 능력이었다.

사용할 때마다 마도공학 유물이 파괴된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복수와 증오에 눈이 먼 마데르노는 오메가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 출혈은 오히려 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걸려든 오메가가 이동한 곳은 브리가드의 기함이자 그 자체로 거대한 생체 요새인 빅웨일이었다.

터널인 줄 알고 오메가가 뛰어다니던 곳은 피가 드나들지 않게 가공한 고래의 혈관이었던 것.

혈관과 주위의 고래 살점을 뭉텅이로 잘라내며 밖으로 탈출한 오메가가 마주한 것은 펄떡거리며 움직이는 살덩이들과 그 안에서 움직이는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피로 이루어진 기다란 검을 든 오메가의 입이 열렸다.

“여긴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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