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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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하루 사이에 이런 걸 잘도 만들어놨네.”
아래쪽에 발을 딛고 선 내 입에서 나온 첫마디였다.
터널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의 전체적인 완성도나 마감은 완벽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옅은 진동이나 물이 지나가는 것 같은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곤 했다.
하지만 네오-서울의 지하가 어마무시하게 복잡하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예공방 지하에 있던, 이제는 쓰지 않는 차량기지처럼 파악이 어려운 시설도 있을 것이다.
그중 지금까지도 작동하는 것을 건드렸다면 대림 에어리어 행정관청에서 난리가 났을 텐데 오늘 아침 어디가 단수라거나 정전이라는 소리는 없었다.
다르게 말하면 내 동선을 미리 알고, 통신도 되지 않게 준비한 터널을 밤새 만들어두었다는 소리기도 했다.
내가 내려왔던 위쪽의 구멍은 이미 흔적도 없이 막힌 상황.
개미지옥 아래쪽 원뿔의 끝으로 빨려가는 개미가 된 기분이었다.
아니면 끝이 낭떠러지인 줄도 모르고 사냥꾼에게서 피해 달아나는 사냥감이 된 것 같기도 했다.
이곳은 내 전장이라고 할 수 없었다.
마데르노, 그리고 브리가드.
절대로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래도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기분 나쁘네.”
[파신권]
으스러질 듯 꽉 쥔 주먹으로 터널의 벽을 때렸다.
제법 반듯하게 수직으로 깎여있던 벽의 한쪽이 내 주먹을 받아내면서 움푹 패였다.
놀라운 일은 그 이후에 일어났다.
벽의 안쪽이 꿈틀거리며 밖으로 밀려 나와 터널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았다.
마치 상처가 차오르는 것 같았다.
‘거대한 벌레 같은 거에 먹힌 건가? 이건 내장이고?’
[반향정위]
다행히도 내장이 꾸르륵거리는 것 같은 소리는 나지 않았다.
발소리를 내 음파를 퍼트렸다.
앞쪽으로 퍼트린 음파가 돌아오지 않았다.
음파를 삼키거나 간섭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다만 지하 주변의 소음이 너무 많이 잡혀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반향정위]를 해제하려는 찰나, 내가 있는 쪽으로 향해 가까워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위치······위치······아래!’
재빠르게 몸을 앞으로 굴리자 조금 전까지 내가 서 있던 자리에서 삐죽삐죽한 것이 튀어나왔다.
날카로운 가시나 털처럼 보였다.
물결치듯 떨어대던 그것이 바닥을 가르며 내게 빠른 속도로 접근했다.
자신들이 원하는 곳으로 나를 몰아가려는 의도가 눈에 보였다.
검을 역전개하고 양발로 땅을 단단히 디뎠다.
땅이 갈라지는 소리가 시시각각 내게로 다가왔다.
이제 소리가 멀지 않을 즈음, 오른발을 높이 들었다가 내리찍었다.
[땅 고르기]
발을 구르며 체중을 이동시켜 타격의 위력을 증대하는 기공 계열의 스킬, [진각震脚]과 비슷하지만 [땅 고르기]는 기공 계열이 아니라 농사 계열의 스킬이다.
내가 사용한 스킬이 [진각]이었다면 발을 구른 위쪽으로 충격파가 올라왔겠지만 [땅 고르기]는 땅 아래와 앞쪽으로 힘이 퍼져나간다.
그리고 같은 동작을 연속으로 시행하면―
[땅 고르기]
[땅 고르기]
[땅 고르기]
힘이 뻗어나간 땅이 저절로 뒤엎어지며 안에 있던 돌멩이나 풀뿌리들을 위쪽으로 내보였다.
심지어는 나를 향해 다가오던 가시의 정체마저도.
서리얼에서 농사 컨텐츠에 발을 들인 유저들을 위한 일종의 배려용 스킬인데, 농사 외의 쓰임새에도 쓸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연구한 결과가 여기 있었다.
생김새는 두더지 같은 녀석이 땅 위로 밀려 올라왔다.
놈의 등 위에 빽빽하게 들어찬 날카로운 가시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광자 검날이 발하는 빛 아래, 서 있는 나와 땅 위에서 몸을 옹송그린 놈의 눈이 마주쳤다.
어색함을 해소하기 위한 눈인사를 나눌 새도 없이, 나는 놈에게 접근했다.
제압하기 위해 손을 뻗은 순간, 몸을 더욱 웅크린 놈의 등판에서 가시가 빠른 속도로 발사되었다.
[흐림수르사르]
내민 손에서 만들어지는 빙벽이 나를 향해 날아드는 가시를 막아 세웠다.
“이러면 재미없다?”
그 짧은 순간, 두더지처럼 생긴 녀석은 바깥으로 돌아간 손바닥을 이용해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빙벽을 넘어 잡으려 했으나 남은 것은 꾸물거리며 원래의 모습을 찾는 터널의 바닥이 전부였다.
그때, 쿠르르륵하는 소리가 여럿 들렸다.
내 시선이 향한 방향에서 파도 같은 것이 밀려오고 있었다.
바닥, 벽, 천장 할 것 없이 가득 채운 그것은 모두 가시였다.
아까 본 가시두더지 중 커다란 녀석들이 있는 건지, 아니면 몇 마리가 협동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 속에서 버틴다는 건 썩 유쾌한 경험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몸을 돌려 어두운 터널에서 의지할 수 있는 빛을 내뿜는 검을 앞으로 내밀고, 가시벽이 오지 않는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날 가지고 놀고 싶은 것 같은데, 일단 어울려주마.’
내가 설계한 판에 남을 끌어들이는 것도 즐겁지만, 남이 설계한 판에 들어가 모조리 박살 내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즐겁다는 걸 이미 알고 있기에 내 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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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의 연락을 받은 앨리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네? 저희 사장님이 도착을 안 했다고요?”
-예. 에이들리 님 유세 현장을 미리 한 번 봐달라고 부탁드렸던지라 캠프에 오셔서 저랑 함께 이동할 예정이었는데 모습을 안 보이셔서요. 연락도 안 됩니다. 혹시 변경사항이 있었나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에이들리에게 조인트와 뺨을 맞은 뒤로 눈에 띄게 공손해진 피츠였다.
“잠시만요. 알아보고 연락드릴게요.”
통신을 종료한 앨리스가 연산회로를 열심히 가동했다.
‘사장님 보고 있으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의문이 들기는 해도 일을 땡땡이 치거나 중간에 사라지는 일은 없었는데?’
네오-서울을 벗어난 것도 아니고 그다지 멀지도 않은 곳에 가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앨리스가 쉽사리 이해하기 어려웠다.
오늘도 사무실에 와 있던 신시아와 이수련이 앨리스의 통신 내용을 듣고는 관심을 가졌다.
먼저 반응한 쪽은 이수련이었다.
“낭군이 중간에 다른 길로 새기라도 한 것이더냐.”
신시아는 앨리스의 생각과 비슷한 견해를 내놨다.
“오메가 님이 일 도중에 갑자기 사라진 적이 있나? 오히려 일 시작하면 밤낮없이 몰두하는 모습만 본 것 같은데.”
“저도 신시아 언니 생각이랑 같아요.”
앨리스의 패드로도, 신시아의 손목시계로도, 이수련의 바이저로도 오메가와 통신이 연결되지는 않았다.
재빨리 오메가의 바이크 위치를 확인한 앨리스가 신음에 가까운 혼잣말을 했다.
“바이크는 선거 캠프 근처에 있다고 뜨는데?”
그 말에 이수련이 뭔가 잊은 걸 떠올린 것처럼 손뼉을 마주치며 외쳤다.
“블랙박스를 확인해보거라! 제법 좋아 보이는 호버바이크이니 그 정도 옵션은 있을 것 아니냐.”
곧바로 바이크의 블랙박스가 자동 저장되는 사무실 데이터베이스로 접속한 앨리스가 스크린에 오늘 자 블랙박스를 재생시켰다.
극심한 대림 에어리어의 교통 혼잡을 기가 막힌 운전으로 빠져나가는 화면은 멀미 기능이 탑재되어 있지 않은 앨리스마저도 약간의 어지럼증을 호소할 정도였다.
신시아도 한마디를 보탰다.
“저도 바이크 타긴 하지만 이건 정말······면허 반납해야 한다고 봐요.”
“동감이니라. 그런데 낭군에게 면허가 있긴 한 것이냐?”
신시아와 이수련의 시선이 앨리스에게 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기억 잃기 전에 딴 면허 있어요. 무면허는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직접 보니 무면허랑 다를 게 있나 하는 생각도 드네요. 모르고 이러고 다니는 거면 갱생의 여지라도 있는데 알면서 이러고 다니는 건 좀······.”
보는 것만으로 전두엽이 회오리치는 화면이 멈춘 것은 오메가가 바이크를 선거 캠프 근처의 공영 주차장에 세운 이후였다.
앨리스의 손짓 몇 번에 후방 블랙박스가 알맞게 분할되어 화면을 채웠다.
바이크 주변의 보호막이 블랙박스 화면을 가리기 직전, 땅으로 꺼지는 오메가의 모습이 잡혔다.
걸어가던 오메가가 한순간에 땅 밑으로 사라지는 걸 확인한 앨리스가 믿기지 않는지 화면을 몇 번이나 되감았다.
“뭐야, 이게.”
실감이 나지 않는지 중얼거리던 앨리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사장님이 싱크홀에 먹혔다!”
앨리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 박쥐로 변한 신시아와 바이저에서 만들어진 로봇 헤드를 장착한 이수련이 사무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팀 오메가 채널을 통해 앨리스의 안내를 받은 둘은 오메가의 바이크가 주차된 공영 주차장으로 향했고, 박쥐에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신시아가 포탈링을 통해 기계화 좀비를 꺼내놓고 있을 즈음 전신이 로봇 외장으로 뒤덮인 채로 건물을 타넘던 이수련이 도착했다.
하지만 둘의 눈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는 주차장 바닥만이 보일 뿐이었다.
“멀쩡한데?”
신시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수련의 어깨와 등에서 반사판 같이 생긴 것들이 떨어져나와 빛을 뿜어냈다.
반사판 주위의 공기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겉은 멀쩡해도 속은 알 수 없느니라.”
이수련이 초고열 빔을 쏘려 한다는 것을 눈치챈 신시아가 기겁하고 말렸다.
“잠깐! 잠깐! 아래에 뭐가 있을 줄 알고 다짜고짜 그러는 거야! 가스관이라도 있으면 여기 일대 다 날아가!”
“하지만 낭군이 이 아래로 사라졌지 않으냐!”
“잠깐 기다려!”
기다려라는 말에 반응한 이수련이 반사판을 다시 몸에 붙였다.
이수련이 사무실에서 땡깡을 피울 때마다 오메가가 늘 ‘기다려’라는 말을 한 덕이었다.
그러자 신시아는 불러낸 좀비들을 모아 땅을 파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무실에 남은 앨리스가 계속해서 상황을 조율했다.
-작년도 대림 에어리어 지하 개발 전도 확보했어요. 전도 상으로는 그 위치에서 수직으로 4m가량 아무것도 없어요. 지름 2m 기준이고 더 넓어지면 상수도관 있으니까 그건 조심해요.
“알겠어.”
-돼지네 청소에도 연락했어요. 가설 울타리 가지고 간다니까 공사 중이라고 위장할 수 있을 거예요.
“돼지네?”
-언니보고 형수라고 부르는 돼지 수인이 운영하는 곳이요.
그러자 통신 채널에 들어와 있던 이수련의 눈이 번쩍거렸다.
“형수? 설마 낭군의 부인을 그리 부르는 것이냐. 본좌가 있는데 누가 감히! 어찌 신시아에게!”
“남들이 보기엔 다 그렇고 그런 거지.”
좀비들이 땅을 파는 사이 후앙이 패거리를 이끌고 도착해서 주변을 공사 현장처럼 꾸미기 시작했다.
“형수님! 그간 잘 지내셨죠! 오랜만에 봐도 여전히 아름다우······크헉!”
평소처럼 넉살 좋게 신시아에게 인사하던 후앙은 어디선가 날아온 이수련의 진심 발차기를 맞고 기절했다.
해결사 사무실에 구미호 하나가 자주 오간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었지만, 그 정체가 퓨전 코퍼레이션의 총수라는 것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 오메가’와 잘 지내는 걸 보면 보통은 아닐 거라는 말이 암암리에 퍼지고 있었고, 따라서 후앙의 패거리는 보스의 실신에 대해 구미호에게 따지고 드는 대신 얌전히 보스를 들어 낡은 밴 뒷자리에 던져놓고 자신들의 일을 마무리 하는 방안을 선택했다.
그래도 대림 에어리어에서 갱 비슷한 놀이를 좀 해봤다고 생존 필수 조건인 ‘강자를 알아보는 눈’은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던 덕이었다.
신시아가 불러낸 좀비들은 계속해서 개량을 거치고 있는 기계화 좀비여서 일반 좀비와는 운동 능력이 차원이 달랐다.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땅을 퍼내는 기계화 좀비들은 포크레인과 같은 중장비의 의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될 정도였다.
그러다 무언가에 가로막혔다.
오메가를 위에서 압박했던 일종의 뚜껑이었다.
좀비들이 그것들을 뜯어내려고 애썼지만, 상처가 조금 생기나 싶으면 곧 아물 듯이 사라졌다.
위에서 그걸 보고 있던 이수련이 신시아에게 말했다.
“좀비들을 물리거라.”
그리고 아래로 내려간 이수련의 등과 어깨에서 다시 한번 반사판이 분리되어 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녹아내리나 싶던 뚜껑이 꿈틀거렸고, 일순간 치솟아 이수련을 덮어버렸다.
-수련 언니랑 통신 두절!
모든 것을 보고 있던 신시아가 외쳤다.
“이수련!”
다음 순간, 이수련을 덮어 싼 뚜껑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더니 뚝뚝 녹아내렸다.
이수련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귀 두 개가 머리 위로 삐죽 솟은 로봇의 꽁무니에 아홉 개의 꼬리가 나와, 열을 뿜는 반사판을 보조하고 있었다.
마침내 뚜껑 전체를 녹여버리자 안쪽으로 그리 크지 않은 터널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쪽에는 부러지고 꺾인 가시들이 잔뜩이었다.
“괜찮아?”
옆으로 내려선 신시아의 질문에 어느새 반사판을 몸을 되돌린 이수련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시를 주워들어 살핀 신시아.
“오메가 님이 쓰는 검에 잘렸네.”
“낭군의 냄새가 멀어지고 있구나.”
신시아와 이수련이 동시에 말했다.
“가자.” / “가자꾸나.”
둘이 사라진 터널로 기계화 좀비들이 뛰어들었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어디선가 날아온 퓨전 코프의 원격 조종 로봇들도 안쪽으로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