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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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이잉- 지이잉-
영 거슬리는 소리가 잠을 방해했다.
손을 뻗어 몇 번이나 더듬거린 끝에 자기 전에 항상 침대 옆 협탁에 놓아두는 귀걸이를 잡아챌 수 있었다.
영 올라가지 않는 눈꺼풀을 힘들게 밀어 올려 시간을 확인하니 오전 7시 30분이었다.
귀걸이를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졸려서 대충 이마에 얹고 터치하자 생체 인식이 완료되었다는 작은 음성과 함께 이어서 앨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무시고 계셨죠? 깨워서 죄송해요.
“나 어제 06시에 들어오지 않았니? 설마 25시간 반 정도 잔 거야?”
-아뇨. 한 시간 반 주무셨어요.
눈을 뜨기 힘든 게 너무 많이 자서가 아니라 덜 자서 피로가 덜 풀린 거였구나.
짜증이나 화를 낼 기운도 없었다.
수면 부족으로 오는 피로는 무슨 스킬을 사용해도 말끔히 해소되지 않았다.
그 덕에 정상적인 생활을 위해 못해도 6시간은 자려고 노력 중인데······.
“한 시간 반 만에 깨우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냐. 적어도 오전에는 깨우지 말아 달라고 올라오면서 부탁까지 했잖아.”
-저도 알죠. 웬만해서는 오후에도 안 깨우려고 했어요. 진짜로요. 근데 아침부터 에이들리 씨가 오셨어요. 사장님을 꼭 뵈어야겠다고 하시네요.
“으으······대충 씻고 내려갈 테니까 커피 한 잔 진하게 부탁해. 차가우면 더 좋고.”
-알겠어요. 준비해둘게요.
흘러내리듯 침대에서 내려와 화장실로 향했다.
퉁퉁 부은 눈으로 닦느니 마느니 하면서 이를 닦고, 대충 얼굴에 물만 묻힌 다음 머리는 감지도 않고 화장실을 벗어났다.
며칠 동안 옷 안 갈아입고 다닐 거면 방에 올라올 때마다 꼬박꼬박 넣어두라며 앨리스가 구매한 스타일러를 열어 안에 걸려 있던 티셔츠를 꺼내 입었다.
헐렁했던 티셔츠가 내 몸 사이즈에 맞춰 적절히 조정되었다.
피는 물론이고 호버보드에서 튀어 오른 정체 모를 액체와 불티가 묻어 있었는데 티셔츠는 말끔했다.
자체 방오성이 뛰어나다고 하르파고스 상무가 자랑했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스타일러의 분자 진동 세탁 기능 역할이 더 큰 것으로 보였다.
이대로 내려가기에는 머리 꼴이 말이 아니라서 스타일러 안쪽에 넣어두고 굉장히 오랫동안 꺼내지 않은 모자 하나를 꺼내 썼다.
내 의사와 관련 없이 이수련이 커플 모자라고 떠맡기듯 선물한 것이었다.
귀가 머리 위쪽에 나 있는 수인들을 위해 나온 것인지 모자 위에 커다란 구멍이 두 개 있었다.
마지막으로 충전을 위해 따로 예공방에 맡겨 특수 제작한 충전 독에 끼워놨던 칼자루를 독에서 분리해 손에 들었다.
여분 배터리도 충전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지만, 어젯밤, 아니 몇 시간 전에 한 번도 역전개하지 않고 그렇게나 휘둘러댔는데도 힘차게 검날을 뿜어내던 걸 보면 앞으로 보조 배터리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당했지.’
출력이나 유지력뿐만 아니라 위력 자체도 향상되었다.
호버보드를 탄 놈들 중 마법을 사용하는 놈들이 몇 있었는데, 그들이 완성한 마법은 검에 닿기 무섭게 무효화 되거나 깨져버렸다.
어느 정도의 마법까지 무효화하는지는 시간이 없어 시험해보지 못했지만, 한층 더 굉장한 무기가 되었다는 것은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가볍게 위로 던진 칼자루를 낚아채 옆구리에 꽂고 사무실로 내려갔다.
문을 열자마자 짜증이 잔뜩 난 표정의 에이들리가 나를 향해 벌컥 소리쳤다.
“당신 미쳤어? 무슨 짓을 한 거야! 인신 공양이라도 한 줄 알았어! 당신이 죽인 사람이 스무 명이 넘어! 스무 명이! 그런 짓을 하고 잠이 와?”
그 정도 될 거다.
모자에 뚫린 구멍을 통해 감지 못한 머리의 간지러운 부분을 긁적이는 동안 더욱 흥분한 에이들리의 말은 멈출 줄을 몰랐다.
“너 이 새끼 피츠 그 자식이랑 짜고 나 골로 보내려고 하는 거지? 아니면 러쉰이 심은 쁘락치냐? 뭐야! 말해!”
심드렁한 표정으로 사무실 소파로 가서 앉으며 기지개를 쭈욱 폈다.
앨리스가 가져다준 커피를 한입에 털어 넣―.
“읏 뜨거! 찬 걸로 부탁한다고 했잖아!”
“빈속에 찬 거 안 좋아요.”
“고오맙다.”
커피잔을 내려놓고 아직도 씩씩대고 있는 에이들리에게 말했다.
“뒷감당하시겠다면서요. 선거 운동 첫날부터 이러시면 서로 좀 곤란한데요.”
“제대로 미친놈이 여기 있네. 여기 있어!”
“제가 인간 백정이고 피에 미친 사이코패스 살인마라서 그 난리를 친 거 아닙니다. 걔네들, 에이들리 씨 반대 진영에서 고용한 정치 깡패예요.”
“······증거는.”
에이들리의 말에 나 대신 앨리스가 대답했다.
“러쉰의 비호 아래 있는 이들이 강제로 해당 부지를 점거했다는 증언과 영상을 확보했어요.”
후앙이 동종 업계 사람들에게 연락을 쫙 돌린 덕이다.
사실 대림 에어리어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있는 사소한 갈등이나 충돌이지만 이권이 얽혀있고 그 이권이 선거와 관련되어 있다면 일을 더 크게 부풀리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다.
분노가 넘실거렸던 오리너구리 수인의 얼굴에 차츰 영악하고 노회한 그늘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하품을 한번 하고 말했다.
“그리고 걔네들 보통 놈들 아닙니다. 브리가드죠.”
“브리가드? 유적지 습격하는 강도 놈들? 그놈들이 여기에는 왜?”
나 때문인 것 같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모르죠. 여튼 어제 만났을 때 자랑스러운 대림 에어리어 어쩌고 하셨죠? 수긍은 힘들지만, 어쨌든. 상대 인사가 브리가드까지 끌어들였네요. 이런 건 좋은 재료죠? 팩트니까 마타도어(Matador: 흑색선전)도 아닐 거고.”
이제 에이들리는 내 옆의 소파에 앉아 한쪽 다리까지 달달 떨고 있었다.
“팩트인 줄은 어떻게 알 수 있나. 그것도 증거가 있나?”
“증거 되게 좋아하시네.”
“정치는 명분 싸움이야! 명분을 위해서라면 없는 증거도 만들어 내야겠지만 진짜 증거가 있다면 압도적인 우위를 선점할 수 있어!”
“현장에 아무도 못 들어가게 통제하라고 부탁드렸는데, 그건 어떻게 됐습니까?”
“자네가 말한 사설 집행자 사무실 소속 말고는 못 들어가게 힘 좀 썼어.”
물론 키클롭스 아재네 사무실이다.
아침부터 불러서 좀 미안하긴 했지만, 나랑 관련돼서 손해 본 적이 없다는 말과 함께 키클롭스 아재는 비번이 아닌 집행자들을 다 끌고 바로 현장으로 향했다.
앨리스에게 물었다.
“메시지는 남겨놨지?”
“네. 주무시기 전에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
“어제 댁에 늦게 들어가셨나······.”
앨리스가 들고 있던 패드에서 진동음이 들렸고, 확인한 앨리스가 내게 패드를 내밀었다.
통신 버튼을 누르고 스피커 모드로 전환하자 익숙한 얇은 목소리가 들렸다.
-메시지 확인하고 바로 연락했습니다. 어제 늦게까지 연구실에 있다가 와서 좀 늦었군요.
하뮬이었다.
“늦기는요. 그 간 별일 없으셨죠? 우리 하뮬 교수님 여기저기 방송 나오시는 거 보니까 아주 얼굴이 피셨던데요.”
-그게 어디 다 제 덕이겠습니까. 우리 호위대장님 덕이죠.
옆에서 눈이 동그래진 에이들리가 입 모양으로 ‘하뮬?, 네오-서울대 하뮬?’이라며 내게 확인을 요구했지만, 가뿐히 씹고 하뮬에게 본론을 꺼냈다.
“다름이 아니라 대림 에어리어에서 브리가드로 추정되는 놈들이 발견됐거든요. 제가 보기엔 영락없는 브리가드인데 못 미더워하는 사람들이 좀 있네요. 유적지에서 브리가드를 몇 번 마주쳐 보신 교수님이 보시면 확실히 아실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저만큼 브리가드랑 많이 마주친 사람도 흔치는 않죠. 그런데 그놈들이 왜 대림 에어리어에 있습니까?
“여기 의원 선거 있는 거 아시죠? 거기서 떨어지는 콩고물이라도 있는 모양입니다. 상황은 끝났고 현장은 보존 중인데 어떻게 한 번 봐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거 뭐 어렵다고요. 오전 강의도 없으니 들러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더 상세한 부분은 저희 사무 안드로이드가 안내해 줄 겁니다. 그쪽 통제하고 있는 곳에 연락해서 교수님 호위를 한 명 보내달라고도 해놓겠습니다. 참, 한 가지 당부드리자면······아침 식사는 하지 않고 오시는 게 좋아 보입니다. 현장이 깔끔하다고는 할 수 없어서요.”
“저, 저기 하뮬 교수님 되십니까? 저는 대림 에어리어 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에이들······.”
패드 옆에 얼굴을 붙인 에이들리는 어떻게든 하뮬 교수와 얇은 인연이라도 만들고 싶어 했다.
서라벌 권역에서 돌아온 이후 인지도와 명성이 크게 높아진 하뮬 교수였다.
일반 시민들이 고고학과 교수의 이름을 알게 되는 것으로 모자라 네오-서울 대학 고고학과의 입학 점수 컷이 역대급 점수를 찍었다고 하니 어쩌면 고고학계를 넘어 교수나 학자 중 현재 가장 화제성 있는 인물일 것이다.
재빨리 스피커 모드를 종료하고 앨리스에게 패드를 넘겨주었다.
이제 적당히 식은 커피를 한 모금 하고 에이들리에게 말했다.
“권위 있는 사람의 한마디면 충분한 증언이 되겠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에이들리의 눈을 마주 보며 으름장 아닌 으름장을 놓았다.
“이 정도는 그쪽에서 알아서 해주실 거라고 기대했는데 조금 실망이군요. 이번 일을 재고해야······.”
내 손을 덥석 잡는 에이들리였다.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저 이번 선거 이겨야 합니다.”
손을 비틀어서 에이들리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선거는 모르겠고, 일단 서로에게 도움은 되어야죠. 안 그렇습니까? 그리고 이건 시작이니까 준비 단단히 해야 할 겁니다. 혹시 모르죠? 이번 일을 잘 마무리하시면 의원도 되고 행정관도 되고 하실지?”
커피를 한 잔 다 마셨는데도 여전히 졸렸다.
엉거주춤 일어나 사무실 문을 열었다.
“나가보셔야죠? 아침부터 이래저래 바쁘실 것 같은데. 저도 못 잔 잠이나 더 자렵니다. 교수님 들렀다 가시면 현장 정리까지 잘 좀 해주십쇼.”
“예에······.”
분기탱천했던 처음 모습과는 다르게 순한 양처럼 사무실을 나서는 에이들리에게 진심을 담은 충고 한마디를 건넸다.
“자기 기분 따라서 반말하고 그런 건 좀 유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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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SS 암흑가의 은밀하게 위장된 공간.
마데르노에게 비보가 전해졌다.
“전멸? 지금 제가 잘못 들은 겁니까?”
“빅웨일에서 방금 전해진 소식입니다.”
브리가드 구성원들은 다른 조직이나 권역들의 추적을 피하기위해 현재 서해 공해 깊은 곳에 대기 중인 기함 빅웨일을 경유하는 자체 통신 프로토콜을 사용 중이었다.
“류정이 남긴 부대원들이 전멸이라······.”
질끈 깨문 마데르노의 입술에서 시커먼 피가 한 방울 떨어졌다.
“그런 일을 벌인 놈은 역시······.”
“정황으로 봤을 때 오메가가 유력합니다. 에이들리의 선거 사무실에서 오메가가 나오는 것도 목격됐다고 합니다.”
“에이들리······.”
“저희가 지원 중인 러쉰의 선거 상대입니다.”
“우리를 눈치챈 것 같군요. 뱀은 어떻게 하고 있죠?”
“서해 권역에 있는 리벨리온의 영역을 대부분 파괴했다고 합니다. 다만 그 거신족 혼혈의 생사는 알 수가 없다는군요.”
“흠······.”
마데르노는 자신의 저주에 다리가 먹히자 괴수에게 다리를 물어뜯게 하고 도망친 엘프가 생각났다.
‘거신족 혼혈과 그 엘프가 리벨리온의 구심점이라고 했지. 둘 중 하나라도 죽였어야 했는데 둘 다 살려 보낸 건 뼈 아프군.’
하지만 이내 마데르노는 고개를 가볍게 털어 그런 생각을 털어냈다.
정말 아픈 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죽어야 했던 호버보드 부대원들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이미 매몰된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들에게 최소한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나아가야 했다.
“뱀에게 전하세요. 계속해서 기다릴 수는 없다고. 나는 네오-서울로 갑니다. 가서 류정의 복수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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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후, 부족한 잠을 보충한 나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으아! 꿀잠!”
뭐라도 먹어야 하겠기에 이수련 선정 대림 에어리어 탑 5안에 드는 사무실 앞 순대국집에 가서 앉기 무섭게 순대국 특을 주문하자 누군가 내 테이블로 다가왔다.
“합석 좀 합시다.”
포마드를 발라 머리를 모두 뒤로 넘긴 팬더 수인이 내 앞에 앉았다.
금목걸이, 금반지, 금 송곳니까지 금으로 둘둘 두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팬더 수인이 꺼드럭대며 말했다.
“들어봤으려나 모르겠는데, 나 루쉰이라고 이런저런 사업하는 놈이요. 이번에 저기 어디 의원 선거도 나가고.”
젓가락을 꺼내며 물었다.
“사업하면, 돈 많냐?”
“그럭저럭. 굶을 걱정은 안 하지.”
“그럼, 여기 네가 사. 이모! 모듬 순대 중자 하나랑 수육 대자 하나 추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