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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같아서는 다 뒤집어엎으면서 호버보드 탄 놈을 따라가서 머리통을 붙잡고 아스팔트에 갈아버리고 싶었는데 일단 약속은 약속이니 그런 마음을 꾹꾹 누르고 택시를 새로 잡아탔다.
‘나는 프로다. 나는 프로다. 작은 일에 집착해서 큰일을 망치지 않는다. 완벽하게 갖춰지고 나서 족쳐도 늦지 않다······.’
자기암시에 가까운 말을 중얼거리며 마음을 다스려도 쉽사리 열이 가라앉지 않았다.
‘저런 놈은 바이크만 타고 있었으면 그냥 잡는 건데!’
인상을 팍 쓰고 택시에서 육두문자를 내뱉고 있으니 택시 기사가 이번 에어리어 의원 선거에 관련된 정치 얘기를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앞만 보고 운전을 했다.
화가 잔뜩 난 상태로 에이들리의 선거 캠프가 있는 건물에 도착했다.
황송스럽게도 건물 밖에까지 나와서 발을 동동 구르는 피츠가 택시에서 내린 내게 달려왔다.
“안 오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말씀까지 하셔서요.”
“그 쪽한테 한 말 아닙니다. 오다가 돌발적인 사고가 좀 있었어요.”
내가 무심하게 말하자 피츠는 안도하는 웃음을 흘렸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럼, 일은 맡아주시는 쪽으로 생각해도 될까요?”
“그건 이제부터 알아가야죠.”
“예?”
“다행스럽게도 아슬아슬하게 시간 맞춰 온 모양이네요. 에이들리 씨는 시간 약속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했죠? 그게 자기 시간에만 해당하는 건지, 아니면 남의 시간도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한 번 봅시다. 들어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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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들리 선거 캠프는 상당히 컸다.
사무실 곳곳에 정치인 특유의 양복을 입고 어색한 웃음을 짓는 에이들리의 포스터가 붙어있었으며, 파티션과 가벽으로 나뉜 내부에서 여러 사람들이 통신 디바이스를 몇 개나 앞에 늘어놓고 다들 전화를 돌리기 바빴다.
그러다 서류 뭉치를 들고 파티션 너머의 다른 부서에 넘겨주면 그 서류가 사무실 이곳저곳을 몇 바퀴나 돌다가 다시 파일철에 담겨 어디서 구해온 지 모를 연식이 좀 된 것 같은 캐비닛으로 들어가곤 했다.
나는 그런 선거 캠프에서 다른 파티션처럼 싸구려 회색 부직포를 떼어 붙인 곳이 아니라 천장까지 닿아있는 높은 철제 파티션으로 구분된 곳으로 안내받았다.
파티션 안쪽으로 들어서자 외부의 소음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커다란 책상에 올려진 명패에 자개로 에이들리라는 글자가 박혀있었다.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꼰 채로 얼마나 지났을까, 파티션 밖이 소란했다.
‘수고 많으십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와 같은 힘찬 인사와 환호가 누군가를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굳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어차피 환호의 주인공을 곧 보게 될 것 같았다.
파티션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전체적으로 둥그런 체형에 길쭉하게 튀어나온 부리, 허리춤에서 아래로 늘어진 넙데데한 꼬리를 지닌 오리너구리 수인이었다.
그가 나를 보고 대뜸 말했다.
“오메가라고 했나? 미안, 미안. 식사 자리가 길어져서 늦었어. 이해 좀 해줘. 사람이 어떻게 딱딱 맞춰 사나. 정치는 더더욱 그래.”
가볍게 귀걸이를 터치해 시간을 확인했다.
“23분 늦었고, 초면에 대뜸 반말. 무슨 일 때문에 늦는다는 안내 사항도 없었고.”
양복 상의를 벗어 옷걸이에 걸던 에이들리는 뒤돌아 나를 뚫어져라 보다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군지 모르나?”
“그쪽은 내가 누군 줄 알아서 이렇게 대하시나? 이런 식이면 나는 같이 일 못 하겠는데.”
“허, 참.”
화난 걸음으로 자신의 책상을 향해 걸어간 에이들리가 수화기를 들고 말했다.
“피츠, 잠깐 들어와.”
수화기를 내려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피츠가 달려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나와 에이들리 사이에 흐르는 불편한 공기를 감지한 모양인지 피츠는 연신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흘끔거렸다.
그런 피츠를 향해 에이들리가 손짓했다.
“이리 와봐.”
피츠가 종종걸음으로 다가가자 에이들리는 그대로 피츠의 조인트를 까버렸다.
“으윽!”
피츠가 정강이를 부여잡자 에이들리는 물갈퀴 달린 손으로 피츠의 뺨을 갈겼다.
“네가 뭘 어떻게 했길래 오메가 씨께서 이렇게 화가 나셨어!”
이야, 자기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고 부하와 내 탓으로 방향을 틀어버렸다.
20년간 선거에서 지고는 있지만 그래도 계속 도전한다는 걸로 봐서 이미 닳고 닳은 정치인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면 겉만 오리너구리고 속은 이무기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명망 있다는 것도 그렇게 보여야 할 자리에서만 만들어 낸 이미지일지 모른다.
저 봐라, 한직에 처박혀 자신이 아니면 탈 대림이 힘들 것 같은 피츠에게는 막 대하지 않나.
그리고 아마 내게서 기선을 빼앗아 오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내가 이만큼 가차 없다.’, ‘아래 사람들을 꽉 잡고 있다.’, ‘할 때 하는 사람이다.’라는 걸 몇 초 만에 보여주고 있으니까.
“사과드려, 어서.”
에이들리의 말에 피츠는 정강이와 뺨을 번갈아 문지르며 나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나를 보는 피츠의 눈길에 원망이 가득하다.
아니 때린 건 저놈인데 왜 나를 노려보냐고.
책임 소재는 나한테 있는 그림이 되었다.
에이들리, 좋은 쪽이 되었든 나쁜 쪽이 되었든 그릇이 보통은 아니다.
평범한 사람이 가지지 못한 카리스마가 있다.
이런 인물상을 쉽게 봤다가는 이용만 실컷 당하고 버림당한다.
다리를 풀지 않은 채로 에이들리를 응시했다.
그 역시 나를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나가 봐. 마스크라도 쓰고 일해. 손자국 자랑하지 말고.”
다시 허리를 꾸벅인 피츠가 밖으로 사라지자 에이들리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내가 앉은 소파의 반대편 소파에 몸을 묻듯이 앉았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다리를 꼬고 말했다.
“정치는 혼자 힘으로 하는 게 아니라지만 많은 사람이 한뜻으로 움직이기도 쉽지 않은 법이지요. 이 정도면 마음이 좀 풀리셨습니까, 오메가 씨?”
“마음이 풀린 건 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에이들리의 새카만 눈이 빛났다.
“부디 지금 이 모습이 허장성세가 아니길 바라겠습니다.”
“그 정도 구분할 안목 정도는 가지셔야죠. 공사다망하신 분이실 텐데. 안 그렇습니까? 일 얘기 하시죠.”
먼저 얘기하라는 의미로 손바닥을 위로 한 손을 뻗어 보였다.
불쾌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던 에이들리의 입이 열렸다.
“행정관 선거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에어리어 의원 선거는 제법 치열합니다. 밝은 곳과 어두운 곳 모두요. 아무래도 어두운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담당해주셔야 할 것 같군요.”
내밀었던 손을 들어 에이들리 쪽으로 손바닥을 향하게 했다.
에이들리의 부리가 멈췄다.
“왜 덜 중요한 일을 먼저 말씀하실까? 어째 피츠 씨 같은 공무원보다 더합니다? 정치인의 언어는 이렇습니까?”
“크흠······.”
“페룬 마탑의 대림 에어리어 학교 건축 사업. 테오릭 경께 여쭤봤더니 이쪽 캠프에서 이름 정도는 가져다 써도 된다고 하더군요. 대신 당선 이후에 어떻게 할 건지는 페룬 마탑에 따로 연락하라고 하시더군요.”
연신 나를 훑던 에이들리의 눈에서 경계심이 사라졌다.
푸근한 얼굴에 옅은 미소까지 띤 걸로 봐서 상당히 만족했나 보다.
그도 그럴 것이 페룬 마탑의 학교 건축 사업은 기업의 사회 공헌 활동으로 굉장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다른 에어리어에서 해당 사업을 벤치마킹해서 기업들에게 제시하는 것은 물론이고 테오릭 경은 네오-서울 시청으로부터 공헌패까지 받았으니 대림 에어리어에서 방귀 좀 뀐다는 것들은 어떻게든 한 숟가락이라도 얹어보려고 애쓰는 중이라고 했다.
사업 주체가 페룬 마탑이고 테오릭 경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섣불리 접근을 못 한다고도 했던가.
그런 사업에 선거를 앞두고 끼어들 수 있으니 에이들리 입장에서는 호재도 이런 호재가 없을 것이다.
이 안건을 조율하기 위해 연락한 테오릭 경이 나보고 정계 진출을 꿈꾸는 거였냐며 놀라긴 했지만 잠깐 발가락 끝만 담갔다 빼는 거라고 얼버무리긴 했다.
어느새 슬슬 앞쪽으로 상체를 내밀고 있는 에이들리를 향해 계속해서 말했다.
“기계 교단과의 관계는 개입하지 않겠습니다. 앞으로도 계속요. 만일 이 캠프와 기계 교단 사이에 제 이름이 들어간다면 저와 에이들리 씨의 모든 관계와 거래는 중단입니다. 에이들리 씨 본인이 아니라 아래의 누군가가 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일단 저질러놓고 조인트까고 뺨 때리는 정도로는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좋습니다. 전자만 해도 어찌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든든하군요.”
“제가 할 말은 다 한 것 같군요. 이제 듣겠습니다.”
“제시하신 조건, 모두 수용하겠습니다. 선거가 끝날 때까지, 오메가 씨가 벌이는 ‘선거 운동’의 뒷감당은 모두 저희 캠프에서 하겠습니다. 듣자 하니 러쉰이 외부의 어중이떠중이도 끌어모으고 있다죠? 자랑스러운 대림 에어리어에 그딴 놈들을 데려오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러쉰은 이번 에어리어 의원 선거에서 에이들리와 맞붙는 익인翼人으로, 불법적인 사업체를 여러 개 가지고 있으며 몇몇 연합 갱단들의 지원을 받는다는 공공연한 비밀이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라 일어선 에이들리가 나를 향해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털로 덮인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손을 내려다보며 답했다.
“저야말로. 뒷감당이 쉽지 않을 겁니다.”
손을 잡지 않고 뒤돌아 선거 캠프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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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새벽에 가까운 늦은 밤, 나는 덜덜거리는 밴을 타고 대림 에어리어 외곽으로 가고 있었다.
“야, 너네 요즘 사업 잘된다며. 차 좀 바꾸고 그래라. 이게 뭐냐. 당장 퍼져도 할 말 없겠구만.”
운전석에서 핸들을 붙잡고 있는 후앙을 향해 한마디를 했더니 이 녀석이 반격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좋은 바이크 타는 누구라고 있는데, 그거 타고 신나게 쏘다가 딱지 무더기로 먹고 금지당했다던데요. 정현 형님이랑 자코만 빌려 타느라 신났지 뭡니까. 좋은 거 타면 뭐합니까. 그런 꼴 나는데.”
“······곧 돌려받을 거야. 야, 잠깐. 세워 봐.”
덜덜거리던 밴의 엔진이 꺼졌다.
멀리 보이는 커다란 폐공장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저기 맞지?”
“네. 고철 수거 업체들이 공동으로 쓰던 창고 같은 곳이었는데 러쉰이 뒤 봐주는 놈들이 와서 자기들이 쓰겠다고 내쫓더라고요.”
루트에서 기동타격대 같은 별도의 조직을 운영하는 타이린드도 근래 에어리어 의원 선거가 가까워지자 대림 에어리어로 유입되는 위험인물들을 추적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런 타이린드의 말에 따르면 WSS에서 유입되는 인원 중 호버보드를 이용하는 놈들이 외곽의 몇 군데에서 모이는 것 같다고.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야 했는데, 내가(정확히는 내가 아니지만) 터트린 택시 잔해를 수거하러 온 후앙과 얘기하다가 놈들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
후앙이 불만 섞인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더러워도 참아야죠. 상대는 의원 선거까지 나가는 거물 아닙니까.”
“그 정도가 무슨 거물이야. 네가 진짜 거물을 못 봤구나.”
“진짜 거물은 어떤데요.”
밴에서 내리며 말했다.
“여기 있잖아. 거물.”
“······틀린 말은 아니네요.”
“아주 옳은 말이라고 해 임마. 태워줘서 고맙다. 바로 돌아가. 괜히 구경하다가 엉켜 들지 말고.”
“형님이랑 더 얽히는 건 사절입니다.”
조수석 문을 닫는 것과 동시에 후앙이 덜덜거리는 밴을 몰고 사라졌다.
폐공장으로 다가가자 반으로 자른 드럼통에 불을 피워놓고 있던 놈들이 내 발소리를 듣고 반응했다.
“누구야!”
나는 아직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 있었다.
더 이상 다가가지 않자 놈 중 몇몇이 곁에 있던 호버보드에 시동을 걸고 올라탔다.
“마데르노가 여기 있나? 선물이 있다.”
내 말에 보초들이 대부분 호버보드에 올라탔다.
심지어 몇몇은 내 쪽을 향해 질주하기도 했다.
검을 비틀어 완전 전개하고 달려오는 놈들을 베어냈다.
분리된 것들이 날아 뒤로 떨어지는 소리가 후두둑하고 들렸다.
외형은 바뀐 것이 없는데 미묘하게 검이 손에 감기는 감촉이 한결 좋았다.
‘쓸데없는 거 덕지덕지 붙이는 게 아니라 이게 강화고 업그레이드지.’
앞으로 걸음을 옮겨 불이 비치는 영역으로 들어섰다.
모여 있던 이들 중 일부가 내 얼굴을 확인하고 인상을 구겼다.
“휠체어맨은 없나 보군. 그럼 선물은 너희가 가져가라. 내가 줄 선물은―.”
[파도천]
검을 휘두르며 뻗어나간 기파가 폐공장의 앞마당을 뒤흔들었다.
드럼통이 넘어져 불씨가 바닥에 튀었다.
사라진 빛의 빈자리를 어둠이 메우려 밀고 들어오는 것과 같이 움직였다.
그즈음, 폐공장에 안에 있던 놈들도 쏟아져 나왔다.
내가 들고 있는 광자 검날을 목표 삼아 호버보드 부대가 쇄도했으나 들리는 것은 내 것이 아닌 비명과 고함이었다.
“죽음이다.”
동이 틀 무렵, 나는 홀로 서 있었고 내 검은 유일하게 빛나고 있었다.
밀려드는 여명에도 검이 발하는 찬란함은 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