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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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왔어.”
어느새 입주를 마친 사무실 건물 아래층의 상가를 지나 위층에 있는 사무실 문을 열며 말했다.
태양청년단 한반도 중부 발사대의 운영 정지에 관련된 강도 높은 조사를 받기 위해 며칠째 공공 집행본부를 왔다 갔다 하는 중이다.
바이크라도 타고 오가면 기분이라도 환기될 텐데, 발사대로 쏘면서 발부된 수십 장의 딱지, 공공 법규 위반 신고와 더불어 뒤쪽에 쓰레기를 덕지덕지 묻히고 돌아온 꼴에 격노한 앨리스 때문에 몸을 사리기 위해 강제 뚜벅이 신세로 전락했다.
신시아나 이수련이 차를 빌려준다고 했지만, 앨리스가 ‘사장님은 자가 차량과 교통질서의 소중함을 알아야 한다.’라면서 도와주는 사람은 누구든지 사무실 출입 권한을 회수할 거라고 엄포를 놨다.
그 덕에 신시아나 이수련 모두 앨리스의 눈치를 보며 내게 도와줄 수 없어서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인공 지능과 기계 문명에게 말살되는 인간성의 예시가 바로 나 아닐까?
“오셨어요.”
자기 책상에 앉아 있던 앨리스가 들고 있던 패드에서 눈도 안 떼고 말했다.
“사장이 나갔다가 들어왔는데, 벌떡 일어나서 튀어나오는 것까지는 안 바래도 사람 눈은 봐야 하는 거 아니냐? 응? 아무리 내가 딱지를 무더기로 받아왔어도 이런 식의 취급은 조금 곤란······.”
“이거 좀 보세요.”
내 말을 끊은 앨리스가 책상 한쪽의 패널을 터치하자 사무실의 가장 넓은 벽에서 스크린이 내려왔다.
“앨리스야. 나도 자존심이란 게 있다. 니가 이런 식으로 내 자존심을 짓밟으면은, 마 그때는 해결사가 아니라 깡패가 되는······.”
어느 순정남의 대사를 읊던 중, 스크린에 떠오른 화면을 보고 나는 말을 멈췄다.
항공사진이었다.
한때 언론에서 같은 각도에서 비춘 사진을 주구장창 내보냈기 때문에 내게도 매우 익숙했다.
넓게 펼쳐진 항공사진 중에서도 가장 익숙한 곳을 손을 뻗어 가리켰다.
“여기, 그거지? WSS 연안 부두?”
색승과 일전을 벌인 곳이었다.
그 당시 항공사진으로 촬영한 WSS 연안 부두의 비포애프터가 화제가 됐다.
물론 주목도는 애프터가 훨씬 높았다.
토네이도가 휩쓸고 간 듯 찢어지고 잘린 컨테이너들이 부두의 시설들에 박혀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제 자 최근 사진이에요.”
앨리스의 말처럼, 연안 부두의 항공사진은 내가 예전에 봤던 것보다는 많이 정돈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연안 부두의 위아래로 길게 이어진 WSS 암흑가의 모습이었다.
“여기 원래도 이랬나?”
항공사진이라 건물의 꼭대기만 보여서 내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과거 사진과는 많이 달라 보였다.
앨리스가 패드를 만졌고, 스크린이 전환되며 세 개의 사진이 나란히 떴다.
차례대로 나와 색승이 전투를 벌이기 이전, 이후. 마지막으로는 가장 최근의 사진이었다.
연안 부두는 비포의 모습을 되찾았지만, 최근 사진에서 암흑가 곳곳에서 애프터 사진의 연안 부두처럼 곳곳이 눌러앉거나 무너져 있었다.
“혹시 들은 거 있으세요? 여기는 그 문신 엘프가 잡고 있잖아요.”
참고로 앨리스는 샴록과 진오의 얘기를 꺼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우리 사무실이 합법과 불법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지만, 저들은 한반도 내 대부분의 권역에서 범죄자 낙인이 박힌 진짜배기들이라는 것이 첫 번째 이유.
두 번째 이유는 사무실 이주 직후 샴록이 보낸 먹물 까마귀가 터져서 온통 엉망이 되었던 기억 때문이다.
내가 볼 때는 두 번째 이유가 훨씬 크다.
그렇기에 얼른 답했다.
“아니. 그때 이후로는 연락도 안 해. 애초에 그쪽이랑 내가 그렇게 살갑게 지내기도 힘든 관계잖아.”
적의 적은 동지라지만 동지가 됐다고 해서 어제까지 송곳니 보였던 사이가 어깨동무하고 으쌰으쌰하기도 힘든 노릇이다.
트라이포드라고 하는 조직이 꾸미는 일과 그 조직을 이끄는 자들을 알아보기로 말이 된 상태이지만 각자의 노선을 이용하고 있어서 별도의 협력이나 연락책은 없었다.
진오와 샴록은 대림 에어리어 폐교 습격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기계화 좀비에 대한 내용을 더 알고 싶어 했고, 현재로는 유일한 관련자인 헤지르 대주교와의 대면을 내게 요구했다.
하지만 나는 대면을 거절했다.
진오와 샴록 역시 피해자지만 헤지르 대주교도 사건의 피해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에 대한 열의와 봉헌을 위해 어두운 과거까지 꺼내 올려 제자를 키워냈지만, 그 제자에게 배신당한 사람이 헤지르 대주교다.
내가 뭐라고 그 상처를 헤집는단 말인가.
그렇지 않아도 내 일이면 양팔을 걷어붙이고 도와주는 분인데.
그리고 나는 해결사지만 헤지르 대주교는 수십억의 신자를 가진 기계 교단의 성지인 대림 교구의 상징과 마찬가지다.
조심에 조심을 거듭한다고 해도 범죄자와 대면하는 자리를 주선할 수는 없었다.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불어닥칠 파급력의 크기를 추정하기도 어려웠다.
지금은 벡을 돌보며 은퇴만 기다리고 있는 헤지르 대주교에게 더 이상의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대신 해당 일에 대해 내가 겪은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성당 지하에 있던 기계화 좀비 공장부터 나이누안의 잔류사념에서 본 것까지 모두.
수연이 사라진 지금 진상을 밝히기는 쉽지 않겠지만 도움이 필요하면 얘기하라는 말과 함께였다.
내 얘기를 모두 들은 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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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너머로 보이는 진오의 눈빛이 사나웠다.
“나는 여전히 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도 마찬가진데.”
잠깐 어금니를 질끈 문 진오가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이번 일에 대해서는 네 도움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거다. 그걸 부정할 마음은 없어.”
“여성의 삶도 나쁘지는 않을걸? 물론 나는 궁금하지도 않고 그렇게 될 생각도 없지만.”
진오가 이를 가는 소리가 살벌하게 울려 퍼졌다.
그의 소매 끝을 붙잡은 샴록이 고개를 흔들고 나서야 진오는 거친 숨과 함께 말을 마무리 지었다.
“죗값을 나중에 치르겠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다만 수연 그 라미아의 목을 비튼 이후가 되겠지.”
“자수할 거면 미리 연락해라. 우리 사무실에서 검거한 걸로 하게. 양심 있으면 그렇게 하겠지?”
진오가 대답하지 않고 거친 발걸음으로 밖으로 나섰고 뒤따라 나가는 샴록이 재빠르게 중얼거렸다.
“실력만 없으면 길 가다 객사하기 딱 좋은 입을 갖고 계시는군요.”
“아니지. 이럴 때는 이런 입을 가지고도 객사하지 않게 만들어 준 실력을 칭찬하는 게 맞는 거지.”
고개를 양쪽으로 절레절레 젓는 샴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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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가 패드를 조작하며 설명을 덧붙였다.
“제가 잠깐 살펴봤더니, 어제 단 하루 동안 정체불명의 무장 집단이 암흑가를 휩쓸었대요.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거의 군인 같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암흑가뿐만 아니라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파악이 힘든 것 같더라고요. 그러던 중에 다크웹을 좀 가봤는데······.”
동영상 하나가 재생됐다.
카메라가 깨졌는지 화면에는 노이즈가 가득했지만, 소리는 선명했다.
거대한 짐승이 서로 얽혀 싸우는 듯한 포효 소리가 여러 번 들렸고, 시간이 지날수록 포효 소리는 고통스러운 신음과 깨갱거리는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사건이 벌어진 곳 대부분이 통제되고 있대요. 이건 통제구역 중 하나의 사진이고요.”
동영상 다음으로 뜬 사진은 나도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서라벌 권역의 유물 탐사 도중, 마데르노가 만들어 낸 거대한 그림자였다.
담쟁이덩굴처럼 건물 일부를 감싼 그림자 곳곳에 시커먼 괴수들의 신체가 박혀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 작게 보이는 것은 호버 보드를 탄 인원들.
“마데르노군. 옆에는 브리가드고.”
“확실한 건가요?”
“적어도 내가 아는 게 맞다면.”
눈에 힘을 주고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인 앨리스가 패드를 다시 조작하자 화면이 바뀌었다.
“서해 권역 외곽의 섬들 사진이에요. 리벨리온의 거점이죠.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랬는데―”
저 멀리 다른 섬들이 몇 개 정도 보이는 푸른 바다 사진이었다.
“어제 올라온 사진은 이렇대요.”
바뀐 화면에는 섬이 없었다.
푸른 바다와 높은 하늘, 끝.
“사라졌다고? 주위 섬들도 모조리? 다른 사진 아니야?”
“위도, 경도, 고도 모두 일치한다는 거 확인됐어요. 그리고 서해 권역이 발표하길 소속을 알 수 없는 다량의 잠수함이 레이더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대요. 저 섬들이 사라지기 직전에요.”
“너는 어제 벌어진 두 사건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고 보는 거고?”
“우연치고는 너무 공교롭지 않아요?”
그웨지안에게서 얻어낸 정보에 따르면 과정과 방식은 알 수 없지만, 현재 수연과 마데르노는 손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상당한 무력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지만 유적지 말고는 관심이 없던 브리가드가 WSS 내륙까지 진출해 암흑가를 침공한 상황.
암흑가 안쪽에 미발굴 유적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순진한 생각 같았다.
동시에 진오가 있던 리벨리온의 거점도 언어 그대로 지워졌다.
이 정황에서 도출할 수 있는 결과는 몇 개 없었다.
정체가 드러나자 네오-서울을 떠났던 수연이 다시 돌아왔다.
그것도 든든한 동맹과 지원군을 이끌고.
첫 행보는 자신에게 반기를 든 자들을 짓밟았다.
신시아와 이수련의 조사에 따르면 트라이포드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꽤 넓게 퍼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어쩌면 자신들이 그 영향력 내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나 집단도 있을 수 있다고.
어쨌든 그들 중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부류가 있다면 어떻게 되는지 제대로 보여준 셈이다.
“진오와 샴록에 대한 내용은 없었어?”
“둘은 얼굴이 좀 알려진 편이라서 목격 정보가 있을 줄 알았는데, 일단 시체라도 봤다는 목격담은 없어요. 어쩌면 시체도 안 남을 만큼의 무언가에게 당했을지도 모르죠.”
“직접 만나본 감상으로는 그렇게 될 정도로 약한 것 같지는 않은데······그렇게 됐다면 어쩔 수 없는 거고.”
앨리스가 나를 째려봤다.
“사장님도 조심해요. 저쪽에서 저렇게 강경하고 위험하게 나오고 있는 판에 사장님한테 해코지 안 한다는 보장 없잖아요.”
“그럴······수도 있겠네.”
“설마 안 그럴 거라고 생각한 거 아니죠?”
“앨리스야. 생각을 해봐라. 나는 그냥 걸어가는데 자기들이 와서 어깨빵 하려고 하길래 괘씸해서 나도 어깨에 힘 좀 줬더니 ‘으억!’하면서 튕겨 나가는 그림이다. 이거야. 그걸로 끝나나? 튕겨 나가더니 나한테 씩씩대면서 ‘힝! 죽여 버린다!’ 하는 거랑 다른 게 뭐야. 나는 억울하지 않겠냐고.”
“어깨에 힘을 안 주는 선택지도 있잖아요.”
“내가 그렇게 하면. 이 사무실 운영은 어떻게 하고 네 충전 요금이랑 간식비는 어디서 벌어오니? 간식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너 일렉트로닉 코마였다가 나아진 이후로 부쩍 한정판 오일 샌드를 찾더라? 그전까지는 일반 버전도 잘만 먹더니?”
“원래 아팠다가 나으면 입맛이 바뀌기도 하고 그러는 거예요. 여튼! 사장님이 길가다가 어깨빵 맞은 피해자라고 해도 요새는 세상이 흉흉해서 어깨빵 하려던 놈이 칼 들고 덤벼드는 건 뉴스에도 안 나오니까 조심하라고요!”
앨리스의 말에 몸을 돌려 외양은 변화가 없지만, 업그레이드를 한 칼자루가 꽂혀 있는 허리춤을 앞으로 내보였다.
“칼은 나도 있어.”
“어쨌든 조심하라는 거죠. 안드로이드가 걱정을 하면 귓등으로라도 듣는 척을 하세요.”
그때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리며 똑똑하는 소리를 냈다.
앨리스가 기겁했다.
“왔다!”
그 바람에 나도 목소리를 높였다.
“뭐가!”
“사장님 해코지하려는 사람!”
“진짜?”
“모르죠! 그런데 타이밍이 절묘하잖아요!”
“그래도 그렇지 해코지하려는 사람이 노크를 할까?”
“상식이 통하면 길가에서 어깨빵하고 사람 해코지하려고 하겠어요?”
하긴, 듣고 보니 그랬다.
그냥 와장창하고 공격하는 것보다 정중하게 노크하고 해코지하는 게 더 괴상하고 어딘가 비틀려 보였다.
그리고 여기는 그 괴상하고 비틀린 놈들이 득시글대는 네오-서울 대림 에어리어고.
밖에 있는 사람이 다시 한번 노크했다.
앨리스의 어깨를 밀었다.
“네가 나가 봐.”
“제가요? 밖에 있는 사람이 누군 줄 알고 저보고 나가래요.”
“사무 일은 원래 네가 하잖아!”
다시 노크 소리가 들릴 때까지 서로 네가 나가라니, 사장님이 나가보라느니 티격태격하다가 앨리스에게 말했다.
“근데 우리 건물이랑 시스템 바꾸면서 지인 통한 예약 말고는 안 받기로 한 거 아니야?”
“그······렇죠.”
“그리고 건물 내 CCTV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잖아.”
“그것도 그······렇죠.”
“뭐야. 빨리 CCTV 확인하고 예약 안 하셨으면 방문 힘들다고 안내해.”
앨리스가 패드를 만지작대자 아직 연결된 사무실 벽의 스크린으로 문 앞 CCTV 화면이 떴다.
적당히 후줄근한 정장을 입은 인간 남성 하나가 사무실 앞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
“어?”
“아시는 분이세요?”
분명히 한 번 본 사람이었다.
“잠시만.”
어디서 봤더라.
내 책상으로 달려가서 잡동사니들을 구겨 넣어뒀던 서랍들을 꺼내 하나씩 뒤졌다.
“분명 있을 텐데······.”
내가 하는 짓을 보고 있던 앨리스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패드의 마이크 부분에 대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희 사무실은 지인 소개를 통한 예약이 아니면 의뢰를 받지 않고 있습니다.”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아마 앨리스의 목소리가 나는 스피커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것이다.
그러자 앨리스도 나와 같은 말을 했다.
“어?”
남자의 말이 앨리스의 패드를 통해 흘러나왔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전에 한 번 방문한 적이 있어서요. 그걸로라도 어떻게 안 될까 싶어서 이렇게 실례인 줄 알면서도 찾아왔습니다. 제가 모시는 분께서 꼭 한 번 해결사님과의 자리를 만들고 싶어 하셔서요.”
나는 마침내 책상 서랍 가장 안쪽에서 목표하던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데이터 명함이 활성화된 시대, 내가 받았던 몇 안 되는 종이 명함이었다.
그가 내가 든 명함에 적힌 글자를 똑같이 말했다.
“네오-서울 대림 에어리어 녹지사업소 과장. 피츠라고 합니다.”
저 남자는 내가 이 몸에서 깨어난 초기, 몸에 곰 수인의 피가 흐르는 강화 인간 학우에게 괴롭힘 받는 아들의 일을 의뢰하기 위해 찾아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