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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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
이수련의 말에 내가 관심을 가지자 앨리스는 이수련을 향해 사악한 얼굴로 패드를 들이미는 것을 멈췄다.
그 틈을 타서 이수련은 사무실 중앙의 테이블에 앉아있던 내 곁으로 바짝 와서 붙었다.
“반대편으로 가요. 자리도 많은데.”
“간만에 보는 것인데 낭군은 왜 이리 매정한 것이냐!”
“친할수록 거리를 지켜야 한댔어요.”
“하긴! 우리가 친하긴 하다!”
친하다는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헤실헤실 웃으면서 테이블을 훌쩍 넘어가 반대편 소파에 앉는 이수련이었다.
그걸 본 앨리스가 ‘오······’하는 입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그래도 이제 좀 봤다고 이 막무가내 구미호를 어떻게 달래는지 나도 서서히 알아가고 있다고.
앨리스가 탕비실에 들어가 이수련의 취향에 맞는 다과를 가져왔다.
투박해 보이는 개껌과 에너지 음료라니.
탕비실에서 처음 발견했을 때 이수련이 자기 간식으로 사놓은 거라길래 반신반의했는데 기쁜 표정으로 포장을 뜯고 개껌을 아작거리며 씹고 있는 걸 보니 개과는 개과구나 싶다.
에너지 드링크 캔을 따서 꿀떡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원하게 마신 이수련이 호쾌하게 말했다.
“역시 네오-서울에서 만든 개껌이 제일 맛있느니라. 한신나 권역에서 나오는 건 간이 너무 세서 하나도 제대로 넘기지 못하겠더구나. 개과 수인들을 위한 가이세키(일본식 코스 요리)가 유명하다길래 먹어봤는데 너무 달고 짜서 원······. 역시 한반도 사람은 한 상에 밥, 반찬, 국물 놓고 수저로 먹는 게 최고이니라! 낭군과 앨리스도 오늘 별일 없으면 본좌와 함께 나가서 순대국이나 한 그릇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얼굴은 이제 얼굴선이 드러나는 소녀의 얼굴을 하고서 뱉는 발언 하나하나마다 아저씨가 가득하다.
조금 전 앨리스의 패드로 본, 이수련이 남긴 것이 분명한 댓글을 생각하자 그 이미지가 더더욱 굳어진다.
“일단 그 소문이란 것부터 들어보고 순대국을 먹든지 말든지 하죠.”
“오! 관심을 가질 줄은 몰랐는데 의외로구나.”
“본인이 말 꺼내놓고 왜 의외래요.”
내 말에 이수련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와 앨리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낭군은 가능한 확실한 정보에 의존해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느냐? 앨리스도 가능하면 그런 기준에 부합하려 했고. 그런데 소문은 신뢰성도 확실성도 매우 떨어지지 않겠느냐?”
평소에 보면 헐렁헐렁한데 맥을 짚어야 하는 곳에서는 정확하게 짚을 줄 안다.
기업의 총수라는 면모가 불쑥불쑥 드러나는 것이다.
이수련의 말을 들은 내가 엄지와 검지를 붙인 손으로 테이블 모서리를 탁탁 두드린 다음 테이블 모서리를 따라 엄지와 검지를 뗐다.
이제는 사무실 일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팀 오메가’ 사이에서 통하는 수신호다.
지금 여기서 하는 말은 테이블 바깥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뜻.
매번 번거롭게 ‘지금부터 하는 얘기가 밖으로 퍼지면 누가 곤란해지고 머리 아파지고 어쩌고저쩌고’하는 게 귀찮아서 내가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앨리스, 신시아, 이수련의 마음에 들었는지 자기들끼리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수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이유가 있는 모양이구나. 본좌에게 말해보거라.”
그 말을 들은 나는 앨리스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너도 여기 포함이다?”
“저는 늘 최고등급 보안이죠.”
위올란트의 존재를 숨겨달라고 부탁한 템페시르나에게는 미안하지만, 둘에게 위올란트 얘기를 꺼냈다.
노인 한 명이 죽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 정도로 노인들이 지닌 지혜의 가치가 높다는 것인데, 템페시르나도 오래 살았지만, 이수련도 그에 못지않게 오래 살았을 테니 도서관 하나 보다는 둘을 이용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는지 대략적인 얘기를 들은 이수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올란트라······그래서 낭군이 검에 대한 소문에도 관심을 가진 것이었구나. 이해가 된다.”
“들어본 적 있어요?”
“물론. 하지만 만난 적은 없느니라. 본좌가 어렸을 때부터 이미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살아온 정령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었지. 과거에는 다른 곳에 살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네오-서울에 있을 줄이야.”
“만난 적이 없다는 것도 신기하네요. 위올란트는 여러 무기를 만든다는데, 이수련 씨는 로봇들의 무장에 관심이 많으니까 접촉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거든요.”
이수련이 콧김을 흥하고 내뿜었다.
“본좌는 남의 손을 빌리지 않는다.”
하긴, 퓨전 코퍼레이션은 로봇 산업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대단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집단과의 교류를 극도로 꺼린다고 들었다.
직원 공채가 없고 죄다 특채나 내부 추천으로 인력을 충원한다고, 그렇게 들어온 직원들이 다른 곳으로 이직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고 하니 대단한 폐쇄성이다.
이수련에게 말했다.
“이러니 제 검에 대한 건 뭐가 됐든 좋으니 일단 다 신경 쓰고 있어요. 앨리스도 요새는 그쪽에 집중하고 있고요. 그러니까 그 소문이라는 것도 말씀해보시죠. 들어보고 판단은 제가 할 테니까요.”
“한신나 권역의 북동쪽, 기후岐阜라고 하는 곳에 아주 독특한 곳이 있느니라. 세키関라는 마을인데 무기, 그중에서도 검을 만드는 독립 장인인 도장刀匠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사실 검의 탈을 쓴 온갖 무기들을 만들기는 하더라 만은······. 하여튼 이번 출장의 일정 중 그곳에 방문할 일이 있었느니라.”
“남의 손은 안 빌린다면서요.”
앨리스의 질문에 앨리스가 짜증 섞인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때로는 원치 않아도 해야 하는 일이 있는 법이다. 한신나 연합 의회에서는 세키의 도장들이 만든 검을 사용하는 사무라이 전투 로봇을 만들어 주길 원하는 눈치더구나. 그런 것보다 낭군의 모습을 본따 만든 오메가 MK7이 훨씬 낫거늘!”
야스민 공의 대리로 참석했던 마도공학 경매에서 돌아오는 길에서 이수련이 등장해 헬기에서 떨궜던 로봇에 오메가 MK1이라고 들었는데 어느새 7번째 개정 버전이 나와 있는 모양이었다.
다만 광자 검은 모양만 비슷할 뿐, 내가 사용하는 것과 비교하면 지속시간이나 출력이 한참 낮은 편이라고 듣기는 했다.
어쨌거나 내 모습이니 로열티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그곳을 방문해서 도장들과 얘기를 나눠봤는데, 의외로 낭군의 검에 대한 관심이 높더구나. 내가 네오-서울에 있다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 오메가 상을 직접 본 적이 있냐고 물어와서 놀랄 지경이었느니라.”
나란 녀석······일본 열도에 진출해버릴지도······?
이런, 나다의 말투가 옮으려고 한다.
듣고 있으면 소름 돋는데 중독성이 미쳤다.
이수련의 말이 이어졌다.
“그중 제법 나이를 먹은 아라크네 도장이 있었는데, 과거에 한반도의 권역을 여행하던 중 낭군의 검을 본 적이 있다고 하더구나. 골동품 가게에서 봤다는데, 그때는 분명 똑같이 생긴 칼자루가 하나 더 있다고 하였느니라.”
“골동품 가게라······.”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자루를 꺼내서 테이블에 올려놨다.
대체 몸의 전주인은 무슨 과정을 거쳐 이걸 가지고 있게 된 걸까.
그리고 이 검의 짝이 있다는 말도 정말일까.
이수련이 얼른 덧붙였다.
“본좌가 들은 것은 여기까지였느니라. 다만 지금 와서 진위를 파악할 수도 없고 그 도장이 본 것이 정말 낭군의 검인지도 확실하다고 할 수 없으니 그리 신경 쓸 것은 못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
“확실히 그렇죠.”
위올란트를 만나서 확인해봐야 할 문제인 것 같았다.
이 검이 그자의 손에서 나왔다면 짝이 되는 검 역시 그의 손에서 나왔을 테니까.
무시하기는 어렵지만 제법 흥미로운 소문이었다.
그리고 이수련은 배고파서 안 되겠다며 당장 순대국을 먹고 싶다고 보챘고, 우리는 사무실 근처의 순대국집으로 이동해야 했다.
한창 순대국을 먹던 중, 안드로이드용으로 제조된 고압축 오일 수육을 한 점 집어 오물오물하다 삼킨 앨리스가 이수련에게 물었다.
“그런데 요새 언니 한신나 권역 출장이 잦네요. 저번에는 산업용 로봇 컨소시엄 때문이라고 했고. 이번에는 아까 말했던 사무라이 로봇 때문에 다녀오신 거예요?”
크허헉-
순대국 뚝배기에 거의 얼굴을 들이밀다시피 해 밥을 먹던 이수련이 앨리스의 질문을 듣고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가슴을 쳤다.
내가 물을 따라주자 단숨에 마신 이수련이 여전히 캑캑거리면서 앨리스에게 말했다.
“그, 그것을 왜 궁금해하는 것이냐!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면 아닌 거지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에요? 그리고 아무것도 아니라면 왜 거기까지 간 건데요.”
“기, 기업 비밀이다! 더 이상 물어보지 말거라!”
이쯤 되니 나도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뭔데요. 말 해봐요. 어디 가서 얘기 안 할게요. 팀 오메가라고 우리 비밀은 다 들으면서 자기 비밀은 얘기 안 해주니까 서운하네.”
내가 눈을 흘기자 이수련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 됐다.
“그런 것이 아니라······.”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는 앨리스도 가세했다.
“와! 그렇게 믿었는데 우리 사이가 이것밖에 안 되는 거였구나. 신시아 언니는 물어보면 다~ 말해주는 데에.”
거짓말이다.
신시아는 공사 구분이 칼 같아서 어떤 부분은 앨리스가 3박 4일을 졸라도 말하지 않는다.
앨리스가 궁금하다고 졸라댄 게 연예계 스타들의 추문 같은 거라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신시아의 이름을 꺼낸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이수련이 입 주변 근육을 움찔거렸다.
그리고 이수련의 입이 열리기 전,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한신나 지역 유흥지구인 난바에 신형 세,세,섹스봇을 도입하는 건을······.”
거기까지 들은 앨리스가 기겁해서 손을 내저으며 괴상한 소리를 냈다.
“우와와아악! 그만! 그만! 내가 잘못했어요!”
나는 못 들은 척 고개를 내리고 순대국을 퍼먹었다.
한가지 생각이 들었다.
‘오우······역시 성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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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련이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날 이후로는 조금 바빴다.
야스민 저택을 방문해서 야스민 공이 새로 입수한 마도 공학 유물을 감정해주는 일도 있었다.
어디서 난 것이냐고 물었더니 히말라야산맥이라는 답이 나와 놀랐다.
“글라드 일족이 수장을 잃고 힘이 대폭 줄었으니 그동안 그쪽에 원한 있던 이들이 가만있을 도리가 있나. 다른 암살단체, 암살을 당한 쪽 등등 그쪽에 피바람이 불고 있네. 대규모 지각변동이야. 그리고 그 일을 촉발한 사람은 지금 내 앞에 있지.”
예뻐 죽겠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는 야스민 공이었다.
글라드 일족이 보관해오던 마도 공학 유물이 등장하는 대로 족족 사들이고 있으니 수집가인 야스민 공에게는 천금과도 같은 기회일 터.
다만 들여온 것들 역시 대부분 하등 쓸모없는 것들이 대부분이긴 했다.
그래도 묵혀둔 다음에 시장에 내놓으면 매입가의 몇 배는 더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요새 야스민 공 손에서 나오는 유물들을 묶어서 ‘야스민 컬렉션’이라고 별도로 지칭하고, 엄청난 프리미엄이 붙는다고 하니까.
다 내 덕이지만, 으쓱대거나 생색을 낼 생각은 없다.
야스민 공이 나를 위해 해주고 있는 것도 많았다.
가령 벡이 있던 연구소로 촉발된 바이오 기업 전수조사는 그쪽 업계에 어마어마한 폭풍을 불러왔다.
중화권 권역의 광역적인 리베이트와 비리가 포착됐고, 그로 인해 형성됐던 물 밑의 거대 제약 카르텔이 해체됐다.
자금의 흐름을 추적하면서 오로지 나를 제거하기 위해 밀입국한 킬러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야스민 가문의 특수 부대에 의해 그런 놈들이 소탕되는 일이 몇 건이나 있었다.
내가 이런저런 일을 벌이고도 네오-서울에서 칼빵 맞지 않는 것에는 야스민 공의 많은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그웨지안 같은 놈들이 나타났다는 부분은 아쉬운 일이지만, 그녀가 보여줬던 능력과 무위를 생각하면 흡혈귀 특수 부대 정도로는 잡아내기 힘들 것도 같았다.
이후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나오려는데, 나가기 직전 야스민 공이 나를 불러세웠다.
“그······호텔에서······신시아와······크흠······봤네만······.”
말해놓고 본인도 민망한지 내 눈을 피하는 야스민 공이었다.
“당사자인 신시아에게 듣는 편이 정확하고 빠르지 않을까요.”
밖으로 나서는데, 닫히기 직전의 작은 문틈으로 야스민 공의 외침이 들렸다.
“물어봤는데 화만 잔뜩 내고 나가 버려서······!”
그걸 물어봤다니, 여러 의미로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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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템페시르나가 알려준 날이 다가왔다.
동행에 대해 여러 번 물어봤으나 템페시르나는 부자연스러운 웃음을 지으면서 아는 사람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동행이 차량도 가져올 테니 나는 시간 맞춰서 사무실 앞에 몸만 나와 있으면 된다는 말뿐이었다.
그렇게 오늘도 사무실에 모여 떠들기 바쁜 앨리스, 신시아, 이수련에게 인사하고 건물 밖으로 나오자 굉장한 배기 소리가 들렸다.
부와아앙-
본넷 위로 엔진 일부가 보이는 머슬카 한 대가 내 앞에 멈춰 섰다.
귀걸이를 통해 웃겨 죽으려고 하는 앨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하하하하! 사장님! 하하하! 잘! 으하하! 크어! 하하하하! 다녀! 하하하! 오세요오! 하하하하!
고개를 돌려보니 사무실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앨리스가 보였다.
웃느라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있었다.
옆의 창문으로 보이는 신시아와 이수련도 차마 앨리스처럼 대놓고 웃지는 못하지만 웃음을 참는 모습이 역력했다.
머슬카 운전석의 창문이 내려갔다.
“오메가쿤! 타라능!”
나다였다.
뒷자리에 무언가 보였다.
그웨지안이 잘라버린 나다의 봉이었다.
나다에게 물었다.
“저희 누구 만나러 가는지 아세요?”
“모른다능! 봉을 고쳐 줄 수도 있다고만 들었음!”
내 검을 위올란트에게 보이는 김에 제자의 봉도 고쳤으면 하는 템페시르나의 안배였구나.
한숨을 푹 쉰 나는 조수석 쪽으로 돌아가 차문을 열었다.
차를 한 바퀴 돌아보니 더욱 어이가 없었다.
호버바이크나 에어로 택시가 돌아다니는데 꽁무니에서 매연 풀풀 내보내는 고배기 머슬카?
취향이니 그럴 수 있다.
근데 그 머슬카 외장에 비키니만 입은 애니메이션 미소녀 랩핑이 커다랗게 되어 있는 건 조수석 탑승자에 대한 배려가 너무 없는 거 아니냐고······.
계속해서 귀걸이를 통해 들려오는 앨리스의 숨넘어가는 웃음소리가 짜증 나서 통신을 잠깐 꺼버렸다.
조수석에 앉아 차 문을 닫으니 나다가 엑셀을 밟으며 외쳤다.
“오메가쿤! 꽉 잡으라능! 사쿠라쨔응의 출력은 보통이 아니라능!”
사쿠라쨔응?
이 웅장한 녀석의 이름치고는 조금 그렇지 않나?
팝콘 튀는 소리와 함께 차가 출발했다.
도로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그냥 바이크 타고 가겠다고 할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