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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캐여도 너보단 강함-138화 (139/258)

138.

138.

암살자는 유연하고 신속한 몸놀림으로 내가 날린 검격의 범위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했다.

그렇게 검 끝에서 나간 융합 마법이 암살자의 옆구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갈 무렵―

양손으로 검을 붙잡고 힘껏 밀어붙였다.

[파도천]

검에서 뻗어나간 기파가 융합 마법의 방향을 뒤틀었다.

언젠가 보았던, 구름 사이사이를 노닐던 페테르처럼 몸을 굽이굽이 접은 융합마법이 용오름처럼 치솟았다.

암살자의 옆구리가 마법에 먹혀버린 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방어용이 분명했을 장치에서 간헐적인 스파크와 함께 쉴드가 깨져나갔다.

옆구리가 텅 비어버린 암살자의 상처에서는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마법이 지나가며 그대로 지지고 얼려버린 흔적이 생생했다.

“으억······.”

뒤늦게 자신의 몸 상태를 파악하고 암살자가 한 마디를 내뱉는 사이, 위타천이 영력을 뭉쳐 만들어낸 투창이 그의 어깨를 꿰뚫었다.

어찌나 강한 힘이 실렸는지 투창을 맞은 암살자가 종이 인형처럼 힘없이 꿰어져 그대로 무대 반대편의 기둥에 처박혔다.

[파천황]을 해제하고 달려가 검을 들지 않은 손으로 암살자의 머리통을 쥐고 바닥에 처박았다.

내 마법이 삼켜버린 옆구리는 피만 흐르지 않았을 뿐, 짐승이 뜯어먹은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면, 위타천의 창에 맞은 어깨는 피가 펑펑 쏟아지고 있었지만 마치 펀치로 종이에 구멍을 뚫은 것처럼 깔끔했다.

창을 회수한 위타천이 바로 내 곁으로 날아와 허리춤에서 뭔가를 꺼내 암살자의 입에 쑤셔 넣었다.

내가 사용하는 어레스트와 비슷했지만, 훨씬 정교하고 복잡해 보이는 장치였다.

“이제 괜찮네. 잠시 나와 있게.”

암살자의 머리통에 대고 있던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서자 위타천이 주먹을 쥐고 암살자의 입에 꽂았다.

그러자 입에 물린 장치에서 작은 작동음이 나더니 얇은 실 같은 것이 뿜어져 나와 암살자의 몸을 굳게 만들었다.

이내 암살자는 번데기에서 얼굴만 나와 있는 꼴이 되었다.

“이런 놈들은 조금만 틈을 주면 더러운 짓을 하려고 해서 이렇게 특수 목적 어레스트를 사용해야 해. 게다가 이 정도 되는 암살자라면 잡혔을 때 자결도 서슴없이 할 놈들이니 후배도 기억하는 게 좋을 것 같군.”

“근데 꼭 그렇게 해야 작동하는 건가요?”

검을 자루 형태로 역전개하고 허리춤에 꽂은 내가 주먹을 뻗는 시늉을 하자 위타천이 한 템포 쉬고 답했다.

“감정 좀 실었지.”

“공공 집행자가 그렇게 감정적이면 되나요, ‘우리 자기 씨’.”

“한 번만 더 나를 그런 식으로 불렀다가는······.”

위타천은 말을 마치지 못하고 가연이 있는 쪽으로 몸을 날렸다.

홀에서 날아든 테이블 잔해가 가연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

아래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홀을 휩쓰는 작은 회오리가 보였다.

그 회오리의 중심에 그웨지안이 있었다.

처음 등장했을 때의 몰골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들고 있는 단검의 끝은 부러졌으나 그녀가 만들어낸 검기가 길게 뻗어 나와 이제 단검이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무엇보다 가연을 죽이려는 암살자를 막아내는 동안 아래쪽의 전투도 보통 격렬한 것이 아니었는지 그웨지안의 몸에 피가 흐르지 않는 상처를 찾는 것이 힘들었다.

눈마저 한쪽은 뭉개졌으며 소형 레이저 집약기나 광자 날을 자유자재로 꺼내던 왼손은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심하게 뜯겨 있었다.

나를 상대할 때 보였던 여유로운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미 광기에 잡아먹힌 것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회오리가 이쪽으로 접근하지 못하게 막고 있는 나다와 템페시르나의 상황도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나다의 손과 발을 감싸는 글자가 차츰 빛을 잃고 흐려졌다.

템페시르나는 움직일 때마다 상처에서 시커먼 피를 뚝뚝 쏟아냈다.

고개를 내려보니 암살자 놈이 보였다.

‘아들이랬지. 좀 치사한 것 같지만······.’

그런 생각은 곧 털어버렸다.

날 죽이려는 사람한테 그런 동정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우위를 잡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진득하고 철저하게, 악착같이 들러붙어서 골수까지 빨아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 골수가 빨린다.

해결사 일을 하기 위해 구르면서 배운 건 이런 것밖에 없었다.

행동할 시간이다.

“그만!”

무대 중앙에 선 내가 [증폭]을 사용해 크게 외쳤다.

내 왼손에는 가연을 노리던 암살자의 머리채가, 오른손에는 그 암살자의 목을 향해 있는 검이 들려 있었다.

그웨지안 주위에 휘몰아치던 거친 바람이 차차 사그라들었다.

분노가 들끓는 그웨지안의 목소리가 내게 닿았다.

“누티엘에게서 손 떼라.”

“이 친구 이름이 누티엘이었구나. 그런데 좀 역겹네.”

검을 조금 더 누티엘의 목에 가까이 대며 말했다.

“남의 딸 목숨 귀한 줄은 모르면서 자기 아들 목숨이 귀한 취급 받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잖아.”

그웨지안이 움직이려는 기색이 보이기 무섭게 누티엘의 머리채를 꽉 잡고 올려 들었다.

“어허, 움직이면 당신 아들이 아니라 ‘아들이었던 것’이 될 수도 있어. 조심해. 그러니까 남의 눈에 눈물 맺히게 했으면 본인 눈에 피눈물 맺힐 수도 있다는 걸 알았어야지.”

“누티엘만큼은······.”

“맨입으로 되나. 날 죽이라고 한 놈이 누군지 말해.”

“그건 일족의 신용이······!”

광자 검날의 끄트머리가 누티엘의 뺨에 상처를 만들어냈다.

어레스트를 물고 있어 제대로 된 소리를 낼 수 없는 누티엘에게서 읍읍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신용은 은행 가서 찾으시고. 내가 그쪽 사정 고려하게 생겼어? 하긴, 일족의 수장이랬지? 이야. 역시 수장은 달라. 아들보다는 일족이겠지? 자, 우리 누티엘 씨는 엄마가 너 대신에 일족을 선택해서 죽는 겁니다. 내가 잘 아는 사령술사가 있으니까 미리 말하면 원혼으로 만들어줄게. 그렇게 엄마 찾아가면 되겠다. 그지?”

검을 치켜올렸을 때, 그웨지안이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그만!”

하나밖에 남지 않은 그녀의 눈이 마구 떨렸다.

“브리가드! 브리가드다! 마도공학 유물을 주겠다고 했다!”

마데르노?

이런, 이건 내 업보다.

깡통을 죽인 업보가 아니라 유적지에서 깡통뿐만 아니라 마데르노도 죽이지 못한 업보.

“증거는?”

“지금 내가 지닌 것은 없다. 일족의 터전에 그들의 수장이 보낸 홀로그램 영상 복사본이 있으니······.”

“지금 보여줄 수 있는 건 없다는 얘기네.”

그웨지안이 다급하게 외쳤다.

“너를 죽여야 한다고 하면서 여와의 후손에 대한 얘기를 했다! 자기만큼 깊은 원한이 네게 있다면서!”

“여와의 후손?”

그걸 들은 나다가 중얼거렸다.

“대륙에 전승되는 신 중 하나라능. 하반신이 뱀이라서 라미아나 용인 중 일부가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는 들었음. 근데 거의 사라진 거로 알고 있다능.”

내게 원한을 가진 라미아나 용인?

용인은 모르겠지만 라미아는 확실히 하나 생각나는 인물이 있긴 하다.

수연이다.

수연과 마데르노가 손을 잡은 건가.

국제 범죄자 둘이 손을 잡고 나를 노린다니.

실화인가 싶다.

가슴이 웅장해지기는커녕 쪼그라들어서 옹졸해지는 것 같다.

그웨지안의 말은 나를 죽이려는 시도가 이번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런 놈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야 할 필요가 있다.

보기와는 다르게 상당히 유연한 동작으로 팔을 뒤로 돌린 채 손을 바꿔가며 수인을 그려내는 나다의 행동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누티엘의 머리통을 붙잡는 직후부터 계속 저렇게 하고 있었다.

심지어 혜심통으로 내게 말까지 건네면서.

-됐다능!

그웨지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 사채업자들이 떼인 돈 이상의 돈을 써가면서 돈 떼먹은 놈을 잡으려고 하는 건 금액의 문제가 아니라 위신의 문제다. 그런 얘기.”

기계 다리를 단 토끼를 잡으러 가기 전, 키클롭스 아재가 내게 해준 얘기다.

스걱―

광자 검날이 움직이자 누티엘의 머리와 몸이 분리되어 각기 다른 방향으로 굴렀다.

눈이 돌아간 그웨지안이 내력을 폭발시키려는 찰나, 손을 앞으로 돌린 나다의 몸에서 다시 한번 광채와 범어가 터져 나와 거대한 손바닥을 만들어냈다.

나다가 양손을 모아 합장을 하자 거대한 손바닥이 그웨지안을 사이에 두고 압박을 가했다.

그웨지안이 벗어나려 애썼으나 손바닥을 구성하는 범어가 그녀의 사지에 얽혀들어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파아앙―

위타천이 온 힘을 다해 뒤쪽에서 던진 창이 공기를 꿰뚫으며 나아가 그웨지안의 하복부에 박혔다.

그웨지안이 마음의 고통 때문인지 육체의 고통 때문인지 알기 힘든 비명을 지르는 찰나, 나는 이미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는 그녀의 앞에 이르러 있었다.

“내가 사채업자는 아니지만, 나도 마찬가지야. 해결사 간판에 먹칠할 수는 없잖아. 날 죽이고 싶어 하는 놈들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다른 사람들도 알아야지.”

다시 한번 손에 쥔 검을 움직였다.

저항감이 조금 느껴졌지만, 결국 누티엘을 벤 검이 그웨지안의 심장도 꿰뚫었다.

그웨지안의 심장에 박힌 검을 빼내자 악에 받친 눈을 한 그웨지안이 바람 빠지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죽어라.”

그녀의 몸 곳곳이 부풀어 올랐다.

“동귀어진하게 둘 것 같냐능!”

나다가 만들어낸 거대한 손바닥이 손가락을 굽혀 그웨지안을 감쌌다.

안쪽에서 일어나는 폭발이 어마무시했다.

마침내 홀이 잠잠해졌다.

귀걸이를 만져 신시아에게 말했다.

“상황 끝났어요. 저희 쪽 사망자는 없는데 템페시르나 님을 병원으로 옮겨야 할 것 같아요.”

무대 위에서 정신을 잃고 풀썩 쓰러지는 가연이 보였다.

이 난장판에서 지금껏 제정신을 유지하고 서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했다.

“가연 씨도요. 가연 씨는 다친 것 같지는 않은데 안정이 필요해 보여요.”

내빈객들이 도망친 이후 출입구에 내려진 격벽과 셔터가 일사불란하게 원래의 자리를 찾았다.

흡혈귀들이 날아 들어와 안에 있던 사람들의 상태를 살폈다.

내 곁에도 박쥐 하나가 빠르게 날아오더니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신시아였다.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괜찮으세요? 다친 곳은 없고요?”

“저는 멀쩡해요.”

주위로 시선을 옮겼다.

들것에 실려 나가는 템페시르나와 가연 주위로 쓰레기장 같이 변해버린 리셉션 홀이 보였다.

“피바다를 만들지 않겠다고 야스민 공께 약속드렸는데, 이 정도는 봐주시겠죠?”

“그럼요.”

신시아는 가연의 상태를 봐야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자신의 상태를 체크하는 흡혈귀들에게 ‘오늘도 나는 불살했다능!’이라는 말과 함께 의기양양한 나다가 보였다.

그 역시 나를 봤는지 내 옆으로 훌쩍 다가와서 조심스레 밖으로 향하는 신시아를 가리켰다.

“오메가쿤, 조심해야 한다능.”

“뭘 말입니까?”

“오늘 겪었잖슴! 3D 리얼 다크 엘프 여자가 얼마나 위험한지! 3D 리얼 흡혈귀 여자도 위험하다능! 리얼 여자는 위험!”

어이가 없어서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사이, 위타천도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는 대뜸 내게 말했다.

“오늘 일이 마고의 귀에 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하지. 나다 너도 함구하고.”

누티엘을 상대하기 위해 마법을 사용했던 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

뭐냐고 물어보면 장비였다고 뭉갤 생각이었는데 역시 공공 집행자 자리는 포커로 딴 게 아닌지 눈치 하나는 좋아서 내게 뭔가가 더 있다는 걸 알아챈 것 같았다.

그걸 불문에 부쳐 넘어가 준다고 하니 나야 환영이었다.

“감사합니다. ‘우리 자기······’.”

위타천이 재빠르게 덧붙였다.

“그 호칭이 한 번만 더 들리면 바로 마고를 찾아갈 생각이네.”

그렇게 엉망이 된 약혼 발표와 그에 뒤따르는 수많은 억측과 추정에 시달린 지 며칠 뒤.

병원으로 직행했던 템페시르나의 상태가 호전되어 면회가 가능하다는 연락이 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평안해 보이는 템페시르나와 그 곁에서 서툰 손길로 과일을 깎는 가연이 있었다.

“몸은 좀 어떻습니까?”

내 물음에 템페시르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혈도가 모조리 망가졌다는구나. 내력을 움직이려다 죽을 수도 있다고 하니 이제 무도가라고 하기도 힘들 것 같구나.”

평생 밟아온 길을 더 이상 가면 안 된다는 충격적인 결과인데도 그것을 말하는 템페시르나는 덤덤했다.

오히려 홀가분해 보이기도 했다.

“마지막에 내가 이겼으니, 그것으로 된 것 아니겠느냐.”

깎던 과일을 내려놓은 가연이 그런 템페시르나의 손을 꼭 붙잡았다.

“이제부터는 제가 지켜 드리면 되죠!”

“네 남편이나 얼굴 좀 자주 비추라고 해라.”

“우리 자기는 어제도 왔다 갔잖아요.”

“스승이자 장인이 누워있는데 하루 두 번은 와야지!”

“우리 자기 바빠요!”

“벌써 남편 편드는 것 보게! 남편이 왜 남편인 줄 알고 있느냐? 남의 편이라 남편인 거야!”

자리에 없는 위타천을 향해 역정을 쏟아내던 템페시르나가 가연을 내보냈다.

의뢰의 대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이전 의뢰인 매티슨의 의뢰에 대한 보상도 아직 확실히 받지 못한 상태에서 엉겁결에 받게 된 의뢰였다.

게다가 당장 암살의 위협이 있다는 말에 세부적인 조건도 제대로 따지지 않았었다.

딥스페이스에서 여러 스킬들의 사용법에 대한 실마리를 얻긴 했지만, 그건 내가 잘 나서 액기스를 뽑아 먹은 것이지 매티슨이 제공한 것은 아니니 부가적인 대가에 가깝다.

아무튼 그렇다.

“의뢰가 성공한다면 아이에게 줄 것은······.”

“제게 가르침을 주신다는 것이었죠.”

공공 집행자들의 교관이었던 템페시르나.

기공과 무공에 있어서는 엄청난 경지에 올랐을 것은 자명한 일.

그래서 그냥 ‘가르침’이라는 단어로 보상을 뭉뚱그려 바로 의뢰에 들어갔었다.

“하지만 내가 이런 꼴이 되었으니 대가를 바꾸려 하는데, 한 번 들어보겠느냐?”

템페시르나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가 다시 묻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제 검의 제작자로 추정되는 사람을 알고 있고, 그 사람 이름이 위올란트라고요?”

내 당황스러운 표정을 본 템페시르나가 되물었다.

“위올란트 님을 알고 있나? 워낙 존재가 비밀스러운 분이라 나이 많은 엘프 중에서도 아는 이가 흔치 않은데. 사실 거의 없다고 봐야지.”

그 위올란트가 내가 아는 위올란트라면 놀랄 수밖에.

서리얼 시절, 특수한 무기만을 만드는 NPC의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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