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137.
잠시 몸을 웅크린 암살자의 기척이 흐려졌다.
물리적으로 모습이 사라지거나 주위에 동화되었다는 것과는 달랐다.
분명히 그곳에 존재하지만, 마치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던 자연물처럼 조금이라도 신경을 기울이지 않으면 존재를 놓칠 것 같았다.
그 상태의 놈이 아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리는 좁히지 않고, 우리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기회를 노리는 움직임이었다.
위압감이나 압박감은 아예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너무 가벼워 하찮게 느껴질 정도였다.
후-하고 바람을 불면 날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
하지만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분명 이쪽이 두 명으로 수적 우위였지만, 지금 느끼는 감정은 마치 사바나 초원의 가젤이 된 것 같았다.
암살자는 길게 자란 수풀에 몸을 감추고 접근하는 표범이었다.
주위에 무언가가 접근 중이라고 본능이 경고하지만, 고개를 들어보면 보이는 것은 수풀뿐이다.
그렇다고 마음을 놓으면 그대로 표범에게 목덜미를 물리는 신세가 될 거다.
[목표 고정]을 사용했지만, 번번이 암살자의 한 발 뒤를 포커싱하는 바람에 없는 것이 나았다.
뻔히 바라보는 앞에서 이런 일이 가능할 줄이야.
기예를 넘어 경이에 다른 솜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글라드 일족에게 암살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말이 왜 붙었는지를 온몸으로 실감했다.
“저러다 어느 순간 거리를 좁힐지 알기가 힘들어.”
몸에서 김을 피워 올리는 위타천이 이를 갈며 말했다.
이쪽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게처럼 옆걸음을 걷던 놈의 떨어져 있던 발이 땅에 닿던 순간, 고물상을 방불케 변해버린 아래쪽의 리셉션 홀에서 굉음이 들렸다.
#
왼손 날로 나다의 봉을 잘라낸 그웨지안이 내력을 끌어올리며 템페시르나와 엉겨 붙으며 나는 소리였다.
그웨지안이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홀로 히말라야산맥에 올라 내게 비무를 청하던 시절의 독기는 어디로 간 것이냐! 무도가의 마음에 상승 욕구가 사라졌으니 너는 그 순간 죽은 것이다!”
내력을 주입받은 그웨지안의 단검에서 검기가 길게 뻗어 나왔다.
독사의 송곳니처럼 휘어진 단도를 역수로 쥔 그웨지안의 공격이 템페시르나에게 닿기 전, 나다가 수인을 맺었다.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해 부드러이 무언가를 감싸 안는 형태로 단전 근처에 붙이고, 오른손은 검지를 펴서 지시하는 형태로 아래를 가리켰다.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을 상징하는 수인인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다.
처음만큼 강렬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나다에게 은은히 맺혀있던 휘광이 그의 수인으로 몰려들어 범어梵語를 그려냈다.
나다의 수인이 바뀌었다.
왼손은 형태를 유지한 채 엄지와 중지를 붙이고, 아래를 가리키던 오른손을 왼손 옆으로 붙여 손바닥을 바깥으로 보이게 하여 검지와 엄지를 붙어 동그란 원을 만든다.
전륜성왕이 보물로 적을 제압하듯 중생의 번뇌를 제거하는 수인인 전법륜인轉法輪印이다.
눈 깜빡할 사이에 이루어진 나다의 행동에 얼핏 보면 마구 휘날려 그린 그림 같아 보이는 범어 몇 개가 그웨지안의 옆구리를 향해 날아들었고, 그 바람에 그웨지안은 템페시르나를 향하던 단검의 방향을 틀어 다시 한번 방어 행동을 취해야 했다.
남은 범어들이 나다의 주먹과 발 주위를 감쌌다.
부러진 봉을 내던진 나다가 입을 열었다.
“상승 욕구와 독기. 중요하다능.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으니 취향 존중하셈. 나만 해도 애니메이션과 만화책으로 깨달음을 얻고 번뇌를 날려······.”
나다의 말이 끝나기 전, 템페시르나가 순식간에 그웨지안과의 거리를 좁혔다.
잘리지 않은 팔 끝의 주먹이 그웨지안의 배에 닿았고, 팔이 펴지는 것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기파가 터져 나왔다.
퍼억-
크지는 않지만 묵직한 타격음.
배 안의 내장이 곤죽이 되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대상이 그웨지안이 아니었더라면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자신의 배와 템페시르나의 주먹 사이, 아주 작은 틈으로 단검을 밀어 넣고 그 짧은 시간 동안 템페시르나의 내력 흐름을 읽어 주위로 흩어 내버린 그웨지안이 만족스럽게 읊조렸다.
“글라드 일족을 무시했군. 이미 파훼가 끝났다고 말했을 텐데. 패배자는 퇴장할 시간이다.”
그웨지안의 오른손에 들린 단검이 템페시르나의 심장을 향했다.
템페시르나는 몸을 틀었지만, 심장 바로 위쪽, 가슴과 어깨의 경계에 그웨지안의 단검이 박혀 들었다.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단검에 내장되어 있던 신경파괴물질이 흘러들었다.
“크윽.”
신음을 흘리는 템페시르나가 흩어지려는 내력을 다시 끌어모았다.
팔을 잘리고, 남은 팔로 아이를 품에 안고 히말라야를 내려온 뒤로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기술이다.
독기가 사라졌다는 그웨지안의 말을 들었을 때, 템페시르나는 누구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작게 웃었다.
독기는 흩어지지 않았고 상승 욕구도 사라지지 않았다.
제대로 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튀던 것들이 오로지 그웨지안을 향했기에 사라진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파훼 당한 것이 어찌 나 뿐이겠느냐.”
입가로 검은 피를 한줄기 흘리는 템페시르나의 말.
그의 눈빛이 타올랐다.
문파깨기를 하기 위해 세계를 누비던 무도가의 눈이다.
그웨지안과의 재대결을 위해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홀로 깎고 덧붙이던 템페시르나의 마지막 기술이 펼쳐졌다.
내력으로 만들어진 팔들이 하나로 뭉쳤다.
그웨지안이 도망치지 못하게 멀쩡한 손으로는 단검과 그웨지안의 손을 으스러지도록 쥔 채, 만들어진 팔을 뒤로 당겨 옆구리로 붙인 템페시르나.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던 [엘프 발경 6식]은 이 순간부터 [엘프 발경 7식]이 된다.
내력을 극도로 끌어모아 응축한 팔이 뻗어나가며 주위의 공기를 뒤흔들었다.
아직 타점에 닿지도 않았는데 주먹 주변에서 천둥소리가 여럿 터졌다.
[엘프 발경 제7식]
[주먹으로 설산을 부수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그웨지안이 내력을 끌어올려 경신법으로 몸을 빼려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거리를 벌려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이제 코에서도 검은 피를 흘리는 템페시르나가 그렇게 두지 않았다.
“말하지 않았느냐. 죽음으로 갚아야 할 것이라고.”
템페시르나의 옹골찬 주먹은 거칠디거친 무도가의 손이였으며 동시에 새로운 삶을 알게 해준 소중한 딸을 지키려는 아버지의 손이었다.
결국 그웨지안도 경신법을 포기하고 있는 대로 내력을 끌어올려 왼손날에 집중한 뒤 템페시르나의 주먹이 뻗어오는 궤도에 밀어 쑤셔 넣었다.
찰나의 순간, 주위의 흐름이 멈췄다.
기이한 흐름을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인지할 때, 멈춰있던 흐름이 가속하며 그웨지안과 템페시르나 사이에서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각자 반대 방향으로 튕겨 나가는 와중, 대기 중이던 나다가 템페시르나를 받아내는 것에 성공했다.
나다의 손에 맺혀있던 범어가 템페시르나의 몸에 스며들며 들끓던 기혈을 임시로나마 안정시켰다.
“스승님! 괜찮냐능!”
쿨럭하는 소리와 함께 몸 밖으로 시커먼 피를 내뱉은 템페시르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시선은 그웨지안이 향한 방향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괜찮으니, 저걸 처리하거라!”
그웨지안의 부러진 단검 끝이 템페시르나의 어깨에 박혀있었다.
#
‘온다!’
홀에서 들린 굉음과 함께 암살자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그웨지안이 단검을 사용했으니 그 아들도 역시 근거리 무기인가?’
추측의 영역일 뿐, 확실하지 않은 한 줌 생각이 움직임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다행히도 생각이 틀리지는 않았는지 놈이 품에서 짧은 단검을 꺼내 들고 이쪽으로 접근했다.
그웨지안의 것처럼 중간 부분부터 휘어지는 형태가 아니라 곧게 뻗은 단검이었다.
파앙-
위타천이 영력으로 만들어낸 채찍이 암살자에게 치달았지만, 암살자는 공중으로 몸을 띄워 뱀처럼 휘어지는 채찍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강신술사라더니 몸에다 신을 불러들여서 주먹도 휘둘러, 봉도 후려쳐, 날개도 만들어, 채찍은 또 뭐야. 진짜 개사기네.’라고 위타천을 보고 생각한 찰나에 내 몸은 이미 공중에 뜬 암살자의 예상 착지 지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공중에서는 방향을 바꾸지 못할 거라는 생각······.
암살자의 신발 밑에서 우웅하는 소리가 나더니 반투명한 발판이 생겨났다.
그걸 디딤판으로 삼아 암살자가 공중에서 한 번 더 뛰었다.
지상에서 3~4m는 될 듯한 높이에서 몸을 뒤집는 모습은 마치 서커스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게 했다.
위타천이 들고 있던 채찍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그의 어깨에서 영력의 날개가 뻗어 나왔다.
가벼운 날갯짓 한 번으로 몸을 띄워 가연과 암살자 사이에 위치하는데 성공한 위타천이었다.
암살자가 들고 있던 단검을 던졌다.
단검이 향하는 방향의 끝에 가연이 있었다.
위타천이 날개를 휘룰러 매섭게 쏘아지는 단검을 쳐냈을 때, 내 시선은 암살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단검은 미끼다!’
[급전환]
검을 들고 있지 않은 손을 뻗어 바닥에 대는 것과 거의 동시에 다리를 진행방향 쪽으로 밀어 감속한 뒤, 암살자를 향해 날아가던 몸의 방향을 바꿨다.
가연이 있는 방향이었다.
[추진]
우드득 소리와 함께 내 발 근처의 무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일단 내 뼈가 부러진 것 같지는 않았다.
순식간에 가연의 앞에 이르렀다.
몸을 돌리자 날개를 퍼덕이는 위타천이 시야를 가렸다.
하지만, 발판을 밟고 몸을 날린 암살자의 시선이 위타천 너머로 생생하게 보였다.
입을 쩌억 벌린 놈의 목구멍 안에서 철컥이는 소리가 요란했고,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투박하지만 화력 하나는 확실할 것이 분명한 개틀링 총열이었다.
“이딴 걸 암살이라고······!”
총열이 회전하며 블래스터 탄환과 재래식 탄환을 가리지 않는 화력이 놈의 아가리에서 쏟아졌다.
뒤늦게 날개를 활짝 펴서 막아내려는 위타천이었지만 폭우처럼 쏟아지는 탄환의 비를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가능하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검술만 내보이고 싶었지만 [빗방울 베기]를 사용해도 내 뒤에 있는 가연에게 향하는 모든 탄환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표르긴]
[흐림수르사르]
이중의 얼음벽이 솟아올랐다.
공중에 떠 있는 위타천까지 커버할 수는 없어서 일단 내 앞에다 쳤는데, 한겨울에도 하와이안 셔츠랑 반바지 입고 다닌다니까 이 정도는 괜찮을 거다.
네오-서울 공공 집행자인데 그 정도 강골은 되겠지.
탄환을 맞고 두꺼운 얼음벽에서 튀어 오르는 작은 얼음 조각들이 아이러니하게도 무지개를 만들어냈다.
탄환의 비가 그쳤을 때, 위타천은 걸레짝이 된 날개를 퍼덕여 암살자를 잡아채려고 노력 중이었다.
암살자가 외쳤다.
“위타천! 전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강한 강신술사라지만 움직임은 템페시르나와 다를 것 없군! 그렇다면 피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그 말을 들은 위타천은 날개를 접고 공중에서 내려오다가―
“지금!”
얼음벽의 멀쩡한 부분을 밟고 뛰어오른 내 외침에 다시 날개를 양옆으로 펼쳐 위치를 유지했다.
내 발에 위타천의 어깨가 닿았다.
다시 한번 도약하자, 얼음벽을 밟을 때 이미 펼쳐 두었던 [파천황]이 만들어내는 붉은 얼음과 푸른 불이 내 뒤로 길게 이어졌다.
[파천황]으로 융합된 마법은 밖으로 분출하는 것이 아니라 티셔츠를 향해 보내고 있었다.
일종의 자해自害다.
엄청난 위력의 마법을 급격히 맞은 티셔츠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파동이 발생했고, 그것이 향하는 곳은 손에 들고 있는 검이었다.
“개틀링건 갈기는 게 암살이면―”
휘두른 검에서 뒤섞이며 뻗어나간 붉은 얼음과 푸른 불꽃이 암살자를 덮쳤다.
“이것도 암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