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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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관계긴, 빈틈만 보이면 서로의 목에 칼 꽂기 바쁜 사이지.
나다에게 그걸 말해줄 틈은 없었다.
오른손으로 잡고 있던 단검이 막히자 그웨지안이 왼손을 꺼내 들었기 때문.
왼손 약지와 새끼를 붙이는가 싶더니 두 손가락이 하나로 뭉쳤고, 계속해서 변형되어 합쳐진 손가락 끝에 둥그런 구멍이 생겼다.
내 미간을 정확히 노리는 그 구멍 안쪽으로 작은 빛이 모여드는 것이 보였다.
재빠르게 고개를 옆으로 틀기 무섭게 그웨지안의 손가락 끝에서 레이저가 발사되어 약 0.3초 전에 내 미간이 있던 자리를 지나갔다.
반응하지 못했다면 내 뇌를 익혀버렸을 레이저는 쭉 뻗어나가서 리셉션 홀 정 중앙에 달린 샹들리에의 고정장치를 녹여버렸다.
끼이익하는 소리와 함께 샹들리에 일부가 아래로 축 처졌고, 그렇지 않아도 내가 케이크를 휘저을 때부터 웅성거리던 내빈객들은 이제 소리를 지르며 홀 밖으로 뛰쳐나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대상만 노린다는 글라드 일족의 소문이 틀리지 않은 것인지 그웨지안과 그녀의 아들이 다른 내빈객을 공격하지는 않는다는 점과 미리 배치해놓은 흡혈귀들이 신시아의 지시에 따라 내빈객들을 밖으로 안내하면서 더 큰 혼란이 벌어지는 것을 최대한 억제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실 이 꼴을 보고도 암살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이런 걱정은 나만 하는 것인지 그웨지안은 내게, 그녀의 아들은 가연을 공격하는 데만 힘을 쏟고 있었다.
다만 내게 붙어 있는 그웨지안을 빨리 털어내고 가연 쪽으로 가야 할 것 같았다.
흘끗 보니 템페시르나의 기술을 파훼했다는 것이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가연에게 붙은 암살자가 템페시르나와 거의 대등한 무위를 보이고 있었다.
그나마 위타천이 있어 암살자가 가연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아내는 모습이었다.
“죽는 순간까지 여유를 가지는 모습이 보기 좋구나.”
무대 위로 시선을 올린 그 잠깐 사이 들려오는 그웨지안의 목소리.
검을 휘둘러 심장을 향해 뻗어 드는 그녀의 왼손을 쳐냈다.
분명 검날 부분으로 잘라낼 생각을 하고 휘두른 검이었는데, 그웨지안의 손날 부분에 닿으니 튕겨내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놀랐다는 듯 눈썹이 움찔거리는 그웨지안의 왼손 손날은 내 광자 검날처럼 빛나고 있었다.
“출력에서 밀려······?”
그때 나다가 그웨지안에게 봉을 찔러 넣으며 외쳤다.
“오메가쿤을 아무리 좋아해도 이런 행동은 옳지 못하다능! 좋아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한테 뽀뽀 좀 받았다고 죽이려고 하는 건 이상한 거임! 본인이 다크 엘프여서 얀데레가 용서될 거라는 믿음을 버리셈! 하렘! 하렘 엔딩이 좋아 보인다능!”
나다는 이 소란이 치정 싸움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머릿속에서 나, 신시아, 그웨지안 사이에 선을 그어 삼각형을 만든 뒤 이리저리 설정을 붙이고 있는 걸까.
그리고 하렘이란 단어가 스님 입에서 나오기에 적합하냐고······.
그웨지안은 어렵지 않게 나다의 봉을 쳐냈다.
대림 에어리어에서 떨거지들을 상대로 보여준 나다의 봉술은 신기에 가까웠지만, 아무래도 글라드 일족의 수장인 그웨지안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나다의 봉을 쳐낸 그웨지안이 다시 몸을 추스르는 틈에 검을 찔러 넣었다.
[만사재시 매사필종]
광자 검날이 아래에서 위로 치솟았다.
‘베었······나?’
분명 감촉은 있었지만, 이상하리만큼 모호했다.
마치 역풍에 대고 나뭇가지를 휘두른 것 같은 느낌이었다.
펄럭하는 소리와 함께 그웨지안이 입고 있던 품 넓은 소매 일부가 잘려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그웨지안은 아래에서 위로 움직이는 검의 궤적을 따라 제자리에서 체조하듯 몸을 뒤로 접었고, 선 채로 뒤로 한 바퀴를 돌아서 다시 선 것.
소매는 그 과정에서 잘려 나간 것이었다.
[만사재시 매사필종]이 쾌快의 묘리를 담은, 절삭과 속도에 중점을 둔 스킬이란 점을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의 유연함과 신속성, 판단력이었다.
지금껏 [만사재시 매사필종]을 마주한 이들 중 반응한 상대는 없었다.
딥스페이스에서 신처럼 행세했던 호테키도 미처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내가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스킬이다.
하지만 바로 눈앞에서, 통하지 않는 모습을 보니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심지어 여긴 딥스페이스가 아니라 현실이다.
몸을 뒤로 멀리 빼면 나다가 바로 붙을 것이 분명하니 간격을 최대한 주지 않으면서 제일 간결한 동작으로 내 공격을 흘려보낸 그웨지안의 모습에 손에 힘을 주어 칼자루를 다시 잡았다.
예상은 했지만 절대로 쉬운 상대가 아니다.
의뢰한 템페시르나와 의뢰 대상인 가연에게는 미안하지만, 그쪽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
이쪽이 마무리되어야 저쪽에 얼굴이라도 비춘다.
나다도 신음을 흘렸다.
“오메가쿤의 저 움직임은 나도 대처하기 힘들 것 같은데 아무렇지 않게 피하다니······대체 정체가 뭐냐능!”
그렇게 말하는 나다도 나와 함께 그웨지안을 공격하고 있었다.
조금의 틈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는데, 나다도 나와 생각하는 것이 비슷한 것 같았다.
내 수준이 네오-서울의 공공 집행자 수준인가 싶다가도 이런 호흡이 나다의 오해를 더 증폭시키지는 않을까 하는 짧은 걱정은 곧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글라드 일족이라고 암살을 전문으로 하는 다크 엘프. 그 일족의 수장이래요.”
검격과 봉격이 난무하는 사이로 내가 나다에게 스치듯 건넨 말이었다.
검과 봉 끝에 걸린 테이블이나 의자가 순식간에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구겨져 날아가는 와중에도, 그웨지안은 양손과 팔만을 움직여 공격을 받아내고 있었다.
타격이 이루어지는 아주 찰나의 순간에만 불편하다는 듯 눈썹을 움찔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가연 씨를 노리는 암살자의 어머니래요.”
“그게······정말이냐능.”
“네. 과거에 이 사람과 맞붙은 템페시르나 님 말씀이니까······.”
“그거 말고! 어머니라는 거! 취향은 존중하지만, 유부녀는 건들면 안 되는 거라능, 오메가쿤! 물론 매력이 있어서 유부녀가 된 거겠지만······.”
이 시대의 불가는 종교적 색채보다 개인의 깨달음에 중점을 두어 수련하기 때문에 머리만 밀고 가사만 입는다면 소속 승려들의 다양성과 개성을 크게 터치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근데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밀교승이었던 색승과 직접적인 비교는 힘들겠지만, 굳이 색승과 나다를 비교하자면 내 느낌은 이랬다.
색승은 ‘어떻게 그런 말을!’, 나다는 ‘어떻게 그런 말을?’.
색승은 정신을 오염시키는 것 같았다면, 나다는 정신을 날려버렸다.
일단 그웨지안을 향한 공세에 집중하며 짧게 말했다.
“치정 관계 아닙니다. 어떻게 된 건지는 템페시르나 님에게 물어보세요.”
“여래여래······.”
곧 나다의 시선이 무대 위에서 다른 암살자를 막아내고 있은 템페시르나에게 향했다.
혜심통을 사용하는 것 같았다.
템페시르나도 음성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의사를 전달하는지 계속해서 봉을 휘두르는 나다가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 내게 물었다.
“완전히 이해는 못 하겠지만, 어쨌든 저 다크 엘프가 오메가쿤의 목숨을 노린다는 것 맞냐능.”
“100% 완전히 이해하셨군요.”
내 답을 들은 나다가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제자들과 둘러앉아 불법을 설파하는 석가모니의 모습처럼 엄격하면서도 위엄있었다.
“이래서 현실 여자를 좋아할 수가 없는 거라능!”
그의 뒤통수에 아른거리던 휘광이 빛을 뿜었다.
모근 하나 보이지 않는 나다의 정수리에 휘광이 반사되어 리셉션 홀을 가득 채웠다.
나 역시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바로 곁에서 눈뽕을 맞았기에 급히 나다를 향해 손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놀라지 말거라. 나다의 십덕화엄경十德華嚴炅이란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나다가 단단히 화 난 모양이구나.
뇌리에 바로 꽂히는 템페시르나의 잔잔한 음성.
그 말처럼 조금 어수룩하고 순해 보였던 나다의 후덕한 얼굴이 붉게 물들고 푸른 핏줄이 이마와 머리를 타고 불거지고 있었다.
- 아이야, 이 틈을 타서 자리를 바꾸자꾸나. 저것과 얽힌 악연은 내 것이니 내가 끊겠다. 아이는 내 딸을 지켜주려무나. 저 상태의 나다를 보조하는 건 내가 아니면 힘들 것 같기도 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웨지안도 아닌 그웨지안의 아들에게도 우위를 점하지 못했던 템페시르나다.
별다른 행동을 못 하게 묶어놨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래도 그웨지안은 나다와 내 공세를 거의 온전하게 받아 냈다.
나도 그렇고 나다도 그렇고 아직 전력을 끌어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웨지안도 절대 만만하게 볼 수는 없었다.
머뭇대는 사이, 다시 템페시르나의 목소리가 머리에 울렸다.
-히말라야에서 팔을 잃고 내려온 뒤 준비한 것이 있단다. 혹여나 저것을 다시 만나는 날을 고대하며 말이다. 오랜 세월을 준비했는데, 저것의 아들에게 보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느냐. 게다가 눈앞에 있는데 말이다.
나다에게서 뿜어져 나온 빛이 사그라들기 전, [고속 이동]을 사용해 무대 위로 이동했다.
템페시르나가 가볍게 허공을 밟으며 내 곁을 스쳤다.
무게가 있는 무언가가 떨어져 바닥과 충돌해 울리는 소리가 홀에 작게 퍼져나갔다.
빛이 사라지고, 여지껏 큰 표정 변화 없던 그웨지안이 인상을 마구 찌푸렸다.
그녀의 앞에서 뒷짐을 지고 있는 템페시르나를 향해서였다.
“패배자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그날의 패배가 지금의 날 만들었으니 어쩌면 네게 고마워할 일일지도 모르겠구나.”
홀을 울리던 소리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템페시르나의 등과 어깨에 붙어 있던 장치였다.
작지만 또렷한 템페시르나의 목소리가 홀 곳곳을 점령했다.
몸 안에서 끌어올려 넘실대는 내력 때문에 그가 입고 있는 생활한복 전체가 펄럭거렸다.
“죽이려는 자가 나였으면 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젊은 시절의 치기로 인해 많은 이들에게 미움과 원한을 샀을 터이니. 그것은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업이다. 허나!”
일제히 들리는 굉음과 함께 템페시르나 주변의 테이블이 모조리 박살이 나는 것과 동시에 터져나갔다.
“내 딸을 죽이려 한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죽음으로 갚아라.”
그웨지안이 광소를 터트렸다.
“내가 저 아이 어미다! 네가 훔쳐 간 내 딸이라고!”
템페시르나의 내력이 한 번 더 터져 나왔다.
“자식을 죽이려는 부모는 없다. 내 딸을 낳은 자가 그런 망종이라면. 죽여 없애는 것이 차라리 낫다.”
나는 뒤늦은 지금에야 알 수 있었다.
템페시르나가 장착하고 있던 장치는 내력으로 팔의 형태를 구체화하는 장치가 아니라 너무 많은 내력이 그쪽으로 가지 못하게 억제하고 있던 장치였음을.
그의 잘린 어깨에서 뻗어 나온 내력으로 만들어진 팔은 수십, 수백 개는 족히 되어 보였다.
다 세기도 힘든 손 하나하나가 엄청난 내력의 응집체였다.
바닥을 박차 가볍게 몸을 띄워 올린 템페시르나.
그웨지안의 머리 위로, 딸의 행복만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손이 쏟아졌다.
그 손 사이사이, 잔뜩 분노한 사천왕처럼 매섭게 봉을 내리찍는 나다의 기세 역시 살벌했다.
“죽으셈! 공공 집행자를 뭘로 보고 이런 자리까지 기어 들어 오는 거임!”
나 역시 놀고 있을 수는 없었다.
검을 가볍게 휘둘러 몸에 있던 긴장을 털어낸 뒤 가연을 등 뒤에 두고 섰다.
불러낸 신이 어찌나 많은지 어깨 위로 김을 뿜어내는 위타천의 곁이기도 했다.
“후배가 내게 얻어맞고 기절한 게 어제 같은데, 이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군. 믿기지 않아.”
“그러게요. 언젠가는 그쪽 턱에 원펀치 먹일 날이 오겠지 하면서 열심히 뛰어다녔는데 일이 이렇게 됐네요.”
“내 턱에? 후배가? 한참 멀었지.”
“오늘 보면 며칠 안 남았구나 하고 생각 바뀔 겁니다. ‘우리 자기 씨’.”
그리고 검을 들어 암살자에게 겨누고 말했다.
“1차전 때는 엄마 보러 도망쳤지? 2차전 시작이다. 스윗가이.”
아직 놈의 몸 곳곳에 묻은 생크림에서 달콤한 냄새가 풍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