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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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1층의 차고.
바이크에 앉아 시동을 걸자 앨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렙틸리비안 로드로 가실 건가요? 스콰이어 씨랑 안타란 씨한테 연락 넣을까요?
그쪽으로 가면 어제와 같은 귀찮은 일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어제 그 난리가 난 것도 내가 바람 쐬려고 렙틸리비안 로드가 아니라 일반 도로를 이용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몸을 숨긴 채로 움직이고 싶지는 않았다.
어제의 그 일은 작은 소란일 뿐, 내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군자는 큰길로 다닌다지 않나.
“아니. 그냥 갈 거야. 1층 차고 문 열어줘.”
뭔가를 말하려는 듯, 앨리스가 음 하는 소리를 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하로 향하는 통로가 아니라 1층 차고 문이 열렸다.
-말리려고 해도 소용없겠죠?
“아마도?”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그래. 일 있으면 연락하고. 스냅샷한테 어제 일 빨리 정리해서 안 보내면 내가 갈 거라고 한 번 쪼아주고.”
-그건 이미 했어요.
“굿. 일 처리는 기가 막혀.”
-제가 열심히 움직여야 사무실이 굴러가더라고요.
“동감이야.”
바이크를 끌고 도로로 나오자 밤을 새워서 졸려 죽겠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정현과 자코가 다가왔다.
밤새 나다와 함께 가챠를 돌리고 오덕 토크를 하느라 바쁘긴 했지만 그래도 두 녀석 다 대림 에어리어의 사설 집행자라는 본분을 망각하지는 않아서 시간마다 교대로 사무실 주변 순찰을 돌고, 근처에 나와 있는 다른 사설 집행자들과도 꾸준히 연락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바이크에 올라 헬멧을 쓰며 물었다.
“나다는?”
“1시간쯤 전에 가셨어요. 자기도 약혼식에 초대받았는데 이 꼴로 갈 수는 없다면서요.”
“그래? 어쨌든 너희 사장님이 좋아하겠네. 밤새 나다랑 붙어 있으면서 연락처 교환도 하고 그랬을 거 아냐. 사설 집행자는 공공 집행자한테 말 붙이기도 힘들잖아.”
내 말에 정현과 자코 둘 다 인상을 찌푸리고 내 말에 거센 반감을 드러냈다.
“형님, 저희를 뭘로 보시는 겁니까. 그런 짓은 안 했습니다.”
“왜?”
“연락처 물어봤으면 그건 비즈니스 아닙니까. 나다 님과 저희는 어제부로 ‘친구’가 되었습니다. 친구 사이에 비즈니스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순수함을 잃게 되는 겁니다.”
아주 복숭아나무 아래서 술 한 잔을 나눠마시며 의형제라도 된 것같이 비장하다.
“그건 너희 사정이고, 키를롭스 아재 사정은 그렇지 않을걸?”
“그렇지 않다니까요. 그런데 나다 님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십니까? 솔직히 형님 이름이 좀 퍼지긴 했어도 나다 님이 종일 붙어서 지킬 정도의 거물······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미흡하지 않나 해서요.”
그 과정을 다 말해주려면 너무 길고, 긴 이야기를 마친 후에 믿기나 할지 의문이다.
대충 어깨를 으쓱해주고 말았다.
“지켜지는 것도 나쁘지 않긴 한데 내 성격에 맞지는 않더라. 어쨌든 어제부터 해서 고생들 많았어. 들어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귀걸이와 연동된 헬멧을 통해 신시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한테 말씀드려서 홀의 보안 정도를 최상급으로 조정했어요. 내빈객 분들 리스트도 확보했고요.
신시아 역시 가연의 친구로 오늘 약혼 발표에 참여할 예정이어서 어제, 밤이 늦기 전 야스민 저택으로 돌아갔었다.
-다만 아버지도 이런 정도로는 글라드 일족의 암살 시도를 막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하고 계셨어요. 준비할 시간이 조금 더 있었으면 호텔이 아니라 저희 저택의 정원을 발표 장소로 내줬으면 어떨까 하고 아쉬워하기도 하셨고요.
약혼 발표를 촉박할 정도로 급하게 잡은 것은 글라드 일족의 암살자를 유인하려는 방법이라 어쩔 수 없었다.
또 다른 암살자가 가연이 아니라 내게 붙은 것은 예상하기 어려운 문제였지만.
“리셉션 홀을 피바다로 만들지는 않겠다고 전해주세요.”
-아버지도 염려하시긴 했지만, 오메가 님이 기획한 일이라고 하니 그럼 됐다고 넘어가셨어요.
“어깨가 무겁네요.”
내 말에 신시아가 비장하게 말했다.
-저도 최대한으로 도울 테니까 말씀만 하세요.
“바쁘면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어진다지만 야스민 가의 영애에게까지 힘을 빌리는 건 해결사의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는군요.”
약혼 발표장에 좀비가 뛰어다니고 원혼이 날아다니는 그림만은 막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신시아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호텔에서 뵙죠.”
혹시나 어제와 같은 추격전이 벌어지지는 않을지 좌우를 살피면서 스로틀을 감아 속도를 높였다.
주위의 풍경이 늘어지더니 붓으로 그은 것 같은 선이 되어 내 곁을 칠하며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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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까지 오는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햇살은 따스했고 바람은 선선했으며 심지어 교통 상황도 좋았다.
바이크에 타고 있는 것만으로 절로 미소가 나고 콧노래를 흥얼거려도 이상하지 않은 주변 환경이었지만, 나는 내심 불쾌했다.
이건 ‘만들어진 평안’ 같다는 느낌이 계속해서 들었다.
마치 사자가 점찍은 사냥감에 표범이나 하이에나들이 달려들지 않는 이치를 체험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웨지안은 자신의 아들이 가연을 죽이는 곳에서 나를 죽일 것이라 선언했다.
그렇기에 감히 그웨지안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내게 어제와 같은 위협이 가해지지 않는 것 같은 기분.
어쩌면 어제 나다가 종일 나와 붙어 있었기 때문에 애초에 포기한 걸 수도 있겠지만, 내 직감은 나다보다는 그웨지안 때문이라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몇 겹의 신원 확인 절차를 거치고 지하 주차장에 바이크를 세워 놓고 위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털 뽑히기 직전의 닭이 된 것 같아서 썩 유쾌하지는 않네.”
변태 스토커나 처리하면 될 줄 알았는데, 암살 시도에서 대상을 지켜야 했다.
심지어 다른 암살자로부터 내 목숨을 위협받으면서.
일단 내가 기공을 사용하는 것으로 그쪽에 연막을 쳐두기는 했으나 완전히 먹힐 거라고 장담하기는 어려웠다.
내가 신분을 여러 개 두고 활동하는 것이 아닌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앨리스한테 말해서 비슷한 걸 만들어봐? 그렇지 않아도 음지에 발을 걸치는 일이 많아지는 차에?’
잡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어 엘리베이터 숫자나 바라보고 있을 때, 옆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제 고생을 좀 한 모양이더구나, 아이야.”
정갈한 생활한복을 입은 템페시르나였다.
역시 종족 자체가 타고난 옷걸이라는 엘프답게 흑백의 생활한복을 걸친 템페시르나 주위에는 신비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어쩌면 신비한 분위기는 옷 때문이 아니라 신경 쓰지 않으면 알기 힘들 정도로 자연스레 흘리는 템페시르나의 내력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의 얼굴은 평소처럼 큰 부침 없이 평안해 보였지만, 내심 그라드 일족의 암살자 둘을 신경 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스케일이 좀 커지긴 했는데, 비스무리한 일을 그래도 좀 겪어봐서 고생까지는 아니죠.”
띵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우린 자연스레 안으로 들어가 위로 향하는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히자, 템페시르나가 내게 조언했다.
“자만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야. 제법 긴 하루가 될 것 같으니 말이다.”
“시간 감각이 흐릿한 엘프가 긴 하루라고 할 정도면 정말 길 것 같긴 하네요.”
잠깐 나를 보던 템페시르나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위타천이 아이에게 호감을 가진 이유를 알 것 같구나. 심지어 어제는 나다도 만났다지? 나다 그 녀석은 나도 다루기가 보통 힘든 것이 아닌데 용케 아이와 오래 붙어 있더구나.”
“제가 좀 매력 있긴 하죠. 그런데 이거 다 영업입니다. 영업.”
“영업?”
“생각해보십쇼. 제가 벌벌 떨고 있으면 되겠냐는 거죠. 적어도 의뢰인이나 손님 앞에서는 뭐든 다 해낼 수 있는 척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걸 내 앞에서 말해도 되는 것이냐?”
“저는 실제로 다 해냈으니까요. 위타천 님이 제 얘기하면서 말씀 안 드렸나요? ‘실패를 모르는 해결사.’라고요.”
2초 정도 말이 없던 템페시르나가 파안대소했다.
“그래,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으면 움츠려 있을 필요가 없거늘. 오늘 아이에게 많이 배우는구나.”
띵-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1층 로비로 나오자 사람들이 많았다.
방송사에서 나온 사람들, 내빈객인지 격식 있는 옷을 입은 사람들 등등.
템페시르나는 곧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멀어졌다.
안에서 보자는 손짓과 함께였다.
-오셨어요?
귀걸이를 통해 들리는 신시아의 목소리.
막 올라왔다고 답을 하려는데, 누군가 내 팔목을 잡았다.
“찾았다.”
신시아였다.
“어······.”
신시아의 모습을 본 나는 순간 석상이 되었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신시아는 예쁘다.
야스민 가문 특유의 회색 금발이 자아내는 분위기나 아우라도 있었고 흡혈귀의 특징인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홀리는 게 아닐까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아마도 가격은 어마무시할 테지만 신시아가 즐겨 입는 다양한 베리에이션의 세미 정장과 액세서리도 그런 분위기에 한몫했다.
물론 입은 사람이 워낙 빛나서 더욱 그렇게 보였겠지만.
그렇지만 자주 봐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처럼 머리를 올려 묶은 채로 드레스를 입은 신시아의 ‘힘 잔뜩 준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배우인 가연에게 조금도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이 들 정도.
신시아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렇게 에뻐요?”
“예······.”
아무런 필터를 거치지 않고 대답한 것과 동시에 화들짝 놀랐다.
신시아도 내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한 건지 큼큼하는 소리와 함께 목청을 다듬었다.
“이런 모습을······좋아하시는군요.”
“그게 아니라······.”
더 이상은 뭐라고 말해도 구차해질 것 같다.
그래! 올려 묶은 머리랑 그 아래로 떨어지는 가느다란 목선 싫어하는 남자가 어디 있어!
영화 보면 흡혈귀들도 다 거기 물잖아!
신시아가 내 팔에 자기 팔을 걸어 올려놓고 말했다.
“가요.”
“네? 저 여기 일하러 왔어요.”
눈을 흘기는 신시아.
그녀의 동그란 이마 아래의 미간에 주름이 진다.
“누가 쭉 제 옆에 있어 달래요? 에스코트만요.”
그 사이, 카메라와 촬영용 소형 드론이 우리 주위를 맴돌았다.
여기서 신시아만 두고 빠지는 것도 그림이 이상할 것 같았다.
“가시죠.”
팔짱을 낀 채로 살짝 걸어 나가니 신시아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찰칵거리는 소리가 주변에서 요란했다.
홀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 이 자리의 주인공은 위타천과 가연이 아니라 나와 신시아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입술만을 달싹여서 말했다.
“나중에 해명할 생각에 벌써 머리가 아프네요.”
고개를 돌렸을 때, 신시아의 얼굴이 내 귓가에 다가와 있었다.
밖에서는 보기에 신시아가 내게 귓속말을 하는 것처럼 보일까?
그녀의 목소리가 닿았다.
“굳이 해명할 필요 있나요?”
신시아의 입술이 내 뺨에 아주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기 힘들었다.
아주 차갑고 시원한 감촉이 지나갔다는 것뿐.
열기를 식히는 서늘함 같아서 지금껏 내 주위를 감싸던 ‘만들어진 평안’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통신 디바이스인 팔찌와 그 위에 감겨있는 황천사를 흔들며 말했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세요. 바로 도우러 갈게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서 홀로 향하는 신시아의 목덜미가 아주 미미하지만 조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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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려드는 사람들을 피해 리셉션 홀 뒤쪽, 가연의 대기실로 향하며 앨리스와 통신했다.
“너 신시아한테 조언이랍시고 이상한 거 가르쳤지.”
-아뇨.
“똑바로 말해.”
-신시아 언니랑 수련 언니 둘 다 알려준 거니까 신시아 언니한테만 했다는 건 틀린 말이죠.
“하아······.”
-소셜 미디어에도 영상이랑 짤 뜨는데 사장님 괜찮게 생겼다는 반응 많네요. 뺨만 닿은 거다, 귓속말한 거다 뭐 이런저런 말들 많아요. 신시아 언니는 얼굴이랑 이름이 알려진 편이니까요. 어! 수련 언니도 확인했나 봐요. 미친 듯이 연락하네. 일단 사장님한테 연락 가는 건 막아놓을게요. 나는 분명히 둘한테 똑같이 알려줬어.
재밌어 죽겠다는 걸 감출 마음이 하나도 없는 앨리스의 목소리를 듣다 보니 가연이 대기하는 곳 앞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귀걸이를 만졌다.
“이따가 얘기하자. 지금부터 바빠질 것 같아.”
[체취 남기기]가 묻은 대상이 근처에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