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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캐여도 너보단 강함-131화 (132/258)

131.

131.

“모든 것을 의심하거라. 놈은 실재를 기만하며 동시에 허상을 기망하니까.”

여전히 기파를 물결치듯 주위로 퍼트리는 템페시르나가 나를 향해 조언했지만, 말뜻이 워낙 모호해 조언보다는 선문답처럼 다가왔다.

“이해도 안 되고 감도 못 잡겠습니다만······.”

이곳은 호텔의 로비다.

템페시르나가 품고 있던 내력을 몸 밖으로 끌어내기라도 한다면 벌어지는 일은 보통 난리가 아닐 것이다.

이미 다른 투숙객 중 예민한 이들이 템페시르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다급하게 말했다.

“여기서는 안 됩니다! 정확히 누군지도 알 수 없지 않습니까.”

비즈니스맨, 여행객, 직원 등등 많은 이들이 제각기 리듬에 맞는 걸음으로 로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말하는 것으로 보아 템페시르나 역시 직감으로 무언가를 느꼈지만 정확한 대상은 알 수 없는 것 같았다.

내 말이 통한 것인지 템페시르나가 눈을 감으며 기운을 천천히 갈무리했다.

“잘 생각하셨습니―”

말을 마치기 전, 템페시르나의 발아래에서 파앙하는 소리와 함께 공기가 쓸려 나왔다.

공중을 여러 번 밟아 몸을 띄운 템페시르나가 내게 접근하며 짧게 말했다.

“비키거라.”

[고속 이동]

몸을 트는 것과 동시에 중심을 뒤쪽으로 이동시켜 두어 발자국 물러났다.

그 바람에 내 뒤에 있던 사람이 노출되었다.

길쭉길쭉한 몸의 선, 뒤로 뻗은 귀로 보아 엘프, 아마도 성별은 여자였다.

하늘하늘 옷과 새카만 선글라스를 쓴 엘프 여인을 보고도 템페시르나는 가속을 멈추지 않았다.

엘프 여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리라 생각한 순간, 그녀는 템페시르나의 간격 안으로 몸을 불쑥 집어넣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

눈으로 따라잡기도 힘들 정도의 빠른 연격連擊이 템페시르나의 팔과 다리에서 발생해 엘프에게로 쏟아졌다.

놀랍게도 엘프 여인은 템페시르나의 것과 매우 흡사한 움직임으로 자신에게 쏟아지는 공격을 모두 흩어냈다.

심지어 템페시르나의 공격을 막는 와중에도 선글라스의 방향이 몇 번 내 쪽으로 향하기까지 했다.

탁―

공중에 떠 있던 템페시르나가 양발을 바닥에 디뎠다.

1초에 수십 번을 오간 격렬한 손속이지만 큰 소리 한 번 나지 않은 것으로 둘의 경지에 가히 지고하다는 말을 붙여도 아깝지 않았다.

빠직하는 소리와 함께 엘프 여인이 쓰고 있던 선글라스의 한쪽 다리가 부러지며 아래로 떨어졌다.

한 줌의 더함과 덜어냄도 필요 없는 손짓으로 다리가 부러진 선글라스를 벗어서 들고 있던 클러치백에 넣은 엘프 여인이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이 호텔, 서비스가 엉망이구나. 손님 대접이 이 모양이라니.”

“그웨지안······.”

템페시르나의 발언으로 눈앞의 이 다크 엘프 여인이 그웨지안이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그웨지안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용케도 알아봤군. 패배자.”

마지막 단어에 템페시르나가 움찔했지만, 곧 사나운 맹수 같은 얼굴로 답했다.

“상처가 이렇게 쑤시는 건 오랜만이니까. 게다가 위장 하나 없이 돌아다니는 미친 짓을 자행할 줄은 몰랐지.”

기의 출력을 조정하기 위해 템페시르나의 어깨 쪽에 붙어 있는 작은 조절 장치가 윙윙하는 고주파를 내뿜고 있었다.

“내 본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은 몇 없다. 제대로 본 이들은 모두 죽였거든.”

그웨지안의 입에서 가볍게 나온 문장 하나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여전히 휘어있는 그녀의 눈꼬리가 내게로 향했다.

“너는 나를 보았구나, 인간.”

나를 죽이겠다는 엄포다.

“나도 너를 봤다, 엘프.”

손을 들어 브이를 만든 뒤 내 눈을 찍고, 그웨지안의 얼굴로 향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내 대답을 들은 그웨지안이 잠깐 벙찌는 얼굴을 하더니 암살자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화사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당돌하구나.”

그 틈을 타서 내밀었던 손가락을 튕겨 지풍을 여러 번 쏘아 보냈다.

샌디 비치 사옥에서 템페르시나와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보여줬던 방법의 응용이었다.

[탄지공彈指功]

내력을 직접 몸 밖으로 투사하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이라는 한정된 부위에 내력을 모아 움직여 공기를 때리는 방식이기에 촌경寸勁이라 하는, 약 15cm 안쪽의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나 그나마 타격이 들어가는 스킬이다.

템페르시나처럼 몇 미터나 되는 곳에서 장풍처럼 펑펑 날려대기는 무리가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내 지풍이 향하는 곳은 그웨지안이 아니었다.

템페시르나, 정확히는 템페시르나의 펄럭이는 한쪽 소매를 향해 쏘아 보낸 지풍이었다.

잠깐 사이 내 의도를 읽은 템페시르나가 소매를 펄럭여 탄지공으로 만들어낸 지풍을 감쌌다.

그리고 자신의 내력을 실어 위력을 강화함과 동시에 각각의 지풍이 향하던 궤적을 아주 미세하게 비틀었다.

피잉 소리와 함께 가속이 붙은 지풍이 그웨지안을 향해 뻗어나갔다.

웃음을 거둔 그웨지안이 아주 우아하게 몇 걸음 물러서며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웨지안 왼손의 손날과 손톱이 서늘한 빛을 뿜었다.

원리는 모르겠지만 저걸로 지풍을 튕겨냈다.

퍼석―

지풍을 피하려고 뒤로 몇 걸음 움직인 그웨지안의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

내가 쏘고 템페시르나가 강화한 지풍이 로비의 중심에 있는 장식물 외관을 뚫어버린 것이 보였다.

여전히 주변에서는 이 치열한 싸움을 알아채지 못한 채 제각기 할 일을 하고 있었다.

평화로움으로 덮어진 일촉즉발의 사태였다.

왼손을 털어낸 그웨지안이 냉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변의 소음 때문에 작은 말소리가 들릴 거리가 아닌데 그웨지안의 목소리는 선명했다.

내력으로 음성을 감싸 대상에게 전달하는 건가.

기예에 가까운 능력을 내보이면서 그웨지안은 호흡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위타천을 가르친 템페시르나의 팔을 잘랐다길래 도대체 어떤 괴물인가 싶었는데 아직 전력을 보지 않았음에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네오-서울의 공공 집행자를 마지막으로 제자를 두지 않는 걸로 알았는데, 숨겨두고 키운 녀석이 있었나? 그것도 인간을?”

입맛을 다시는 그웨지안.

“인간이 아니라 엘프였다면 교합하고 싶을 만큼 훌륭하다.”

예전 같으면 기겁했겠지만, 그런 언어적 공격은 이수련 덕에 익숙하다고!

요즘은 빈도가 좀 줄긴 했지만 그래도 매일 듣는 것이 발정, 정자, 교미 etc······.

이수련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템페시르나가 그웨지안을 향해 으르렁댔다.

“과거의 악연을 풀 요량이었다면 나를 죽이면 되지 않으냐. 내 딸은 아무 관련이 없다.”

그웨지안이 사납게 답했다.

“단초를 제공한 자의 변명치고는 너무나 구차하구나. 애초에 그때 죽었으면 이런 일이 있었겠느냐. 이름도 붙이지 못한 내 딸을 납치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악연을 입에 담는다는······.”

“갈喝!”

내력이 실린 템페시르나의 호통이 호텔 로비를 몇 번이나 쩌렁쩌렁 울렸다.

로비를 오가던 수많은 사람이 걸음을 멈춘 채 놀란 얼굴로 우리 쪽을 바라봤다.

템페시르나의 얼굴은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분노, 당혹, 슬픔, 절망 등등 부정적인 뉘앙스가 조금이라도 섞여 있다면 종류 불문하고 꺼내 온 감정의 물감을 얼굴에 풀어놓았다고나 할까.

오히려 그웨지안의 목소리에서 당황이 묻어났다.

“설마······모르고 있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템페시르나의 목울대가 몇 번이나 움직였으나 그는 쉽사리 말을 뱉어내지 못했다.

겨우 꺼낸 그의 목소리는 메말라 있었다.

“그런······농간에······속을 것 같으냐.”

곧 당황한 기색을 지워내고 재미있다는 듯, ‘순수한 악의’가 섞인 웃음을 보이는 그웨지안의 입에서 믿기 힘든 말이 쏟아져나왔다.

“이름 모를 딸은 가장 축복받아야 할 날에 내 아들에게 죽을 것이다. 또한 그 자리를 빛낼 선물은―.”

그웨지안의 시선이 나를 꿰뚫을 것 같다.

“네 목이다. 오메가. 죽음의 번제가 이곳에서 열릴 것이다.”

나는······어째서죠?

욱하는 마음이 들었다.

충격 때문인지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템페시르나를 지나쳐 그웨지안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파신권]······?

하지만 그웨지안을 향한 내 주먹은 그녀가 내민 손가락 끝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것처럼 주먹은 더 나아갈 수 없었고, 이 때문에 접촉을 해야 발동할 수 있는 [체취 남기기]도 사용하지 못했다.

‘검을 꺼내서 승부를 봐?’

보는 눈이 너무 많다.

이미 템페시르나의 호통 때문에 가드들이 몰려오고 있는 상황.

그웨지안의 얼굴이 뒤집히며 순식간에 다른 얼굴로 바뀌었다.

“부디 내일까지 죽지 말거라. 내 손으로 죽이고 싶으니까.”

무슨 말인가 싶어 멈칫했을 때, 그웨지안은 어느새 멀어져 호텔의 회전문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웨지안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네 목숨을 노리는 이가 제법 간절한 것 같더구나. 우리 글라드 말고도 다른 곳에도 접촉한 것 같으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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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가연 씨가 글라드 일족 수장의 딸이라는 거죠?”

사무실에서 앉아 오메가와 통신 중이던 앨리스가 되물었다.

-일 수도 있다는 거지. 확실하지는 않아. 템페시르나 님도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나왔거든.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닐 성질의 내용은 아니네요.”

-내 생각도 그래. 우리 이 통신 내용도 어디서 도청되고 그런 건 아니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복잡하게 우회하게 해놨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공공 집행자 마고 정도는 되어야 뚫고 들어올걸요.”

-마고는 들어올 수 있다는 소리네?

잠깐 멈칫한 앨리스.

얼른 짐을 오메가에게 넘겼다.

“사장님이 나쁜 짓만 하지 않으면 마고가 우리 사무실 통신망을 뜯어보는 일은 없겠죠?”

-절대로 혼자는 안 죽는다. 우리는 운명 공동체야. 서울메이트라고.

“알아요. 누가 뭐래요?”

퉁명스럽게 답하면서도 곧 킥킥거리는 앨리스가 오메가에게 말했다.

“지금 오고 계신 거죠?”

-응. 렙틸리비안 로드 이용할까 하다가 바람이나 좀 쐬려고 일반 도로 이용해서 가고 있어. 한강 거의 다 넘어왔어.

“그래요? 사장님 나가 계신 동안 안타란 씨랑 키클롭스 사장님한테서 들어온 것들이 있는데, 와서 보실래요? 아니면 간략하게 읊어드릴까요?”

-어차피 사무실 가서 봐도 네가 옆에서 이건 어쩌고 저건 어쩌고 할 거잖아. 읊어줘.

“일단 방송국에서 사장님을 공격한 파충류 수인. 아직 잡지는 못했는데 신상은 드러났어요. 불칸 마탑에서 10년 넘게 수습 딱지를 못 떼다가 불법 마력 증대 약물에 손을 대서 퇴출당한 놈이래요. WSS의 갱단에서 나름대로 마법사 대우받으면서 살았는데 약에 너무 빠져서 갱단에서도 손을 놨다고 하더라고요.”

-불칸? 거기 나이누안이 있던 곳 아닌가? 재능이 없으면 놔주길 하지 10년이나 수습으로 부려 먹어? 독하다, 독해.

“불칸 마탑주, 박운의 극심한 엘리트주의는 유명해요. 몇몇 제자들 말고는 죄다 소모품으로 본다던가요.”

-그런 곳이 어떻게 굴러가냐.

“페룬 마탑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불칸 마탑도 꽤 부유해요. 고열을 다루는 산업에 관련한 마법 특허를 많이 가지고 있거든요.”

-돈이 웬수다, 돈이 웬수야.

“어쨌든 안타란 씨가 계속 추적 중이래요. 파충류 수인들이 범죄를 저지르면 결국 찾는 곳은 렙틸리비아라고 하더라고요.”

-오케이.

그때, 갑자기 통신이 약 1~2초간 끊겼다.

“사장님?”

-앨······리스?

다행히도 통신 상태는 곧 원래의 말끔한 상태로 돌아왔다.

“이럴 리가 없는데?”

-진짜 마고가 도청 중인 거 아니야?

패드를 통해 통신 라인을 모두 확인한 앨리스였지만 이상은 아무 데도 없었다.

심지어 건물 지하에 위치한 통신 모듈에도 갔다 왔지만 별다른 특이점은 없었다.

“사장님! 혹시 주위에 트럭이나 트레일러 있어요?”

-많지.

“그중에 사장님 주위에 계속 보이는 차 없었어요?”

-미행?

“사장님 주변의 통신 주파수를 먹통으로 만드는 방법 외에는 통신이 끊길 이유가 없어요.”

-확인해볼게.

어느 탑차의 옆으로 오메가가 붙자 통신이 다시 한번 끊어졌다.

동시에 다른 탑차와 트레일러가 오메가의 바이크를 감싸고, 탑차의 슬라이드 도어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

그곳에는 각자 손에 한두 개씩 무기를 든 괴한들이 가득했다.

그들이 바이크를 향해 무기를 조준했을 때, 오메가는 보이지 않았다.

이미 자율주행 모드에 들어간 바이크가 스스로 스로틀을 움직여 속도를 조정하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바이크를 향해 있던 그 순간, 탑차의 위쪽에서 빛 한줄기가 움직였다.

서걱-

광자 검날에 베인 괴한 하나의 머리가 피를 뿌리며 탑차 아래로 굴러 들어갔다.

슬라이드 도어가 올라가는 것과 거의 동시에 바로 검을 뽑고 탑차의 지붕으로 몸을 날려 올라가 있던 오메가가 검에 묻은 피를 털며 물었다.

“너희도 나 죽이러 왔냐?”

그의 손에 들린 검이 계속해서 희생자를 만드는 와중이었다.

“내 목숨값이 얼마나 되나 확인 좀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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