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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캐여도 너보단 강함-130화 (131/258)

130.

130.

사흘 뒤, WSS 영종도에 위치한 국제공항에 도착한 여객기에서 묘령의 여인이 입국 수속을 마쳤다.

내민 신분증과 여권에서 옳은 부분은 단 하나도 없었지만, 한없이 진짜에 가깝게 위조한 것이기에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통과할 수 있었다.

이국적인 색채가 잔뜩 배어 나오는 천으로 만들어진 하늘하늘한 옷, 손과 목에 걸린 작은 장식물은 남녀 할 것 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여인에게 한 번씩 돌리기에 충분했다.

여인의 귀는 뒤쪽으로 날카롭게 뻗어 있었기에 엘프임을 알 수 있었다.

짙게 선팅된 커다란 선글라스 너머로 안구만 움직여 주위를 눈에 담던 그웨지안이 작게 내뱉었다.

“다 죽여버리고 싶어.”

이름도 붙이지 못한 딸을 잃은 이후, 그웨지안의 발작적인 폭력성이 간간이 터져 나오곤 했다.

템페시르나에게 잃고 나서 다양한 무기를 내재한 머신 핸드를 이어붙인 왼 팔목의 절단면이 근질거렸다.

일족의 장로들도 그웨지안의 이런 면을 염려해 수장의 외유를 만류했으나 아들의 임무를 점검하러 간다는 이유에 길을 열 수밖에 없었다.

임무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웨지안이 누티엘에게 비밀 임무를 줬고, 그에 따라 누티엘이 하산했다는 정도는 장로들도 알고 있었다.

글라드 일족의 차기 수장이 유력시되는 누티엘에게 수장이 직접 내린 임무고, 그걸 점검하러 가겠다는데 막을 명분이 미약했다.

히말라야산맥에서 내려와 몇 번의 신분 세탁과 여러 권역을 지나 네오-서울 근방인 WSS에 도착한 그웨지안의 심기는 매우 불편했다.

이유 없는 학살이 벌어질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 그웨지안의 입가에 한줄기 미소가 흘렀다.

“아들아.”

그 말에 그웨지안을 스쳐 지나가던 이가 걸음을 멈췄다.

배낭여행을 가는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인간이었다.

심지어 엘프 특유의 잡티 하나 없는 피부나 기다란 귀도 없는 완벽한 모습의 인간.

비행기가 도착할 때부터 누티엘이 와있다는 것을 직감한 그웨지안이었지만 자신을 놀라게 해주기 위한 아들의 재롱에 짜증 가득했던 마음이 풀어졌다.

본인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발휘해 기척을 감췄다고 생각하던 누티엘의 뒤통수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누티엘 역시 숙련된 암살자.

호흡 한 번으로 몸 상태를 정상으로 돌린 뒤, 먼 길을 나선 어머니를 향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역시 어머니를 속이는 건 쉽지 않군요.”

“신경 쓰지 않았다면 자칫 그냥 지나갈 뻔했단다.”

그웨지안의 그 말이 ‘넌 아직 부족하다.’라는 말로 들렸기에 누티엘은 어머니의 포옹 너머로 입술을 깨물었다.

둘은 미리 준비된 차량에 탑승했고, 차량의 방향은 네오-서울이었다.

누티엘이 양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자 정밀하게 만들어진 위장 마스크가 그의 얼굴에서 떨어져나오더니 화륵 소리와 함께 한 줌 재가 되어 사라졌다.

창문을 열어 재를 털어버린 누티엘을 본 그웨지안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 아들인지 본판이 훤칠하구나.”

어색하게 웃어 보인 누티엘이 굳은 얼굴로 손끝을 만지작거리자 그걸 잡아낸 그웨지안이 선글라스를 이마 선까지 올린 뒤에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걱정이라도 있는 것이냐?”

“아닙니다.”

“걱정이 있으면 손끝을 뜯는 것은 네 오랜 버릇이지. 말해보거라.”

누티엘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께서 제게 기대한 것이 있어 내려주신 임무인데 이렇게 질질 끌고 있으니 죄송스럽습니다. 게다가 어머니께서 직접 오게 만들었으니 제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누이의 목숨은 마땅히 제가 아닌 어머니가 취하셔야 합니다.”

그 말에 크게 웃음 짓는 그웨지안이었다.

“그게 그리 걱정되었던 것이냐? 걱정 말거라 다른 이가 지어준 이름을 쓰는 네 누이는 여전히 네 몫이다.”

누티엘의 눈이 커졌다.

“그렇다면 어째서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 이 먼 곳에까지 오신 것인지 여쭙습니다.”

“과거에 헤어진 딸이라고 해도 무려 약혼 발표를 하는데 어미가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게다가 그 자리가 내 아들이 뿌릴 피로 물들 곳이라면 더더욱.”

세상 끝에서도 자식을 생각하는 건 부모뿐이라 했던가, 자신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느낀 누티엘이 누이의 죽음을 통해 어머니의 뒤를 이어 글라드 일족의 수장 자리에 오르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때, 잔혹한 미소가 암살자 일족 수장의 입가에 걸린다.

“나도 볼 일이 있어 이곳에 온 것이니 그리 어려워할 것 없단다.”

뇌에서 감정을 조절하고 공포와 불안을 관장하는 편도체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아 웬만한 일에는 한 줄기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누티엘의 호흡이 순간 흐트러졌다.

어머니의 입에서 나온 ‘볼 일’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암살이다.

글라드 일족의 수장에게 직접 암살을 사주한 이는 누구이며 그 대상은 누구인가.

무엇이 어머니를 움직이게 했나.

찰나의 시간 동안 누티엘의 안쪽에서 오만가지 생각, 의심, 추측이 부상과 침잠을 반복했다.

그러나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저 말이 나온 순간부터 자신의 곁에서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여인은 어머니가 아니라 일족의 수장이다.

흘끗 바라본 것만으로도 누티엘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고뇌를 눈치챈 그웨지안은 아들이 대견하다는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이 정도는 알려줘도 되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네 누이의 새로운 호위라는 자 말이다.”

“예.”

“인간이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그 인간에 대한 정보 수집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느냐?”

“굉장히 단편적인 정보만 들어오고 있습니다. 경로를 역추적해 저를 찾아내려는 시도도 있다고 하니 정보 조직과도 연결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오메가라고 했던가?”

한낱 해결사일 뿐이니 그리 신경 쓰실 것 없다고 말하려는 누티엘의 뇌리에 위화감이 솟았다.

어머니가 이름을 외우는 사람은 일족과 암살 대상뿐이다.

툭―

잔털 하나 없이 말끔하게 정리된 그웨지안의 이마 선에 걸쳐 있던 선글라스가 미끄러져 그녀의 매끈한 콧대에 안착했다.

그 짧은 순간, 누티엘은 장로들에게 말로만 전해 들었던, 어머니가 일에 들어섰을 때 보이는 ‘암살자의 눈빛’을 보았다.

“그에 대해 수집한 정보를 이 어미도 보고 싶구나.”

선글라스가 가로막고 있지 않았다면, 누티엘이 오래전에 잃어버린 공포라는 감정을 되살릴 정도의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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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서울 광화문 에어리어에는 전 세계적으로 이름 있는 많은 호텔 체인들이 영업 중이지만, 그중에서 가장 격식 있고 비싼 호텔을 꼽으라고 하면 플라워스 호텔을 꼽힌다.

내부에 입점한 식당과 객실 컨디션만으로도 다른 호텔들보다 한 발자국 이상 앞서 있다고 평가받는 플라워스 호텔이 가장 내세우는 것은 몇 년 안쪽으로는 예약이 꽉 차 있다는 이그제큐티브 리셉션 홀.

수많은 리셉션과 연회, 명사들의 강연이 이루어졌던 곳이며 경력만 최소 50년이 넘는 플라워스 호텔의 셰프들이 참가자들의 종족과 입맛 상관없이 최상급의 요리를 내놓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플라워스······최소 50년 경력의 셰프······.

흡혈귀 가문은 전통에 따라 꽃 이름을 가문 명으로 둔다.

따라서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플라워스 호텔 체인의 관리자는 모두 해당 권역의 흡혈귀 가문이며 대표 지점이자 본점 역할을 하는 광화문 에어리어 플라워스 호텔의 소유주는 당연히 야스민 공이었다.

신시아는 야스민 공에게 친구인 가연의 약혼식을 플라워스 호텔에서 할 수 없겠냐고 물었고, 야스민 공은 다 듣지도 않고 흔쾌히 오케이 사인을 했다.

가문의 일원이긴 하지만 너무 의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신시아가 야스민 공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건 매우 드문 일이라고 한다.

기존에 예약되어 있던 어느 기업의 15주년 연회를 취소하면서 아주 많은 위약금을 줘야 할 뻔했지만, 야스민 공이 위약금을 내놓기 전에 가연이 3개월간 그 기업의 모델을 서주는 것으로 깔끔하게 해결됐다.

그 플라워스 호텔의 이그제큐티브 리셉션 홀 내부는 아주 바빴다.

야스민 가문의 집사장인 레이먼드가 직접 이곳에서 직원들을 진두지휘하며 내일 있을 위타천과 가연의 약혼 기자회장을 꾸미고 있었다.

“가연이 정도면 거대한 숲속에서 약혼식을 하게 해주려 했는데······.”

홀을 돌아다니며 암살자가 침투할만한 곳을 살피던 내 곁으로 누군가 다가와서 하는 말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부루퉁한 얼굴의 템페시르나였다.

여전히 가연의 양아버지라는 것은 밝히지 않을 예정이지만, 템페시르나는 내일 공공 집행자들의 무술교관으로 자리에 초대될 예정이었다.

위타천뿐만 아니라 마고를 제외한 나다, 노덴스, 야타가라스도 템페시르나에게 배웠다고 한다.

“그건 결혼식 때 준비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간단하게 템페시르나의 불만을 받아친 내가 시선을 그에게 돌리고 물었다.

“강남 에어리어에서 제가 여쭤봤던 것, 생각은 좀 해보셨습니까?”

내가 위타천과 가연에게 약혼 발표를 하자는 의견 제시를 하고 그렇게 하겠다고 하던 날, 나는 템페시르나와 따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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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드 일족의 암살자는 대상 하나만을 노린다죠? 그렇다면 저를 공격하던 놈들은 다른 사주를 받아 그랬다는 걸로 치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타겟이 왜 가연 씨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유명세가 있고 잘 나가는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글라드 일족에게 암살 의뢰를 넣는다는 건 이상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말씀하시길 글라드 일족은 의뢰도 굉장히 까다롭게 받는다면서요.”

복잡한 표정을 짓는 템페시르나를 향해 계속해서 내 의문을 풀어냈다.

“그웨지안이라고 하셨었나요? 그쪽 수장의 손 하나를 날려버리셨다고 했죠? 그럼 암살 대상은 템페시르나 님이 되어야 하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왜 가연 씨가 타겟이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수십 년이나 지나서요. 제게 뭔가 감추고 계신 거 아닙니까?”

템페시르나는 그것에 대해 자신도 고민해봤지만, 답을 알 수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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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모르겠단다, 아이야. 다만 가연이가 글라드 일족의 평범한 아이가 아니었고, 그것이 이제야 드러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주 옅은 추측이 내가 할 수 있는 생각 전부란다.”

“제게 주신 의뢰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은 아니지만, 찝찝한 의문이라서 여쭤봤습니다.”

“나라고 그렇지 않겠느냐. 차라리 그런 고통을 겪는 것이 가연이가 아니라 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던지······.”

고개를 몇 번 절레절레 젓던 템페시르나의 어깨에서 작은 작동음이 나더니 기의 팔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만들어진 팔로 내일 손님들이 앉을 자리와 테이블 위의 잘 보이지도 않는 먼지들을 조심스레 털어냈다.

딸을 보러 온 손님들에게 잘 대접하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이 묻어났다.

다른 직원들이 ‘이 사람은 누구길래 왜 여기서 이러지’라는 표정을 하고 다가와서 저희가 할 테니 놔두시라고 해도 템페시르나는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리셉션 홀을 한 바퀴 돌아 다시 내 곁으로 온 템페시르나에게 물었다.

“이 정도로 했는데, 나타나겠죠?”

“그 다크 엘프 일족이라면 아주 신이 나서 달려올 것이야. 내가 장담하지.”

이렇게 화려한 곳에서 암살자의 몸에 묻은 내 체취를 따라다녀야 한다니.

어쩐지 조금 서글펐다.

그렇게 레이먼드에게 먼저 가보겠다는 인사를 하고 템페시르나와 함께 호텔 로비로 걸어 나왔다.

“저는 바이크를 지하에 두고 와서 그쪽으로 가보겠습니다. 그럼 내일······.”

템페시르나에게도 인사를 하려는데, 그는 두 발을 땅에 박은 나무처럼 꼿꼿하게 서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아래로 축 늘어져 있던 그의 긴 귀 끝이 날카롭게 서 있었다.

분노와 증오가 맴도는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이야, 이곳에 놈이 있구나. 나는 느껴진단다.”

“그럴 리가요.”

[체취 남기기]에 걸리는 것은 없었다.

내력을 순환하는지 주변 공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템페시르나의 확신에 찬 목소리가 내게 닿았다.

“가연이를 노리던 놈은 글라드 일족일 뿐 그웨지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 그웨지안이 근처에 있는 것이 분명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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