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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캐여도 너보단 강함-129화 (130/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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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지나지 않아 템페시르나도 도착했고, 호텔 레지던스답게 넓은 거실에 모두 의자 하나씩을 가지고 모여 앉았다.

어째 계속 민망해하며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위타천이 인상적이었다.

저 하와이안 셔츠 가이에게 저런 면모가 있을 줄이야.

괜히 의식하면 분위기만 이상해진다는 신시아의 조언에 따라 나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려고 했는데 당사자가 저렇게 민망해하니 내가 다 몸에 송충이가 기어오르는 기분이다.

해명이라도 하고 싶은 건지 계속 내 쪽으로 다가오려다 가연에게 손목을 꽉 잡혀 움찔거리는 모습이 그동안 내가 알던 위타천과는 너무 달라서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위타천 그놈이 우리 예쁜 가연이를 꼬신 거다.’, ‘가연이가 약점을 잡힌 게 분명하다.’라고 샌디 비치 회의실에서 한탄 아닌 한탄을 하던 템페시르나는 분명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 것이 분명하다.

아무리 봐도 저건 가연이 위타천에게 푹 빠진 모습이란 말이지.

“두 분 보기 좋지 않아요?”

내 곁으로 의자를 당겨 앉은 신시아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가연 씨는요. 저랑 만나도 위타천 님 애기 밖에 안 해요. 서로 바빠서 자주 못 만나긴 하지만 데이트 때 뭘 먹었고 어딜 갔고 그런 얘기요.”

“사이가 좋아 보이긴 하네요. 제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그림이긴 하지만요.”

위타천이 인상 잔뜩 쓰고 ‘내가 너 좋아하면 안 되냐?’라고 반 겁박하는 모습을 상상했다고 하면 신시아가 질겁하겠지.

위타천과 가연은 약혼 관계긴 하지만 그걸 밝힌 적은 없어서 데이트하기도 힘들 텐데 그걸 15년이나 이어왔다니 어떤 면에서 대단하긴 하다.

못마땅한 시선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는 템페시르나에게 작게 물었다.

“제게 해주셨던 얘기, 가연 씨는 알고 계십니까?”

템페시르나의 과거와 얽힌 이야기다.

그웨지안이라는 다크 엘프가 얽혀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며 가연이 그 다크 엘프 글라드 일족이라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

템페시르나가 순식간에 나와 자신 사이에 기막을 펼쳐 소리가 밖으로 퍼지는 것을 막고 답했다.

“가연이는 모르고 있단다. 혹여나 흘러 들어갈까 봐 저놈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의문점 하나를 여기서 해소하고 싶었는데, 그건 아무래도 이 자리에서 해결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일단 이 자리가 파하고 따로 보시죠.”

고개를 끄덕인 템페시르나가 기막을 거뒀고, 각자의 앞에 놓인 냉수로 목을 축인 내가 입을 열었다.

“일단 결과부터 말씀드리면 스토커는 놓쳤습니다.”

위타천이 입을 열려고 했으나 나는 재빨리 다음 말을 던졌다.

“하지만 분명히 다시 올 겁니다. 그렇죠? 템페시르나 님?”

고개를 끄덕인 템페시르나.

“아이의 말이 맞다. 아마 계속 접근할 테지.”

의심이 가득 담긴 눈을 가늘게 뜬 위타천이 마침내 말을 꺼낼 타이밍을 잡았다.

“어떻게 그걸 확신하십니까. 마치 그 스토커와 아는 사이인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때 후배와 무슨 말씀을 나누신 겁니까.”

템페시르나를 향하던 위타천의 고개가 나를 향해 쏘아졌다.

당장이라도 입을 안 열면 안 될 것 같은 위압감이 내게 쏟아졌다.

그것을 일시에 해소해 준 것은 아주 싱그러우면서도 자리에 모인 이들의 이목을 당기는 가연의 목소리였다.

“화내지 말아요. 자기 이마에 주름질라.”

그리고는 섬섬옥수를 뻗어 잔뜩 구겨져 있는 위타천의 미간을 손수 문질러주는 가연의 모습은 마치 어느 화보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을 옮겨온 것 같았다.

“보는 눈이 이렇게나 많은데······.”

죽일 듯이 노려보는 템페시르나를 의식한 것인지, 아니면 로맨틱한 눈으로 둘을 담는 신시아를 의식한 것인지 붉어진 얼굴의 위타천이 가연의 손을 잡아 내렸다.

재밌다는 듯 가볍게 웃은 가연이 나를 향해 말했다.

“갑자기 와주셨는데도 오늘같이 큰일을 잘 대처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가벼운 목례로 감사를 표했다.

가연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아버지와 자기가 모두 괜찮다고 하는 사람은 아주 드문데 오메가 씨에 대한 평이 좋아요. 두 분의 의견보다는 신시아 씨의 열성적인 PR이 더 인상 깊었지만요.”

뿌듯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윙크하는 신시아였다.

위타천과 템페르시나라는 거물들의 추천이 아니라 친구인 신시아의 조언이 더 효과 있었다니 조금 묘한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템페시르나와 시선을 맞춘 가연이 계속해서 목소리를 냈다.

“아버지가 제게 해주신 일 중에 의미 없는 일은 없었어요. 단 하나도 말이죠. 그러니 이번 일도 저는 아버지를 믿겠어요.”

사나웠던 템페시르나의 눈꼬리가 딸의 몇 마디에 녹아내렸다.

가연은 템페시르나의 삶에 큰 전환을 맞이하게 한 장본인이었고, 부녀 관계라고 공표하지는 못해도 지극정성, 금지옥엽으로 키웠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닌 듯싶었다.

“저도 최선을 다해 스토커를 잡아내겠습니다.”

내 말에 위타천이 다시 끼어들었다.

“후배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도울 수 있다면······.”

위타천이 말을 끝맺음하기 전, 템페시르나의 엄격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연이가 겪고 있는 일이 공공 집행자가 나서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느냐?”

“네오-서울에서 벌어지는 범죄행위라고 생각하면······.”

어딘가 구차해 보이는 위타천의 말.

“가연이가 연예인이 아니고, 네 약혼녀가 아니었더라도 똑같이 나설 수 있냐고 묻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네오-서울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나면 모두 네가 개입할 수 있을 것 같으냐?”

템페시르나가 매정해 보이기도 했지만, 원론적으로는 틀린 말이 아니다.

네오-서울의 공공 집행자는 결코 가벼운 자리가 아니다.

실상은 암살 시도지만 외부적으로 알려진 것은 가연에 대한 스토킹이었다.

범죄 분류에 따르면 스토킹은 지속성과 위험성이 입증되지 않는 이상 경범죄다.

공공 집행자가 경범죄에 개입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동안 감추려고 했던 둘 사이의 관계가 드러날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특혜 논란에 휩싸이는 것은 불 보듯 훤한 일.

인상을 잔뜩 구긴 위타천이 버럭 소리쳤다.

“그럼 돌아가서 공공 집행자 자리를 그만두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아무것도 못 하는 데 이까짓 자리가 뭐라고!”

신시아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낮은 탄성을 흘렸다.

“사랑하는 사람······! 멋져라!”

가연도 위타천을 바라보는 눈에서 하트랑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니 암살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이게 무슨 일이야.

하이틴드라마도 이런 전개로는 안 흐를 것 같은데.

내가 나서서 분위기를 정리했다.

“가연 씨를 생각하는 위타천 님의 마음도 알지만 그렇게 감정적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냉수 한 잔 드시죠.”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건지 드디어 자각한 위타천의 붉어진 뺨은 냉수로도 가라앉지 않았다.

일단 분위기가 조금 환기된 것 같았다.

“템페시르나 님과 저는 스토커의 정체를 완벽하게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습니다. 알려드리지는 못하는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가연 씨도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스토커는 절대 가연 씨가 혼자 계실 때 나타나지 않습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가연이 맞장구쳤다.

“맞아요. 스케쥴이 없을 때는 나타나지 않아요. 꼭 보는 사람이 많거나 경호원분들이 계실 때 모습을 드러내더라고요.”

“‘판’이 깔려야 움직이는 겁니다.”

“판이요?”

템페시르나가 나 대신 답을 했다.

“놈은 네가 당······황하는 모습을 다른 이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은 거란다. 동시에 삼엄한 경호를 뚫은 자신의 실력을 알리는 기회도 되겠지. 그게 네가 외부 일정이 있을 때 놈이 따라붙는 이유가 아닐까 하고 추측 중이란다.”

템페시르나는 추측이라고 말했지만 거의 확신이라고 해도 좋은 내용이었다.

글라드 일족은 가능하면 사람이 많은 곳에서 타겟만을 죽이는 암살을 선호한다고 하니까.

내가 이어받았다.

“방송국에서는 실패했지만 분명 모습을 다시 보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수고스럽지만, 다시 판을 깔아야죠.”

위타천이 심기가 불편한 목소리를 그대로 내보였다.

“가연을 위험에 노출해야 한다면 나는 좋게 보이지 않는군.”

잠깐 생각을 하던 내가 답했다.

“위타천 님도 그 자리에 계실 수 있다면요?”

내 말에 버럭한 것은 템페시르나였다.

“아이는 내 말을 어디로 들은 것이냐. 저 녀석을 끌고 들어올 수는 없다니까.”

“끌고 들어오자는 소리가 아닙니다. 당사자가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있다가 스스로 끼어들면 되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대체 무슨 말을 하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연을 향해 물었다.

“제가 듣기로는 위타천 님이 공공 집행자 일을 그만둬야 결혼하겠다고 하셨다면서요.”

“맞아요.”

“두 분의 사이를 밝히지 않은 건 그 당시 가연 씨가 연예계에 발을 들인 지 얼마 안 됐을 때였고, 위타천 씨도 막 공공 집행자가 돼서 여론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들었습니다.”

“그것도 그렇죠.”

“그렇다면 지금 시점에서 오래전부터 약혼했다는 사실 정도는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결혼은 두 분이 말씀 잘 나누셔서 알아서들 하시고요.”

“후배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고······.”

신시아가 높은 목소리로 위타천의 말을 끊었다.

“요새 연예인의 연애나 결혼은 흠이 아니긴 하죠. 게다가 상대가 위타천 님이라면 화제성도 클 거고요. 세기의 커플이라고 난리가 나지 않을까요?”

고개를 끄덕여 신시아의 의견에 긍정했다.

“아예 판을 키우는 겁니다. 두 분만 괜찮다면 기사도 내고 무엇보다 기자회견을 한다고 하면 그 스토커가 과연 안 나타날까요? 그런 자리에?”

충격을 받은 것 같은 템페시르나에게로 시선을 옮겨 말했다.

“가연 씨에게 붙는 광적인 팬들이나 스토커가 지금껏 한둘이 아니었죠? 위타천 님과 약혼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런 놈들의 숫자가 확 줄어들지 않을까요? 이번 스토커 같은 놈들처럼 조금 결이 다른 놈들만 신경 쓰면 되는 상황이 될 수 있지 않겠냐는 겁니다.”

마지막 문장은 위타천과 가연, 그중에서도 뺨에 발갛게 홍조가 올라와 있는 가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물론, 두 분께서 그렇게 하시겠다고 해야 가능한 계획이긴 합니다. 되도록 빠르게 알려주셨으면 좋겠군요. 시간이 흐를수록 제가 스토커를 감지하는 정도가 약해지거든요.”

[체취 남기기]는 지속 기간이 길지 않다.

위타천과 가연이 얘기를 나누는 사이, 나는 템페시르나에게 말했다.

“다른 방에서 저랑 따로 좀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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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서울 대림 에어리어 30구역.

대림 에어리어에서도 외곽에 있는 낙후 구역의 미허가판자촌에서 허름한 후드를 머리 위로 뒤집어쓴 거지가 걷고 있었다.

모습을 위장한 누티엘이었다.

그의 손에는 찢어진 신문이 들려 있었다.

「가연, 위타천과의 약혼 전격 발표. 가까운 시일 내에 기자회견 예정」

복잡하게 꼬인 판자촌의 길을 조심스레 살펴 걷던 누티엘이 페인트칠이 벗겨져 녹이 가득한 철문을 밀고 들어가자 절반 이상이 허물어진 벽돌집이 있었다.

여전히 소리 하나 나지 않는 걸음으로 벽돌집의 뒤로 돌아간 누티엘의 모습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글라드 일족의 안전 가옥이었다.

그곳에는 먼저 도착해 누티엘을 기다리는 이가 있었다.

환각 상태에 진입해 멀리 있는 다른 술자와 정신적 동조를 이루는 기술인 뉴로싱크드NeuroSynced를 연마한 글라드 일족이었다.

글라드 일족은 이들을 통해 임무 수행 중인 암살자들에게 지령을 내렸다.

술자의 상태에 따라 동조 정도와 전달력의 불안정성이 동반될 수 있는 기술이긴 했지만, 꾸준한 훈련과 사용이 뒷받침된다면 디바이스 통신과는 다르게 거리의 한계가 거의 없다는 점이나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눈을 감고 환각 상태에 들어선 다크 엘프의 입에서 그웨지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웨지안 앞에도 뉴로싱크드를 익힌 다크엘프가 비슷한 꼴로 앉아있을 것이었다.

-아직도 네오-서울에 머무는 것을 보니 일의 진척에 문제가 있는 것 같구나.

일족의 수장이자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누티엘은 방송국에서 마주한 일을 이야기했다.

기공에 능숙한 새로운 호위에 관한 얘기가 주였다.

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여러 협력자의 도움을 통해 정보 조직들에 접근했고, 이름이 오메가고 대림 에어리어에서 해결사를 한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확보한 누티엘.

하지만 눈에 불을 켜고 오메가의 정보가 돌아다니는 것을 잡아내는 스냅샷이 그 흐름을 놓칠 리가 없었고, 여러 겹의 위장과 기만에도 불구하고 누티엘을 향해 루트의 망이 조여오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누티엘은 누이의 약혼에 대해 이야기했다.

“위타천이라는 네오-서울의 공공 집행자와 약혼 관계라고 합니다. 대대적으로 기자회견도 할 예정이고요. 그 자리에서 누이를 죽이겠습니다.”

돌아오는 어머니의 말에 누티엘은 숨을 크게 들이 쉴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께서 직접 오시겠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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