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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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실비실해서 툭 하고 치면 부러질 것만 같던 엘프 청소부의 팔뚝에 잘 단련된 근육이 솟았다.
피곤에 절어 있던 눈빛도 살아났다.
음산하거나 잔혹한 눈빛이 아니다.
매일 출근하고, 직장에서 일하고, 퇴근하는 평범한 이의 눈빛이다.
하루하루 큰 사고 없이 넘어간 것에 감사하는 소시민의 눈빛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소시민의 손에 단검이 역수로 들려 있을 리는 만무하다.
심지어 단검 아래로 일렁이는 것은 고도로 농축된 내력이 분명하다.
내력의 색이 시시각각 바뀌는 것이 더욱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달리 말해 내 눈앞에서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로 평온한 호흡을 내뿜는 이 엘프는 살인 행위가 소시민적 일상으로 다가올 만큼 익숙해진, 지독한 놈이다.
문이 벌컥 열릴 때 바로 사용한 [기막 펼치기]에도 거의 걸리지 않았다.
암살에 특화된 다크 엘프, 글라드 일족이라고 했던가.
템페시르나가 자신이 짐작한 이들의 정체를 미리 일러주지 않았다면 나도 팔뚝 하나를 잃을 뻔했다.
다시 한번 느꼈다.
스킬은 만능이 아니고 그것들을 이용하는 나 역시 무적이 아니다.
어떤 미친 종자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다.
딥스페이스에서 전지전능에 가까운 힘을 휘두르며 부풀어 오르던 자만심이 한순간에 날아갔다.
다만 이상한 점은 이들의 방식이었다.
‘글라드 일족은 분명 타겟 하나만을 처리한다고 했는데?’
주변에 피해를 주지 않고 오로지 타겟만을 처리하는 방식은 글라드 일족의 명성을 드높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원영신]이 쫓고 있는 다른 놈은 들어서자마자 연막을 뿌리고 고개를 돌려 내 분신과 가연으로 변해있는 내 얼굴을 분명 확인했다.
그리고 모든 힘을 다해 나를 향해 공격을 쏟아냈다.
마치 암살의 타겟이 나라는 듯이.
이건 ‘보이는 놈을 모두 죽이면 암살’이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장비를 사용한 건지 순식간에 네댓 개의 마법진을 전개하면서 단 하나의 마법도 가연의 얼굴을 한 내게 돌리지 않았다.
‘설마 다른 놈들이 나를 죽이려고 한 건가? 눈앞의 이놈은 가연이 목적이었고?’
상황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일단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점점 위험한 기세를 숨기지 않는 엘프 암살자를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할 만큼 여유가 있지는 않았다.
그 순간, 연막에 닿았는지 대기실의 조명이 파직 소리와 함께 꺼졌다.
복도에서 이쪽을 향해 새어 들어오는 빛이 있어 암전까지는 아니었지만, 시야를 제대로 확보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어둠이 내리자 다크 엘프는 그것에 녹아들 듯 기척이 더욱 희미해졌다.
어둠 자체에서 전해지는 것 같은 놈의 목소리가 퍼졌다.
“지킬 수 없을 거다.”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주먹을 뻗어 허공을 약하게 때렸다.
[파신권 - 격공지경]
멈추지 않고 뒤편과 좌우에도 한 번씩.
주먹에서 터져나간 충격파에서 생성된 퍼억하는 소리가 대기실 이곳저곳을 휩쓸었다.
[반향정위]
충격파 역시 파장의 일종이고 소리가 발생했다면 반사되는 소리로 물체의 위치를 파악하는 [반향정위]로 잡아낼 수 있다.
빛이 들어오는 문의 바로 뒤, 어둠이 가장 짙은 곳에 놈이 있었다.
[기도비닉]
몸에서 나는 소리를 줄인 뒤―
[라이징 드래곤 킥Rising Dragon Kick]
[발경]
초보적인 기공 계열의 발차기지만 소리를 줄인 채로 신체 말단에 기를 몰아넣는 [발경]까지 함께 사용한다면 헥토파스칼 킥 부럽지 않은 위력을 낼 수 있다.
콰아앙-
문짝이 부서지는 소리는 요란했지만 애석하게도 놈은 내 공격을 흩어내 버렸다.
[이화접목]과 비슷한 움직임이었다.
“기공?”
놈의 목소리다.
먹혔다.
일부러 다른 스킬들은 봉인하듯 사용하지 않고 기공과 무술 계열만 내보이고 있었다.
이것 또한 템페시르나의 조언이었는데, 글라드 일족 중에는 능력을 전문적으로 분석하고 파훼하는 엘프들이 있어 죽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절대 100%의 힘을 발휘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들의 암살을 막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라는 말과 함께였다.
그가 팔을 새로 달지 않고 내력을 집약해 사용하는 것도 글라드 일족의 수장과의 비무에서 파훼 되었을 과거의 자신에 매이지 않기 위함이라던가.
그런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암살자와 마주했을 때 자신의 기공을 그대로 보이는 것에 놀라 한순간 마음에 빈틈이 생겼고, 암살자는 그 틈을 타서 사라졌다고 했다.
그렇기에 확신이 들 때까지 검술과 마법, 특히 [파천황] 같은 건 절대로 사용할 수 없다.
파훼할 실마리도 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
따라서 자연히 그다음으로 익숙했던 기공과 무술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방송국 밖으로 빠져나왔어요!
귀걸이를 통해 들리는 신시아의 목소리.
가연과 템페시르나의 집은 PUK 권역에 있지만, 방송활동을 하기 위해 가연이 네오-서울에 오면 머무르는 별장은 강남 에어리어에 있다.
오늘 아침 가연은 그곳에서 나와 차량을 이용해 샵에 들린 뒤 양천 에어리어의 방송국까지 이동했다.
하지만 차량에서 내린 가연은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샵에서 합류한 나였다.
외부 일정이 있을 때마다 스토커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경험으로 인피면구로 모습을 변화시킨 내가 나간 것이었다.
그리고 신시아까지 나서준 덕에 가연으로 변한 내 위치를 더 확실히 드러낼 수 있었다.
큰 무대에서 암살을 벌인다는 글라드 일족의 암살자를 낚기 위한 치밀한 덫이었다.
내 분신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는 신시아에게 [원영신]으로 만들어냈다고 곧이곧대로 말하긴 그래서 로봇으로 그럴듯하게 만든 더미라고 설명하고, 신시아가 어디서 구할 수 있냐고 꼬치꼬치 물어오는 통에 얼버무리느라 좀 고생하긴 했다.
이번 일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 준 거라고 헤지르 대주교를 팔았다.
알아서 교단의 내부 비밀이라고 얼버무려주길······.
그렇게 내가 미끼 역할을 하는 동안 신시아는 가연을 밖으로 빼내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주었다.
암살자를 향해 공격을 이어가려는 순간, 잠시 멈칫했다.
분신이 느껴지지 않는다.
의지를 가진 분신인 [원영신]이긴 하지만 공격 스킬 하나 사용하지 못하는 반쪽짜리인데다가 일정 거리 이상을 벗어나면 사라져버린다.
작가 모습을 하고 등장했던 암살자를 놓친 셈.
그리고 잠깐 멈칫한 사이, 눈앞에 있던 놈도 난장판이 된 방송국의 복도를 향해 몸을 날렸다.
재빨리 따라나섰지만, 사람들이 테러니 뭐니 워낙 난리를 치고 있었고 무엇보다 청소부의 옷을 입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람들을 마구 밀치며 밖으로 나갔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믿을 건 이거 하나뿐인가.”
손끝을 비벼 코 아래 가져다 댔다.
예공방 생산기지에서 샴록이 근처에 있음을 알게 해줬던 스킬.
[체취 남기기]다.
[라이징 드래곤 킥]이 살짝 닿을 때 남겨두었다.
범위와 지속시간이 길지는 않은 스킬이지만 놈이 쉽게 포기할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덫에 걸렸다가 화들짝 놀랐으니 놈도 한층 더 경계할 것이 분명했다.
“놓쳤어요. 대신 며칠 안쪽으로 근처에 나타나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거라고 전해주세요.”
-알겠어요. 가연 씨는 모든 일정을 캔슬하고 강남 에어리어로 돌아갈 거라는데 오메가 님도 그쪽으로 오실 거죠?
“사무실에 들렀다가 갈게요. 거기서 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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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사무실은 제법 북적북적했다.
상주하고 있는 앨리스뿐만 아니라 스냅샷, 키클롭스 아재와 정현, 안타란까지 내 연락을 받고 모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재 의뢰가 무엇인지 이들에게 상세하게 알려줄 수는 없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를 공격한 놈에 대한 실마리를 잡기 위해 불러 모았다.
내 애기를 쭉 들은 스냅샷이 정리했다.
“의뢰 중에 공격을 받으셨는데, 그게 방어적 행동에서 나온 게 아니라 아예 타겟을 정해놓고 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으신 거죠?”
“일단은.”
“인상착의는 보셨습니까?”
‘나는 여기 왜 온 거지.’라는 의문을 숨기지 않고 얼굴에 띄운 안타란을 바라보고 말했다.
“그래서 안타란 씨를 부른 겁니다. 파충류 수인들은 인적 네트워크가 잘 되어 있으니까 혹시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해서요. 저를 공격한 놈은 파충류 수인이었어요. 그리고 주로 화염계 마법을 사용했고요.”
“주변 렙틸리비아의 구역장들에게 알려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한편, 여기서 카지노 지배인과 렙틸리비아 구역장을 보는 것이 신기하다는 듯 둘을 향해 눈을 굴리던 키클롭스 아재가 내게 물었다.
평소 아재의 성격대로 느긋하고 악의 없는 물음이었다.
“누가 오 사장 담그려고 하는 거 아니야? 해결사 일이 아무리 쉽지 않고 거친 일이라고 해도 원한 사고 다니고 그런 건 아니지?”
그 말에 나를 보던 스냅샷이 시선을 회피했다.
외부에 알려진 스냅샷은 카지노 지배인이지만 실상은 루트 건물에서 있었던 일 이후 엘림을 제외하면 누구도 손대지 못하는 루트 내의 독립적인 부서를 이끄는 인물이다.
일반적으로 돌지 않는 나에 대한 소문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거라는 소리다.
원한이라······.
루트에서 고블린을 따르던 세력을 일거에 치워버린 것?
브리가드의 게릴라전을 담당하는 무력부대를 와해시키고 그 리더인 깡통을 죽인 것?
트라이포드의 간부로 추정되는 색승을 죽이고 리벨리온의 방향을 틀어놓은 것?
생각나는 것 하나하나가 원한이 안 생겼다고 하면 상대 쪽이 군자나 승려라고 생각될 정도의 일이다.
“제법 있죠. 우리 사장님 일 처리 방식이 좀 거칠어요?”
모두의 눈이 앨리스를 향해 돌아갔다.
“그런데 원한도 상대를 밟아놓을 수가 없으니까 품는 거죠. 이 바닥에서는 그것도 명성이고 이름값 아니겠어요? 막말로 다들 저나 사장님한테는 말 못 해도 사장님 이름 가져다 써서 일 편하게 풀린 적 한두 번씩은 있죠?”
다들 앨리스의 눈을 피한다.
이 사람들이?
앨리스의 목소리에 힘이 붙었다.
“그걸로 뭐라고 할 생각은 없어요. 우리 사장님도 곧잘 하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원한을 살 수는 있는데 그게 실제적인 공격이나 암살로 이어지는 건 다르다고 생각해요. 그렇죠, 사장님?”
“그렇지. 내 성질 알면 절대 못 할 짓인데도 그렇게 했다는 거니까.”
“다들 들으셨죠? 여러분들은 사장님 성질 알잖아요. 그러니까 사장님 공격한 놈이랑 그걸 사주한 놈들을 알아 오시면 되겠네요. 이번 ‘부탁’으로 여러분들과 저희 사무실과의 관계가 돈독해질지 옅어질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바쁜 걸음으로 나가고, 컵을 정리하는 앨리스에게 혀를 내두르며 물었다.
“너 사람 다루는 게 보통 아니다?”
잠깐 나를 본 앨리스가 피식 웃고는 답했다.
“맨날 붙어 있는 사람이 흡혈귀 대가문 영애랑 로보틱스 대기업 총수잖아요. 둘에 비하면 저는 아직 멀었죠.”
언젠가는 넘어서겠다는 포부가 느껴지는 것 같아서 살짝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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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에어리어에 있는 한 호텔 레지던스의 상층부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 위성통신과 권역별 통신 프로토콜 호환 모듈까지 동원한 이수련의 통신을 받고 있었다.
-루트에서 낭군의 정보를 사간 경로 중에 한신나 권역, 간토 권역, 톈진 권역, 허베이 권역에 터를 잡은 집단이 있는 것을 확인했노라.
“전혀 예상 못 했던 이름들인데요.”
-본좌도 그러하다. 기껏해야 네오-서울에 있는 놈들이 사 갔겠거니 했거늘······. 트라이포드가 동북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집단이라는 우리의 예상이 아무래도 맞는 것 같느니라.
“야스민 공도 연락하셔서 하시는 말씀이 ‘그분’은 아직 묘연하지만 벡이 있던 연구소와 비슷한 시설을 몇 개 더 발견했다고 하시더라고요.”
-도시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일단 계속해서 찾아보죠.”
-그리하자꾸나. 참, 템페시르나를 만났다는 얘기를 들었다.
“어떻게 아세요?”
-본인이 얘기해주더구나. 설마 낭군이 나와 연이 있을 줄은 몰랐다면서 말이다.
“두 분은 어떻게 아시는데요.”
-테일즈······아니다. 간간히 모여서 장난감이나 만지는 모임의 멤버이니라.
뭔가를 숨기는 것 같은데 파고들어서 좋은 것도 없어 보였다.
이후는 출장이 많아서 힘들다느니, 나도 자기를 보고 싶지 않냐는 둥 이수련의 헛소리 퍼레이드였다.
이런 식으로 통신하면 이용료가 5분에 웬만한 원룸 월세만큼 나온다던데 이렇게 쓰고 싶나?
그걸 듣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고, 알려준 호실 앞으로 가서 벨을 누르니 먼저 도착해있던 신시아가 문을 열어줬다.
“템페시르나 님도 곧 오실 거래요.”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직 통신을 끊지 않고 있었던 터라 입 모양으로 물었다.
‘가연 씨는요?’
닫혀 있는 고급스러운 문을 가리키는 신시아.
“저기 계세요.”
정신이 확 들었다.
아무리 강남 에어리어 한복판에 있는 초고급 호텔 레지던스가 철통 같은 보안이 유지된다지만 암살자의 능력과 실력은 보통 이상이었다.
어떤 방식을 통해 침투할지 알 수 없는 상황.
네오-서울에 돌아가면 떡볶이 맛집 투어를 할 거라는 이수련의 통신을 끊고 말했다.
“보호 대상을 혼자 두면 안 돼요! 적어도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게―”
달려가서 노크한 뒤 곧바로 문을 열었다.
황급히 내 뒤를 따라온 신시아의 말이 뒤늦게 들렸다.
“혼자 아닌······데.”
야외 테라스처럼 꾸며진 방의 벤치에서 가연이 위타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위타천의 시선과 내 시선이 얽혔다.
침을 넘기는 것도 천근만근 같은 묵직한 적막.
신시아가 내 귀에 속닥거렸다.
“조금 전에 오셨어요. 위타천 님 자택이 여기서 5분 거리거든요.”
나는 초인적인 의지를 발휘해 문을 닫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두 분 좋은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