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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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서울 양천 에어리어, 건물 옥상에 올라앉은 엘프 하나가 고개를 아래쪽으로 내리고 눈에 박힌 렌즈의 배율을 조정했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방송국 대기실이 그의 시야를 채웠다.
많은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며 오가는 대기실에서도 엘프의 시선은 오직 한 사람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는데, 다른 이들과는 다른 분위기를 내뿜는 엘프, 가연이었다.
다만 화장으로 가리려 애썼지만, 가연의 피부는 푸석했으며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내려와 있었다.
엘프가 혀를 차며 혼잣말했다.
남성의 것이 분명한 목소리였다.
“그냥 한 번에 목숨줄을 끊어버리면 될 텐데 어머니는 왜 이렇게 번거로운 짓을 시키는 건지······.”
남자의 이름은 누티엘 이니셀티고르 샨 글라드.
극한의 실전성을 띤 무술과 기공을 연마하고 그것을 최첨단 살인 기술과 접목해 전승하는 다크 엘프, 글라드 일족의 엘프였다.
또한 현 글라드 일족의 수장이자 템페시르나의 팔을 잘라간 그웨지안 트라톨라스드 샨 글라드의 아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누티엘이 바라보고 있는 가연은 그웨지안의 첫 번째 딸이니 원래대로라면 모계 사회인 글라드 일족의 차기 수장이 될 터였다.
그웨지안에게 팔을 잘린 템페시르나가 폭주하며 납치하지만 않았더라면.
누티엘 입장에서는 기묘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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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드 일족은 지독한 모계 사회인지라 외부의 씨를 받아 낳은 아이 중 남자아이가 있다면 모두 목숨을 끊는다.
하지만 누티엘이 그웨지안의 뱃속에 자리 잡을 무렵, 템페시르나가 그웨지안과 비무를 위해 글라드 일족의 거주지를 찾아왔고, 격렬한 비무 끝에 템페시르나는 패배했다.
“약한 놈들 중에는 가장 강하구나.”
템페시르나의 [엘프 발경 6식]을 피하지 못해 플라즈마 차크람을 쥔 왼손이 날아간 그웨지안이 말했다.
비록 신체 일부를 잃었지만 그웨지안의 목소리에는 만족감과 호승심이 그득했다.
날아간 신체야 붙이던지 다시 자라나게 하면 될 일이고, 이렇게 좋은 씨를 가진 엘프가 스스로 찾아오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템페시르나는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잘려 나간 팔의 단면을 붙잡은 채 거친 숨만 뿜어대고 있었다.
플라즈마에 섞여 들어온 그웨지안의 내력이 독처럼 템페시르나의 몸 곳곳을 헤집고 있었다.
그 기운을 억누르기도 힘든 상황, 입이라도 잘못 열었다가는 순식간에 정신을 잃을 위기였다.
“좋은 남자다. 교합 후에 죽일 것이니 준비해라.”
그웨지안이 등을 돌린 순간, 템페시르나는 침식되지 않기 위해 단전에 모아두었던 내력을 일시에 전신으로 뻗쳤다.
어쩌면 천치 반푼이가 될 수도 있었고,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질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이런 치욕스러운 패배는 그동안 템페시르나가 쌓아 올린 무도가의 프라이드로는 용납하기 힘든 일이었다.
좁은 시골길을 거침없이 질주하는 경주마처럼 템페시르나의 몸을 헤집던 내력이 잘려 나간 팔의 단면에 닿자 간신히 멎어가던 출혈이 다시 시작됐다.
그리고 그 출혈은 내력으로 생성된 팔을 타고 아래로 떨어졌다.
이미 이지를 상실한 채 눈을 허옇게 까뒤집은 템페시르나의 목 뒤 깊은 곳에서 감정 없는 목소리가 끓어 올랐다.
“죽을 곳은 네가 아니라 내가 정한다.”
템페시르나의 어렴풋한 기억은 거기서 끝이었다.
다시 정신이 돌아왔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글라드 일족의 거주지를 찾기 위해 며칠에 걸쳐 올랐던 히말라야산맥의 어느 봉우리.
윤곽이 간신히 보일 정도로 아주 멀리 있었다.
그리고 눈물 콧물이 말라붙은 채 포대기에 싸여 있는 엘프 아기였다.
아기가 그웨지안의 아이라는 것을 알 리가 없던 템페시르나는 엘프 종친회의 도움을 받아 아기가 글라드 일족이라는 것을 숨기고 키웠다.
자신과도 관련이 없는 것처럼 꾸며냈다.
호전적이고 날카로웠던 템페시르나가 히말라야에서 내려온 후 온화해졌다고 호사가들이 떠들어댔지만 템페시르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비록 서로가 원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 템페시르나에게 찾아온 아기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의 손에서 자란 것은 스스로의 강함과 무도에 대한 집착밖에 없었다.
그 손으로 아이를 들어 올려 웃음 짓게 할 수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래서 템페시르나는 아기에게 가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름다울 가(佳)에 인연 연(緣)을 쓴 이름이었다.
템페시르나가 새로운 기쁨을 찾아가는 동안, 그웨지안은 딸을 잃었다는 절망에 빠졌다.
하지만 템페시르나에게 해코지를 하지는 않았다.
그것마저 비무의 과정으로 보았으며, 마지막에 방심한 것은 그웨지안 스스로였기에.
또한 그웨지안은 아기가 죽었거니 하고 지레짐작했다.
이후 그웨지안은 누티엘을 낳았다.
원래대로라면 글라드 일족의 전통대로 목숨을 끊어야 했으나 이미 아이를 잃은 그웨지안은 다른 여아를 낳을 때까지는 누티엘을 기르겠다고 요청했다.
일족의 장로들은 긴 고뇌 끝에 그웨지안의 요청을 승낙했다.
그웨지안의 강함과 일족에 대한 지배력, 그녀의 불안정한 정신상태를 고려한 결과였다.
하지만 템페시르나와의 비무 이후 신체에 이상이 생긴 것인지 그웨지안은 더 이상 아이를 품을 수 없었다.
누티엘은 그렇게 가연이 납치된 덕에 생을 부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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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요량이었으면 더 잘 숨었어야지.”
멀리 보이는 누이에게 전하는 누티엘의 혼잣말이었다.
템페시르나는 가연과 자신의 관계는 밝히지 않았지만, 가연을 숨겨두고 키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밝은 빛을 받고 살아야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녀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지원해주었다.
가연은 그렇게 연예계에 발을 디뎠다.
문제는 가연의 연기가 뛰어났을 뿐 아니라 나이가 차서 미모가 만개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음반까지 대히트.
가연은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의 권역에 얼굴과 이름이 퍼지는 중이었고, 그 명성은 히말라야산맥의 이름 모를 봉우리에 살며 외부와의 접촉을 극단적으로 꺼리는 글라드 일족의 거주지에까지 흘러들고 말았다.
생필품을 전달해주는 엘프가 가져온 낡은 잡지를 뒤적이던 그웨지안의 손이 멈췄다.
그리고 누티엘을 불러 가연의 화보를 가리키며 말했다.
“틀림없는 네 누이구나. 나는 알 수 있단다.”
혼란스러워하는 누티엘에게 그웨지안이 말했다.
“나는 오래전 떠나간 딸보다는 네가 다음 수장에 어울린다고 생각한단다.”
누티엘은 타고난 재능과 뼈를 깎는 노력으로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장로들 반수 이상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글라드 일족 최초의 남성 수장이 나올 수도 있다는 말이 일족들 사이에 공공연하게 돌았다.
아주 특수한 과거가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웨지안이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전통을 무시할 수는 없는 법. 일족의 다른 이들이 아직 눈치를 채지 못했을 때 네 누이를 죽이거라. 단숨에 죽여서는 안 된다. 아주 천천히, 하루에 한 걸음씩 말려 죽여야 한단다. 그래야 네 누이의 혼이 담고 있는 글라드의 정신이 네게 배어들거든.”
세간에는 다른 여러 이름으로 알려져 있긴 하지만 글라드 일족은 훌륭한 암살자 집단이기도 했다.
수장의 명을 받은 암살자가 하산했고, 가연이 자주 모습을 보이는 네오-서울에 도착했다.
그리고 천천히 배어드는 가랑비처럼 가연에게 접근했다.
이상함을 느낀 템페시르나가 누티엘을 막아섰으나 정체를 밝히는 데는 실패했다.
오히려 누티엘의 움직임을 본 템페시르나의 음성이 마구 흔들렸다.
“글라드······! 그웨지안인가!”
그 틈을 타서 누티엘은 몸을 뺄 수 있었다.
어머니인 그웨지안과 템페시르나의 비무는 일족의 어른들에게 지긋지긋할 정도로 들어왔기에 익숙했다.
그때의 템페시르나에 대한 파훼는 거의 다 이루어졌기에 붙으면 이길 수도 있다고 누티엘은 생각했다.
다만 목표가 템페시르나가 아니라 가연이었기 때문에 피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존재로 인해 가연이 무너지는 것이 보이는 상황.
‘곧 있으면 일족으로 돌아갈 수 있겠군.’
그렇게 생각한 누티엘이 다시 눈에 힘을 주었다.
가연 주위에 그동안은 보지 못했던 인물이 보였다.
“회색빛 금발에 새빨간 눈······흡혈귀인가. 그 옆은 인간 같은데······.”
인간 주제에 멋 부린다고 칼날도 없는 검을 허리춤에 꽂고 다닌다고 생각한 누티엘.
자신이 보고 있는 사람이 야스민 가문의 영애인 신시아 야스민과 네오-서울을 넘어 한반도의 여러 권역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오메가라는 것을 알지는 못했다.
암살 대상인 가연을 철저하게 조사했지만, 야스민 가문의 힘이 연예계까지 뻗어 있고 심지어 신시아와 가연이 친한 사이라는 것까지는 알기 힘들었다.
템페시르나가 직접 오메가를 찾아가 가연을 지켜달라는 의뢰를 했다는 것도 마찬가지.
“그래봤자지.”
예상외의 변수가 나타났지만 누티엘은 개의치 않았다.
어떤 변수가 생겨도 타겟을 죽이는 것.
그것이 암살자의 본질이었다.
시야를 원래대로 돌리고 옥상의 난간에 올라선 누티엘이 양손을 몸 옆으로 뻗었다.
고층 건물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자연스레 그의 등을 밀었고, 그는 바람에 몸을 싣는 자유로운 갈매기처럼 부드럽게 아래로 떨어졌다.
광학미채 위장복이 발동해 주변의 눈으로부터 누티엘을 감췄고, 그 상태의 누티엘은 팔과 다리 사이로 흘러가는 기류를 내력으로 조종해 소리 하나 없이 방송국의 옥상에 착륙했다.
아무렇지 않게 아래쪽의 벽을 타서 열려 있는 창문으로 쑥 들어간 누티엘의 앞에 청소 카트를 밀고 돌아다니는 중년의 엘프가 보였다.
스쳐가며 누티엘이 손을 뻗자 청소부의 눈이 풀리며 쓰러졌고, 누티엘은 자연스레 청소부를 부축하며 카트 위에 올라탔다.
그렇게 카트를 몰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왔을 때, 누티엘은 누가 봐도 삶의 무게에 쩌든 엘프 청소부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파묻혀 가연이 있던 곳으로 이동하며 누티엘이 손가락 하나를 펴서 점검했다.
피부 안쪽에 이식했던 초진동 메스가 샤악 하는 소리와 함께 튀어나왔다.
‘오늘은 팔뚝에 선을 하나 그어주지.’
아직 가연이 죽을 날은 아니었다.
오늘의 시도로 인해 경계는 더 삼엄해질 것이며, 호위 인력은 더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런 것마저 뚫어내고 성공하는 최고의 암살자가 글라드 일족이니까.
고난은 글라드를 빛낼 장치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게 누티엘은 가연이 있던 대기실의 문을 두드렸다.
삶의 풍파를 정통으로 맞은 고단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나왔다.
“청소 중에 뭘 좀 두고 나와서요. 금방 가지고 나가겠습니다.”
안쪽에서 문이 열렸고, 누티엘은 입맛을 다시며 들어가려고 했다.
뒤에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지만 않았다면.
“어이, 아줌마! 거기 함부로 들어가면 안 돼요!”
헤드셋을 끼고 품에 지시용 스케치북을 안고 있는 것이 조연출이나 작가로 보였다.
하지만 누티엘은 작가로 보이는 인물의 안쪽에서 피어오르는 은근한 향을 맡았다.
끈끈하고 비릿한 피 냄새, 그 안에 묻어 있는 절규와 원망.
지우려고 애썼지만 희미하게 스며있는 그것을 누티엘은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암살자 누티엘이라면 놓칠 수 없는 것.
‘업계인’의 냄새였다.
자신 말고 다른 암살자다.
‘감히 어떤 놈이!’
암살 시도를 실패한 것보다 더 큰 치욕이 대상을 다른 암살자에게 뺏기는 것이다.
하지만 누티엘은 고도로 훈련된 암살자.
감정을 내보이던 시절은 오래전에 지났다.
순식간에 작가를 눈에 담고, 확신했다.
‘나는 놈을 읽었지만, 놈은 나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리고 연기를 계속했다.
“내가 안에 껌 떼는 칼을 놓고 나왔네? 얼른 가서 그거만 가지고 나올게요.”
“안된다니까요.”
작가가 문고리를 잡고 있던 누티엘의 손 위에 손을 얹었다.
닫으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문을 밀고 있었다.
‘나를 이용하려고 들어?’
동종 업계 종사자임을 확신한 누티엘.
하지만 당황스러웠다.
자신의 누이를 죽이려는 이들이 얼마나 더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사이 문이 열렸고, 작가가 안으로 들어서는 것과 동시에 주머니에서 작은 폭탄을 꺼내 터트리자 엄청난 양의 연막이 터져 나왔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암살자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고전적인 수법.
일시적으로 전자장비를 멈추는 기능도 있는지 누티엘의 눈에 이식한 자동 배율 조정 렌즈도 동작을 멈췄다.
하지만 이대로 암살 대상을 빼앗길 수는 없기에 누티엘도 방 안에 들어섰다.
그의 눈에 암살 장면이 펼쳐졌다.
다만 대상이 누티엘과 달랐다.
수인을 맺은 작가의 공격용 마법은 가연이 아니라 모조리 오메가에게 향하고 있었고, 그걸 그대로 몸으로 막은 오메가의 상체에서 피가 흘렀다.
가연이 아니라 대놓고 자신을 노린 암살 시도에 아주 잠깐 얼빠진 표정을 짓던 오메가가 곧 사나운 얼굴을 하고 작가에게 달려들었다.
“너 뭐 하는 개새끼야! 누가 보냈어!”
그 사이 누티엘은 먹통이 된 초진동 메스 대신 항상 종아리에 차고 다니는 구식 단검을 꺼내 들고 가연이 있던 곳으로 접근해서 팔뚝을 그었다.
정확히는 그으려고 시도했다.
단검이 닿기 직전, 가연의 입에서 오메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목에 차고 있던 인피면구를 이용해 가연의 외형으로 변해있던 오메가가 원래 모습을 드러내며 목소리에 분노를 실었다.
“네가 진짜구나.”
자리에 오메가가 두 명 있었다.
작가의 마법을 맞은 오메가는 딥스페이스에서의 경험을 통해 사용법을 익히는 중인 [원영신]으로 만들어낸 분신이었다.
연막 속에서 작가가 달아나는 발소리가 요란했다.
아직까지는 딥스페이스에서 보여줬던 것만큼의 위력을 발휘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오메가의 [원영신]이 작가의 뒤를 따라나섰다.
오메가의 본체는 누티엘에게 시선을 고정한채로 으르렁댔다.
“설마 나까지 타겟으로 삼을 줄이야. 알려준 대책대로 했으면 골치 좀 아팠겠어.”
누티엘의 머릿속 경고등이 맹렬하게 회전하며 위험을 알렸다.
적어도 당신은 타겟이 아니었다는 말 정도는 하고 싶었지만 말해도 통할 것 같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