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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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들어온 샌디 비치의 회의실, 매티슨의 진두지휘 아래 간단한 다과가 다시 세팅됐다.
“말씀들 나누시고, 필요한 게 있으면 불러 주십쇼.”
자기 회사의 회의실임에도 일말의 고민 없이 깔끔하게 퇴장하는 매티슨.
여기 끼기는 아무래도 힘들다고 느낀 것이지 싶다.
노인의 앞에 놓인 찻잔이 저절로 둥실 떠오른다.
정확히 필요한 양만큼의 기를 내보내 물리적인 위력을 가하는 것이 틀림없다.
[허공섭물]을 사용하면 비슷한 장면을 연출할 수 있겠지만, 저렇게 시선도 두지 않은 채로 잔을 들고 내리는데 소음 하나 없이, 가득 찬 차가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게 할 수 있겠냐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연습이 조금 필요하다고 대답할 것 같다.
위타천의 스승으로 추정되는 이 노인, 기공의 초고수일 가능성이 크다.
기의 운용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팔 한쪽이 없는 것은 거동에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심지어 조금만 내 집중이 흐트러지면 팔이 양쪽 모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저 앉아서 차를 홀짝일 뿐인데 굉장한 존재감이었다.
헤지르 대주교나 야스민 공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고 느낀 것이, 앞선 둘은 거대한 조직의 첨단에 앉은 이의 통찰과 위엄이 묻어났다면, 이 엘프 노인은 그 자체로 한 자리에 박혀 수없는 세월과 폭풍을 견디고도 늘 푸른 잎을 내보이는 노송老松의 분위기를 풍겼다.
정갈하고 깊으면서도 마주하는 것들을 꿰뚫는 시선은 끊임없이 자신을 도야하는 장인이나 구도자 같기도 했다.
여전히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위타천을 외면한 노인이 내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소개가 늦었구나, 아이야. 우드 엘프 바라테스공파派 382대손 템페시르나 카프카스 일 비아 폰 호르헤라고 한단다. 템페시르나라고 부르면 되겠구나.”
이쪽 세계관에서 이름의 성은 중요하지 않다.
핏줄에 대한 집착이나 연관성이 약해졌기 때문에 보이는 현상이다.
그래서 대부분은 성을 사용하지 않거나, 있더라도 잘 내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혈연이나 가문을 중요하게 여기는 종족들은 이름이 길어지곤 했는데, 흡혈귀나 엘프가 그랬다.
용인들도 다섯 글자로 된 성을 사용한다고 하던데, 그들을 제외한 다른 종족들의 발성 체계로는 발음 자체가 어려워 점차 사장되어 간다는 말을 들은 적 있었다.
이렇듯 젊은 엘프들도 이름만을 말하는 시대에 그 긴 풀네임을 일일이 다 말하는 걸 보니, 이 엘프 노인은 ‘진짜’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마도 이미 알고 계신 것 같지만 네오-서울 대림 에어리어에서 해결사를 하는 오메가라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위타천을 강하게 노려봤다.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나를 이 상황에 앉혀 놓은 것은 위타천이었다.
“오랑우탄이 아주 흥미로운 다이버를 데리고 올 거라고 바람을 잔뜩 넣어 놨는데 들어보니 이놈이 종종 입에 올려 떠들어대던 사람 같아서 호기심을 참지 못해 이리 무례를 저지른 것에 다시 한번 사과하고 싶은데, 괜찮겠느냐.”
단번에 그 위타천을 ‘이놈’으로 격하시켜버리는 노인.
이름을 줄줄 읊을 때 굉장한 꼰대가 아닌가 싶었는데 생각보다 유연한 인물인 것 같았다.
하긴, 헤지르 대주교나 위타천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딥스페이스를 수련 공간으로 쓰고 있었다는데 그 정도 유연성은 갖췄겠지.
대뜸 지풍을 날려대던 노인에 대한 첫인상이 조금 희석되니 내 입에서 나오는 말도 부드러워졌다.
“당황스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으나 그렇게 여러 번 사과하실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상황을 들어보니 따님이시자······위타천 님의 부인 되시는 분께서 난처한 상황에 놓이신 것 같은데, 아버님이신 템페시르나 님의 염려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회의실에 내려앉는 정적.
왜 이래?
앨리스를 보니 한 손으로는 입을 막고 다른 한 손으로는 엄지손가락을 들어서 내게 보이고 있었다.
그동안 앨리스가 하는 걸 옆에서 보고 들은 게 있는데 이 정도는 일도 아니지.
위타천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렇게 할 수 있으면서 후배는 왜 내게는 매번 까칠하게 대했던 것인가······.”
왜긴 왜야, 안 까칠하게 대했으면 당신 페이스에 말리니까 그렇지.
그리고 템페시르나라는 저 엘프 노인도 위타천에게만 까칠하게 대하고 있는 걸 보니까 나와 생각 구조가 100% 일치하는 게 아닐까?
템페시르나의 눈이 반짝였다.
감히 내가 예상하기로는 위타천을 겪어본 자들끼리의 단단한 신뢰가 아닐까.
위타천이 다시 중얼거렸다.
“엄연히 따지면 부인은 아닐세. 약혼 관계지.”
대번에 템페시르나의 기운이 치솟았다.
“그래서, 가연이와의 약혼을 무를 셈이냐?”
다시 당황한 위타천의 음성이 흔들렸다.
“누가 아니랍니까. 다만 저는 현재의 상황을 확실히 해두고 싶은 것뿐입니다.”
“15년간 약혼 관계면 부부나 다름없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법적인 문제에서는 다르다 이 말입니다.”
“이놈이 꼬박꼬박 말대꾸를······!”
테오릭 경과 여다함의 사제師弟관계가 복사, 붙여넣기였다면 템페시르나와 위타천의 사제관계는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것처럼 보인다.
잠깐 본 것으로 판단하기에 위타천이 밀리는 것 같긴 했지만.
갑자기 벌어진 둘의 말싸움에 끼어들 수가 없어서 잠깐 입을 다물고 있으니 앨리스가 내 팔을 톡톡 치고는 패드를 내밀었다.
“한 번 보세요.”
그새 기사를 모아보기 편하게 간단한 편집까지 마쳐 놓은 걸 보니 일머리 하나는 진짜 기똥차다.
패드를 슬쩍 보니 첫 기사부터 두통이 온다.
「엘프 무도가 템페시르나, 마침내 1000번째 문파깨기에 성공. 500여 문파 봉문 선언」
“뭔 소리야 이게.”
목에 핏대까지 올려가며 위타천에게 ‘네가 미적지근하게 행동하니 내 딸에게 이상한 놈들이 붙는 거 아니냐’라며 윽박지르는 저 노인이 깨부순 문파가 1000개가 넘어간단다.
스크롤 하며 기사를 계속 훑었다.
「템페시르나, “나는 더욱 강해진다.”」
계속 긍정적인 반응의 기사 일변도에서 어느 순간 기조가 바뀌었다.
「템페시르나의 팔을 가져간 자는 누구인가, 당사자는 ‘묵묵부답’」
「“다양한 강함이 있더라. 포기하지 않는다. 새로운 기회.” 템페시르나 30년 만의 소회」
「네오-서울 시청, 유명 무도가 템페시르나를 공공 집행자들의 무술 교관으로 초청」
마지막 기사의 바로 아래에 지금보다 훨씬 젊은 모습의 위타천이 인상을 쓴 사진과 함께 짧은 인터뷰가 있었다.
-이미 충분히 증명했기 때문에 공공 집행자가 된 것이다. 교관은 필요하지 않다-
템페시르나 본인은 거부하는 모양이지만 지금은 위타천이 스승님, 스승님 하는 걸 보니 어떻게 갈등은 봉합된 모양이다.
앨리스가 손가락을 뻗어 패드 화면의 구석을 터치하며 말했다.
“이건 찌라시나 황색언론에서 나온 기사라서 보여드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는데, 저 두 분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면 설득력이 있는 것 같아요.”
「신인 배우 가연. 가족 관계를 묻는 말에 그저 미소만, “아버지만 계세요. 아주 점잖고 멋진 분입니다.”」
「단독 입수. 연이은 성공으로 연예계의 신성이 된 ‘가연’, 심야의 데이트! 상대는 과연?」
「위타천, 가연과의 관계 부인. “밥 처먹고 어지간히 할 일들 없는 모양이다.” 발언 논란」
“다 보셨죠?”
앨리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패드를 가져가서 하얀 화면을 띄우더니 거기에 손가락을 대서 내용 정리를 시작하는 앨리스였다.
“솔직히 좀 충격이긴 하네요. 가연이면 드라마, 영화를 몇 개나 히트시키고 음반까지 대성공을 거둔 연예계의 여왕인데 그런 사람이 위타천 님의 약혼녀고 무도가 템페시르나 님의 딸일 줄이야. 용케 안 들켰다 싶어요.”
잠깐 다른 화면을 올린 앨리스가 사진 하나를 띄웠다.
그냥 봐도 우아함과 귀티가 뚝뚝 떨어지는 엘프의 사진이었다.
“가연 씨의 사진이에요.”
“연예인 할 만하네.”
“신시아 언니나 수련 언니도 이 정도는 될 것 같은데.”
“그건 그렇······.”
뭔가 이상해서 앨리스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음흉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번에 눈에 힘을 줬다.
“일해라, 일.”
“아쉽네요. 녹음해서 둘한테 들려줬으면 좋아했을 것 같은데. 여튼 이런 사실들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템페시르나와 투닥거리는 걸 멈춘 위타천이 앨리스의 말을 끊고 치고 들어왔다.
“스승님과 내가 양면으로 힘을 쓴 덕일세. 추측성 루머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지만.”
“힘을 쓸 거면 결혼에나 힘을 쓰지······.”
스승의 퉁명스러운 말에 위타천이 버럭 소리쳤다.
“공공 집행자를 그만둬야 결혼하겠다고 한 건 가연입니다!”
“지아비가 위험한 일 하는 꼴을 어떻게 보나!”
남의 집안일에 끼어들어서 괜히 나만 피 보는 그림이다.
호흡을 고르며 다시 차를 마신 템페시르나에게 물었다.
“본인께서도 고강한 무도가시고, 위타천 님은 무려 네오-서울의 공공 집행자인데 따님의 안전을 제게 의뢰하시려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의문일 수 있겠구나. 먼저 이건 사적인 일이니, 공적인 일을 하는 사람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네오-서울에 자주 오긴 하지만, 나와 가연이 사는 곳은 네오-서울이 아니라서 저 녀석을 끌고 오기가 겸연쩍기도 했고.”
그게 위타천을 배제한 이유라면 그럴 수 있다.
“본인께서 하지 않으시는 이유는요?”
잠시 침묵하던 템페시르나는 위타천을 향해 손짓했다.
“넌 나가 있거라.”
“가연의 일이라면 저도 들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럼 네 녀석이 해결사를 하던가! 아니면 진작 관심을 가지던가! 연예인보다 쉬는 날이 더 없는 놈이 무슨 염치로 이제 와서 권리 타령이야!”
회의실을 쩌렁쩌렁 채우는 템페시르나의 목소리에 위타천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리고 사춘기 아이가 반항하듯, 들으라는 것처럼 대놓고 발소리를 쾅쾅내면서 위타천이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가연이 그 애는 저런 놈 어디가 좋다고······. 에잉······.”
나도 정말 궁금하긴 한데 취향이란 건 너무나 다양하고 존중해야 하니까 뭐······.
얼어있는 나 대신, 앨리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템페시르나를 달랬다.
“그럼, 이유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비밀 보장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꽤나 유명하신 분들도 저희 사장님을 찾는 데는 철저한 보안과 비밀 유지가 밑바탕에 있기 때문이죠.”
한참이나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템페시르나가 한숨을 푹 쉬고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스토커라고 에둘러 말하긴 했지만, 사실 나는 놈의 정체를 알고 있단다.”
“그렇다면 더더욱 제가 아니라 본인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닌가요?”
내 물음에 고개를 가로젓는 템페시르나.
“나는 할 수 없단다. 한창때도 못 한 일인데 나이를 먹은 지금에는 말할 것도 없지.”
어느새 찻잔에서 피어오르던 김도 식어버렸다.
“가연이를 노리는 건······내 팔을 잘라간 놈이 분명해. 나는 놈을 막을 수 없을 것 같구나. 밖에서 무슨 소리 안 들리나 잔뜩 귀를 기울이고 있을 녀석도 내 무맥武脈의 일부를 받아갔으니 놈을 상대하기는 힘들 것이고.”
혼자서 문파 1000개를 박살낸 무도가랑 네오-서울 공공 집행자를 하고 있는 강신술사도 상대하기 힘든 인물의 스토킹을 막아내라는 거네?
보호 대상은 급을 나누기도 민망한 연예계의 정점이고?
결국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이것이었다.
“제가 무슨 수로요?”
“나도 대책 없이 찾아오지는 않았단다. 내 나름대로 정리한 방법을 알려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