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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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 나는 미술에 문외한이다.
현장학습 같은 단체 관람이 아니고는 미술관을 따로 가본 적이 없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모나리자를 그렸고, 미켈란젤로가 고개를 들고 천지창조를 그렸다는 걸 알고 있지만 앞선 둘과 함께 르네상스 3대 거장으로 꼽히는 라파엘로의 작품 이름을 대보라고 하면 한참을 고민하다 모르겠다고 말하고, 라파엘로의 작품 중 <아테네 학당>이 있다고 하면 알고 있었는데! 라고 말하는 정도가 내 예술, 미술 지식수준이었다는 소리다.
그런 나도 살면서 매체나 인터넷을 통해서 접하게 되어 작가와 작품의 이름을 알게 되는 것들이 있었는데, 나무에 걸린 시계가 아래로 주욱 늘어지는 것이 인상적인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이라던가 캔버스 왼쪽의 멍청한 소 표정이 기억에 남는 피카소의 <게르니카> 같은 작품이 그랬다.
평소에는 꺼내 쓸 일 없는 분야를 끄집어내느라 머리가 아파 올 지경이지만 하나 더 꼽아보자면 중절모와 레인코트를 입은 남자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르네 마그리트의 <골콘다> 정도가 있겠다.
<기억의 지속>, <게르니카>, <골콘다>는 작가들이 거장이라는 것도 작품을 기억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지만, 작가와 작품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아도 앞서 말했던 세 작품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그것들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아마 세 작품이 현실과 이성의 굴레를 벗어난 세계를 그려낸 초현실주의의 대표적인 작품들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잘 알지도 못하는 미술 이야기를 이렇게나 길게 한 건 눈 앞에 펼쳐진 딥스페이스의 쓰레기 집하장, 덤핑 그라운드의 모습이 초현실주의 작품들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로 못 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하늘에서 땅을 향해 쌓인 거대한 쓰레기 산, 그것들 사이를 흐르는 끈적한 질감의 시커먼 강,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폭발 소리, 제 모습을 알 수 없을 만큼 늘어지고 축소된 데이터 조각들, 모든 광경의 중심부에 있는 분쇄기의 이빨이 맞물리며 내는 간헐적인 소음까지.
내가 하던 건 서리얼(surreal:초현실)이 아니었다.
이게 진짜 초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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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리! 지금보다 훨씬 작긴 했지만, 이 괴악한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던 것이 틀림없소이다!”
이곳으로 보내진 불필요 데이터들의 처분을 맡고 있는 초거대 분쇄기가 돌아가며 들리는 소리는 닌닌의 표현대로 참 괴악했다.
청소고 업그레이드고 한 번도 하지 않고 몇 년간 막 굴린 컴퓨터가 자기를 죽여달라고 내는 소리를 몇백 배로 증폭시킨 것 같아서 듣고 있으면 등줄기에서 시작된 소름이 절로 목 위로, 귀 뒤로 올라올 지경이었다.
어마어마한 양의 데이터들을 갈아버리는 데도 딥스페이스 전역에서 그 양을 훨씬 상회하는 불필요 데이터들이 이곳으로 보내지고 있었다.
미리 이곳을 탐색하고 있던 사메 추적 팀에게 갔다 온 매티슨의 표정이 심각했다.
“계속해서 탐색 중인데, 나온 게 없다고 합니다. 걱정되는 건 데이터 오염인데······.”
“데이터 오염이 뭐죠?”
“기본적으로 플로우는 딥스페이스의 전역을 순회합니다. 다이버들이 소비하고 생산하는 것들의 흐름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죠. 하지만 이곳, 덤핑 그라운드에서만큼은 플로우가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불필요 데이터를 분쇄하며 나온 초미세 데이터가 플로우를 타고 바깥으로 나가는 걸 막기 위해서죠.”
“잠깐, 분쇄해도 데이터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삭제나 파괴는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남은 건 의미도 없고 해석도 불가능한 쪼가리니까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덤핑 그라운드는 플로우 내 초미세 데이터 농도가 매우 높습니다. 이게 아바타에 쌓이게 되면 계정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 관심을 끄고 살았던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게 제게도 영향을 미치는 겁니까?”
잠시 양손에 나와 닌닌의 손목을 잡아 본 매티슨이 고개를 저었다.
“오메가 씨에게는 이것도 통하지 않는군요. 다만 닌닌 씨에게는 영향이 있어요. 저나 다른 팀원들도 마찬가지로 영향을 받고요.”
“사메에 속한 놈들도 다르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다. 여기서 제법 오랜 시간을 보냈을 수도 있죠.”
“그들이 아바타에 뭔가를 했을 것 같소. 예를 들면 마스크나 필터 같은 것 말이오. 초미세 데이터가 미세 먼지와 같다고 생각하면 그렇지 않겠소?”
바깥에서 치료계통의 기술을 익히고 있는 닌닌이 몸과 미세 먼지를 가져와 비유를 들자 이해가 확 됐다.
“놈들이 여기를 거점으로 삼고 있다면 이······뭐랬죠?”
“초미세 데이터요.”
“고마워요. 초미세 데이터를 극복할 방법을 찾았다고 봐도 되겠죠?”
매티슨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어떻게 처리할 방법이 없어서 딥스페이스 한구석으로 몰아놓은 건데 방법을 발견한 거라면······사메의 구성원 중 실력이 아주 좋은 아웃라이어가 있다는 소리입니다. 아마도 개발자겠죠.”
사메 놈들을 우습게만 볼 수 없다는 위기감이 등줄기를 훑었다.
그때, 닌닌이 손을 들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벌써 아바타에 문제가 생긴 것 같소만······.”
매티슨이 고개를 끄덕여 닌닌의 말을 긍정했다.
“초미세 데이터가 계정에 달라붙고 있는 겁니다. 청소를 하긴 했지만 닌닌 씨의 계정은 세이프 가드가 아니라 일반 계정이니까요. 아마 저나 다른 팀원들의 아바타도 얼마 견디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건 바깥에서 방법을 마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코드를 뜯어고치는 게 좋을지 아예 새로 짜는 게 나을지 견적도 안 서는군요.”
매티슨이 나를 향해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다시 크런치 모드에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그때까지 덤핑 그라운드 수색은 오메가 씨 혼자 맡아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여유가 되는 팀원들을 되는대로 투입하겠습니다. 여기서 얼마 버틸 것 같진 않지만요.”
“그렇게 하세요.”
매티슨과 닌닌의 아바타가 사라졌다.
하늘과 땅 사이에 놓인 거대한 쓰레기 산들을 한 번 둘러보았다.
혼자 뒤져서는 답이 없을 것 같았다.
이건 뭐 사격장에서 탄피 찾기 수준이잖아.
근데 그런 상황에서 모든 부대원을 투입하면 어떻게든 찾아진다.
“노가다는 물량이지.”
[분신술 - 원영신元嬰神]
내가 서리얼에서 익혔던 건 그냥 [분신술]까지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분신들은 내 외형과 행동을 따라 할 뿐 물리적인 힘을 전달할 수 없었다.
그것보다 더 나아간 [원영신]은 캐릭터 본체의 약 75%의 위력을 내는 자율적인 기의 육신을 만들어내는 스킬이다.
기공을 제외한 다른 계통의 스킬을 봉인하다시피 하는 것이 습득 조건이라 아쉽지만 익히는 걸 포기한 스킬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걸 신경 쓸 필요가 없지.
그리고 전투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탐색과 정찰’에만 사용한다면 깎여나가는 원영신의 능력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곧 [원영신]으로 만들어진 기의 육신이 다시 [원영신]을 펼쳤다.
그렇게 나온 녀석이 다시 [원영신], 그리고 다시 [원영신]
몇 번의 [원영신]을 거듭하자 주위에는 온통 나무 가면을 쓴 내가 가득했다.
가면 때문에 높은 목소리로 짹짹대는 것이 몹시 신경에 거슬렸다.
내가 말할 때마다 닌닌이 온 힘을 다해서 웃음을 참던데, 다 이유가 있어서 그랬구만.
손뼉을 쳐서 기의 육신들의 주의를 모았다.
“집중! 사메의 흔적을 찾는다. 여기에 오는 아바타는 거의 없다고 하니까 사람이 보이면 거의 확실하겠지. 쓸데없는 접근은 피해라.”
그러자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기의 육신이 앞으로 나와 나를 향해 말했다.
“네가 뭔데 명령이지?”
그래, 이게 문제라서 [원영신]을 익힌 유저들도 기의 육신을 여러 개 뽑지 않았다.
하라는 대로 하라는 분신이 아니라 캐릭터의 플레이 스타일을 모방하기 때문.
만들어진 기의 육신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그때까지의 컨트롤이 쉽지 않았다.
즉, 이 자식이 삐딱하게 나오는 건 내 모습을 반영했다는 소리다.
다른 기의 육신들도 그 의견에 동의하는 것 같았다.
본판의 무서움을 보여줘야겠구만.
조인트를 까버리기 위해 다가가는데, 가장 먼저 만들어냈던 기의 육신이 이의를 제기한 놈에게 다가가서 가슴팍에 불덩이를 처박았다.
“불만 가진 놈은 불로 지져버리겠다.”
똑같은 기의 육신들이지만 먼저 만들어진 육신이 능력의 깎임 정도가 덜하다.
불만을 제기한 육신은 마지막에 만들어졌고, 처음에 만들어진 육신과 비교하면 능력은 천양지차일 것이다.
그것 때문인지 처음 만든 육신이 다른 육신들에게 으르렁대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내가 저렇게 거칠었나.’
내 리더십을 많이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일단 지금 나는 편해졌으니까.
“자! 시작해! 분명히 말했다! 절대로 먼저 접촉하지 마!”
육신들이 제각기 스킬을 사용하며 빠르게 멀어졌다.
어렴풋이 육신들의 위치가 느껴졌다.
다른 계열의 스킬들을 제약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맞이했으니 조금 더 활용해보기로 했다.
원래는 무슨 데이터였는지 알 수 없지만 제법 넓고 평평한 나무판을 찾아 앞으로 가지고 왔다.
[발로 뛰어 그리는 지도]
탐색 계열 스킬 중에서도 주로 익힌 테크트리가 레인저 쪽이어야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다.
그쪽에서는 기본적인 사격 스킬만 배우고 접어뒀기에 역시나 서리얼에서는 사용하지 못했던 스킬이다.
철판 위에 분신들의 위치가 표시되면서 그들이 향하는 주변이 간략하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다만 이 덤핑 그라운드의 지형지물이 제멋대로 꼬여있었기 때문에 지도의 그려진 것으로는 대체 뭐가 있는지 알아볼 수 없는 곳들이 꽤 있었고, 그럴 때마다 나무판을 손에 든 채로 가서 확인해야 했다.
쓰레기 더미 내부에 공간이 있는 것 같으면 역시나 레인저 유저들이 사용하던 [천리안] 스킬을 사용해서 안쪽을 어렴풋하게 들여다보았다.
이렇게 몇 번 반복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감탄이 터져 나왔다.
“이거 중독되겠는데?”
제한과 제약 없는 스킬 사용.
바깥에서도 이렇게 다닐 수 있으면 6개월 이내에 세계평화를 이룩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싶었다.
한편, 그리 크지 않은 나무판 위에 덤핑 그라운드의 광활한 부지 전부를 그리긴 힘들었는지 이제 몇몇 기의 육신들은 지도에서 표시되지도 않았다.
처음 있던 자리에서 상당히 이동해 왔는데도 분쇄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우렁차게 들여왔다.
‘닌닌은 저 소리가 훨씬 작게 들렸다고 했지. 아예 탐색 범위를 멀리 넓혀야 하나?’
하지만 사메의 근거지가 지하에 존재하거나 하늘에서 땅을 향해 쏟아지는 쓰레기 산더미에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고생 좀 하겠네.”
내가 아니라 분신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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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브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자 위타천이 와 있었다.
앨리스를 향해 안쓰러운 눈빛을 보낸 위타천이 사무실 중앙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았다.
그래도 아무것도 안 내올 수는 없어서 탕비실을 뒤지는데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건 늘 앨리스 담당이었으니 알 리가 있나.
내가 아는 건 앨리스가 오일 샌드를 보관해 두는 찬장 위치뿐이었다.
탕비실 문을 열고 위타천에게 물었다.
“오일 샌드는······안 드시죠?”
미친 소리도 정도껏 하라며 눈으로 욕을 하는 위타천에게 하는 수 없이 물이나 한잔 떠서 내갔다.
식기세척기에 돌린다는 걸 깜빡한지라 컵에 전에 먹었던 음료수 방울이 튀어 있어서 옷 소매로 대충 문질러 지웠다.
모르고 먹으면 괜찮다.
위타천이 품속에서 사진 몇 장을 꺼냈다.
한적한 시골이나 산을 찍은 항공 사진이었다.
“딥스페이스 접속 기록이 규모에 비해 과하게 잡히거나 필요 이상의 전력이 흘러 들어가는 곳들을 추렸네. 다른 시설이 있을 수도 있으니 여기에 꼭 사메가 있다고는 확답하기 어려워. 꼭 모여 있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고.”
홀린 듯 사진 하나를 보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대로 찾아오신 것 같은데요.”
보고 있던 사진을 맨 위로 꺼내 들었다.
항공 사진이라서 더 확실하다.
하늘에서 땅으로 쏟아지는 형태로 되어 있어서 내가 고개를 들고 바라봐야 했던 쓰레기 산 중의 하나가 분명 이런 모양이었다.
쓰레기 산마다 모양이 조금씩 다른 걸 알아채고 지도에 최대한 비슷하게 그려놨기에 눈에 더 익었다.
“여기를 집중적으로 찾아주세요.”
이틀 뒤, 위타천에게서 내가 말했던 곳에 수상쩍은 인물이 드나든다는 말이 전해졌다.
놈들의 도주를 막기 위해 딥스페이스 내부와 현실에서 양동작전을 벌여야 한다는 것에 나와 위타천의 의견이 일치했다.
준비를 위해 다시 사흘이 흘렀고, 다이브하자 매티슨을 비롯한 사메 추적팀과 닌닌이 보였다.
고개를 들자 위타천이 보여줬던 사진과 매우 흡사한 쓰레기 산이 있었다.
“가시죠.”
[비행]
몸이 둥실 떠올라 쓰레기 산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