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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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눈 앞을 가리던 안경을 벗으니 처음 내가 들어왔던 공간이 보였다.
의자가 전동음을 내며 원래의 형태로 변형됐다.
내려오며 유리벽 너머의 매티슨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그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손가락으로 머리 주변을 긁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각자의 들고 있는 패드에 뭔가를 터치하거나 적고 있는 개발자들의 표정도 매티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뭐 대단한 일이라도 해낸 기분이다.
서리얼에서 하던 짓을 조금 보여줬던 게 전부인데 말이다.
물론 딥스페이스와 서리얼 간에는 차이가 있었다.
서리얼은 그 자체로 게임이지만 딥스페이스는 게임 인터페이스를 적용한 가상공간이라는 것.
게다가 오픈소스의 특성상 다른 다이버들이 본인들의 아바타를 어떤 식으로 변형했을지 예측할 수 없다고 한다.
적정 가이드라인은 두었지만 사메와 같은 악성 다이버들은 그런 가이드 정도는 완전히 무시하고 아바타를 제멋대로 개조하는 일을 일삼는다고.
서리얼에서 다른 유저의 캐릭터와 마주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하다는 소리다.
하지만 딥스페이스가 더 나은 점도 있었다.
내게 한정된 사항이긴 하지만 딥스페이스 내에서 내게 가해지는 공격은 ‘무효’로 돌아간다는 것.
매티슨의 예측이 정확히 맞아떨어진 부분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딥스페이스에서 흐르는 플로우는 나를 아예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한다.
그냥 관통해버리는 것 같다는데 이런 사례는 처음 본다고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니 결국 딥스페이스의 플로우를 변형시켜 공격하는 악성 다이버들의 공격은 내게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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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브를 마치고 몸 상태와 다이브 디바이스를 점검하기 위해 현실로 돌아오기 전, 다양한 스킬을 선보이느라 초토화된 섬 한쪽에서 매티슨에게 물었다.
“가능성이 크다는 건 100%는 아닐 수도 있다는 말 같은데요.”
“딥스페이스에서 100%는 없습니다. 그리고 0%도 없죠. 어떤 일이든 가능한 곳이니까요.”
그 ‘어떤 일이든 가능한 곳’을 만든 개발자가 해도 되는 소리인가 싶어서 지적하자 매티슨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수긍했다.
“제가 토대를 쌓은 공간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이곳의 신이 된 건 아닙니다. 그저 다른 다이버들보다 조금 잘 알고 있는 정도입니다. 그리고 이쪽 분야에는 괴물이 워낙 많아요. 누군가는 분명 저보다 딥스페이스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놈들이 악성 다이버가 되지 않았기만을 바라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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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나 하고 가시라는 매티슨의 권유를 받아들인 나는 샌디 비치 사옥 1층에 있는 카페테리아에 앉아서 매티슨의 식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매쉬 포테이토, 해시브라운, 감자채 조림, 감자전까지.
감자칩이 아니라 그냥 감자를 좋아하는 거였어?
내 시선을 의식한 건지 매티슨이 민망하게 웃으며 말했다.
“워낙 좋아해서요. 제가 먹는 메뉴는 늘 준비되어 있습니다. 한번 드셔보시겠습니까?”
“아뇨.”
칼답했다.
그리고 집어 온 고기랑 야채가 한가득 들어 있는 부리또를 크게 베어 물었다.
감자밭에서 감자파티를 벌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감자전 위에 해시브라운을 올려 먹는 기행을 선보인 매티슨이 내게 물었다.
“정말로 다이브가 처음이셨습니까?”
“네.”
“다른 가상공간에 접속한 적도 없으시고요?”
“네.”
최대한 담백하게 진실을 전했음에도 매티슨은 도무지 믿기 어려운 눈치였다.
나를 향해 의심의 눈길을 보내며 들으라는 듯이 혼잣말을 했다.
“알려드린 적도 없는 스킬을 사용하질 않나, 심지어 스킬들의 완성도도 굉장히 높던데······.”
“제가 상상력이 좀 괜찮은 편이라. 그리고 딥스페이스는 가능성이 넘치는 곳이라면서요. 그래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내 말에 수긍하는 듯하면서도 계속해서 갸웃거리는 매티슨과의 식사는 금방 끝났다.
계속해서 알고 있는 다른 퓨어는 없냐, 일이 끝나고도 세이프 가드로 활동할 생각 없냐, 원래 세이프 가드는 봉사직이라서 경력을 쌓고 싶어 하는 개발자들이 많이 지원하는데 오메가 씨가 하겠다고 하면 개인적으로 보수를 챙겨주겠다 하는 매티슨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 조금 귀찮기는 했다.
애초에 앨리스만 그렇게 안 됐으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설 일은 절대 아니었다.
일어서기 전,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올라가서 계정과 디바이스를 미세조정 해야 합니다. 잠깐 살펴봤을 때는 거의 건들 부분이 없던 것 같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그 이후는요.”
“딥스페이스 적응은 마친 것 같으니 이제 플로우를 통해 사메 추적에 나서야죠. 저희 쪽에도 놈들을 은밀하게 트레이싱하던 팀이 있으니까 그쪽에서 데이터를 받아 계정에 업데이트해두겠습니다.”
젓가락으로 감자채 조림을 집어 소스처럼 매쉬 포테이토에 푹 찍어 먹은 매티슨이 말했다.
“지금부터 바로 작업에 들어가도 하루는 족히 걸릴 겁니다. 언제쯤 오시라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그게 제일 빠른 거, 확실합니까.”
내 말에 진절머리 난다는 듯 상체를 뒤로 쭉 빼는 매티슨.
“확실합니다. 이번 일도 크루들을 얼마나 재촉한 줄 아십니까.”
식사를 마치고 바이크 위에 올라 출발하기 전, 잠깐 시간을 확인했다.
“늦지는 않겠네.”
딥스페이스 내부의 일은 내가 하고, 외부의 일을 부탁할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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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에어리어, 공공 집행본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한적한 찻집.
딸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언제나 거칠 것 없이 행동하는 남자가 뚜벅뚜벅 걸어와 내가 앉아있던 테이블 옆으로 다가왔다.
“후배가 나를 먼저 찾는 일이 있다니!”
얼굴 가득 행복한 웃음을 띠고 있는 남자, 위타천이다.
그런 위타천을 향해 냉정하게 말했다.
“왜 안 찾았던 건지는 잘 아시죠?”
순간 무너지는 위타천의 웃음.
하지만 이내 원래의 활짝 핀 미소를 그려내며 그가 내 앞에 자연스레 앉았다.
“그 부분은 내가 미안하다고 몇 번이나 하지 않았나.”
위타천이 말하는 ‘그 부분’.
공공 집행본부에 구속되어 있던 스펙터의 탈주다.
지금까지도 내부의 누군가 도와준 것인지, 도왔다면 누구인지에 대한 내용이 하나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처음 스펙터를 넘길 때, 집행본부 측에서는 국제 범죄자 스펙터의 구속이라는 성과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려 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조사와 연구를 마친 후에 해도 늦지 않다는 이수련의 강경한 스탠스 덕에 스펙터가 공공 집행본부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몇몇에 그쳤다.
그 덕에 스펙터의 탈주가 알려져 공공 집행본부가 체면을 구기는 일도 면했고.
그러니 그 내부의 사람만 조지면 될 텐데 조사 결과는?
ALL CLEAN.
스펙터와 접점이 있는 인물이 하나도 없었다.
그 얘기를 전해 들은 이수련과 나는 그날 종일 집행본부를 씹어댔다.
“미안하다고 될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으니 좀 유감이네요. 이걸 루트 같은 곳에 넘기면 정보료를 얼마로 측정해 줄까요? 스펙터가 잡힌 것도 놀라운데, 공공 집행본부에서의 탈주는 더더욱 기가 막히겠죠? 거짓 정보라면서 안 믿을 것 같기도 하네요.”
시선이 가늘게 떨리는 위타천이 애써 침착함과 여유로움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후배도 많이 독해졌어.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거야.”
“네오-서울의 공기를 마시고 살다 보면 멀쩡했던 놈도 독기가 오르기 마련이죠.”
팔짱을 낀 위타천이 나를 향해 보내는 시선이 예리하다.
“나를 따로 보자고 한 것도 그렇고, 비밀로 해달라는 것도 그렇고, 가진 최고의 패로 초장부터 나를 압박하려는 것도 그렇고······구린 냄새가 잔뜩 나는구만. 미안하지만 내가 후배를 좋게 보고 있는 건 사실이긴 하지만 그 이전에 공공집행자이니 지저분한 청탁은 미리 사절하겠네.”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사는 사람인 줄 알았더니 또 이런 부분에서는 칼 같네.
“청탁이라면 청탁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지저분한지는 모르겠네요. 들어는 보시겠어요?”
예리한 시선으로 나를 훑던 위타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해보게.”
그래, 사람이고 양심이 있다면 여길 박차고 나가지는 못하겠지.
“저를 처음 만났을 때, 한신나 권역의 공공집행자들과 협동 수사 중이라고 하셨죠.”
“그랬지. 예상치도 못하게 튀어나온 후배가 일을 좀 꼬아놓긴 했지만.”
내게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고 싶은 것 같은데, 깔끔하게 무시했다.
나는 다잡은 걸 넘겨줬지만, 당신은 다 잡아서 떠 먹여준 걸 뱉은 수준이야.
“일본 열도의 다른 권역에도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열도? 후배가 그곳에 신경 쓸 일이 뭐가 있다고.”
위타천의 말에 흥미가 배어 나온다.
신시아에게 물어보니 일본 열도는 히마와리向日葵 일족이라는 흡혈귀 가문의 직계와 방계가 꽉 잡고 있다고 한다.
야스민 가문에서 협조를 부탁하면 그쪽에서 협조를 하긴 하겠지만 상응하는 대가를 받으려 들 것이라는 소리에 일단 선택지에서 접어두었다.
스냅샷에게 물어보니 루트도 열도에 선이 닿아있긴 하지만 딥스페이스 상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눈치.
내게 빚이 있고, 다른 권역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
이게 다른 사람이 아니라 위타천을 찾은 이유다.
“절대 다른 곳에 말씀하시지 않을 거라고 해주시면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요. 해결사 오메가와 공공집행자 위타천이 아니라 그냥 오메가와 위타천, 개인 대 개인의 부탁으로요.”
위타천에 대한 매티슨의 생각이 어떨지는 모르겠는데, 같은 공공집행자인 마고에 대한 거부감을 내비치는 것으로 봐서 위타천도 좋게 보지 않을 것 같아 조건을 달았다.
잠깐 생각하던 위타천이 어디 말을 해보라는 듯, 팔짱을 풀고 상체를 테이블 앞으로 당겨 앉았다.
딥스페이스, 앨리스, 사메, 일본 열도에 대한 얘기를 풀어놓았다.
“저는 요즘 딥스페이스에서 그놈들을 추적하고 있어요. 그런데 내부에서 흩어놨다고 해도 결국 외부에 타격이 없으면 이름만 바꿔서 다시 모인다든지 할 것 같단 말이죠. 그래서 놈들의 진짜 본거지나 하다못해 주요 인물을 밝혀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제법 긴 내 얘기가 끝날 동안 고개 한 번 까딱이지 않고 있던 위타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옳은 말이야. 웬만한 집행자들보다 후배의 생각과 행동이 훨씬 앞서 있군. 돕겠네.”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기우라는 걸 알면서도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건 어디 새어 나가면 안 되는 겁니다.”
“후배는 나를 뭘로 보는 건가! 물 샐 틈 없이 처리하지.”
“물 샐 틈은 없어도 벌레 새어 나갈 틈은 있었나 보네요.”
바로 반응하는 위타천.
“어허! 그건 지금도 계속해서 조사 중인 일이라고 하지 않았나.”
“이수련 씨가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갑자기 나온 내 말에 위타천이 흠칫하는 사이, 재빨리 뒷말을 덧붙였다.
“일을 그딴 식으로밖에 못 할 거면 ‘수호자 일족의 뜻을 이어’ 이런 홍보 문구는 빼 달래요.”
이번 일은 너무 직격으로 후려갈긴 건지 반응이 좀 느리다.
약 3~5초 후, 벌떡 일어선 위타천이 거친 걸음으로 찻집을 벗어났다.
공공 집행본부로 뛰어가는 위타천과 보도 위에 움푹 팬 그의 발자국이 유리창 너머로 보인다.
아마 위타천 아래 인원들은 한동안 고생 좀 할 것 같다.
양심에 찔리거나 미안하지는 않았다.
“그러게 다들 미리미리 제대로 했었어야지.”
아직은 온기가 미미하게 남은 차를 한 번에 후룩 마셔버리고 나도 밖으로 나섰다.
위타천이 눈치챘을지 모르겠지만, 나와 이수련, 신시아는 트라이포드의 '그 분' 중 하나로 위타천도 의심하고 있다.
이번 부탁을 통해 그게 의심에서 그칠지, 더 나아갈지도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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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브.”
이틀 뒤, 샌디 비치의 사옥에서 안경을 쓴 채 매티슨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내려온 눈꺼풀 너머로도 강렬함이 느껴지는 빛이 쏟아졌다.
다시 들어온 딥스페이스.
“위치를 옮겨 놨습니다. 여기가 사메 놈들이 자주 출몰하는 곳으로 파악된 곳이라서요.”
매티슨의 목소리와 함께 빛이 사라졌고, 내 눈 앞에 펼쳐진 것은 거대한 돔으로 둘러싸인 해저도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