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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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강남대로가 질서정연하다고 느낄 일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네오-서울 대림 에어리어의 그 끔찍한 난개발과 도시계획을 경험하다 온 내게 서로 비키라고 빵빵대는 버스와 택시, 어깨를 툭툭 치고 지나가도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 녹색 신호가 5초밖에 남지 않았음을 알려주는데도 허겁지겁 횡단보도를 건너는 행인들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정도면 군대에서 오와 열을 맞춰 제식을 하는 것과 비슷한 정도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고개를 위로 들자 시야 끄트머리에 높은 건물 몇이 걸리긴 했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걸림 없이 하늘이 보였다.
네오-서울이었다면 일단 어떻게 설계한 건지 의문부터 드는 기하학적 건물들이 어떻게든 하늘을 보지 못하게 하겠다는 듯이 어디를 둘러봐도 시야를 침범했을 것이다.
그 사이를 날아다니는 드론과 비행 가능 종족들은 눈에 들어오는 하늘의 범위를 더더욱 줄여줬을 것이고.
“이렇게 차분한 곳이었던가?”
과장 좀 더해서 교외에 삼림욕을 하러 가서 마주한 차분함을 경험 중이었다.
그만큼 내가 네오-서울에 익숙해져 있다는 얘기인 것 같아서 조금 씁쓸하기도 했다.
하지만 딥스페이스로 들어온 나는 작은 존재였다.
항상 허리춤에 결속되어 있던 칼자루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으니 걷기 위해 발을 떼면 몸이 휘청하고 흔들릴 것 같았다.
마법, 기공을 비롯한 익히고 있던 모든 스킬들이 흔적도 느껴지지 않았다.
“원래부터 없었던 것 같네.”
말의 뉘앙스가 이상했다.
엄밀히 따지면 원래는 없고, 사용하지 못하는 것들이 맞으니까.
하늘을 향해 있던 고개를 내렸다.
열심히 각자의 걸음을 옮기던 행인들이 모두 멈춰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심지어 도로 위에 가득한 차량도 멈추어 있었다.
운전자들의 고개 역시 나를 향해 고정된 것이 보였다.
그들에게 말했다.
“이렇게 되고 보니 그립기까지 하네. 이 광경을 다시 직접 볼 수 있으려나?”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행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을 향해 웃어주었다.
“지금의 내게는 이게 현실이 아니라는 거지. 잘들 가라 ‘기억’.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다시 볼 수 있다면 보자. 그렇게 할 수 없다면······마는 거지.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도 있곤 하니까.”
내 말이 끝나자 지진이 일어나는 것처럼 강남대로 한복판에 거대한 균열이 생겼다.
깨진 아스팔트와 버스 정류장을 시작으로 주위에 있던 것들이 균열로 빨려들기 시작했다.
행인들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얼굴에서 시작된 붕괴는 순식간에 몸으로 번져갔고, 곧 흩날리는 가루가 되어 그 역시 균열에 잡아 먹혔다.
한순간에 주위의 배경이 바뀌었다.
쨍한 햇살이 내 얼굴 위로 들이쳤다.
쏴아- 쏴아- 하는 파도 소리가 기분 좋게 귀를 간질였다.
날개 끝만 회색으로 물든 갈매기들이 몇 개 안 되는 뭉게구름이 뜬 하늘을 자유로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발을 떼자 고운 입자의 모래가 사르르 밀려들어 내 발자국을 지웠다.
“어떻게 벌써······.”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반바지에 5XL는 될 것 같은 넉넉한 티셔츠를 입은 오랑우탄이 얼굴에 걸친 선글라스를 올려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깥에서의 모습과는 달리 매티슨은 시력 보조 장치도, 어깨와 팔에 가득했던 의수도 없었다.
그냥 날씨 좋은 섬에 휴양 온 돈 많은 오랑우탄 수인 정도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놀란 매티슨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나를 향했다.
“어떻게 하신 겁니까? 초기 설정 모드는 다이버의 심층 의식에 깊게 영향을 받기 때문에 다들 기본으로 몇 시간 정도는 헤매곤 합니다. 사고 기관의 구성 물질 중 유기물 비율이 높은 종족일수록 그런 경향이 두드러져서 퓨어인 오메가 씨는 빨라도 6시간은 걸릴 거라고 예상 중이었는데······. 가장 최신의 사고 회로를 장착한 안드로이드도 45분은 걸리는 과정이란 말입니다.”
자기만 아는 내용을 또 떠들기 시작한다.
빨리 나온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싶다.
“얼마나 걸렸는데 그러십니까.”
“10분입니다.”
내가 있는 곳이 강남대로란 것을 알고 신기함에 둘러본 시간이 얼추 그 정도일 것 같았다.
궁금해 죽으려고 하는 표정이기에 간단히 답해주었다.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거든요.”
“분명히 다이브는 처음이시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다이브는 처음입니다.”
“그럼······?”
“원치 않게 어디론가 끌려가는 경험을 말씀드린 겁니다. 그때는 눈을 떴을 때 제가 알고 있던 것과 전혀 동떨어진 것들이 펼쳐졌는데, 이번에는 다행히도 익숙했던 것들이더군요. 다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뿐입니다.”
내 말을 들은 매티슨이 긴 팔로 팔짱을 끼더니 ‘그 어떤 인간 다이버나 세이프 가드 중 오메가 씨 정도로 심층 의식을 논리적으로 접근한 인간이 없었다.’, ‘논리적 접근이라는 것이 맞긴 한가, 오히려 지극히 비논리와 비이성적 접근이 이런 결과를 도출한 것이 아닌가’와 같이 또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중얼댔다.
달변인 건 분명한데 그 달변이 혼잣말할 때도 발휘되니 옆에서 듣고 있기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연민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는 매티슨.
“납치된 경험이 있으신가 보군요. 얼마나 고초가 많으셨습니까. 그런 일을 겪었으니 성격이 그렇게 모난 것도 이해가 됩니다.”
끌려가는 걸 납치로 알아들은 건가?
묘하게 다르지만, 또 묘하게 통하는 것도 같으니 굳이 나서서 정정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성격이 모나다는 건 뭐야.
이놈 이거 마이페이스인 척하면서 맥이네.
오늘 샌디 비치에 도착해서도 고개만 까딱하며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아무래도 저번 만남에 앙금을 품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덩치도 큰 놈이 속은 밴댕이 소갈딱지만 하긴······.
당장 한 대 쥐어박고 싶지만, 이 오랑우탄에게 예의를 주입하는 건 앨리스가 깨어난 후로 미뤘다.
일단 이 딥스페이스라는 가상공간에서 설계자이자 개발자인 매티슨의 활용도는 무궁무진할 것 같으니까.
“외형이나 목소리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데, 어떻게 하냐면······.”
“그건 천천히 알아가도록 하죠. 당장 급한 사항은 아닌 것 같으니 말입니다.”
커스터마이징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냐며 호들갑을 떨던 매티슨을 아무 말 없이 응시했더니 곧 움찔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조금 알 것 같다.
말에 말로 대응하면 안 된다.
엇나간다 싶으면 무관심이나 침묵을 내세우는 게 매티슨을 다루는 좋은 방법이다.
입을 열었다.
“어쨌든 다이브라는 걸 해서 딥스페이스에 온 건 맞는 거죠.”
“네. 맞습니다.”
“앨리스 말로는 여기서 게임도 하고 드라마도 보고 커뮤니티로 사용할 수도 있다던데―.”
주위를 둘러봤다.
백사장을 들락거리는 파도와 날개를 퍼덕이는 갈매기뿐이었다.
“이건 그냥 섬 같은데요.”
그러자 매티슨이 손가락을 튕겼다.
딛고 있던 모래사장이 무너지는 느낌과 함께 몸이 휘청했고, 주위가 어두워졌다.
별이 없는 우주공간에 둥둥 떠 있는 느낌이 이럴까.
멀리서 무언가가 우리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혜성?”
무시무시한 속도로 길게 꼬리를 뽑아내며 다가오는 혜성이 어느 순간 폭발했다.
그리고 혜성에서 갈라져 나온, 이루 세기도 힘든 숫자의 파편이 우주공간을 수 놓았다.
수천억, 어쩌면 그것의 몇 배나 될지도 모르는 파편들이 꾸물대며 별이 되었고, 마침내는 읽을 수 있는 글자와 그림으로 변했다.
“영화, 게임, 음악, 도서, 드라마, 예능, 커뮤니티 등등, 세상 모든 즐길 거리가 딥스페이스에 있습니다. 원하는 걸 골라잡기만 하세요. 마음에 들지 않았던 부분을 고쳐서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죠. 생산자와 소비자가 나뉘지 않는 최상, 최고, 최대의 가상공간이 이곳입니다.”
탓-
다시 매티슨이 손가락을 튕기자 광활한 우주와 무한한 별들이 사라졌다.
우리는 처음 그대로 섬에 있었다.
“다양한 기능을 활용하기에는 방금 보여드렸던 우주 UI(User Interface, 사용자 인터페이스: 사용자가 제품/서비스와 마주할 수 있게 만들어진 매개체)가 가장 좋지만 아무래도 멀미를 호소하시는 분이 많으셔서 권장해 드리지는 않습니다.”
좋은 선택지다.
솔직히 혜성이 정면으로 날아올 때는 나도 모르게 공포영화의 등장인물들처럼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를 뻔했다.
발밑이 단단하다는 사실도 한결 안심이 됐다.
매티슨의 말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리고 딥스페이스를 흐르는 플로우라는 장대한 흐름을 느끼기에도 이런 아일랜드 UI가 좋을 겁니다. 자 일단······어디 가십니까!”
허겁지겁 달려온 매티슨이 바다를 향해 걸어가던 내 손목을 거칠게 잡았다.
저 시끄러운 오랑우탄 말을 언제 다 듣고 있나, 일단 들이박으면서 배우는 거지.
“플로우는 해류라면서요. 해류는 바다니까 여기로 가야 할 거 아닙니까. 사메는 일본어로 상어라니까 마침 바다에 살겠죠.”
“틀린 말은 아니지만 간단한 설명 정도는 듣고 같이 움직이셔야죠.”
“어디가 간단하다는 겁니까. 듣고 있으면 머리만 복잡해지는데.”
“헉! 저처럼 명쾌하게 말하는 오랑우탄 수인이 또 어디 있다고!”
내 말을 들은 매티슨이 충격받은 표정을 했다.
이것도 주위에서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어?
이런 걸 가만 놔두는 얘 주위 개발자들 상태도 알 만하다.
정신을 차린 매티슨이 나를 물 밖으로 끌어냈다.
“언제 그걸 다 듣고 있습니까······?”
온 힘을 다해 저항했지만, 나는 맥없이 끌려 나와 해변가에 던져지고 말았다.
어린아이와 어른의 힘겨루기라고 해도 부족할 정도의 격차.
황당해하는 나를 본 매티슨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입술을 뒤집어 깠다.
“우! 우! 우! 딥스페이스는 바깥과 다릅니다. 적응하지 못하면 아무리 슈퍼 가드인 오메가 씨라도 당하고 말 겁니다. 튼튼하지만 바이러스를 해치우지 못하면 백신의 역할도 하지 못하는 겁니다!”
입술 아래로 보이는 분홍빛 잇몸, 아래로 늘어트린 상태로 휘휘 돌리는 긴 팔, 펄쩍펄쩍 뛰어대는 다리.
매티슨은 대충 봐도 보통 신난 게 아니었다.
그 이유는 물론 내 무능한 모습 때문이겠지.
진짜 클라이언트만 아니었다면, 앨리스가 의식을 잃지만 않았더라면 온 힘을 실어서 한 대만 쥐어박고 싶다.
분함에 저절로 목소리가 떨렸다.
“설명, 들어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가능성입니다. 기본적으로는 신체 정보를 베이스 삼아서 딥스페이스 내에 아바타를 생성하지만, 베이스는 베이스일 뿐, 무한한 가능성을 담을 수 있습니다. 팔이 불편했던 사람은 이곳에서 자유로운 팔의 움직임을 얻고, 더 적은 팔이나 더 많은 팔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신체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현실에서 가지지 못했던 능력도 마음껏 펼쳐 보일 수 있는 겁니다. 예를 들면.”
가볍게 발을 구른 매티슨이 순식간에 위로 치솟았다.
그리고는 깃털처럼 나풀나풀 부드럽게 원래 있던 자리에 정확히 내려섰다.
“또는.”
바다로 걸어가는 매티슨.
파도가 그를 삼켜야 하건만, 너무도 자연스럽게 매티슨은 파도 위로 올라서서 물 위를 걸었다.
다시 내 옆으로 와서 재수 없는 표정을 짓는 매티슨이었다.
“퓨어라고는 하지만, 인간이시고 게다가 하이퍼 계정이니 저처럼 하기가 쉽지는 않을 겁니다. 세이프 가드들도 빨라야 일주일 정도는 훈련해야 감을 잡습니다. 그러니 그때까지는 저를 스승으로 모시고 매일 감자칩 세 봉지를 사서 제게 주시면······.”
“요점.”
“예?”
“요점만 말합시다.”
말을 끊은 것이 기분 나빴는지 눈을 흘기는 매티슨이 부루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상공간이지만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일종의 게임 시스템을 이식했습니다. 이해되실지는 모르겠지만 스킬을 사용하는 감각을 깨우쳐야 합니다. 그중에서도 세이프 가드는 딥스페이스에서만큼은 스킬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자가 되는 겁니다. 바깥에서는 해본 적 없는 일이니까 이게 무슨 말인가 싶으시죠? 보여드리겠······.”
매티슨의 말이 끝나기 전, 나는 위로 휙 뛰었다.
[폭발적인 각력]
방금까지만 해도 내가 서 있던 섬이 아래로 작게 보였다.
[저속 낙하]
부드럽게 매티슨 옆에 착지했다.
심지어 아까 매티슨이 보여준 것보다 더 매끄럽게.
이해되실지 모르겠어?
무슨 말인가 싶어?
으딜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고 스킬 보관소 앞에서 스킬을 막 꺼내 보이고 그러나? 으이?
코끝까지 선글라스가 흘러내리는 것도 모르고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매티슨에게 말했다.
“다음은 뭡니까. 빨리빨리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