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잡캐여도 너보단 강함-115화 (116/258)

115.

115.

긱Geek이라는 말이 있다.

범생이면서 특정 분야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부류의 사람을 칭하는 너드Nerd와 뉘앙스가 매우 흡사한 표현이다.

긱과 너드는 툭하면 혼용될 정도로 이미지가 비슷하지만 그래도 굳이 구분하자면 너드가 사회성이 조금 더 떨어지는 정도려나.

지금 사무실에 방문해서 내 눈앞에 앉아있는 오랑우탄 수인은 긱일까 너드일까.

잔뜩 구겨진 셔츠, 그 셔츠 위에 붙어 있는 과자 부스러기, 모 만화의 스카우터처럼 눈의 한쪽을 가리는 반투명한 시야 보조 장치, 길고 가느다란 팔과 손가락에 달린 추가 의수.

셔츠에 붙어 있는 과자 부스러기의 색이 여러 의수 중 한 의수의 끝에 진하게 배어버린 것에 자꾸만 눈이 간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슨 일을 하신다고 했죠?’라고 예의상 던진 질문에 10분 넘게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딥스페이스는 또 하나의 세계이자 우주고 동시에 바다입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졌죠. 가상공간을 표방하는 것들은 많았습니다. 어나더 라이프? 메타 유니버스? 그것들이 만들어낸 공간은 현실의 연장이었을 뿐입니다. 심지어 그것도 어설픈 모방에 불과했죠. 하지만 딥스페이스는 다릅니다. 꿈꿔왔던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현실에서 빈민인 자가 딥스페이스에서는 행성을 통치하는 황제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지구 반대편 권역에 사는 사람들과 모여서 인상적으로 봤던 영상매체의 한 장면을 재현할 수도 있죠. 그에 국한되지 않고······.”

이 오랑우탄 수인의 이름은 매티슨.

딥스페이스라는 가상공간의 토대를 세운 개발자이자 딥스페이스 안경의 초안을 제공한 기안자다.

딥스페이스를 매각하라는 세계 유수의 기업들의 러브콜을 단호히 거부하고 오픈소스화해버린 괴짜이기도 하다.

그래도 딥스페이스 안경이 팔릴 때마다 들어오는 로열티와 계정 구독 요금 일부가 매티슨의 계좌로 들어오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부자인 것은 틀림없단다.

딥스페이스에 접속하는 걸 다이브라고 하는 것 같던데, 매티슨이 개발한 안경 말고도 다양한 다이브 디바이스가 시중에 나와 있지만, 사용과 휴대의 간편함과 안전성 때문에 여전히 매티슨 표가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고 들었다.

대단한 부자에, 엄청난 개발자라는 건 알겠는데, 알아듣지 못 할 말을 좀 많이 떠들어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중증 자아도취랄까.

일단 대화를 좀 정리할 필요성을 느껴 입을 뗐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시간이 멈춘 듯 내려앉는 적막.

앨리스가 눈으로 내게 말하고 있다.

‘손님 앞에서 미쳤어요?’

맹세컨대 저 말을 꺼낸 건 실수다.

생각만 하고 있었을 뿐, 원래 하려던 말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의뢰 내용을 들어볼 수 있을까요.’였는데 오랑우탄이 떠드는 페이스에 말려 들어가서 생각과 말이 바뀌어 나왔다.

“어······제가 어제 잠을 설쳐서······.”

궁색한 변명을 꺼내놓으려는데, 매티슨이 껄껄거리면서 웃었다.

“이야~그리운 말입니다. 네오-서울 대학 다닐 때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었죠. 중간에 자퇴하긴 했지만요.”

그래,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도 이 오랑우탄 수인을 보고 비슷한 생각들을 했던 거다.

왠지 신나 보이는 매티슨이 더 열심히 떠들었다.

“대주교님이 소개해주시면서 말씀하시길 실패를 모르는 해결사니 절대 쉽게 보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런 부분까지 조사하시는 겁니까? 이 정도는 되어야 프로 소리를 듣는 거죠! 마음에 듭니다!”

사회성이 상당히 부족해 보이고 분위기를 파악하는 능력이 매우 미흡한 것 같으니 이 오랑우탄은 너드로 분류하기로 했다.

그 덕에 위기를 아슬아슬하게 넘어가긴 했지만.

다시 본격적인 용건을 꺼냈다.

“앨리스에게 얘기를 듣긴 했는데, 제가 이해한 내용이 맞는지 한 번 확인 부탁드리겠습니다.”

준비되었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매티슨.

미리 들었던 내용을 천천히 풀어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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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스페이스는 범세계적인 가상공간 네트워크다.

종족을 가리지 않고 인기를 얻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딥스페이스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부류는 안드로이드다.

전자기기와 가상공간에 대한 거부감이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은 것이 가장 큰 이유.

그리고 다른 이유로는 연산회로와 사고회로에 유기물 개입이 거의 없는 안드로이드들이 딥스페이스에서 제공되는 툴과 펑션을 활용하는 데 있어 제약사항이 가장 적기 때문이다.

대기업의 통제 독점 구조에 반발을 가진 매티슨의 오픈소스화 기행 덕분에 이용료가 저렴하고 다양한 확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유저들이 딥스페이스에 열광하는 데 한몫을 했다.

하지만 오픈소스는 필연적으로 보안 측면의 취약성을 동반하는 법.

다양한 확장성을 악용해 유저들의 개인 정보를 불법 취득한다거나 심지어 다이브 디바이스를 먹통으로 만드는 것 같은 악질적인 시도가 꾸준히 있었다.

대부분은 매티슨이 이끄는 비영리 조직 ‘샌디 비치Sandy Beach’의 재빠른 조치로 다이버Diver라 불리는 딥스페이스 이용자들에게 큰 피해가 생기는 일은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심상치 않은 조짐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다이버 중 몇몇이 딥스페이스 다이브 중 가사 상태에 빠지는 현상이 발견된 것.

피해자들은 모두 안드로이드.

사고회로의 기능이 정지한 채 전자적 혼수상태Electronic Coma에 빠진 안드로이드들의 모습은 편안하게 잠을 자는 것처럼 보였다.

혈색도 나쁘지 않았고, 가늘게나마 호흡을 지속했다.

다만 눈은 뜨지 않는다.

안드로이드의 의식을 신체로부터 유리한 뒤, 딥스페이스 내의 특정 장소에 가둬 그곳을 새로운 현실로 인식하게 하는 악질적인 범죄 행각.

왜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인지 알려지지는 않았다.

전체 다이버의 수에 비하면 극소수의 피해자였지만 좌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샌디 비치는 끈질긴 추격 끝에 이런 짓을 하는 곳이 스스로를 사메(サメ:상어)라고 칭하는 다이버 집단이라는 것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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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잘 이해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우리 안드로이드가 옆에서 1대1로 과외하듯 주입했거든요.”

뿌듯하게 웃는 앨리스.

매티슨이 직접 온다니까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져서 의뢰 안 받아도 좋으니 얘기나 해보자면서 나를 열심히 졸라댔었다.

“제가 이해한 부분에서 틀린 게 없다니 다행이긴 합니다만, 대주교님이 매티슨 씨께 저를 소개한 이유는 짐작하기 어렵군요. 참고로 저는 딥스페이스 다이브를 한 번도 안 해봤습니다.”

“그래요? 한 번 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다이브를 안 해본 사람은 있어도······.”

매티슨의 말을 앨리스가 낚아챘다.

“한 번만 해본 사람은 없다! 간토関東권역! 딥스페이스 3주년 기념 기조연설!”

간토 권역은 일본 열도의 동쪽에 있는 권역으로 현실의 도쿄도, 요코하마시, 지바시, 우츠노미야시를 합친 거대 권역이다.

일본 열도 서쪽에 있는 한신나 권역과는 네오-서울과 WSS의 관계 이상으로 앙숙이기도 하다.

앨리스의 말을 들은 매티슨이 놀랍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도 가물가물한 기억인데 잘 알고 계시는군요.”

“팬이니까요! 강연 영상 다 찾아봤어요! 가실 때 사인 하나만······.”

열광적이던 앨리스가 나를 바라보고는 주접을 멈췄다.

매티슨도 슬쩍 내 눈치를 봤다.

다시 일 얘기로 돌아가자.

“이유요.”

“아! 사실 이 문제에 대해 대주교님과 먼저 상의를 했습니다. 안드로이드들의 권익 증진에 많은 애를 쓰시고 계신 분이니까요.”

보통 바쁜 것이 아닌 헤지르 대주교와 얘기 나눌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매티슨이 이름 있는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요새는 벡을 키우는 재미에 빠져 정말 중요한 일정 아니고는 다 캔슬하는 통에 ‘헤지르 대주교의 은퇴가 머지않았다.’라고 헛소문이 돌긴 하지만······.

매티슨의 이야기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대주교님은 공학적인 부분에서 뛰어나시긴 하지만 이런 ‘최신식 기술’은 조금 어려워하시더군요. 그래도 안드로이드들이 피해를 입고 있다는 것에 안타까워하시며 당신께서 도울 일이 없냐고 물어보셨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해서 ‘라이프 가드’ 얘기를 꺼냈습니다.”

“라이프 가드?”

“예. 딥스페이스 내에서 다이버들을 보호하는 일종의 자경단입니다.”

앨리스가 눈을 반짝이더니 발을 조그마하게 동동 굴렀다.

매티슨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뒤 앨리스에게로 눈을 돌렸다.

“왜 그래. 화장실 가고 싶으면 갔다 와도 돼.”

“그게 아니라요. 라이프 가드 얘기에 설레서요. 저도 지원했었거든요. 떨어지긴 했지만. 그리고 저 화장실 안가도 되게 만들어졌거든요?”

“붙었으면? 사무실은 그만두려고?”

“아뇨. 수면 모드나 충전 모드일 때 하려고 했죠. 몸을 움직이는 일이 아니잖아요.”

매티슨이 끼어들었다.

“죄송하지만 안드로이드는 라이프 가드에서 원칙적으로 배제하고 있습니다. 가능한 몸에 전자기기나 기계 장치가 적은 인원을 우선으로 지원받고 있어서요.”

놀란 표정의 앨리스.

“그래요? 전혀 몰랐어요.”

“외부로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입니다. 이 대화도 밖으로 나가면 안 되고요.”

“왜 그런 건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딥스페이스는 거대한 흐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다로 비유하면 해류죠. 저희는 플로우라고 합니다만······. 어쨌든 플로우를 받아들이고 내보내는 데 있어서 이미 신체 내외부로 전자적 작용이 있거나 전자기기가 있는 것이 압도적으로 유리합니다. 안드로이드가 딥스페이스에서 적응이 빠른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다르게 말하면 그만큼 플로우에 저항이 없다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플로우를 타고 들어오는 사메의 공격에 상대적으로 더 쉽게 무력화되는 겁니다.”

이해가 쉽게 되지는 않지만 대충 때려 맞춰보자면 색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고 찍어 먹다가 병에 걸리는 느낌인 것 같다.

심지어 그 똥이 공격도 하는 거고.

“대주교께서 말씀하시길 오메가 씨는 퓨어라고 하더군요. 따라서 딥스페이스에 다이브 하시면 가장 이질적인 존재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적응과 활용은 느릴지 모르지만 플로우가 침투하지 못하는 존재. 딥스페이스에 존재하는 슈퍼 가드, 일종의 백신이 되는 겁니다.”

이제 나를 보는 매티슨의 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의뢰하시고 싶으신 건?”

“전자적 혼수상태에 빠진 안드로이드들의 의식은 사메가 딥스페이스 어딘가에 숨겨놨을 겁니다. 사메의 본거지를 탐색한 후 격파하고 빼앗긴 안드로이드들의 의식을 구출하는 것. 그것이 제가 오메가 씨께 하고 싶은 의뢰입니다.”

#

매티슨이 돌아가고 몇 시간 뒤, 책상에 앉아 손으로 펜대를 굴리다가 중얼거렸다.

“오랑우탄······말을 줄줄 잘하던데 처음에 찌질하고 정신 없어 보이던 건 연기였던 건가?”

사무실 문 닫을 시간이 가까워 마무리 청소를 하던 앨리스가 답했다.

“매티슨은 개발자치고 엄청 달변으로 유명해요. 제 생각도 연기가 아니었을까 해요. 사장님을 떠보고 싶었던 거죠.”

“흐음······.”

“의뢰 어떻게 하실 거예요?”

“나쁘지 않은 의뢰란 말이지······.”

착수금 조로 딥스페이스 하이퍼 계정을 제공받는다.

일반 다이버들이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기능이 다양한 일종의 마스터 계정이다.

의뢰가 실패해도 이 계정은 회수하지 않겠다는 매티슨의 공언이 있었다.

앨리스가 말하길 매티슨의 손이 직접 닿은 하이퍼 계정은 전 세계에서 10개가 안 되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을 거면 그냥 가져다 팔아도 수억은 우습게 받을 수 있단다.

그런데 당장 돈이 궁한 건 아니라서 이 조건이 그렇게 매력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조건이 더 끌렸다.

헤지르 대주교가 매티슨에게 내가 마법, 검술, 무기에 대해 관심이 많다는 것을 살짝 귀띔이라도 해준 것 같았다.

“딥스페이스 내에 그곳에 속한 다이버들끼리 스스로 ‘요양원’이라고 부르는 비공개 커뮤니티가 있습니다. 초대받을 기회가 있어서 가 봤는데 저는 그쪽에는 문외한이라 잘 모르지만 느낌으로 봤을 때는 현실의 제약이 없는 딥스페이스를 수련장으로 사용하는 기인이사들의 모임 같더군요. 의뢰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신다면 그곳에 오메가 씨를 소개하겠습니다.”

끌리기는 하지만 굉장히 두루뭉술한 보상이다.

게다가 딥스페이스는 무지막지하게 넓다는데 거기서 그 사메라는 놈들의 본거지는 또 언제, 어떻게 찾고.

무엇보다 게임을 하다 이 꼴이 된 트라우마 때문인지 쉽게 하겠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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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나는 귀걸이를 만져 매티슨에게 통신한 뒤 큰소리로 다급하게 외쳤다.

“하겠습니다! 뭘 어떻게 하면 됩니까! 빨리!”

내 옆의 사무실 소파에는 앨리스가 편안한 표정으로 잠을 자듯 누워있었다.

곁에서 로봇 헤드를 뒤집어쓰고 떨리는 손으로 앨리스를 점검하던 이수련이 황망한 목소리로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을 확인해주었다.

“일렉트로닉 코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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