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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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 뒤, 브리가드의 기함인 빅웨일이 다시 해저 깊은 곳으로 사라졌다.
타고 온 배 위에서 그 모든 광경을 눈에 담던 수연이 다른 이들에게 말했다.
“톈진 권역으로.”
조타실로 들어간 이가 여러 버튼을 조작하자 배의 형태가 변하기 시작했다.
트여있던 갑판 옆과 위로 유리 벽이 세워지는 것을 시작으로 선체는 조금 더 길쭉해졌고, 동시에 양옆으로 날개 두 개가 뻗어 나왔다.
후미에서는 꼬리 날개가 솟아 올랐다.
지면효과Grond Effect를 이용해 고속으로 수면 위를 저공 비행하는 위그선Wig船이었다.
공해상을 지나는 다른 권역들의 배나 해적들의 눈에 띌까 봐 평범한 배로 위장 중이었던 것.
곧 낮게 떠오른 위그선이 방향을 북북서로 잡았다.
수연에게는 아직 톈진 권역에서 마무리 지을 일들이 있었다.
선실로 돌아와 홀로그램 통신 장치를 다시 가동한 수연의 앞에 머리통 절반이 날아간 스펙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간이 오래 걸린 걸 보니······.
입꼬리가 귀를 향하는 수연.
숱한 남자들의 애간장을 태웠던 미소다.
“한동안 협력하는 쪽으로 얘기가 됐어.”
-호오······마도공학 유물에 미친 놈들을 잘도 꾀어냈네. 꼬리라도 흔든 건가?
“그럴 필요도 없었어. 브리가드의 수장이 오메가에게 품은 분노가 이만저만 한 게 아니더라고. ODC(Old Dynasty’s Capital, 서라벌 권역)에서 브리가드가 보르스나탄 탐사단에게, 그것도 단 한 명에게 박살 났다는 소문이 맞는 것 같아. 반응으로 봐서는 그 한 명이 오메가겠지.”
탐사가 끝난 이후, 호위대원 조사대원 할 것 없이 모두 각자의 터전으로 돌아가 오메가의 믿지 못할 활약에 대해 떠들었다.
자기들이 생각해도 너무 황당해서 일부분은 축소해 얘기하기까지 했지만 그래도 활약이 너무 엄청나서 들은 이들은 대부분 믿지 못했다.
게다가 의뢰 수주 방식을 소개 위주로 바꾸고 들어온 첫 일이라 하뮬이 이끄는 보르스나탄 탐사단에 오메가가 합류한 것도 잘 알려지지 않았었다.
기계 교단의 일이나 벡이 있던 연구소 건은 극소수만 아는 비밀로 묻었으니 오메가의 명성이 퍼지고는 있지만 실제로 해낸 일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그러니 탐사단에서의 오메가에 대한 것을 들은 사람 중 몇은 낙하산으로 운 좋게 탐사단에 꽂힌 오메가가 돈을 뿌려 바이럴 마케팅을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대체 얼마를 받았길래 브리가드를 물리친 공적을 그 사람 하나에게로 몰아주냐는 식.
오메가 본인은 그런 일이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지만, 정작 탐사단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자기를 거짓말쟁이로 보는 눈빛들에 미치기 직전이었다.
성질 급한 켄타우르스인 클라우스는 이것 때문에 몇 번이나 민주주의를 외치며 술집을 개판으로 만들기도 했다.
스펙터의 반응도 매한가지였다.
-그 해결사가?
수연이 피식하고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그 해결사에게 당해 다 완성된 작전을 말아먹고 공공 집행본부까지 들어갔다 나온 게 누구지? 평생 연구 재료로 쓰이다 종국에는 박제로 생을 마칠 뻔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코 아래쪽만 위치한 스펙터가 아랫입술을 깨무는 모습이 선명했다.
-운이 없었던 것뿐이야.
“대업에 가장 필요한 게 운 아닌가?”
-검 좀 휘두를 줄 아는 해결사가 뭐 대단하다고!
“오메가가 망친 우리 일이 몇 개인 줄이나 알아? 절대 쉽게 봐서는 안 돼.”
끝이 갈라진 라미아 특유의 혀로 요염하게 입술을 핥는 수연.
“그래서 아쉬워. 죽일 수밖에 없다니.”
-네가 기계 교단의 성당에서 놈을 죽이지 않은 나비효과야.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어.”
-네가 실수를 인정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그 정도로 오메가라는 남자의 존재가 커지고 있으니까. 브리가드의 마데르노, 보통이 아니야. 못해도 네오-서울의 노덴스나 위타천과 비슷하거나 조금 아래일 거야. 그런 사람이 전력을 다해 오메가를 죽이고 싶어 하고 있어. 믿기지 않는 성장 속도야. 성당에서 나와 만난 것이 1년도 되지 않는데 말이지.”
-놈이 의도를 가지고 우리 일을 방해하는 것 같아?
어느새 스펙터도 진지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글쎄. 확실하지 않아. 그래서 아쉽다는 거야.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수만 있으면 확실한 전력이 될 테니까.”
-리벨리온처럼?
“리벨리온에게서 확실한 건 머릿수밖에 없어. 아, 하나 더 있다. 그 소꿉장난에 심취한 거신족 혼혈과 엘프를 조종하기가 아주 쉽다는 거.”
-오메가를 사살하라는 지침을 내린 건 너야. 하지만 네 말이나 행동은 정반대인데?
“조직의 뜻과 개인의 뜻은 다를 때가 있으니까.”
-확실히 해.
수연이 손을 뻗어 목걸이에 가져다 댔다.
오메가가 성당에서 그녀에게 주었던 데이터 명함이 그녀의 손 위에 생성됐다.
파짓-
주먹을 쥐자 으스러져 흩어지는 데이터 명함.
“확실해졌어.”
화제를 돌리기 위해 수연이 물었다.
“색승의 행방은 파악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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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 진 빠져. 얼추 된 것 같죠?”
눈앞에 고개를 떨군 색승이 있었다.
[분근착골]의 다양한 배리에이션을 모조리 선보인 결과 놈의 사지 중 제대로 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일종의 현대 예술 조형물이라고 해도 될 정도.
입가에서 피거품을 흘리는 색승이 몸을 움찔거리며 혼잣말하듯 말을 흘렸다.
“그으으으······차라리······죽여······.”
놈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답했다.
“네가 했던 짓을 생각해서라도 편하게 죽게는 못 두지.”
“악독한······.”
악독은 무슨, 상자 안에 있는 이놈의 거시기를 뒤에 박아버리려다가 참았구만.
액체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바닥을 보니 놈이 흘린 피, 부동액, 침, 흘러나온 소변 등이 작은 웅덩이를 이루고 있는 것이 보였다.
기껏 마련한 차고를 더럽혀?
갑자기 열이 확 올라서 이미 열 군데 이상 부서진 놈의 조인트를 까버렸다.
“그아아아악!”
“시끄럽다!”
바이저를 쓴 이수련이 튀어나와 꼬리로 색승을 후려쳤다.
얼핏 봐서는 꼬리가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보기에만 그런 것인지 맞고 있는 색승은 이미 엉망이 된 얼굴을 다시 한번 찌푸려가며 고통을 호소했다.
저 새끼는 더 맞아도 싸다.
신시아도 나와 같은 의견인지 공중에 주먹까지 휘둘러가며 이수련을 응원하고 있었다.
“잘한다! 더 세게! 뭉개버려!”
요새 많이 잠잠해지긴 했지만 늘상 티격태격하는 둘의 뜻이 온전하게 일치되는 걸 보는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오빠랑 붙을 때 여자로 변해서 곤란하게 했다며? 또 해봐! 해보라고!”
자기 손을 더럽히기는 싫었는지 불러놓았던 좀비를 움직여 색승을 패기 시작하는 신시아.
그걸 본 이수련도 로봇을 움직여 린치에 합류했다.
그나저나 여체화한 색승을 상상하니 그건 그것대로 구역질이 나올 것 같다.
젠의 여성 기피는 거기에도 발동했던 것일까.
만약 그랬다면 젠은 크나큰 핸디캡을 안고 싸웠던 건가.
어쩐지 젠이 놓쳤다는 것이 이상했는데 저 말을 듣고 나니 조금 이해가 된다.
색승은 분명 강하지만 절대로 젠 급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저놈이 젠의 가장 큰 약점을 그런 식으로 공략했다면 젠의 극심한 여성 기피를 알고 있는 내가 봤을 때 색승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일방적인 린치는 색승이 정신을 완전히 잃고서야 멈췄다.
아직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씩씩거리는 이수련이 내게 물었다.
“이놈의 뒤처리는 어떻게 할 생각이더냐?”
“대림 하 렙틸리비아로 보내려고요.”
“커다란 악어가 이끈다는 그곳?”
“네.”
대림 하 렙틸리비아는 색승이 한창 활동할 때 가장 많은 피해자가 나온 곳 중 하나라고 한다.
피해자들의 고통을 없던 것으로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고통의 원흉에게 돌 한 번 던질 기회는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스콰이어에게 운을 띄웠더니 오히려 자기들을 신경 써 줘서 고맙다는 말이 돌아왔다.
네오-서울에 정식으로 시민 등록이 되지 않은 인구가 워낙 많아 누가 들고 나가는지 알 수 없으니 뒤처리하는데 자기들만큼 적합한 곳이 없다는 말과 함께였다.
색승의 분비물을 치우기 위해 물청소를 하고 있으니 앨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하 수로 쪽 입구에 스콰이어 씨가 와 계시네요.
“열어줘.”
굳이 색승과 같이 있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없다는 판단으로 이수련과 신시아는 사무실로 올라갔다.
커다란 덩치로 조심스럽게 차고로 들어온 스콰이어가 악어 수인의 특징인 강인한 턱을 떡하니 벌렸다.
“세상에, 정말 색승이군. 게다가 상태가······.”
“말했지만, 내 이름이 나오지 않았으면 해. 할 수 있겠지?”
“수로를 통해 흘러들어왔다고 해두지.”
“그런 이유가 먹히나?”
“실제로 그런 놈들 많아. 수로로 사라지는 놈들도 많고.”
초 거대 도시 권역 지하에 존재하는 행정 공백에 기가 막힐 지경이었지만, 완벽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
유토피아의 뜻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지 않나.
어레스트로 입까지 가려놓은 색승에게 다가선 스콰이어가 거대한 주먹을 들어 색승의 배에 꽂았다.
“어이, 그러다 죽겠어.”
“이 자식 때문에 파충류 수인들 배척이 더 심해진 걸 생각하면 여기서 죽여도 시원치 않아. 다만 내 손에 죽기에는 이놈이 지은 죄가 많으니 이 정도로 하겠어.”
스콰이어가 타고 온 수상 스쿠터 뒤에 연결된 짐칸에 색승과 놈의 물건이 담긴 상자를 결속하는 것을 도와준 뒤에 한 번 더 확인했다.
“확실하게 처리 잘해. 여기서 죽여버리자는 거 넘기는 거야.”
“에브레의 일도 그렇고, 늘 도움만 받는군.”
“그러니까 부탁한 거 잘해달라고.”
“물론.”
말라비틀어진 색승의 물건과, 그것으로 맞은 자국이 온몸에 새겨진 채 숨을 거둔 색승의 사진이 전달된 것은 며칠 후의 일이었다.
항상 새롭고 자극적인 성적 자극을 찾던 놈이 자기 물건에 맞아 죽었으니 놈에게도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 기가 막힌 성적 경험을 어느 누가 해보고, 내가 아니면 그 누가 제공해주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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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콰이어에게 색승을 맡기고 다시 사무실로 올라온 나는 이수련, 신시아, 앨리스와 함께 색승에게서 캐낸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실 저 거북이 놈이 깊게 알고 있는 건 거의 없다고 봐야겠죠?”
미간을 찌푸린 신시아의 말.
“그렇죠. 아무에게나 박게 해준다는 말에 트라이포드로 들어간 것 같으니까요.”
“마지막 목표가 젠 오빠였다는 걸 듣고 진짜 찢어 죽일 뻔했네요. 가끔은 진짜 미운 오빠긴 해도 저딴 놈한테 당하는 꼴은 내가 못 봐요.”
“잘 참았어요.”
한편, 미래식량생산기지에서 가져온 데이터칩을 뒤적이던 이수련이 한마디 했다.
“그래도 소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니라.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의 윤곽을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으니 말이다.”
앨리스에게 스크린을 띄워달라고 부탁하는 이수련.
가운데 트라이포드라고 적힌 글자를 중심으로 마인드맵처럼 가지가 뻗어나간다.
가장 먼저 그려진 세 갈래의 줄기.
한쪽 줄기에 수연, 스펙터, 색승의 이름이 적혔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여러 줄기가 뻗어나갔다.
대부분은 물음표 표시가 되어 있었지만 리벨리온과 썬더 콜링 필드 연구소, 미래식량생산기지는 이름이 선명하게 적혀있었다.
“여기에 본좌가 확보한 데이터에서 추출한 자금 흐름을 그리면······.”
한반도, 일본 열도, 중국 대륙 위에 수많은 화살표가 오고 갔다.
큰 흐름을 보면 다른 곳에서 네오-서울을 향해 모여들고 있었다.
“아마 트라이포드의 다른 두 다리는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에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본좌의 추측이니라.”
심각한 표정의 신시아가 끄덕이며 이수련의 의견에 동조했다.
“이건 네오-서울이 오랫동안 가졌던 아시아 헤게모니에 대한 다른 권역들의 반발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예요. 이런 거대한 규모를 용케 숨겨왔네요. 아마 자기들이 트라이포드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걸 모르는 조직이나 사람들도 상당할 것 같아요.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조사 범위와 강도를 재조정해야겠어요.”
“본좌도 그리 생각하고 있느니라. 그리고.”
이수련이 손을 움직이자 트라이포드라고 적혀있던 곳이 지워지고 ‘그분?’이라는 글자가 나타났다.
“색승이 그분이라고 호칭한 이가 공공 집행본부 안에 있다는 것이 본좌의 생각이니라. 어쩌면 동시에 그가 무당이 말했던 브로커일 수도 있겠지.”
숨도 쉬지 않고 이어지는 이수련의 말.
“공공 집행본부는 또 하나의 시청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권력이 막강한데 네오-서울을 보호하기 위해 주어진 권력으로 다른 권역을 끌어들이는 것은 심각한 이적행위이자 즉결처형감이니라!”
과거 네오-서울의 수호자였던 만큼 이수련의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분노가 묻어났다.
“이거······.”
모두의 시선이 앨리스를 향해 돌아갔다.
“갑작스럽게 스케일이 너무 커졌어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사장님?”
능글맞다고 해도 좋을 만큼 늘 유들유들했던 앨리스가 이렇게나 긴장한 모습은 처음 본다.
신시아와 이수련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과 표정도 앨리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이렇게나 심각하고 어려울 일인가?
“제 일에 방해되고 거치적거리면 박살을 내줄 겁니다. 늘 그렇지 않았나요?”
잠깐의 침묵 후, ‘하긴, 언제는 사장님이 뭘 피해 가는 적이 있었나요. 피해 가려는 일도 끄집어서 가져오는 사람인데.’ 하는 앨리스의 말과 함께 가벼운 웃음이 터졌다.
나만 빼고.
이거 왜 이래, 나도 적게 일하고 많이 벌고 싶은 사람이야.
바쁜 건 다 상황이 그렇기 때문이야.
아무튼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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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뒤, 피곤함이 가득 묻은 목소리로 하르파고스 상무에게 통신이 왔다.
“보호구 시제품이 완성되었습니다. 와서 한 번 봐주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