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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캐여도 너보단 강함-112화 (113/258)

112.

112.

앨리스가 자신의 책상에 패인 홈에 패드를 올려놓고 버튼을 누르자 사무실 벽 한쪽에 스크린이 내려오면서 영상이 재생됐다.

깔끔한 양복과 마이크를 든 것으로 봐서 어렵지 않게 기자인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공작새 수인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자의 뒤로는 어제 내가 향했던 WSS의 연안 부두가 어렴풋이 보였다.

「속보입니다. 연안 부두에서 다수의 폭발을 비롯한 괴성이 들리고 있습니다.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WSS 시의회는 일대를 위험구역으로 지정한 후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특별관광지구, 속칭 암흑가라고 칭해지는 곳의 인물들도 보이고 있어서······.」

진지한 표정의 기자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는 가운데, 코 위에 솟은 거대한 뿔에 황금색 문신을 가득 그린 코뿔소 수인이 접근했다.

분명 고급 브랜드의 정장인 것 같지만 날티가 가득한 차림새, 언뜻 보이는 팔에도 가득한 문신까지.

누가 봐도 ‘생활’을 하는 부류였다.

기자가 말한 ‘암흑가의 인물’ 중 하나일 것이다.

코뿔소 수인이 카메라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와 기자에게 윽박질렀다.

「어이, 카메라 안 꺼?」

두툼한 손으로 가린 카메라 화면 너머로 코뿔소 수인의 위협적인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누구 허락받고 찍는 거야! 다른 놈들도 다 디바이스 꺼! 엄한 데 올렸다가는 쳐 죽인다!」

떨리고 있지만 그래도 강단이 느껴지는 기자의 앙칼진 목소리도 곧이어 들렸다.

「WBS입니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관계자라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왜 시민들의 알 권리를 막는 겁니까!」

「알 권리 좋아하네. 아직 알에 들어 있던 시절이 좋았구나 하고 추억하게 해줘? 새대가리?」

갑자기 들리지 않게 된 기자의 목소리.

그리고 그 뒤로 건물이 쓰러지고 폭발하는 것이 분명한 소리, 컨테이너가 부두 바닥을 긁으며 내는 강렬한 마찰음 등등 전혀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영상의 화룡점정은 화면이 검게 변하기 몇 초 전에 연속으로 들려온 메아리소리였다.

「섹스!!」

「세엑스으!!」

「세에에엑스으으으!!」

그것으로 영상은 끝이었다.

아무것도 재생되지 않아 온통 새카맣게 변한 스크린.

정적 가득한 사무실.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수련이었다.

“성은 감춰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니라. 오히려 욕망을 안으로 감추려다 심성이 비틀리는 자들이 많으니 저렇게 내보이는 자들이 오히려 더 솔직한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게 말하지만, 이수련의 눈과 귀는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

몹시도 당황한 것이 분명하다.

이어서 말을 꺼낸 것은 신시아.

“저렇게나 속으로 담아두고 계셨군요······.”

웬만해서는 달아오르지 않는 신시아의 뺨에 희미한 홍조가 올라있었다.

마지막은 앨리스였다.

“성문 분석 시스템을 가동하지 않고 들어도 저 목소리 사장님 같거든요? 대체 WSS까지 가서 왜 저러고 다니신 건데요.”

세 여자의 시선이 내게 쏟아진다.

영상도 제대로 못 보고 있던 내가 조그마하게 중얼거렸다.

“말했잖아······. 미친놈을 잡으려면 미친놈이 되어야 했다고. 결과는 좋았으니까 어떻게든 된 거 아닐까······?”

“저 연안 부두 정비 기간이 4개월이래요. 네오-서울에 사무실 등록된 해결사가 WSS까지 저 난리를 쳐 놓은 게 알려지면 기껏 새로 세운 사무실 장판이랑 도배를 고소장으로 해도 모자랄 거라고요!”

신시아와 이수련이 앨리스의 말에 놀란 건지 각자 한마디씩 했다.

“오메가 님이 나쁜 뜻으로 그런 건 아니니까 야스민 가와 협력 중인 로펌을 동원하면······.”

“퓨전 코퍼레이션에서 WSS 부두에 하역용으로 제공한 로봇이 많으니 조금 압박을 가하면 그 정도는······.”

하지만 앨리스는 단칼에 둘의 말을 끊어냈다.

“이 건에 관해서 언니들은 아무 말도 마세요. 사무실 일이에요.”

냉정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애초에 합법보다는 불법 쪽에 더 깊게 관련된 일이라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은 것도 있었고.

이건 나도 동의했다.

“맞아요. 저희 쪽에서 수습해야 할 문제죠.”

“조금 더 책임 소재를 정확히 하면 저희보다는 사장님이라고 한정해줬으면 하지만요.”

섬뜩한 앨리스의 말에 서운하다는 표시를 하기 위해 눈이나 한번 흘기려고 했는데, 잠깐 앨리스를 바라보니 눈빛만으로 나를 태워 죽일 기세다.

얼른 못 본 척했다.

“그쪽 사람들이 잘 처리해준다고 했어.”

진오와 샴록의 말이었다.

그 덕에 소셜 미디어에도 #WSS 섹스 머신, #출산율 증가 캠페인, #연안 부두에서 폭발적 교미 등등 충격적인 해시태그들이 잔뜩 올라오고 있지만, 실제 당시 주변의 영상은 공작새 기자와 코뿔소 깡패가 나오는 저거 하나뿐이다.

연안 부두의 시설이 오래되어서 선명한 CCTV가 없고, 드론 비행 금지 구역이라는 것도 영상이 안 나오는 것에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내 출동 비용도 저런 귀찮은 일을 떠맡아 주는 것과 연안 부두 재건 비용을 묻지 않는 걸로 덮었다.

고소장 더미에 깔릴 일은 없다는 소리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기억이 명확하지는 않아. 일종의 무아지경 상태라고.”

그 말에 이수련과 신시아가 눈을 빛냈다.

“기이할 정도로 강력한 낭군의 검술 원천이 그런 것이었나.”

“무아지경이라니 더더욱 욕망에 충실했던 것이 아닐까?”

숙덕거리며 뭔지 모를 의논을 이어가는 둘을 내버려 두고 다시 앨리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 일은 잘 마무리된 걸로 봐도 되는 건가요?”

잠시 망설이던 앨리스가 말을 덧붙였다.

“바이크 차고에 있는 ‘그 사람’도 포함해서요.”

전투 직후, 샴록에게 말해 무력화된 색승과 분리된 놈의 신체를 트레일러에 실어 이쪽으로 옮겨왔다.

네오-서울에서 악명이 높은 국제 범죄자이니만큼 공공 집행본부로 넘기면 굉장한 현상금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공공 집행본부로 넘겼던 스펙터의 탈출, 나중에야 우리에게 알렸지만 톈진 권역 미래식량기지를 습격해 거기서 나온 서류와 데이터를 분석 중인 이수련의 공공 집행본부를 믿지 말라는 경고 등등으로 인해 색승을 바로 넘기는 것은 보류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자체적으로 정보를 캐내야 하는 셈.

이 부분에 있어서 만큼은 신시아와 이수련에게 내막을 밝히고 도움을 요청했다.

신시아는 야스민 공의 지시를 받아 벡이 있던 연구소의 배후를 밝히는 데 주력하고 있고 이수련도 스펙터의 탈출과 공공 집행본부로 흘러 들어간 톈진 권역의 자금 흐름을 추적 중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와중에 내가 잡아 온 색승은 렙틸리비아 사태 당시 스펙터와 같이 움직인 것으로 추정되고 수연의 입김이 강하게 닿은 리벨리온을 움직이는 진오와 샴록의 앞에 나타났으니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다고 봐도 좋았다.

줄곧 소파에 앉아있던 내가 일어서며 여전히 머리를 맞대고 있는 신시아와 이수련에게 말했다.

“쉴 만큼 쉰 것 같으니 내려가죠.”

계속해서 색승을 심문할 시간이었다.

이수련이 생각만 해도 짜증이 난다는 듯이 미간을 오므렸다.

“당장이라도 본좌가 그놈의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느니라.”

“저라고 좋아서 살려뒀겠습니까.”

신시아도 거들었다.

“좀비로도 만들기 아까운 놈이에요. 일만 끝나면 가장 고통스럽고 참혹한 방법으로 죽여버리죠.”

흡혈귀 사령술사라서 그런지 신시아는 본인이 먼저 죽음을 입에 담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색승을 심문하며 거의 매시간 단위로 죽여버린다고 말하는 걸로 봐서는 그간 색승이 했던 짓들과 물건이 잘리고 결박된 상태로도 내뱉는 음담패설에 단단히 열이 받은 것 같았다.

이건 신시아가 젠의 동생이라는 이유도 컸다.

젠에게 패배하고 달아난 색승인만큼 그 열등감을 신시아를 향한 음담패설로 풀어내고 있던 것.

물론 그런 개짓거리를 할 때마다 부동액이 질질 흐르는 놈의 사타구니를 불로 지져주고 있었다.

외부에서 보이지 않게 유리창을 차단 모드로 돌려놓은 1층 차고에 들어와 불을 켰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신시아의 기계화 좀비와 이수련이 원격 조종 중이었던 로봇이다.

그 중간에 어레스트로 손발과 입이 막힌 색승이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퓨전 코프 사의 원격 조종 로봇을 이송할 때 쓰는 작은 박스가 보였다.

잘라버리긴 했지만, 혹시나 다른 기능이 있을 수도 있었기에 색승의 물건을 넣어놓았다.

슬슬 눈에 초점이 풀리는 색승의 어레스트를 입 부분만 해제하는 동안, 신시아는 포탈링을 통해 좀비로 만들어둔 연구소의 무당을 불러냈고 이수련은 바이저를 조작해 미래식량연구소에서 확보한 데이터를 바닥에 투사했다.

광전사 상태에서 휘두른 체인소드 덕분에 놈의 등갑은 멀쩡한 조각이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안에 있던 장치들도 이수련의 도움을 받아 모두 탈거한 상태.

“흐흐······2대2 플레이도 나쁘지 않······커헉.”

이 지경이 되도록 정신 못 차리고 헛소리하는 색승의 턱에 주먹을 꽂았다.

“다시 시작해보자고. 무당에게서 뽑아낸 기억, 가져온 데이터와 네 증언이 맞지 않으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본보기로 사타구니 부분을 얼려버렸다.

“이런 걸로 나를 어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으아아아악!”

발작하듯 벌벌 떠는 색승.

놈의 무릎 위에 올라간 내 손이 우악스럽게 움직였다.

[분근착골分筋錯骨 - 슬개골 뒤틀기]

신시아와 이수련이 듣지 못하게 색승에게로 몸을 숙인 뒤, 나지막하고 부드럽게 말해주었다.

“네가 몸을 그렇게 잘 쓴다며? 시간은 많고 기술도 많으니까 마음껏 즐겨보자고. 피학적인 성향을 잔뜩 개발해주지. 방향은 조금 다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네가 그렇게나 부르짖던 열락으로 향하는 거야. BOY♂”

고개도 돌리지 못한 채 내게로 향한 놈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아직 위층에 다른 점포들이 입점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조금은 시끄러워질 것 같다.

#

-색승이 행방불명이야.

홀로그램에 비치는 얼굴은 콧대 윗부분이 없었다.

미래식량생산기지가 갑자기 습격받은 탓에 추가적인 변형 벌레를 공급받지 못한 스펙터였다.

완전하지 못한 스펙터의 얼굴을 바라보는 수연이 입술을 꾹 다물고 있는 동안, 스펙터의 입술이 계속해서 움직였다.

-해결사 오메가가 WSS의 연안 부두에 나타났다고 하는 것 같은데 진위는 아직 확실하지 않아. 설마 둘의 교차점이 있는 건가?

“그건 네가 내게 물어볼 게 아니라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 지금 한반도에 있는 건 너잖아.”

-지금 내 꼴을 봐. 뭘 하게 생겼어? 네가 그쪽 일을 처리해야 벌레들을 새로 받을 거 아니야.

“······톈진 권역은 지금 엉망이야. 한동안 변형 벌레 생산은 힘들 수도 있겠어.”

스펙터가 거세게 항의하려 했지만, 수연이 더 빨랐다.

“나도 이런 뒤치다꺼리나 하려고 기껏 만들어놓은 위장 신분을 버린 건 아니니까 제발―.”

끊어지듯 잘라내는 수연의 말.

“닥, 쳐. 공장은 어떻게든 빠르게 돌려놓을 테니까. 네 벌레만 만들던 공장이 아니었잖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스펙터.

-연구소 건은 어떻게 됐지? ‘그분’께서 뭐라고 하셨는지가 궁금해. 그분과 직접 얘기를 나누는 건 너밖에 없잖아.

공공 집행본부에서 모종의 인물에게 도움을 받은 이후, 부쩍 그분에 관한 관심이 늘어난 스펙터다.

수연은 속이 뻔히 보이는 유도성 질문에 넘어가지 않았다.

“네가 신경 쓸 게 아니야. 그것 말고도 할 일이 많을 텐데? 색승의 생사 추적, 오메가의 사살, 리벨리온의 관리까지.”

-젠장. 다 네가 위험하다는 핑계로 일을 팽개친 것 때문이잖아. 산하 조직은 많으면서 쓸만한 놈들이 이렇게 없을 줄이야.

“조직이란 게 그렇지. 그래서 좀 괜찮아 보이는 놈들과 손잡으려고 바쁜 와중에도 내가 시간 내서 여기까지 오기도 했고.”

수연이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상해 권역과 타이베이 권역의 중간 즈음에 위치한 공해公海에서 그녀를 실은 배가 움직이고 있었다.

-잘 되려나? 우리랑은 방향이 다른 걸로 아는데.

“만남을 거절하진 않았으니, 얘기는 해 봐야지.”

기술상의 한계로 대화가 끊어지고 몇 분 뒤, 잔잔한 물 흐름에 이끌려 떠다니던 수연이 탄 배 옆으로 작은 그림자가 생기더니 차차 거대해졌다.

물 밖으로 드러난 것은 곳곳이 장갑으로 뒤덮인 살아 있는 고래였다.

수연마저 놀라는 가운데 고래의 숨구멍 근처의 해치가 열리면서 한 무리의 사람이 다가왔다.

-외부인에게 기함을 직접 보여주는 일은 흔치 않은데, 어떻게 일정이 맞았군요.

머리를 쪼개는 듯한 강렬한 사념파.

사람들이 자리를 비키고, 부양 휠체어에 탄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눈을 가린 두건, 가뭄을 견딘 나무처럼 비쩍 마른 채로 기괴하게 뒤틀린 팔다리, 그리고 이전에는 없던 상처가 있었다.

불에 늘어 붙고, 얼어서 괴사한 흔적이 있는 피부.

오메가의 작품이다.

늘 곁에 있던 류정을 잃고 잔뜩 날이 선 마데르노의 사념파가 수연에게 꽂힌다.

-브리가드, 아니 내게 볼 일이 있으시다던데.

머리를 휘젓는 것 같은 낯선 감각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수연이 용건을 꺼냈다.

“해결사 오메가를 죽이는 데 관심이 많을 것 같으셔서. 죽이기엔 영 아쉽지만······.”

마데르노가 수연의 말을 끊었다.

-아쉽지만 꼭 죽여야 할 사람이죠.

그렇지 않아도 매혹적인 수연의 눈매가 더욱더 휘어진다.

“얘기가 좀 통할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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