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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캐여도 너보단 강함-109화 (110/258)

109.

109.

‘색승에게 당했다.’

충격적인 한 마디였다.

색승이 어떤 놈이던가.

그자가 뿜어낸 연기에만 닿아도 섹스를 외치는 섹무새가 되어버리고, 생각하기도 싫은 뭉근한 백탁액에 맞으면 남자도 입덧하는 걸 직접 목격한 적 있었다.

그런 놈에게 ‘당했다’?

심지어 성별마저 바뀌어 있었다.

이 녀석들······색승에게 엉망진창으로······?

‘기쁨을 아는 몸’이 되어 버린 것인가?

혼란스러웠다.

술이 확 깨고 입맛이 사라졌다.

“표정을 보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군. 범해지지는 않았다.”

진오의 말.

그렇게 말하겠지.

누가 ‘나는 색승에게 범해졌다.’라고 말하고 다니겠냐고.

트라이포드······알고는 있었지만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무서운 곳이다.

이런 식으로 기강을 잡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샴록도 거들었다.

“정말입니다. 기혈을 뒤틀고 호르몬 체계를 조작해 이렇게 된 것뿐입니다. 그 이상의 일은 없었습니다.”

극구 부인하니 더 이상하다.

2차 가해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더 이상 따져 묻지는 않았다.

세상에는 덮고 넘어가야 하는 일도 많은 법이니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주춤하는 사이 샴록이 씁쓸하게 말했다.

“짐작하시겠지만 저희가 이런 꼴이 되었다는 건 색승에게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수적으로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샴록!”

그런 말은 뭐하러 하냐는 듯 진오가 성질을 냈지만 샴록은 꿋꿋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색승은 인간 내면의 금기를 긁어 올리는 것 같은 그 역겨운 능력들도 충격이었지만 처음 봤을 때 렙틸리비아의 수로에서 튀어나와 20명 가까이 되는 이들의 길을 막았었다.

본인의 힘에 대해 자신이 있지 않고는 절대 할 수 없는 짓.

그리고 패배하고 도망쳤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색승은 젠과의 일전을 치르기도 했다.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색승은 강하다.

하지만 놈을 놓친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놈의 그 거대한 세 번째 다리가 나를 향해 뻗어오는 공포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일종의 트라우마라고 할까.

트라우마 극복을 위해서라도 그 새끼는 내가 죽인다.

“한 가지만 묻지. 색승 그 자식······물건은 있었냐?”

줄곧 진지하던 샴록의 얼굴에 일순 당황이 스쳐 지나갔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윤곽으로 봐서는······있었습니다.”

혀를 차면서 말했다.

“붙였나. 그때 회수를 하게 놔뒀으면 안 됐는데.”

진오가 믿기 힘들다는 어투로 내게 되물었다.

“정말 네가 색승의 그걸 잘랐나?”

“그래. 다시 붙였다고 하니까 지금 와서는 별 의미 없는 일이긴 하지만.”

앙다문 진오의 입술이 가면 아래로 보였다.

열등감을 느끼는 건가?

하긴, 나는 계룡 권역에서 진오의 팔목도 잘랐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거신족 앞에서 거대 주먹을 보여줘서 기도 팍 눌렀지.

그런 내가 색승의 신체 일부를 베었다고 한다.

자신들이 둘이 합심해서 달려든 결과 치욕적이게도 성별이 바뀌고 말았는데 말이다.

처음 샴록의 습격에서 하르파고스를 지킬 때, 나는 괴수들의 공세에서 몸을 건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대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하면 괴수를 모조리 죽일 자신이 있다.

어디서부터 이런 차이가 난 것일까.

주위 환경과 인맥?

타고난 재능?

수십 가지도 넘는 스킬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나라는 인간의 사기성?

앞서 꼽은 조건들 모두가 조금씩 영향을 미치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감히 하나만 꼽자면 선택의 차이 아니었을까.

무장 투쟁 노선을 택한 이들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한반도 내에서는 잠잠하지만, 중화권이나 유럽권으로 가면 권역 간 경계에서 국소전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판이고, 브리가드처럼 대놓고 탐사단을 덮치는 집단도 있는데 무장 투쟁이 무슨 큰 흠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저런 곳에 취직하려고 마음먹으면 스펙 한 줄이 늘어나는 정도 아닐까.

하지만 이들은 편하고 쉬운 대신 어둡고 음습한 제약에 매여버렸다.

나는 나를 믿고 맨몸으로 세상에 부딪혔다.

스킬을 사용하지 못했더라면, 처음부터 앨리스가 옆에서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시간은 더 오래 걸렸을 것이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훨씬 더 힘든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병원에서 깨어난 시점으로 돌아가도 똑같이 행동하겠다.

남이 깔아준 쉽고 편한 길 대신 내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어렵고 힘든 길을 택하겠다.

어찌 됐든 이것도 나의 삶이다.

내 삶에 누군가 불쑥 들어와서 이래라저래라 훈수 두는 건 못 참는다.

내가 키우던 캐릭터를 잡캐라고 놀리는 것 다음으로 못 참는다.

그렇기에 자신들을 마치 피해자처럼 얘기하는 이들의 태도는 나를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색승 얘기는 이쯤 하자고. 나이누안과 셀티스의 죽음, 그리고 학교를 습격했던 놈들에 대한 게 알고 싶다는 거 아니야. 그리고 그들 뒤에 수연이 있었는지까지.”

“맞습니다.”

아마도 원래는 없었을 샴록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크게 움직였다.

시선을 가면 너머로 보이는 진오의 눈동자로 옮겼다.

물질적인 증거는 없다.

대림 교구 성당 지하에 있던 기계화 좀비 생산 공장은 다 불타고 폐쇄되었으며 주동자였던 파라터스는 죽어버렸으니까.

하지만 그 안에서 감금당했던 헤지르 대주교가 있다.

테오릭 경이나 야스민 공 이상으로 내 편의를 봐주는 분이라 말 한마디면 본인의 명예를 걸고 증언을 해주실 분이다.

신체 대부분을 기계로 교체했으니 어쩌면 그때의 기억이 저장되어 있거나 할 수도 있다.

게다가 진오와 샴록이라면 사건의 당사자이니 진상을 알고 싶다는 좋은 명분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이들은 그저 입장이 난처해지자 뒤늦게 발을 빼고 싶어 하는 것 이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자기들의 무장 투쟁이 나이누안과 셀티스의 죽음을 기리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사실은 둘의 죽음을 자신들 편한 대로 이용한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때 더 자세히 알아보려고 했으면 알아볼 수도 있는 문제였을 것이다.

하지만 진오는 이때다 싶어 수연의 접근을 받아들였다.

샴록은 몇 년 동안이나 셀티스의 신분으로 살다가 진오에게 합류했고.

내 앞에 앉아있는 것은 동지의 복수, 차별 철폐, 부의 재분배 같은 큰 명분을 앞에 세우고 자신들의 뜻을 기워 붙인 비겁자였다.

달콤한 유혹과 거센 외압이 번갈아 몰아쳐도 꺾이지 않는 심지, 그것이 신념이다.

샴록과 진오에게 그 신념이 있는 걸까?

있지 않기 때문에 지금처럼 이용이나 당하는 게 아닐까?

천천히 입을 열어 한 글자 한 글자 눌러 담은 나의 언어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폐쇄된 지하철을 이용해 예공방 생산기지를 테러 했을 때, 외골격을 입고 있던 경비원 한 명의 팔이 압착됐다. 다른 외골격이 구겨진 채로 팔 위에 떨어졌다고 하더군.”

가게 안쪽 주방에서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만 요란했다.

“다행스럽게도 목숨은 건졌지만, 그 경비원은 앞으로 원하지도 않는 의수를 달고 살아가야 한다. 증액된 보험료와 의수의 할부 금액은 덤이지. 네 발길질에 척수 신경이 끊어진 자도 있고 쓰러진 바로 위로 외골격이 떨어져 구호 조치를 할 새도 없이 즉사한 인원도 있다.”

다시 샴록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하르파고스 상무 앞에서 나와 마주치기 전에 네 괴수가 물어 죽인 경비원과 연구원의 수를 기억하나? 그 경비원과 연구원이 나이누안과 셀티스를 죽여서 그렇게 해야 했나?”

토해내기 시작한 말은 거센 물줄기가 되어 멈추지 않았다.

“대림 렙틸리비아를 점령하기 위해 하수도를 통해 올라온 리벨리온 놈들, 대부분은 잡혀 들어가 최소 수십 년 형을 살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너희에게 말해주면, 앞서 벌어졌던 일이 모두 없던 일이 되나?”

“그건······.”

“죽었던 자가 살아 돌아오고! 허리 밑으로는 움직이지 못하던 사람이 벌떡 일어서서 뛰어다니고! 너희들이 개과천선했다는 이유로 특별 사면이라도 내려지냐고!”

여기까지 와서는 머리가 뜨거워져서 나도 멈출 수 없었다.

“너희는 그냥 나이누안과 셀티스의 죽음을 편한 대로 이용해놓고 난처해지자 이럴 줄 몰랐다며 합리화하고 있는 것뿐이잖아!”

“네가 뭘 알아!”

쾅-

벌떡 일어난 진오가 한 손으로 테이블을 엎었다.

뚝배기가 담고 있던 내용물을 바닥에 흩뿌렸다.

시선을 진오와 샴록의 손목으로 옮겼다.

순식간에 만들어지는 얼음 팔찌.

“이거······!”

“나이누안의 영체를 없앴을 때, 과거를 봤다. 아이들이 늘 달라붙어 있어 옷 소매는 늘어지고, 부족한 시간 때문에 얼굴에는 피곤이 가득하더군. 그렇지만 눈빛은 달랐다.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 그 희망을 스스로의 손으로 만들어간다는 자부심이 보였지.”

원래 테이블이 있었던 공간, 진오와 샴록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암흑가의 여제? 전례가 없던 해적? 그게 다 무슨 소용이지? 다 죽은 눈을 하고, 정체 모를 놈들에게 이용당하고 있을 뿐인데?”

마무리를 지을 때였다.

“사건의 진상을 알려주면 수연의 밑에서 정보를 넘기겠다? 결국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중간에서 간이나 보면서 입맛에 맞는 달콤한 과실만 취하겠다는 얘기랑 뭐가 다르지? 너희가 하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 그러다 그들에게 들키면? 이번에는 나를 팔 건가?”

둘은 변명조차 하지 못한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샴록의 어깨가 옅게 떨려왔다.

“어떤 걸 가져올지 너희들도 모르는 그 정보. 내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종자들이 가져올 정보의 신뢰성이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이 자리에서 우리 사이의 관계를 개선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어. 적의 적이니 이해관계는 같이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이누안을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으로서 그의 친구에 대한 도리를 다해야겠다고 생각하겠다고 나온 거지.”

쐐기를 박았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고, 행동하지 않는 자에게 구원은 찾아오지 않는다. 너희 같은 것들을 친구, 동지라고 믿었던 나이누안이 불쌍해.”

그대로 뒤돌아 나왔다.

거래도 급이 맞는 상대와 해야 거래다.

솔직히 말해 현재 트라이포드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저들이 알고 있는 것이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나 몰라서 접촉한 것인데 시간만 버린 셈이 됐다.

에어로 택시를 잡아타고 사무실로 향하면서 앨리스에게 통신을 연결했다.

-일은 잘 마치셨어요?

“파투 났어. 이 시간에 잠 더 자고 국밥이나 한 그릇 든든하게 먹는 게 훨씬 나았을 거야.”

-지도상으로는 그 건물에 국밥집 있던데요?

“입맛만 버렸어. 병신같이 이용이나 당하고 성별 바뀐 놈들 앞에서 밥이 넘어가겠냐고.”

#

다음 날, 나는 바이크를 바로 건물 지하로 넣기 위해 렙틸리비안 로드를 이용해 건물에 접근 중이었다.

페룬 마탑에서 시도한 유물 광석의 섬유 제련 과정이 순조로워 오는 내내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건물 지하로 향하는 입구가 저 멀리 보일 무렵, 아래의 수로에서 나를 향해 뭔가가 폴짝 뛰어올랐다.

먹물로 이루어진 물고기.

“또냐.”

까마귀 난입 후에 앨리스에게 귀에 인이 박이도록 타박을 들었던지라 그대로 물고기를 발로 차버렸다.

하지만 내 발에 차이면서도 물고기는 작은 쪽지를 뱉어냈고, 나를 향해 날아오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낚아챘다.

읽어나 보고 버리자는 생각으로 편 쪽지에는 내 말을 듣고 고민하던 진오가 암흑가의 술집에서 죽치고 있던 색승에게 달려들어 다시 전투가 벌어졌다고 쓰여 있었다.

“진오 혼자는 색승의 상대가 되지 않았고, 열 받은 색승이 진오를 반쯤 죽여 감금하고······도움이 필요합니다······.”

잠깐 고민하다 바이크 방향을 돌렸다.

비로소 자신의 길을 걸으려는 자의 몸부림이다.

말을 꺼낸 내가 책임은 못 져도 도움은 줘야지.

바이크 스로틀을 감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앨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무실로 오시는 거 아니었어요? 어디 가세요?

“내가 생각을 잘못했어. 정보를 얻으려면 아랫놈이 캐오는 걸 기다릴 게 아니라 윗놈을 잡아다가 정보를 뱉게 하면 되는 거거든.”

-네? 갑자기 무슨 소리 하세요. 어디 가시냐고요.

“색마 거북이 사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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