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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해주러 오셨는데 청소만 하다가 보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영 그렇네요.”
“신경 쓰지 마.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지. 리모델링 하자마자 액땜했으니 앞으로 번창할 일만 남았네. 미리 축하해.”
“이미 저희 사무실보다 오메가 형님네 사무실이 훨씬 더 번창하고 있지 않나요.”
괜히 쓸데없이 한 마디를 더한 자코의 머리통에 키클롭스 아재의 꿀밤이 작렬했다.
저쪽 사무실은 수습 몇 명을 더 받아서 자코도 막내가 아니게 됐다는데, 그래도 얼마 전까지 막내였던 녀석과 사장이 저렇게 격의 없이 행동할 정도면 분위기는 좋은 사무실인가보다.
한편, 먹물이 하필이면 얼굴을 덮쳐서 몇 번을 씻었는데도 얼굴에 얼룩덜룩한 자국을 남기고 있는 정현은 내 책상 위에 올려진 종이에 흥미를 가지는 눈치였다.
지금은 터져버린 까마귀의 발에 묶여 있던 종이였다.
둘둘 말린 종이 위에 밀랍으로 봉인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저건 뭘까요?”
앨리스가 종이를 째려보며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했다.
“별의별 놈들이 장난 전화하길래 큰맘 먹고 통신용 보안 모듈 사서 좀 잠잠해지나 싶었더니 이런 식으로 투서를 보내? 이건 저에 대한 도전이나 다름없어요. 저거 열어보지 말고 버려요, 사장님.”
살기 넘치는 앨리스의 말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앨리스의 지휘를 받으며 사무실 청소를 하던 우리 넷은 괜히 시선을 돌리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결국 숨이 막히는 분위기를 참다못한 자코와 정현이 키클롭스 아재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고, 키클롭스 아재는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일어났다.
“바쁠 텐데 우리가 찾아와서 방해하는 거 아닌지 몰라.”
청소할 때만 잠깐 부산스러웠지 어딜 봐서 바쁘냐고.
나만 해도 오늘 내내 안마의자 위에서 생활했는데.
이 사람들 분노한 앨리스에게서 나를 버려두고 자기들끼리만 빠져나갈 셈이다.
“가시게요? 저도 같이······.”
일어서는 셋을 따라 일어서려고 했지만 주욱 늘어난 키클롭스 아재의 팔이 내 어깨를 눌러 앉혔다.
“아니야, 아니야. 나오지 마. 아무리 사무실이 잘 굴러간다고 해도 사장이 자리 비우고 그러는 거 아니야.”
당신은 허구한 날 사무실에 없잖아!
어디 갔냐고 물어보면 영업한답시고 주위 술집에 있다더만!
“아니, 제 자리로 돌아가려고······.”
내 말에 정현과 자코도 얼른 한마디씩을 덧붙였다.
“그래요, 형님. 굳이 나오지 마세요. 저희 사무실도 별로 안 멀잖아요.”
“종종 놀러 오겠슴다! 앨리스도 나중에 보자!”
“우리 간다, 오 사장!”
여전히 팔을 늘려 한 손으로는 내 어깨를 누른 채로, 다른 한 손으로는 손목을 꺾어 보이는 제스처를 취하는 키클롭스 아재.
“나중에 시간 되면 한잔하자고. 알겠지? 때 되면 연락할게!”
그 ‘때’라는 게 지금 아닐까요?
나가서 연락해 줄 거죠?
결국 사무실에는 여전히 심기가 불편한 앨리스와 나만 남았다.
키클롭스 아재, 정현, 자코 셋 중 아무도 내게 연락을 주지 않았다.
그래, 다들 나보다는 앨리스가 무섭다 이거지?
숨 막혀 죽어버릴 것 같다.
눈앞이 핑핑 돌고 시야가 좁아지는 것만 같다.
이런 게 공황인가?
무너지는 유적지의 지하 공동에서도 오지 않았던 공황을 이렇게 느낀다고?
[명경지수]로 해결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선 공황이다.
장담한다.
천천히 일어나서 문제의 시발점이었던 창문을 조심히 닫고, 사무실 옆에 만들어놓은 작은 탕비실로 가서 제로 오일과 오일 샌드를 가져다가 앨리스 옆에 내려놓았다.
여전히 눈가에는 힘을 잔뜩 주고 있지만, 입가를 씰룩이는 앨리스의 모습을 보자 공황 증세가 사라지는 것 같다.
어쩌면 이 공황 역시 스스로의 압박감이 만들어낸 족쇄였던 걸까?
앨리스가 오일 샌드의 봉투를 뜯자 사무실 한쪽의 공기청정기가 돌아가며 기름 냄새를 말끔히 없앴다.
저거나 쓸 걸 왜 괜히 햇볕 좀 받으려고 창문을 열었을까 과거의 나란 존재여.
사무실 어딘가에 남은 얼룩이 있을까 해서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책상 위로 돌아왔다.
밀랍 봉인이 찍힌 종이.
고지식한 엘프들이나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지극히 아날로그적이긴 하지만 때로는 아날로그가 디지털 이상의 활용도를 지닐 때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먹물로 이루어진 까마귀, 아무래도 눈에 익은 방식이다.
살짝 고개를 들어 앨리스 쪽을 보자 아까의 분노한 표정은 싹 지우고 즐겁게 오일 샌드를 먹는 모습이 보였다.
‘버리라고는 했지만······.’
조심스럽게 힘을 주어 밀랍 봉인을 부쉈다.
혹시나 트랩이나 마법 같은 추가적인 조치가 되어 있을까 봐 긴장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런 것 없이 스르르 풀리는 종이에는 정갈한 글씨가 가득했다.
쭈욱 읽어 내려가던 내 시선이 마지막 마침표에 닿았다.
고개를 들어 앨리스를 불렀다.
“앨리스!”
종종걸음으로 내 책상에 다가온 앨리스가 말했다.
“책상 오른쪽 위에 있는 이 버튼! 이거 누르고 말씀하시면 사장님 음성이 저한테 바로 온다고 했잖아요. 귀찮으시면 음성 명령어를 지정해도 되고요.”
“적응 기간이라고 생각해 줘. 인간은 안드로이드랑 달라서 시간이 필요한 법이야.”
“······그래요. 그건 맞는 말이네요.”
그러다 봉인이 뜯어진 종이가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을 보고는 바로 도끼눈을 뜬다.
“버리라니까요! 이런 비공식 루트를 하나씩 허용하다 보면 일 처리 방식이 엉망 되는 건 순식간이에요! 비싼 돈 들여서 보안 모듈을 왜 설치했는데요!”
그 비싼 돈이 전부 루트 돈이라는 건 절대 말 안 하는 것 봐.
“알지. 다음부터는 무조건 다 버릴게. 근데 이거 한 번 봐.”
홱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재빠르게 종이를 채간 앨리스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는 종이를 버리지 않고 다시 내 앞으로 밀어놓는 앨리스였다.
“의뢰라고 하기도 그렇네요. 거의 도움 요청이잖아요.”
“내 생각도 그래.”
“어떻게 하시려고요?”
종이를 보낸 사람은 역시나 샴록이었다.
먹물로 이루어진 소환수를 여럿 부리는 엘프다.
종이에 적힌 내용은 나를 만나보고 싶다는 것, 그리고 진오에게 했다는 말에 대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겠냐는 것.
자신들에게 도움을 준다면 지금은 잠적해 있는 수연의 추적에 힘을 싣겠다는 말과 수연이 속한 것으로 추정되는 트라이포드라는 조직의 정보를 내부에서 빼내겠다는 말도 함께였다.
“트라이포드라······야스민 공과 스냅샷에게 알려주면 조사에 가속도가 붙겠어.”
“이게 함정이 아니라는 전제가 있다면요.”
앨리스가 나를 향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우리 사무실이 하는 일이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든다고 해도 샴록은 엄연한 범죄자예요.”
“이 일에 착수하면 다른 사람들의 조력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거네.”
“아무래도 그렇겠죠. 도움을 준다고 해도 우리가 나서서 말려야 하는 게 맞고요.”
나와 앨리스의 시선이 모두 종이에 닿았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수연의 잠적, 암흑가에서 나타난 색승, 사라진 스펙터까지. 이놈들에 대해 내가 아는 게 너무 없어. 지금까지는 요행과 임기응변으로 맞섰지만, 더 깊게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트라이포드라고 했나? 그 안에 누가 더 있는지, 이들이 원하는 건 뭔지.”
종이에 적혀있는 글자는 분명 가지런했지만, 어딘가 급한 흔적이 있었다.
“샴록도 수연에게서 벗어나려 하는 것 같아.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말도 있잖아? 친하게 지내기는 힘들겠지만 한 번 만나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내가 인연에 매이는 타입은 아니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나이누안의 능력을 이어받기도 했잖아. 한 번 정도는 말을 들어줄 수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해.”
후- 하는 한숨을 길게 뽑아낸 앨리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가에 옅게 미소를 지었다.
“돈 안 되고 피곤해 보이는 일만 골라잡는 것도 사장님 재주인 거 알죠?”
나도 마주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굶냐? 다 가지진 못해도 부족하지는 않잖아.”
“그래서 더 이상 뭐라고 못하는 거예요.”
앨리스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뭔가를 조작하자 내 책상에서 화면 하나가 떠올랐다.
스케줄이 적혀있는 캘린더였다.
책상 오른쪽에서 앨리스 목소리가 들렸다.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만났으면 한다고 적혀있던데, 오늘은 사무실 다시 연 첫날이니까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힘들 것 같고. 내일 식사 일정을 취소······.”
“아니! 그건 취소 안 해.”
청람의 음식은 먹고 돌아와서도 며칠 동안이나 계속해서 생각날 정도였다.
그건 포기 못 한다.
“도움을 요청한 쪽은 그쪽이지 내가 아니잖아. 급한 쪽은 내가 아니니까 내일 식사 자리는 포기 못 해.”
잠깐의 텀을 두고, 앨리스의 목소리가 다시 전해진다.
“사장님을 보고 있으면 기준을 전혀 모르겠어요. 대부분은 비이성적인 것 같으면서도 이성적인 것 같고, 또 어느 때는 이성적인가 하다가도 비이성적이란 말이죠. 인간이라서 그런 걸까요? 퓨어라서?”
이 질문에 답을 확실히 내려줄 수 있다.
“아니, 종족은 관련 없어. 그건 그냥 나라서 그런 거야.”
“아.”
이해했다는 듯, 끊어지는 앨리스의 목소리.
그래, 이 정도 같이 일했으면 서로서로 통할 때가 됐지.
팟-
눈앞에 떠 있던 캘린더가 사라지고 다른 화면이 떴다.
양복을 입은 사람이 강의하는 영상.
영상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감과 자만심을 구분해야 합니다.]
깔깔거리면서 신나게 웃는 앨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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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뒤, 나는 에어로 택시를 불러 인천 권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원래 계획으로는 바이크를 끌고 갈 예정이었지만, 어제 있던 식사 자리에서 테오릭 경과 하르파고스 상무의 강권을 이기지 못해 술을 들이부은 결과 아직 숙취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숙취해소] 스킬은 왜 없는 거지.
[자연 회복] 덕에 몸상태는 나쁘지 않은데 정신적인 피로인가.
나, 테오릭 경, 하르파고스 상무가 연신 잔을 부딪힐 동안 하뮬 교수는 진작에 술에 떡이 돼서 방구석에 처박혀 침을 질질 흘리며 자다깨다를 반복하고 있었더랬다.
청람에서 파한 자리가 하뮬 교수의 자택으로, 페룬 마탑에 있는 테오릭 경의 집무실로 이어진 건 정말 미쳤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마도공학 유물로 만들 보호구에 대한 설명을 몇 번이고 하긴 했는데 나부터가 술에 거나하게 취해있어서 설명은 제대로 한 건지, 그 양반들이 제대로 알아먹긴 한 건지 기억이 매우 모호했다.
테오릭 경과 하르파고스 상무 둘 다 내 설명을 듣고 엄청난 게 나올 거라고 서로 잔을 부딪쳐가며 신나게 떠들던 것도 같으니 맨정신에 설명을 다시 잘하면 괜찮은 물건이 나올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울렁이는 속을 간신히 다스리며 인천 권역의 서쪽 끝에 있는 암흑가에 도착했다.
내가 도착한 시간이 낮이라 그런건지 암흑가라는 명칭과는 달리 굉장히 밝은 분위기였다.
“여기가 아시아 최대의 환락가란 말이지······.”
인천 권역의 암흑가와 한신나 권역의 난바難波 가운데 어느 곳이 더 돈이 많이 도느냐를 따지면 난바를 꼽겠지만 넓이와 규모만 봤을 때는 암흑가가 더 크다나.
별로 궁금하지는 않았지만 서포팅 모드의 귀걸이에서 흘러나오는 앨리스의 음성이 알려주는 정보다.
네오-서울과 WSS 간에는 상호 통신 교류 조약이 맺어져 있어서 안드로이드의 통신 모듈 교체 없이도 통신할 수 있다고 한다.
미식거리는 속을 안고 앨리스의 위키피디아 낭독을 듣고 있자니 조약이 원망스러울 지경.
-지금 계신 곳에서 우측에 있는 건물로 들어가시면 될 것 같아요. 그쪽에서 지정한 장소예요.
고개를 돌리자 국밥집이다.
이런 비밀스럽고 은밀한 모임은 국밥집에서 하는 게 딱 좋지. 뭘 좀 아네.
허름한 내부 인테리어로 보아 배양육 국밥 같긴 한데, 일단 뭐라도 먹어서 속을 달래기 위해 특으로 주문했다.
국밥이 나오기 전, 어이없어하는 목소리와 함께 등장한 두 명이 내 앞에 앉았다.
“엄연히 제 영역인 걸 알면서도 태연하게 밥이나 시킬 줄이야. 대담한 건지, 속이 없는 건지 모르겠군요.”
피부에 괴수 문신이 여럿 보이는 엘프와 예전에 한 번 봤던 가면을 쓴 거신족.
샴록과 진오다.
자리를 주도하는 것은 거의 샴록이었다.
트라이포드라는 조직의 존재, 그들에게 휘둘리는 자신들, 리벨리온의 방향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계속해서 흘러갔다.
나이누안과 셀티스, 학교 습격, 내 목숨을 원하는 트라이포드 등등.
어느새 앞에 놓인 국밥에서 펄펄 솟던 뜨거운 김도 사라질 무렵이었다.
제법 긴 시간이었다.
샴록의 태도는 줄곧 정중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면 우리는 이 길을 계속 걸을 이유가 없습니다. 알고 계신 것이 있다면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남아있는 술기운 때문에 바짝 마른 입술을 뗐다.
“잠깐.”
숟가락을 들어 국밥의 국물을 몇 번 떠먹었다.
훌륭하다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나쁘다고 하기도 그런, 적당한 맛이었다.
숟가락을 내려놨다.
“아직 술이 덜 깼나. 헛것이 보이네.”
다시 샴록과 진오를 바라봤다.
하지만 둘의 모습은 처음 등장했던 그대로였다.
내 기억에 분명 샴록은 여리여리한 엘프 여성이었고, 진오는 가면 아래로 보이는 얼굴에서 남성이라는 것을 추측하기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샴록은 턱에 수염이 거뭇거뭇하게 자라있고 팔에 그려진 문신 사이사이로 근육이 도드라졌다.
심지어 목소리 역시 중후했다.
진오는 가면 아래의 턱이 아주 갸름했다.
옷태도 맵시있게 떨어졌다.
“안 물어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물어보련다. 왜들 그러고 다니는 건데?”
여태껏 한마디도 하지 않던 진오의 하관이 움직였다.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것 같다고 하던가, 꾀꼬리가 지저귄다고 하던가, 아주 듣기 좋고 청명한 여성의 목소리가 조곤조곤 흘러나왔다.
“색승에게 당했다.”
작가의 말
성전환 장르 아닙니다.
히로인 후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