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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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 씨 사이드, 흔히들 WSS로 쓰거나 부르는 인천 권역의 여러 지구 중에서도 가장 발달 된 곳을 꼽으라고 하면 대부분의 권역 시민들은 송도국제지구를 꼽았다.
네오-서울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배상금을 갚느라 권역 인프라 유지 보수에 신경을 쓰지 못해 WSS는 빠른 속도로 슬럼화되었다.
이대로는 네오-서울에 흡수당한다는 위기감이 인천 권역의 지도부에 퍼졌고, 그들은 극한의 선택과 집중을 했다.
일단 피해가 가장 적고, 살릴 여지가 있는 지구에 집중 투자를 하기로 한 것.
격전지였던 부천 지구와 부평 지구는 재건에 얼마나 걸릴지 가늠조차 힘든 상황, 지도부는 인천 권역의 남서쪽과 북서쪽에 있어 피해가 적었던 곳들로 눈을 돌렸다.
송도국제지구와 강화산업지구였다.
두 지구를 각각 금융, 산업의 거점으로 삼는다는 전략.
대규모 간척을 시작으로 삽을 뜬 지 수십 년, 인천 권역은 한반도 내에서 네오-서울, PUK(부울경 권역), 탐라(제주 권역)에 이어 4번째 규모를 가진 권역으로 발돋움하는 데 성공했다.
세계로 따져도 100위 내, 아시아로 한정하면 30위 안쪽에 드니 전쟁 직후 곧 네오-서울로 편입될 것으로 예측했던 전문가들조차 놀란 눈부신 결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초고층 건물이 가득한 송도국제지구는 그런 가운데 피어난 노력과 근성의 결과물이었다.
다 같은 권역의 시민들이면서도 출생 지구에 대한 기묘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WSS 시민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송도국제지구는 앞으로 더욱 발전할 여지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그런 시민 중에는 송도국제지구가 강남 에어리어를 넘어설 것이라는 말을 하는 이도 있었다.
아직 그런 날이 오기까지는 요원해 보였지만, 어찌 됐든 그런 자부심과 긍지가 전쟁에 패배했던 인천 권역을 여기까지 끌어온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빛이 강할수록 어둠이 깊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송도와 강화를 밝혔던 낮이 지나가고 밤이 오면, 인천 권역의 다른 지구들이 기지개를 켰다.
네오-서울이 대림 에어리어로 할렘가를 몰아놓은 형태라면 인천 권역은 모든 역량을 송도와 강화로 집중시켜 다른 곳이 할렘이 되어버린 상황.
그 어두움의 깊이는 대림 에어리어만 못하지만, 넓이로 봤을 때는 견줄 다른 권역이 없었다.
특히 송도지구와 강화지구에서 직접 이어지는 지구들은 엄청난 규모의 환락가가 발달했는데, 두 지구에서 흐르는 돈을 빨아먹기 위함이었다.
하룻밤의 즐거움을 위해 이곳을 찾은 이들은 깊게 알지 못했지만, 이 환락가는 하루도 끊이지 않고 돈과 피가 함께 흘렀다.
WSS의 국제지구와 산업지구에서 떨어지는 부산물을 먹기 위해 기어들어 온 조직, 네오-서울로의 진출을 노리는 조직, 다른 곳에서 쫓겨나 새로운 기반을 잡으려는 조직 등등
이전투구, 아수라장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곳이 이곳이었다.
송도에서 강화까지 해안을 따라 길게 늘어져 있던 이 환락 벨트를 누군가가 암흑가라 칭하기 시작했고, 인천 권역 시민들에게 있어서 암흑가라는 명칭은 환락 벨트를 일컫는 대명사가 되었다.
악명이 어찌나 자자한지 타 권역의 사람들도 WSS암흑가 하면 며칠 놀기에는 그만한 곳이 없지만, 그 며칠 동안 어느 골목에 구겨진 채로 버려진 조직원들을 수도 없이 볼 수 있는 곳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수많은 조직이 이합집산을 반복하던 WSS암흑가에 어느 엘프가 부하들과 함께 나타났다.
그녀의 부하들은 예공방의 마크가 박힌 최신 무기들을 사용해 암흑가를 휩쓸었다.
몸에 그려진 문신을 소환하는 엘프 본인의 무력도 절대 약하지 않았다.
밤마다 먹으로 그려진 괴수들이 환락가의 옥상을 뛰어다녔고, 괴수들의 아가리에는 암흑가에서 이름을 좀 날린다는 작자들의 목이 물려 있었다.
샴록에게 WSS 암흑가의 여제라는 말이 따라붙은 것은 살아남은 조직의 보스들이 자진해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아래로 들어가기를 원한 것이 알려진 직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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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가는 밤에도 낮처럼 환하지만 그렇다고 낮에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곳 역시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다.
송도국제지구에서 조금 떨어진, 암흑가의 끄트머리.
그다지 높지 않은 담벼락이 세워진 학교의 운동장에서는 다양한 종족의 아이들이 술래잡기라도 하는지 뛰어놀고 있었다.
그리고 근처 건물 3층에 위치한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 놓고 낮 시간의 평화로움을 눈에 담는 엘프가 있었다.
샴록이었다.
“저런 시절이 있었지.”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
고개를 돌려보니 얼굴을 반절 정도 가린 가면을 쓴 남자가 있었다.
“왔군요, 진오.”
자연스레 진오의 손을 향해 시선을 옮기는 샴록.
계룡 권역에서 오메가에게 잘렸던 손이다.
다행히도 손목을 회수한 덕에 이어붙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참에 여러 강화 장치를 달 수 있으니 차라리 잘됐다는 진오의 목소리만 들었을 뿐, 실제로 본 것은 샴록도 처음이었다.
그 정도로 서로는 바빴다.
그들을 따르는 반사회적 무장 조직인 리벨리온의 인원을 나눠 샴록은 WSS의 암흑가를, 진오는 서남해 권역의 섬들을 점령하러 떠났기 때문.
둘은 각자에게 주어진 목표를 훌륭하게 달성했다.
활동 영역을 넓히고 인력 수급을 원활하게 하도록 계룡 권역에 진출했다가 오메가를 만나 일을 망치고 황급히 도망친 것만 아니라면 완벽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손은 멀쩡하다는 듯 몇 번 쥐었다 폈다 해서 샴록에게 보여준 진오가 자연스레 샴록의 반대편에 있는 의자를 빼서 앉았다.
“1인 1주문인가?”
진오의 말에 샴록은 웃고 말았다.
진오, 샴록, 나이누안, 셀티스 넷이 대림 에어리어에서 폐교를 고칠 때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았다.
1인 1주문도 간당간당해서 카페는 가지도 못하고 학교를 짓던 터 위에 아무렇게나 자리를 잡고 몇 시간 동안이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떠들었던 일이 있었다.
가끔 샴록이 카페라도 가자고 하면 나이누안은 맑은 목소리로 진오의 덩치라면 1주문 정도가 아니라 3주문 정도는 해야 할 거라고 거절했다.
셀티스 역시 염동력으로 샴록의 몸을 돌려놓곤 했고.
한때는 떠올리기도 고통스러운 기억이었지만, 이제 샴록은 서글프지 않았다.
그렇게 말랑말랑한 시절은 지났다.
입에 댄 커피에서 그녀가 죽여온 이들의 피 냄새가 번져오는 것 같았다.
“그냥 앉아 있어요. 끄트머리긴 해도 이곳 역시 암흑가니까 1인 1주문 안 했다고 내게 뭐라고 할 사람은 없어요.”
“아무렴. 여제신데.”
자신을 놀리려는 진오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샴록이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할렘가 아이들의 임시 선생이 되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던 엘프는 인천 권역 양지의 인물들도 쉽사리 무시할 수 없는 거물이 되어 있었고, 커다란 손으로 남은 건축 자재들을 이리저리 짜 맞춰 의자와 책상을 만들던 거신족은 서남해 권역의 섬을 틀어쥔 해적이 되었다.
하지만 한반도의 여러 권역에서 수배령까지 내려진 진오가 위험을 무릅쓰고 인천 권역까지 와서 샴록을 만나고자 한 것은 회포나 풀고 달라진 모습을 보기 위함이 아니었다.
“알아봤나?”
진오는 계룡 권역에서 오메가에게 들은 말을 신경 쓰고 있었다.
-널 죽여서 좀비로 만들고 싶어 하는 놈들이 학교를 습격한 거다! 너는 살았지만 나이누안과 셀티스, 그리고 아이들은 죽었지.
되는대로 내뱉은 도발이라고 생각하고 넘기고 싶었다.
하지만 불타는 학교의 모습과 함께 깊게 새겨진 트라우마는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결국 네오-서울과 가까이 있는 샴록에게 사건의 진상을 알아봐달라고 부탁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수연이 자신들 말고 다른 반사회적 집단에도 지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기계 교단 내부에서 자기 일을 돕는 사제라며 파라터스라는 이를 소개해준 기억도 있다.
새로운 형태의 좀비를 만들고 있으니 좋은 시체가 있으면 넘겨달라는 말에 벌레 보듯 바라봤던 기억이 진오에게 떠올랐다.
“파라터스라는 그 사제, 기계 교단 대림교구 어디에도 없어요. 아예 네오-서울에 있지 않은 것 같아요.”
“······.”
“기계 교단이야 워낙 세가 방대하니까 찾기 힘들 수는 있어도 어디로 갔으면 어디로 갔다 기록 정도는 남아 있을 것 같은데 아무런 기록도 없어요.”
샴록이 힘주어 말했다.
“마치 죽은 것처럼요.”
계속해서 이어지는 샴록의 말.
“파라터스와 같이 다니던 사제들도 마찬가지예요. 흔적을 읽어낼 수가 없어요. 마치 누군가 일부러 끊어놓은 것처럼요.”
“어렵군······.”
“네. 더 이상의 정보는 교단 내부, 내부에서도 상층부를 통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저나 진오가 깨끗한 신분은 아니다 보니······. 수연 씨가 있었다면 수월했을 텐데 말이죠.”
“수연에게 따로 연락이 온 것은 없었고?”
진오의 말에 샴록이 고개를 저었다.
수연이 잠적했다.
대림 에어리어의 지하에 있는 두 개의 렙틸리비아를 점령하기 위해 리벨리온의 사람들을 지원했다 실패한 직후 벌어진 일이다.
그 덕에 진오와 샴록은 조직이 흔들리는 걸 막기 위해 진땀을 쏟아야 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설명을 해도 모자랄 판에 혼자 사라진 수연.
게다가 예공방의 상무라는 직위를 이용해 무기 지원이나 검은돈 지원 같은 편의를 봐줬던 사람이 수연이었는데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자금이야 암흑가에서 긁어모으는 보호비나 해적질로 충당할 수 있었지만, 무기는 그렇지 않았다.
각자의 영역에서 힘을 기른 뒤 네오-서울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키려는 리벨리온의 계획이 자연스레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그 전에, 진오는 오메가의 말로 인해 자신들이 정말 장기판 위에 올라가 있는 장기말이 아닐까 고민하고 있었다.
목적 없는 도움은 없다.
그렇기에 수연이 처음 접근했을 때 경계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조심해서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과 흑심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다르다.
처음에는 신무기의 현장 데이터를 얻는다는 이유였다.
충분한 데이터가 모였을 것 같은데도 지원은 계속됐다.
‘이제는 됐다.’라고 말할 법했지만, 진오와 샴록은 달콤한 향기를 풍기며 다가오는 검은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 달콤한 유혹이 사라진 지금, 그들은 방황하고 있었다.
“정확히 수연의 속내가 뭔지, 그쪽의 목적이 뭔지 알아야 해. 우리와 같지 않다면 서로의 길을 갈 때가 된 거야. 마침 수연이 자리를 비운 지금이 적기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샴록.
“저도 그렇게는 생각해요. 하지만 여기로 오기로 한 수연 씨의 전령에게서 얘기를 들어보고 결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진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어서서 돌아 나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샴록의 말에 동의를 표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때, 카페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샴록과 진오도 누군지 모를 수연의 연락책.
평소에 입던 가사는 어디로 치웠는지 깔끔한 옷을 입은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둘에게 다가와 앉았다.
애초에 카페에 사람이라고는 진오와 샴록뿐이었다.
“굉장한 환락가라고 해서 어떤 광란의 파티로 소승을 맞이할까 기대했는데, 이 정도는 조금 실망입니다.”
나름대로 위장이라고 가사는 벗어던졌지만, 손목에 찬 염주를 굴리는 거북 수인.
눈을 비롯한 얼굴에 음란함이 가득했다.
렙틸리비아 뿐만 아니라 네오-서울 곳곳에서 워낙 악명을 떨쳤기에 진오와 샴록 모두 새로운 인물을 알아봤다.
“색승?!”
거북 수인이 미간에 주름을 잔뜩 만들어냈다.
“아다라는 좋은 이름이 있는데 색승이라는 칭호는 조금 그렇습니다.”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둘이 얼어있는 사이, 색승은 진오를 향해 추파를 날렸다.
“하긴, 파티의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소승과 함께할 파티의 파트너는 그쪽 시주이신지? 거신족이라 들었습니다. 큰 기대를 해도 될는지요. 색······스즉시공 공즉시색······스.”
진오의 얼굴이 굳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