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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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니임!”
네오-서울 강동 에어리어 비행장에 내리자 앨리스와 신시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브리가드가 나타났다는 소리 듣고 얼마나 놀랐다고요!”
“걔들 생각보다 별거 아니더라고.”
앨리스에게 너스레를 떨어준 뒤 신시아에게 고개를 돌리자 신시아가 화들짝 놀라더니 고개를 돌렸다.
“이, 일부러 보려고 했던 건 아니고! 오, 옷이 그렇게 되어 있어서······!”
수송기에 타자마자 잠들어버려서 옷을 갈아입을 틈이 없었다.
애초에 갈아입으려고 가져온 옷들은 지하에서 탈출하면서 버려버리기도 했고.
그 덕에 나는 너덜거리는, 조금 과장 더하면 걸레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옷을 걸치고 있었다.
계속해서 나를 흘끔거리는 신시아의 시선은 내 가슴팍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 같았다.
괜히 민망해져서 앨리스가 손에 들고 있는 에코백을 달라고 손짓했다.
“가져왔지?”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뻔뻔스러운 표정을 짓는 앨리스.
“뭘요?”
“내 옷. 가져와 달라고 얘기했잖아.”
“그랬나요?”
네오-서울 통신망에 접속 가능하다는 안내가 나오자마자 졸린 눈을 비벼가며 일어나서 앨리스에게 얘기했었다.
앨리스가 잊어버렸을 리가 없다.
“신시아 언니는 사장님 지금 스타일이 꽤 마음에 드는 모양인데요? 그냥 그대로 가시는 건 어때요.”
신시아가 즉각 반응했다.
“아니거든!”
“아니기는! 언니 지금 볼 빨개지려고 하거든요? 흡혈귀가 이렇게 혈색 좋아도 되는 거예요?”
품에서 손거울을 꺼내 뺨을 확인하는 신시아.
물론 신시아의 뺨은 평소처럼 잡티 하나 없는 백색이다.
그래, 거대 흡혈귀 가문의 영애라도 악마와 싱크를 마친 안드로이드를 이기긴 힘든 법이다.
신시아를 보고 배가 찢어져라 웃는 앨리스의 손에서 에코백을 뺏었다.
역시 내 옷이다.
특수 마공강 티셔츠를 못 입게 된 후로 피부처럼 입고 다니는 후드티와 트레이닝복 긴 바지.
역시나 멀쩡한 구석이 없는 외투를 벗어 잠시 앨리스에게 맡겼다.
앨리스가 접어든 외투에서 작은 씨앗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머니에도 구멍이 난 모양.
돌아가면 새로 하나 사든지 수선을 맡겨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윗옷을 벗었다.
“으억!”
“사장님! 여기 사람 지나다니는데!”
옷을 벗느라 앞이 안 보이는 사이 들려오는 신시아의 외마디 비명과 앨리스의 타박.
냉큼 후드를 뒤집어쓴 뒤에 말했다.
“귀찮잖아.”
“그럼 아예 바지도 여기서 갈아입으시죠? 아니면 발가벗고 다니시던가요.”
“문화시민이 어떻게 그렇게 하겠어.”
화장실에서 바지를 갈아입고 나오면서 밖을 보니 몇 겹으로 봉인된 박스가 수송기에서 꺼내지는 것이 보였다.
작은 반지에게는 너무 과대포장이 아닌가 싶었지만, 이제 내 손을 떠나간 물건이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마침 하뮬 교수가 비행장 안으로 들어오길래 앨리스, 신시아에게 소개해주었다.
하뮬 교수는 앨리스 혼자 사무실의 살림을 맡고 있다는 데 놀랐다.
그리고 신시아에게는······.
“네오-서울 대학교의 교수인 하뮬이라고 합니다. 부친께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야스민 가의 영애를 뵙게 될 줄 몰라 꼴이 말이 아닌 점 송구합니다!”
양손을 공손히 모은 채로 눈도 잘 못 마주치며 연신 인사를 하는 하뮬.
이렇게 하실 필요 없다고 해도 계속해서 그렇게 하는 통에 신시아가 더 당황스러워할 정도였다.
야스민 공은 마도공학 유물 수집가 중에서도 보통 큰 손이 아닐 테니 하뮬의 입장도 이해가 갔다.
한참 후에나 진정한 하뮬은 며칠간 바쁠 것이라 했다.
스폰서와 대학에 탐사의 결과를 알려야 하고 본격적인 유물의 연구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
그것 때문에 다른 조사대원들에게는 휴가를 주면서까지 본인은 나와 함께 먼저 올라온 것이기도 했다.
반지에 어떤 능력이 있는지 살짝 귀띔해줄까 하다 말았다.
그래야 내가 뭔가에 쓰여 브리가드를 몰아냈다는 하뮬의 믿음이 완성될 것 같아서.
게다가 유적지를 벗어나면서 하뮬과 조사대원들이 반지를 조심이 손에 끼워보는 것을 봤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연산 보조 장치>는 귀속 아이템이었던 모양.
내가 첫 착용을 했으니 나한테만 반응하는 것일 테고, 나는 지금 반지가 없어도 문제가 없는 상황이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저걸 만져도 유적지에서 발굴된 평범한 반지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 것.
그래서 도착 직전에 하뮬에게 은근슬쩍 조언했다.
반지에 대해 연구하다 정 실마리를 못 잡겠으면 기금 경매에 내놓으라고.
지하에서의 내 활약을 본 사람이 20명이 넘는다.
브리가드를 물리치게 해준 유물 반지.
비록 지금은 그 능력이 발휘되지 않지만, 확실하고 매력적인 스토리텔링 아닌가.
아마 수집가들이 눈에 불을 켜고, 목으로 피를 토해가며 달라붙을 거다.
하뮬이 경매에 내놓지 않고 가지고 있다가 죽으면 자연스레 야스민 공에게 넘어갈 테지만, 내가 힘들게 가져온 걸 그렇게 스무스하게 먹는 건 좀 억울했다.
돈도 많은 양반이 좀 쓰셔야지.
그래야 경제가 돌아가는 거 아니겠나.
사적으로 탕진하는 것도 아니고 탐사단 사상자를 위한 기금을 위해 경매에 내놓는 거라는데 말이지.
하뮬이 결국 반지를 경매에 내놓을지, 야스민 공이 그걸 사들일지는 당장 내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일단 급한 불부터 먼저 끄고,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예공방과 페룬 마탑 측에는 연락해두었습니다.”
“알겠습니다.”
이건 자리에 하르파고스 상무와 테오릭 경이 같이 나온다는 말 같다.
이번 의뢰로 내가 받게 될 것은 하뮬 교수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마도공학 유물이다.
내게 제시한 것 중에서 필요한 것으로 직접 골랐는데, 하뮬 본인은 우주에서 온 광석 정도로 알고 있는 물건이었다.
적당한 제련 과정을 거치면 특수한 섬유를 뽑아낼 수 있다.
그 과정에 생활 스킬이 필요하긴 한데, 그건 내가 알고 있다.
다만 고열의 용광로가 필요해서 페룬 마탑의 도움을 받기로 했고, 만들어진 섬유로 보호구를 만드는 추가 공정은 예공방에서 맡아주기로 했다.
하뮬이 가지고 있는 광석이 얼마 없어서 오로지 나를 위한, 세계에 단 한 벌밖에 없는 보호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수고했다,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는 덕담과 함께 악수를 주고받은 뒤 하뮬과 헤어졌다.
야스민 가에서 제공해 준 리무진을 타고 야스민 저택으로 향하는 길.
곧 있으면 사무실이 완공될 것 같다는 앨리스의 높은 목소리와 벡이 있던 연구소의 꼬리를 잡은 것 같다는 신시아의 목소리 사이, 어딘가 화음이 안 맞는 것 같다는 느낌을 훅 받았다.
신시아에게 물었다.
“잠시만요. 이수련 씨는 어디 갔어요?”
“잠깐 본사에 일 있다고 사라졌어요.”
“퓨전 코프 본사요?”
“네.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면서 급하게 갔는데 좀 신나 보이기도 하더라고요.”
#
동남아시아 말라카 제도의 한 무인도.
레이더나 기타 관측 장비가 탐지할 수 없게 은폐장이 펼쳐진 절벽 한쪽이 살짝 열렸다.
절벽 안으로 들어서는 것은 스텔스 상태인 비행기.
내부로 들어와 스텔스 상태를 해제한 꼬리 날개 부분에 퓨전 코퍼레이션의 마크가 선명했다.
유도 램프를 따라 착륙한 비행기에서 내리는 이는 바이저를 내려쓴 이수련.
긴 외유를 마치고 본사로 돌아온 총수를 맞기 위해 여러 의전이 준비되어 있었으나 이수련은 한 손으로 그들을 물렀다.
그녀가 바로 향한 곳은 그리 크지 않은 회의실.
안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한 사람이 벌떡 일어섰다.
네오-서울 공공 집행본부에 파견되어 스펙터를 연구했던 팀의 팀장이었다.
“위치를 알아냈다고 하였느냐.”
“그렇습니다.”
손톱만 한 저장장치를 조심히 내미는 팀장.
이수련이 그걸 바이저의 옆에 끼워 넣자 바이저에서 벽을 향해 빛이 뿜어져 나오며 빔프로젝터의 역할을 했다.
빠르게 보고서를 눈에 담는 이수련.
“톈진 권역 교외. 톈진 미래식량연구기지.”
눈치를 보던 팀장이 부연했다.
“고소애 프로틴 분말이나 식용 귀뚜라미 에너지바를 생산하는 것으로 알려진 곳입니다.”
“진짜 곤충이 아니라 가짜 곤충을 만들어 범죄자에게 제공했던 것이고?”
스펙터의 페로몬에 반응하는 변형 벌레들을 만드는 곳이 이곳이었다.
위성사진으로 미래식량연구기지의 위치와 부지를 확인하던 이수련이 팀장에게 물었다.
“이들이 범죄자를 돕는 이유는 무엇인 것 같으냐.”
“여러 방면으로 접근해봤지만 명확한 이유는 알기 어려웠습니다. 다만······.”
어렵게 말을 꺼내는 팀장.
“이들의 지원이 스펙터에게 한정된 것은 아닙니다. 대량의 자금이 미래식량연구기지를 통해 네오-서울, 그중에서도 공공 집행본부로 흘러 들어간 정황이 있습니다.”
바이저 안쪽에서 꿈틀거리는 이수련의 미간.
“미래식량연구기지는 전달책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출처가 어디인지, 마지막으로 누구에게 전해지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내부 정보나 문건이 있다면 명확해질 것 같습니다.”
“······수고했느니라. 본좌가 따로 치하할 것이니 나가봐도 좋다.”
인사를 꾸벅하고 팀장이 나서려는 찰나, 이수련의 음성이 그의 뒤통수를 찔렀다.
“이 내용, 본좌와 그쪽 말고 아는 이가 있느냐?”
“없습니다.”
“그쪽도 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너무 위험한 내용이니라.”
얼굴이 하얗게 변한 팀장을 보고 이수련이 말했다.
“걱정 말거라. 본좌는 도움받은 것을 잊지 않는다. 비서실로 비용 청구서를 올리면 기억 삭제나 기억 봉인에 필요한 비용을 지원하겠노라. 이것은 그쪽에게 주어질 금일봉, 승진과는 별개이니 말만 하거라.”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사라지는 팀장.
몇 분 뒤 이수련은 회의실을 나와 본인의 집무실로 올라갔다.
자리에 앉아 고민하던 이수련이 바이저를 조작해 비서실로 통신을 연결했다.
“테일즈Tails에게 기별을 넣고 그들의 로봇을 눈에 띄지 않게 톈진 권역으로 옮기거라.”
테일즈.
퓨전 코퍼레이션의 파일럿 중에서도 이수련이 직접 세팅한 미출시 로봇을 조종할 수 있는 극소수의 인물들이다.
신분은커녕 테일즈라는 명칭도 제대로 공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명문 무가의 원로, 제자에게 자리를 물려준 마탑주, 로봇공학에 미친 기계교단 사제 등등 인물 하나하나의 면면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이들은 퓨전 코프가 아닌 이수련과의 개별 계약을 맺었다.
첨단 기술이 적용된 미출시 원격 조종 로봇을 받는 대신 이수련의 소집에 응하는 계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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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뒤, 톈진 권역의 최외곽.
300km만 더 가면 중화권 권역들이 벌인 핵전쟁의 참화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곳에 위치한 미래식량연구기지의 경비원들이 무언가를 목격했다.
기지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4대의 로봇.
가장 선두에 있던 로봇의 머리에 여우귀처럼 솟은 두 개의 안테나가 인상적이었다.
순식간에 기지를 불바다로 만드는 로봇들.
바이저를 통해 로봇의 시야를 공유 중인 이수련이 로봇을 움직여 기지의 창고 바닥을 뜯어냈다.
미처 멈추지 못한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아래쪽에 가득했다.
이수련이 오메가를 보고 배운 것 중 하나는 말로 해서 안 될 것 같으면 일단 들이박는 편이 좋다는 것이었다.
“낭군의 방식, 썩 마음에 드는구나.”
그날, 톈진 권역의 미래식량생산기지는 지상과 지하 구분 없이 남김없이 불탔다.
불이 사그라든 뒤, 사람들이 지하로 내려갔지만 형체가 제대로 남은 것이 거의 없어 그때의 로봇들이 뭔가를 가져갔다는 것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작가의 말
고소애는 파충류나 설치류의 먹이로 많이 쓰이는 밀웜입니다.
벌레나 곤충에 거부감이 있으신 분들은 괜히 검색해보시지 않으시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실제로 곤충은 배양육과 더불어 미래의 식량위기를 해결할 방책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아미노산이 풍부하고 단백질 함량이 높아 영양학적 가치가 높습니다.
육류와 비교하면 동일 중량 대비 필요한 공간과 사료, 물의 양이 월등히 적습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해 밀웜 분말을 주문해 먹어본 적 있는데 생각보다 고소합니다.
영양제라고 속이고 동생한테도 먹여봤는데 새우깡 비슷한 맛 같다고 했습니다.
밀웜인걸 밝히니 대략 3년 동안 먹을 욕을 다 처먹었습니다.
#분말 형태 말고 원래 형태를 남겨 스낵처럼 만든 것도 있었는데 그건 비주얼적으로 별로라서 주문하지는 않았습니다.
후기는 꽤 맛있다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