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잡캐여도 너보단 강함-94화 (95/258)

094.

094.

주량에 관여하는 요소는 다양하다,

절대적인 것은 타고난 간 능력과 체질.

그 외에는 컨디션, 피곤, 성별 등등이 있다.

그중 하나가 ‘덩치’, 정확히는 혈액량이다.

몸이 작으면 혈액이 적으므로 같은 양의 술을 먹어도 몸이 큰 사람에 비해 혈중 알코올 농도가 높게 나온다.

체구가 작을수록 쉽게 취할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다.

이런 얘기를 왜 하냐면······.

“그래! 경매 수익금을 연구비에 보태려고 연구도 덜 끝난 유물에 양념 좀 치긴 했다! 그런데! 그런데! 그거 하나 가지고 나를 완즈니 무시하는 건 너무 한 거 아니냐고오! 으허엉!”

페어링으로 나온 와인 몇 잔을 홀짝이던 하뮬이 대취해서 주정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 잔 마시고 눈이 풀리기에 그만 마시는 것이 어떻냐고 했더니 자기 무시하냐는 말에 더 이상 말리지 못했다.

애초에 저 양반이 죽상을 하고서 술을 마시게 만든 게 내 말 때문이었다.

우리가 안내된 방은 좌식이지만 테이블 아래에 공간이 있어 그곳에 발을 넣고 등받이 의자에 앉는 식이었는데, 술에 취한 하뮬이 계속 테이블 아래로 들어가려는 걸 말리느라 혼났다.

“땅을 파야 해! 그곳에 유물이 있다!”

하뮬이 몸에 이식한 고고학 장비가 우루루 쏟아져 나와 장판을 뜯어내려고 하는 걸 황급히 들어 올리다 테이블 아래에 머리를 찍히기도 했다.

“이런 거 때려 박는 김에 알콜 분해 위장도 달지.”

뒤통수를 세게 문지르며 내가 한 말을 또 어떻게 들었는지 불콰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하뮬.

“야! 임마! 술은! 취하려고 마시는 거야! 취하려고! 취기에 몸을 맡기려고 마시는 거라고 임마!”

주눅 들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기세가 아주 코끼리 저리 가라다.

당황한 것은 하르파고스.

“워, 원래 교수님이 이런 분이 아니신데······.”

그리고는 나를 향해 원망스러운 눈길을 보낸다.

나도 왜 그런 생각을 굳이 입 밖으로 낸 건지 후회하고 있으니까 그렇게는 보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몸을 비틀어서 내 손을 빠져나간 하뮬이 테이블 위로 올라가자 미처 다 먹지 못했던 반찬이 담긴 그릇 몇 개가 테이블 아래로 떨어졌다.

아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분위기가 개박살난 이후로 입 안에 뭘 집어넣긴 집어넣는데 도대체 무슨 맛인지 느껴지질 않았으니까.

테이블에 올라서자 하뮬의 눈높이가 앉아 있는 나를 내려다볼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나! 하뮬! 네오-서울고를 나와 네오-서울대를 졸업해 네오-서울대 교수를 하고 있는 하뮬! 이런 시련에 무너지지 않는다! 이번 탐사를 통해 다시 내 가치를 증명할 것이다! 그러니 너!”

하뮬의 길지 않은 손이 나를 가리키고 있다.

“나의 동료가 돼라!”

밀짚모자를 쓰고 바다로 갈 것 같은 대사를 치는 하뮬.

“저······는 검을 하나밖에 안 쓰는데요.”

해적왕의 옆에는 검을 세 자루 사용하는 검사가 어울린다.

마침 이 자리에 검을 여섯 자루 휘두르는 작자도 있네.

알기 힘든 말을 내뱉은 하뮬의 다리가 풀리더니, 이내 테이블에 대자로 뻗어버렸다.

숨통을 조여오는 적막 속에서 하뮬의 코 고는 소리만이 들린다.

여섯 개의 손으로 빠짐없이 세 얼굴을 가린 하르파고스에게 어렵사리 입을 뗐다.

“오늘 자리를 마련한 이유가······.”

“······교수님 상태가 나아지면 말씀 나눈 뒤에 따로 연락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시죠. 그럼 저는 이만······.”

조심스레 방을 빠져나와 지하에 있는 바이크에 올라탈 때쯤 한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티셔츠!”

물어봤어야 했는데.

멈칫했다가 이내 바이크에 시동을 걸었다.

지옥의 늪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는데 그곳으로 다시 기어들어 갈 생각은 없었다.

맛있게 먹긴 했는데 대체 뭐였지······.

#

다음 날.

임시 사무실이라 쓰고 대충 뭉개고 있는 거점이라고 읽는 곳, 즉 후앙네 청소업체 사무실이 있는 올가 할머니의 건물에 있는 방 중 가장 넓은 곳.

길기도 길다.

우리끼리는 그냥 아지트라고 부르고 있다.

그곳에서 앨리스, 신시아, 이수련이 동그랗게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으아! 너무 귀여워!”

“걷는다! 걷는다!”

“넘어질 것 같아 보기가 힘들구나.”

슬쩍 다가가보니 셋이 보고 있는 것은 앨리스가 끼고 사는 패드, 패드에서 재생되고 있는 것은 비틀대며 걸음을 떼는 벡이었다.

헤지르 영감님이 시도 때도 없이 벡의 사진과 영상을 보내고 있다.

거의 홈카메라 수준.

그러던 중 패드에 전화표시가 떴다.

앨리스가 패드를 들자 신시아와 이수련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잠시만요. 사무실 번호로 온 거라서.”

.

.

.

이번에 사무실 건물을 새로 짓는 김에, 사무실 번호를 바꿨다.

유명세 때문인지 오만 장난전화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하루종일 패드에 뜨는 전화표시에 치를 떤 앨리스는 이번 번호에 신경을 많이 썼다.

새로 지어질 사무실 지하에 통신용 보안 모듈을 큰 걸로 설치해서 무작위 주기로 번호가 바뀌게 해놨댔나.

설정해 둔 가장 가까운 지인들에게는 바뀐 번호가 알려지지만 지인들에게 우리 번호를 얻어간 사람들, 즉 소개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는다.

그리고 모듈을 통해 번호가 전파되는 흐름도 알 수 있다.

특정 경로에서 누출이 지속된다면 그쪽 라인을 차단해버리는 게 가능하다는 소리.

우리와 지속적인 신뢰 관계를 가져야만 바뀐 번호를 알려주는 일종의 고급화 전략이다.

이러면 손님이 떨어지지 않겠냐는 질문에 오히려 앨리스가 내게 반문했다.

“지금 사장님 찾는 곳이 엄청 많아요. 사무실 공사만 아니었으면 사장님은 하루에 2시간도 못 주무시면서 일해야 했을걸요. 그리고 올가 할머니네 건물 임대료 나오고, 새로 지어질 건물에 입주할 업체들한테도 임대료 나오니까 고정 수입 탄탄하잖아요. 뭘 걱정해요.”

틀린 말은 아니어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야스민 공께는 치근덕거릴 사람이 없겠지만, 테오릭 경이나 대주교님, 타이린드 언니한테는 저희 사무실 번호 좀 알려달라고 치근덕댈 사람 꽤 많을걸요? 아마 신시아 언니도 짜증 좀 나지 싶고요.”

앨리스가 사악하게 웃었다.

“제가 피곤해질 일은 없다는 소리죠. 그분들이야 좀 안됐지만.”

.

.

.

앨리스가 잠시 방의 구석으로 간 사이, 신시아와 앨리스의 관심은 곧 내게로 옮겨왔다.

“어제 오후에 오니 앨리스만 있던데, 어디를 갔다 온 것이더냐?”

“업무······까지는 아니고 고객 관리요.”

“고객? 누구요?”

“그걸 말하면 안 되죠.”

“흠······.”

이수련이 눈을 가늘게 떴다.

“CCTV 해킹하면 그걸 아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도 아니니라.”

“위타천이나 마고한테 신고할 거예요.”

위타천의 훈계를 들은 적 있는 신시아와 이수련 둘 다 질린다는 듯 쓴 걸 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사이, 앨리스가 패드를 내게 가져왔다.

“하르파고스 이사님 소개로 연락하셨대요.”

하뮬이 내 연락처를 묻거든 사무실 번호를 알려줘도 좋다고 하르파고스에게 미리 일러두었다.

패드를 터치하고 귀걸이에 손을 가져다댔다.

“네, 연결했습니다. 해결사 오메가입니다.”

-······.

“누구십니까.”

알면서도 일부러 물었다.

원래 주사 부린 사람은 한 번 놀려주는 게 정석이니까.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어제 같이 식사했었던 하뮬입니다.

“아! 기억하죠. 그런데 교수님은 술을 그렇게 드시고도 저랑 식사한 게 기억이 나시나봅니다. 술을 아주 잘 드시는군요.”

-······어제의 추태는 사죄드립니다.

“추태라고 할 거 있나요. 좋은 거 먹고 좋은 구경한 셈 치겠습니다.”

하뮬이 말이 없다.

끊을까말까를 고민하는 것 같다.

장난은 여기까지다.

“어제 제게 미처 못하신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아니다, 한 번만 더 놀리자.

"뭐라고 하셨더라. 동료가 되라고······.”

푸흐- 하는 한숨과 함께 하멜의 목소리에 자괴감이 가득 묻어나왔다.

-그런 소리를 했었군요······. 일단 얘기를 조금 들어주시겠습니까.

#

내가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폭죽 글자 생성기 때문에 하뮬은 학문적으로 큰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가 그동안 보여주었던 마도공학에 대한 헌신과 열정으로 완전히 몰락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탄탄했던 위치가 흔들리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스폰서인 이온테스사社도 과거와 같은 전폭적인 지원은 어렵다고 난색을 표하는 상황.

하뮬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길은 또 다른 유물을 발견하고 연구하는 것에 있다고 결론 내렸고, 다음 탐사지를 집요하게 찾아다녔다.

그러던 중 한반도 남동부, 과거에는 영남지방이라 불렸던 곳의 도시권역인 ODC(Old Dynasty’s Capital)에서 산사태로 인해 지반이 무너져 내리며 새로운 유적지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ODC는 원래부터 마도공학 유물뿐만 아니라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는 것으로 유명한 곳이니 새로운 유적지 자체로 그리 놀랄만한 사건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역 주민들의 말은 하뮬의 가슴을 뛰게 하기에 충분했다.

“안쪽은 깊어서 못 들어가 봤는데 입구에만 가도 막 가슴이 뛰고 머리가 팽팽 돌아가더라니까. 내 생에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지.”

오랜 기간 탐사단을 이끌며 마도공학 유물을 찾아다닌 하뮬의 육감이 말하고 있었다.

‘대박’이 있다고.

#

“예,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 있는 줄 모르겠군요.”

-그게······아직 탐사단이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조사대 구성은 끝났는데 호위대 구성이 완료되지 않아서요.

“왜죠?”

패드를 가리키자 앨리스가 내게 건넸다.

‘하뮬’

적어서 돌려주자 곧바로 검색 결과를 보기 좋게 정렬해서 다시 패드를 돌려주는 앨리스.

얘 없으면 일을 어떻게 했을까 상상도 안 간다.

여튼, 하뮬의 커리어가 주루루루루루루룩 뜬다.

피인용수가 3만회를 넘어가는 논문부터, 어디 대학의 명예 졸업생이니 저기 대학의 명예 교수니······.

어제 술 마시고 난동부리던 사람이 이런 사람이었을 줄이야.

조금 달라 보인다.

마도공학 유물, 서리얼의 아이템에 있어서는 교수나 박사 이상의 지식을 지닌 나와 얽히지만 않았다면 더없이 행복했을 사람이기도 했다.

여튼, 이런 커리어라면 가장 최근에 크게 똥볼을 차긴 했어도 탐사단을 모으기는 어렵지 않아 보였다.

-최근에 용병들이 유물 탐사에 잘 나서지 않는다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네. 브리가드라는 곳 때문이라죠? 습격을 받느니 협력하는 쪽을 택한다고요.”

-알고 계시는군요. 그래서 어느 탐사단이나 용병 구인난입니다.

날 미끼 삼아 양질의 인원을 수급하겠다는 셈인가?

나쁘지 않은 구상이다.

내가 수락한다면 말이지.

“인원이 부족하신 거라면······.”

-그건 아닙니다.

이게 아니야?

-평소보다 질이 조금 떨어지긴 하지만 인원을 거의 다 구하긴 했습니다. 다만 평소 같으면 대형 용병단과 계약을 하지만 이번에는 구인난 때문에 군소 용병단에서 파견된 인원 몇과 심지어 개별적으로 움직이는 용병과도 계약을 해야 했습니다.

다양한 용병들.

한 용병단 출신도 아니란다.

서로 견제하고 으르렁대기나 하겠지.

안 봐도 개판이겠구만.

-이들을 통솔하고 지휘할 호위대장이 구해지지 않아서 혹시 오메가 씨에게 의뢰할 수 있나하고 어제 자리를 마련했던 겁니다.

“호위대장이라······.”

-예. 물론 그냥 하는 말은 아니고 대가를 제시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보상과 대가에 대해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눈 뒤, 통신을 끊고 앨리스에게 물었다.

“나 잠깐 출장 좀 갔다 와야 할 것 같은데?”

“어디로요?”

“ODC. 근데 ODC가 어디냐?”

패드에 한반도 전도를 띄운 앨리스가 답했다.

“여기요. 서라벌 권역이라고도 불려요.”

“아! 경주네.”

“토박이들은 그렇게도 부른다더라고요.”

경주면 유물이 쏟아져도 인정이지.

마도공학 유물이긴 하지만.

패드를 돌려받은 앨리스가 내게 물었다.

“통화하신 분이 하뮬 교수인거죠? 무슨 의뢰고, 보상은 어떻게 하겠대요?”

고개를 돌려보니 신시아와 이수련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는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에둘러 답을 줬다.

“하르파고스 이사님이랑 테오릭 경한테 연락해서 마도공학 유물로 옷 하나 만들 생각 있냐고 한 번 물어봐 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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