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
093.
며칠 뒤, 하르파고스가 알려 준 장소로 향하니 대림 에어리어 3구역, 즉 현실의 여의도 동쪽이라 할 수 있는 곳에 높게 솟은 빌딩이었다.
바이크를 지하에 세워두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뒤 버튼을 훑어봤다.
‘최상층으로 오면 된다고 했나.’
70개가 넘는 버튼 중 내 눈과 손가락이 가장 위로 향했다.
이상했다.
다른 버튼은 모두 엘리베이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숫자가 쓰여있었지만 77이라 쓰여 있어야 할 가장 위의 버튼은 숫자가 적혀있지 않고 그냥 푸른색 버튼이었다.
‘이게······맞나?’
일단 버튼이 거기 있으니 누르자 다행히 버튼에 불이 들어왔다.
그런데 엘리베이터의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내가 버튼을 누르자 안에 타고 있던 사람 중 몇몇이 숨을 들이쉬거나 아니면 대놓고 헉하는 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한 명은 몇 번이나 버튼과 나 사이를 왕복해서 보기도 했다.
그러다 내 허리춤에 꽂힌 칼자루를 발견했는지 그만두긴 했지만,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하고도 계속 나를 흘끔흘끔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다만 경계나 의심의 시선은 아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부러워하는 눈빛?
의문은 곧 풀렸다.
같이 타고 있던 남자 엘프가 내게 조심스레 말을 걸어온 것.
“저······실례가 아니라면 ‘청람’ 예약 대기 얼마나 걸리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청람이요?”
“네. 청람. 네오-서울에서도 손 꼽히는 한식당이잖아요.”
엘프의 눈이 반짝였다.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거야.
“예약은 아니고 지인이 초대를 해줘서요.”
엘프의 눈이 더 커졌다.
“초대요? 청람은 예약이 몇 년 단위로 잡혀있어서 예약자 본인 이외에는 안 받는 걸로 아는데······.”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오라는 곳으로 가는 것뿐이라 잘 모릅니다.
엘리베이터는 계속 움직였고, 같이 타고 있던 사람들이 내릴 때마다 나를 한 번씩 바라보곤 했다.
부러움과 질투가 섞인 눈빛이었다.
식당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저러나 하고 있을 때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에 도착하고, 푸른 버튼에 들어와 있던 불이 꺼지는 것과 동시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앞으로 나서자 어둑어둑한 조명에 청람이라는 말 그대로 온통 푸른 문 하나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문을 두드리자 아무 반응이 없었다.
돌아가야 하나 하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기 직전, 서비스직 특유의 친절하지만, 영혼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람입니다. 예약 확인 도와드리겠습니다.”
“음······하르파고스 씨 이름으로 예약이 되어 있을 것······같은데요.”
추측의 영역이었다.
여기로 오라고만 했을 뿐 이런 과정이나 절차가 있다고는 안 했거든.
“하르파고스 님 맞으십니까?”
“본인은 아니고요. 이쪽으로 오라고만 들어서······.”
잘못한 것도 아닌데 괜시리 목소리가 작아진다.
“확인 도와드리겠습니다.”
그 말이 끝이었다.
닫힌 엘리베이터, 어둑어둑한 조명, 푸른 문.
그리고 그 앞에서 뻘쭘하게 서 있는 나.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작태인가 싶었다.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
영혼이 가득 함유된 것과 동시에 당황한 기색까지 느껴졌다.
“확인되었습니다.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푸른색 문이 부드럽게 열리나 싶더니 안쪽에서 빛이 쏟아진다.
깔끔하게 턱시도를 차려입은 염소 수인이 달려오더니 나를 맞이했다.
“청람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하르파고스 님은 이미 와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사람 두 명이 간신히 어깨를 부딪치지 않고 지나갈 정도의 복도를 통과하니 나도 모르게 감탄이 터져 나왔다.
“와······.”
거대한 통창 너머로 기계 교단 성당, 기계 지구, 그 너머의 한강이 한눈에 들어왔다.
건물 한 층을 통째로 사용하는 건가.
내가 감탄하고 있자 염소 수인이 흐뭇하게 웃었다.
“저희 청람이 자랑하는 리버뷰입니다.”
충분히 시간을 주었다 싶은지 염소 수인이 다시 나를 안내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안쪽으로 이동하는 도중, 식당 한쪽에 기둥 같은 것이 보였다.
띵-
현대인이라면 익숙하지 않을 수가 없는 소리.
엘리베이터 도착음이었다.
기둥의 한쪽이 열리며 사람들이 걸어 나왔다.
얼핏 보이는 기둥 안쪽은 완전한 엘리베이터였다.
뭐야??
#
청람의 프라이빗 룸.
미리 와 있던 하르파고스와 인사하고 내가 겪은 일을 얘기했더니 하르파고스는 아수라의 세 얼굴에서 진땀을 잔뜩 쏟아낼 정도로 송구스럽다는 태도를 보였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전용 엘리베이터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일정이 급하게 잡혀서 저도 깜빡했나 봅니다.”
1층에서 예약 확인을 마친 뒤 식당으로 직행하는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나는 바이크를 지하 주차장에다 두고 올라온 탓에 직원들도 잘 쓰지 않는 뒷문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온 것이고.
영혼 없는 그 목소리······내가 잘못 온 사람인 줄 알아서 그런 거였구나.
자리에 앉기 무섭게 음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전채요리로 나온 죽과 어란을 입에 넣기 무섭게 왜 예약이 어려운 식당이라는 건지 바로 알았다.
산뜻하게 입안을 감싸주는 동시에 녹아 사라지는 어란.
죽은 기분 좋게 식도를 타고 내려가지만 무겁거나 부담이 되는 건 전혀 없다.
맛의 지평을 넓혀주는 느낌.
새로운 감각을 열어 주는 것 같았다.
“이게······.”
말을 잃은 나를 보고 하르파고스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괜찮죠?”
두어 가지의 간단한 음식이 나오고, 메인 요리가 등장했다.
음식과 함께 들어온 직원이 이건 아주 청정하게 기른 돼지를 거기서만 자라서 채취하기가 더럽게 힘든 무슨 나물과 함께 요렇게 숙성시켜 이런 요리 방법으로 저온으로 사흘간 어쩌고저쩌고하는데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은은하게 퍼지는 농후한 냄새에 당장이라도 뚜껑을 열고 퍼먹고 싶은 마음뿐이다.
전채요리로 시동이 걸린 위장이 아우성쳤다.
마침내 설명이 끝나고 뚜껑이 열리자 김이 확 오르며 잘 삶아진 돼지고기 한 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젓가락을 들자 직원이 정중히 권유했다.
“숟가락을 사용하시는 쪽이 드시기 편할 겁니다.”
숟가락을 가져다 대니 아무런 저항 없이 부드럽게 잘리는 고기.
푸딩이라 해도 믿을 지경.
떨어지지 않게 조심스레 입에 넣자, 따스한 온기와 함께 형용하기 어려운 행복감이 전신으로 퍼져나간다.
나는 지금 내 얼굴을 볼 수 없지만 아마도 흐뭇하게 웃고 있을 것이다.
“그럼, 맛있게 즐겨주시길.”
직원이 나가고 하르파고스가 내게 말했다.
“인간 종족에게 좋은 약재들이 많이 들어갔다고 하니 이건 음식이 아니라 보약입니다, 보약. 이것 말고도 나올 요리가 많으니 천천히 드셔도 됩니다.”
넣기만 하면 녹아 사라지는 고깃덩어리를 몇 번 입에 넣은 후, 물었다.
약 5분 전까지는 몰랐던 정보까지 활용해서.
“이런데 자주 오시나 봐요? 여기 예약이 몇 년 치가 잡혀있다던데요.”
“아닙니다. 제가 뭐라고 이런 곳을 자주 옵니까.”
“곧 상무 되신다는 소문이 유력하던데요? 그 상무는 사실 거쳐 가는 자리고 사장 되실 거라는 말도 돌지 않나요?”
뒤의 건 앨리스가 알려준 내용이다.
수연의 잠적 이후 하르파고스가 예공방 내의 주류로 올라섰단다.
검술덕후 아수라로만 알았는데 생각보다 결단력 있는 인물이었다.
물론, 이제 네오-서울에서 돈 좀 있는 놈들이라면 한 벌씩은 다 가지고 있다는 특수 마공강 티셔츠의 히트가 큰 역할을 했다.
하르파고스가 기획부터 깊게 개입한 상품이라 발언권이 확 커졌다나?
공동 연구를 한 페룬 마탑에도 로열티가 쏠쏠하게 들어가는 터라 얼마 전 야스민 저택에서 만났을 때 테오릭 경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금송아지를 보는 눈빛이었다.
내가 조그마했으면 주머니에 넣고 다녔을 거란다.
닳아 없어질까 두렵다나.
눈빛을 보니 진지한 것 같아서 얼른 피하긴 했다.
여튼 해외에서도 티셔츠 주문이 들어 온다는데, 한반도에 있는 도시 권역들 수요 맞추기도 급급해서 예공방 대림지부에는 불이 안 꺼진단다, 불이.
스스로 얼굴에 금칠하는 것 같아서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내가 입고 다녔기 때문에 그런 것도 좀 있지 않나 싶다.
흡혈귀 회합에 오가면서 미디어에 노출돼, 얼마 전 강남 에어리어에서 루트 빌딩 위에서도 찍혀서 노출돼.
내가 죽을 둥 살 둥 건물 벽을 타는 영상이 예공방 티셔츠 광고냐는 소리도 나왔으니 말 다 했지.
예상이 맞는지 하르파고스는 크게 부정을 하지 않았다.
“제가 한 게 뭐 있습니까. 다 운과 시기가 좋았던 거지요. 그중에서도 우리 오메가 님 덕 아니겠습니까.”
“제가 빌빌거리던 시절에 알아봐 주신 이사님, 아니 상무님 안목도 있지요! 곧 사장님이신가? 남자는 힘든 시절의 도움을 잊지 않는 법입니다! 하하하하!”
“마음이 든든해집니다! 역시 오메가 님은 로망이 있으십니다!”
“제가 로망이 있어봤자 아수라 육도류의 개파조사가 되실 우리 상무님만큼의 로망이 있을까요.”
“기억하고 계셨군요!”
주거니 받거니 웃음꽃이 핀다.
음식의 탈을 쓴 보약을 먹여주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그리고 하르파고스 기분이 좋아져야 티셔츠를 조금이라도 싸게 받아올 것 아닌가.
음식 먹고 바로 티셔츠 얘기를 꺼내면 좀 속 보이는 것 같아서 살짝 에둘러 가기로 했다.
“그나저나 소개해주시기로 한 분은 어디에······.”
“조금 늦으실 것 같다고 미리 말씀 주셨습니다. 워낙 공사가 다망하신 분이라서요. 참고로 이 식당도 그분이 잡아주신 겁니다. 말씀하신 대로 스케줄이 꽉 차서 예약이 거의 불가능한 식당인데 오너와 친한 사이라서 특별히 자리를 마련했다고 합니다.”
“오······.”
정체가 궁금해진다.
질문을 몇 번 더 던져봤지만 하르파고스는 직접 만나 보시는 게 좋을 거라며 정중히 더 이상의 질문을 사양했다.
인간에게 좋은 음식을 준비한 걸 보니 그쪽도 인간인가?
아니면 오로지 내게 맞춘 거?
사람이 화장실 갔다 올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더니 좋다고 먹었던 음식이 묵직하게 나를 주저앉히는 듯하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
“오셨나 봅니다.”
문이 열리고 등장한 것은 등산복 비슷한 옷을 입고 정글에서나 쓸 것 같은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수인.
덩치가 작고 코가 길쭉하다.
프레리독? 미어캣?
둘의 차이점은 잘 모르겠지만 이미지상 미어캣에 가까워 보인다.
하르파고스가 여섯 개의 손 중 하나를 내밀어 미어캣 수인과 악수하며 인사했다.
“어서오십쇼, 교수님.”
교수?
미어캣 수인이 식탁을 한 번 살피고는 웃으며 내게 말했다.
“식사가 아주 마음에 드신 모양입니다.”
엉거주춤 일어서 있던 내가 답했다.
“예에······. 맛있게 먹던 중이었습니다.”
“해결사 오메가 씨, 맞으시죠?”
하르파고스를 바라보니 고개를 끄덕했다.
이 자리에서 소개해주려고 했던 사람이라는 뜻이다.
“예. 맞습니다. 대림 에어리어에서 해결사 사무실을 하고 있는 오메가라 합니다.”
미어캣 수인은 내 여기저기를 살피다 말했다.
“이사님 말씀대로군요. 겉보기에는 참 평범해요.”
“대신 능력 하나만큼은 굉장한 분입니다. 그리고 보기에 평범하니까 이번 일에 더욱 적합하겠죠. 물론, 오메가 님이 의뢰를 수락하신다는 전제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선택권은 오메가 님께 있어요.”
“능력. 알고 있어요. 야스민 공이 더욱 가열차게 유물 수집에 열을 올리는 이유가 이분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더군요. 진상은 알 수 없지만.”
마도공학 유물 얘기?
브리가드인가?
언제라도 뽑을 수 있게, 오른손을 칼자루 쪽으로 움직였다.
그런 나를 보고 미어캣 수인이 크게 당황해서 손을 앞으로 내밀어 저었다.
“무슨 생각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도움을 구하고자 모신 겁니다. 야스민 공과도 서신을 주고받는 사이입니다!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요!”
분위기가 다급해지자 가장 당황한 쪽은 하르파고스였다.
그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한 뒤 내게 미어캣 수인을 소개했다.
“오메가 님. 이쪽은 하뮬 교수님입니다. 아주 뛰어난 고고학자이자 보르스나탄 탐사단의 단장이기도 하십니다.”
하뮬······보르스나탄······하뮬······보르스나탄······.
“아! 생각났다! 글자 쏘아 올리는 폭죽을 행성 움직임 어쩌고저쩌고라고 포장해서 경매에 내놓은······!”
황급히 목소리를 줄였지만, 방 안의 분위기가 엉망진창이 되었다.
미어캣 수인이 풀이 잔뜩 죽어서는 중얼거렸다.
“네. 맞습니다. 그 덕에 학회에서 잔뜩 망신당하고 스폰서도 끊기게 생긴 하뮬이 바로 접니다.”
아오······생각만 할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