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
092.
짤랑-
희미한 광원이 간신히 발끝을 비추는 좁은 통로 안, 방울 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몇 명 남지 않은 연구소 생존자를 이끌고 비밀통로를 통해 밖으로 향하는 자화보살의 허리춤에 있는 방울이 내는 소리였다.
보안팀원은 다 죽었고 그녀의 뒤에는 눈에서 생기가 사라지기 직전인 연구원 몇 명만이 기계적으로 다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 말도 없었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건 대체 뭐란 말입니까.’
자화보살이 단신으로 연구소에 뛰어든 해결사에 대해 모시고 있는 차사신에게 물었으나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마치 외면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말하는 듯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큰 규모의 연구소는 아니었지만, 연구소의 규모에 비해 보안팀의 규모와 질은 굉장히 좋았다.
다들 한가지씩 결함이 있거나 사고를 쳐서 뒷세계로 흘러들어오긴 했지만 어디 내놔도 자기 분야에서 부족함 없는 이들이었다.
자화보살만 해도 태백권역의 큰 만신이 직접 간택해 길러낸 강신무降神巫였으며, 교류차 찾아왔던 한신나 권역의 사이버네틱 음양사들도 자화보살의 신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런 보안팀원들 중 살아남은 것은 자화보살 혼자뿐이었다.
로봇이 쏟아내던 폭탄과 휘두르던 광자 검날에 맞은 이들도 있었으나 그것에 즉사한 자들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 응급처치를 한 뒤, 지하창고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곳을 장악한 불의 화신에게 잿더미가 되었다.
가진 능력으로 화염을 막아낸 자들은 검의 먹잇감이 되어 스러졌다.
-연구원들이 있으면 실험체를 다시 만들어 낼 수 있다. 연구원들을 살려서 브로커에게 인계해.
비글로우의 잦아드는 음성이 자하보살의 귓가에 선명했다.
이들이 브로커에게 맹신에 가까운 충성을 바치는 것은 거액의 계약금과 급료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약속한 ‘미래’ 때문이었다.
-사회의 구석으로 밀려난 이들을 다시 위로 끌어올려 주겠다-
-네오-서울이 다시 세워지는 날, 너희는 가장 앞에 서서 진격할 것이다-
그 말을 모두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연구소의 실체를 들여다본 이후에는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다.
얼굴도, 정체도 모른다.
심지어 브로커라는 이름도 연구소 내에서 암암리에 붙인 명칭일 뿐 진짜 이름이 뭔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어마무시한 프로젝트를 진행할 정도면 어마어마한 인물임이 틀림없을 거라는 소문이 연구소를 지배했다.
어느새 브로커는 연구소에 있는 모두의 마음속에 거대한 기둥으로 자리 잡았다.
그에게 이 사태를 알려야 한다.
그라면 미친 해결사를 죽여 복수해줄 것이다.
세뇌에 가까운 자기암시를 읊조리며 나아가던 자화보살의 손끝에 벽이 닿았다.
권한을 넘겨받은 팔찌를 가까이 가져가자 벽이 소리 없이 접히며 그곳으로 빛이 비쳐 들었다.
뒤에 있던 연구원 하나가 자화보살을 밀치며 뛰어나갔다.
“살았다! 살았어!”
“기다려!”
자화보살이 황급히 외쳤지만, 연구원들은 안도감에 이미 뛰쳐나간 뒤였다.
“그대로 죽는 줄 알았어!”
“아직 썬더 콜링 필드 안쪽인가?”
자화보살이 신력을 끌어올렸다.
문이 열리면서 근처에 망령들이 배회하는 감각이 생생하기 때문이었다.
가슴에 번개 형태의 문장을 달고 있는 마법사 망령 하나가 자화보살과 눈이 마주쳤다.
‘오래전 이곳에서 죽은 마법사인가.’
자화보살이 안도하려는 찰나, 노년의 남성으로 보이는 마법사의 입에서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찾았다. 멀지 않아 다행이네.”
신시아 야스민의 목소리.
건물 전체 구조로 봐서 밖으로 통하는 길이 있을 것 같다는 이수련의 말을 듣고 좀비를 풀고 일대의 망령을 지배해서 물샐틈없는 감시망을 쳐두고 있었던 것.
그어어어-
어디선가 좀비들이 달려와 포위망을 만들었다.
기계화 좀비 이후로 영감을 받아 운동능력을 개선한 신시아의 좀비들이었다.
자화보살의 손에 새카만 기운이 뭉쳤다.
차사신이 나누어준 기운을 현세에 개입하는 힘으로 변환시킨 살煞이었다.
“물렀거라!”
힘찬 외침과 함께 사방으로 쏘아진 살이 좀비들을 통과했고, 좀비들은 뻣뻣해진 채로 바닥에 픽픽 쓰러졌다.
연구원들이 안도하고 있을 무렵, 새카맣고 거대한 뱀이 나타나 살 하나를 집어 삼켜버렸다.
“프사이! 아무거나 집어먹으면 못 써!”
모두의 눈이 목소리가 난 방향으로 돌아갔다.
하얀 피부, 붉은 눈동자, 고혹적인 외모, 풍겨 나오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연구원이 말을 절었다.
“시, 신시아 야스민.”
신시아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원혼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며 귀곡성을 내질렀다.
자화보살만을 바라보던 신시아의 목소리에 분노가 실렸다.
“오메가 님 앞에서 내게 개망신을 준 게 너구나?”
주인의 명령을 기다린다는 듯, 프사이가 붉은 혀를 날름거렸다.
신시아의 목소리가 잔혹하게 울려 퍼졌다.
“죽여. 남김없이, 전부.”
원혼들과 황천사가 연구원들에게 달려들었다.
자화보살이 방울을 흔들며 저항했으나, 그녀는 혼을 다루는 것과 후방 지원에 특출난 것이지 일선 전투에는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니었기에 결국 황천사에게 몸이 감겨 죽는 신세가 되었다.
가까이 다가온 신시아가 손을 뻗자 황천사의 크기가 작아지나 싶더니 손목을 타고 올라 원래의 팔찌 모습으로 변했다.
무당의 얼굴과 옷 위에 녹색으로 빛나는 글자를 신시아가 그려 넣자 무당이 천천히 일어섰다.
자화보살의 동공에 초점이 없었다.
신시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날 짜증나게 했으니까 너는 몸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굴려줄게.”
#
“사장님 괜찮은 걸까요?”
“그러게. 나도 걱정돼서 미치겠네.”
“걱정들 말거라. 낭군은 그리 약한 인간이 아니니라.”
야스민 저택의 굳게 닫힌 손님방 앞에서 앨리스와 신시아, 이수련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앨리스와 신시아는 조마조마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으며, 이수련은 그런 둘에게 진정하라고 타이르는 모양새.
방 안에는 오메가가 있었다.
오메가는 불타는 연구소에서 빠져나오는 것과 거의 동시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스킬의 반동과 정신적 충격 때문이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수련의 로봇들이 쓰러진 오메가를 바로 썬더 콜링 필드 밖으로 빼냈고, 젠에게 연락해 야스민 저택으로 이송했다.
연구소에서 탈출한 인원들의 정리를 마친 신시아가 한걸음에 달려왔음은 물론이다.
오메가는 며칠간 심하게 아팠다.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로 밤새 땀을 한 바가지씩 쏟아냈으며, 가늘게나마 깰 때는 죽을 몇 모금 먹고 다시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에브레와 벡을 진찰한 경험이 있는 흡혈귀 의사, 이그나시오는 오메가의 몸에 아무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내렸다.
혹시나 해서 모셔온 청운도 같은 의견이었다.
스스로 회복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만이 최선이라는 데 두 의사의 의견이 일치했다.
“그래도 벌써 닷새가 넘었어요. 깰 때마다 죽은 좀 드신다고 해도 그걸로 몸을 어떻게 유지하냐고요.”
끼니때마다 직접 죽을 들고 들어가는 신시아가 보기에 오메가의 얼굴이 날로 수척해지고 있었다.
그러자 괜찮을 거라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이수련도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앨리스가 둘을 보더니, 문고리를 잡았다.
“그럼 제가 살짝 보고 올게요.”
잠시 뒤, 앨리스가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사색이 되어 튀어나왔다.
“없어요! 사장님이 없어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 들어간 신시아와 이수련의 눈에 보이는 것은 잘 정리된 침구류.
처음부터 누구도 머문 흔적이 없는 것 같았다.
“설마 사장님이 안 좋은 생각을······!”
앨리스가 조그마하게 흘린 말에 신시아와 이수련의 시선이 교차했다.
이수련은 네트워크 해킹을 통해서 오메가가 연구소를 불태우기 직전까지의 CCTV 영상을 확보해 두었다.
혹시나 이런 짓을 한 놈들의 뒤를 캘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걸 신시아와 함께 봤고, 인공 자궁을 받치던 단상이 접힐 때는 참지 못하고 한참이나 영상을 멈춰야 했다.
그러니 둘은 오메가가 겪은 충격을 간접적이나마 이해하고 있었다.
능력이 특출나긴 하지만 오메가 역시 한낱 인간.
마음이 무너진 것은 아닐까.
신시아가 디바이스를 통해 레이먼드를 호출했다.
“오메가 님이 사라졌어요. 지금 당장 모든 인원을 동원해서 찾아요. 빨리요!”
거대한 야스민 저택이 분주해졌다.
야스민 공마저 나뉜 자아 여럿을 내보내 오메가를 찾을 정도니 다른 사용인들은 발에 불이 나게 뛰어야 했다.
그렇게 한참이나 저택이 들썩인 끝에 신시아에게 레이먼드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오메가 님을 찾았습니다!
“살아 계시죠? 어디 다친 데는 없고?”
-네. 1층의 식당에 젠 님과 함께 계신답니다.
앨리스, 신시아, 이수련이 식당으로 가서 본 것은 뺨이 수척해지고, 지저분하게 수염이 자란 오메가가 방금 샤워를 한 듯 끝이 젖은 머리로 앞에 놓인 음식을 천천히 꼭꼭 씹어 삼키는 광경이었다.
식탁의 반대편에 젠이 앉아 그런 오메가를 지켜보고 있었다.
체하겠다며 물을 따라 옆에 놓아주면서.
오메가의 눈빛만큼은 형형해서 잘못된 선택을 하지는 않을 것 같아 일행은 마음을 놓았다.
다만 풍기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누구도 말을 붙일 생각은 하지 못했다.
계속해서 턱을 움직이는 오메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신시아가 젠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오빠는 알아?”
“체육관에서 새벽 명상 중인데 찾아오셨더라고. 잠에서 깼는데 몸을 움직이고 싶으시대. 제법 누워계셨던 터라 큰 움직임은 힘들 것 같아서 같이 기체조하고 명상했지.”
평소 젠이 체육관에 들어가면 수련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누구도 접근하지 않으니 오메가가 사라진 걸 모를 만했다.
넓은 식당에 오메가가 음식을 씹어 넘기는 소리와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퍼져나갔다.
식사가 끝나고, 오메가가 입을 열었다.
“걱정시켜서 죄송해요. 아직 100%는 아니지만 몸은 좋아졌어요.”
잠시 끝을 늘이던 오메가가 어렵게 말을 이었다.
“산 사람은 살아나가야죠. 아이들도 그걸 바랄 것 같고요.”
“잘 생각했네.”
모두의 눈이 식당 입구로 들어갔다.
야스민 공이 걸어오고 있었다.
놀라움으로 눈을 크게 뜬 신시아가 말했다.
“설마 아버지 본체로 식당에 오신 거예요? 저택 지어지고 단 한 번도 본체로는 오신 적 없으시면서?”
민망하다는 듯 딸의 눈을 피하는 야스민 공을 향해 오메가가 일어서서 목례했다.
“전폭적인 도움, 기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젠의 협력, 흡혈귀 부대의 감시망 형성, 수송기 이용까지.
야스민 공이 물밑에서 도와준 부분이 많았다.
오메가의 감사 인사를 받은 야스민 공이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입꼬리가 움찔거렸지만, 체면을 지키는 데는 성공했다.
“감사를 받으려고 한 것은 아니네. 신경 쓰지 말게.”
아버지의 기쁨에 찬 표정을 거의 처음 보는 젠과 신시아가 말을 잃었을 때, 오메가가 몸을 돌려 앨리스에게 말했다.
“가자.”
“어딜요?”
“병문안. 벡 수술 잘 됐대.”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오메가.
뒤따라가려는 앨리스는 신시아와 이수련이 숙덕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가까이 가보니 둘의 대화가 가관이었다.
“남자들이 수염 기르는 거 정말 완전히 질색했는데 오메가 님이 수염 나니까 좀 달라 보이네.”
“본좌도 남성은 항상 깔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주의긴 하지만 저 모습을 보니 조금······생각이 흔들리는 것도 같구나.”
“그지? 좀 수척한데다가 눈빛도 깊어서 완전······. 나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막 튀어나오는 줄 알았잖아.”
“흡혈귀의 맥박은 아무리 빨리 뛰어도 분당 10회 내외로 알고 있느니라.”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주접에 가까운 둘의 대화를 뒤로 한 채, 앨리스는 오메가의 뒤를 따라 걸음을 빨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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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에어리어에 위치한 기계 교단 산하의 종합 병원.
철저하게 프라이버시를 보호해 VIP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특수동의 최상층 로비에서 헤지르 대주교가 일행을 맞이했다.
“많이도 몰고 왔군.”
“다들 보고 싶다고 해서요.”
“아이는 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게 좋다는 옛말이 있지. 가세.”
병실의 문을 열고 앨리스, 신시아, 이수련이 들어갔다.
“잘 있었어?”
“너무 귀여워!”
“아기는 종족을 불문하고 참으로 신비로운 존재이니라.”
안에서 들리는 말들.
나는 차마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조용히 병실의 문을 닫은 대주교가 내게 말했다.
“고생 많았네. 대강 들었어.”
고개만을 간신히 끄덕였다.
“너무 많은 짐을 지려 하지 말게. 힘들 때는 주위에 얘기도 하고, 도와달라고 요청도 하면서 살아. 자네는 충분히 그렇게 해도 돼. 이번에는 잘했어.”
“······감사합니다.”
대주교에게 물었다.
“제가 더 능력이 있었다면, 다른 아기들도 구할 수 있었을까요?”
잠시 침묵하던 대주교의 말이 전해졌다.
“젠 말일세. 일반적인 인간보다 성장 속도가 빠르다고 하네. 지금은 수술로 퓨어가 아니게 됐지만, 성장 속도 때문에 퓨어가 아닌 건 아니야. 자연적인 돌연변이라고 봐야지. 일체의 외부 자극이나 조작이 없을 때 비해 약 2배에서 3배 정도로 성장이 빠르다더군.”
대주교의 말에 집중했다.
“6~7년이면 성인 정도의 신체를 가지게 될 거라는 소리야. 그동안 빠르게 성장한 뼈와 근육, 장기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세심히 지켜봐야 하고, 필요하다면 추가적인 시술과 수술도 있어야겠지. 그리고 그때가 되면 본인이 싫다고 하더라도 내가 억지로라도 벡을 흡혈귀로 만들 걸세. 노화를 정지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
숨을 한 번 고른 헤지르 대주교는 나와 시선을 맞춘 채로 얘기를 이어나갔다.
“저 아기, 자네를 만나지 않았으면 틀림없이 죽었을 걸세. 자네를 만났기 때문에 살 수 있었던 거고, 자네가 살린 거야.”
시야가 흐려져 고개를 떨군 내 어깨에 대주교의 손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지켜내지 못해 분하고 슬플 수도 있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자네가 지켜낸 걸 생각하게. 오메가 자넨 틀리지 않았어. 잘하고 있고, 앞으로도 더 잘 할 수 있을 걸세.”
말없이 고개만을 끄덕이자 민망했던지 대주교가 몇 마디 덧붙였다.
“이미 한번 거하게 잘못해본 내가 하는 말이니 틀림없을 거야.”
대주교가 기계 교단의 표식이 새겨진 손수건을 내밀었다.
“닦게. 어른이 울면 애들도 울어.”
피식 웃고 눈물을 닦은 뒤에 돌려주자 대주교는 병실 문을 열고 나를 안으로 데려갔다.
벡을 안고 있는 육아용 안드로이드에게 다가가자 앨리스, 신시아, 이수련이 옆으로 비켜주었다.
“안아보겠나?”
대주교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자 안드로이드가 조심스레 벡을 내게 넘겨주었다.
따스한 체온이 무척이나 평안했다.
눈을 뜬 벡이 나를 보고 방긋 웃었다.
“아부~.”
아무런 근심 걱정 없는 그 미소에 나도 웃었다.
잡아달라는 듯 이리저리 휘젓는 벡의 손에 내 손가락을 잡혀주었을 때,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결국 다시 한번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감격인지 고마움인지 미안함인지 스스로도 판별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헤지르 대주교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망할 네오-서울. 오늘도 비가 오는구먼.”
왜 내 눈가에만 비가 오는지.
왜 오늘따라 내리는 비가 그렇게 뜨거웠던 건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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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 일행이 병원에 도착하기 조금 전.
젠의 앞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던 에브레는 슬슬 허벅지가 저리는 것을 느꼈다.
슬그머니 다리를 좀 펴려는데, 눈도 뜨지 않은 젠의 엄한 목소리가 들렸다.
“작은 욕망에 굴복하면 큰 욕망을 이겨낼 수 없게 된다.”
움찔한 에브레가 다시 다리를 접고 눈을 감으려는 찰나, 그의 오른쪽 눈에 찬란한 빛이 내려앉았다.
미래시가 끝난 뒤, 에브레가 얼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바뀌었어요.”
천천히 눈을 뜬 젠이 에브레를 바라보았다.
에브레가 막힌 둑이 터진 제방처럼 말을 쏟아냈다.
“똑같은 광경을 봤어요. 오메가 삼촌이 아기를 안고 있는 장면. 그런데 이전에는 밖에 비바람이 내리치는 곳이었고······그때 차마 말은 못 했지만, 아기가 되게······아파 보였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똑같이 아기를 안고 있지만, 병실 같은 곳이었고 아기도 활짝 웃고 있었어요.”
“에브레.”
“네.”
“도사란 무엇이라 말했는지 기억하고 있느냐.”
“순리를 거부하고 역천을 기치로 삼아 하늘로 오르려는 존재요.”
솔직히 에브레에게는 다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지만 영특한 아이였기에 젠이 했던 말 대부분을 외우고는 있었다.
젠이 흡족하다는 듯 빙긋 웃었다.
“역천은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도의 길에 발을 들인 네가 생각하기에,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고 그렇게 흘러가는 것 같으냐?”
잠시 생각하던 에브레가 크게 외쳤다.
“······! 아뇨! 모든 게 정해져 있다면 억울할 것 같아요! 제가 내리는 판단이 없는 것 같잖아요. 저는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고 싶은걸요.”
“내 생각도 그렇다. 천기天氣는 분명 존재하지. 하지만 그것은 아주 거대할 뿐 흐름인 것에는 분명하단다. 네가 말한 생각과 행동으로 방향을 트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다. 네가 보는 것은 아마 여러 갈래의 미래 흐름 중 가장 가능성이 큰 것이 아닐까 싶구나.”
“그럼 오메가 삼촌은······.”
“미래의 흐름을 바꾼 것이지.”
에브레의 입이 떡 벌어졌다.
“와······오메가 삼촌은 엄청나고 대단하네요.”
순수한 제자의 가식없는 감탄을 들으며 젠이 한 번 더 빙그레 웃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단다. 그런 존재는 정말 드물거든. 평생에 한 번 만나기조차 어렵고 기쁜 일일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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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 병원에서 울었죠?”
“아니야!”
“아니긴. 다 봤는데.”
봤어도 모른 척 좀 하지.
앨리스 얘는 진짜 악마가 따로 없다.
민망해서 괜히 소리를 빽 질렀다.
“의뢰나 가져와! 이럴 때일수록 몸을 움직여야 해. 그래야 잡생각이 사라져.”
“우리 사무실 때문에 임시 휴업이잖아요.”
“······맞네.”
패드를 이리저리 뒤적이던 앨리스가 내게 말했다.
“의뢰는 아닌데, 하르파고스 이사님이 시간 좀 되면 얼굴이나 보자고 메일 주셨네요. 부재중 통신도 있고요. 누굴 소개해주고 싶으시대요.”
고개를 내려 입고 있는 후드티를 바라봤다.
특수 마공강 티셔츠가 이번 일로 작살이 나서 후드를 입고는 있었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티셔츠를 새로 하나 구입 할 생각이었는데, 직원 할인이면 더 저렴하지 않을까?
그것도 임원인데?
누굴 소개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하르파고스 이사를 만나봐야겠다.
“약속 잡아줘. 너무 급하게는 말고. 할 일 없어 보이잖아.”
"사장님 요새 백수랑 다름 없잖아요."
"어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