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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캐여도 너보단 강함-88화 (89/258)

088.

088.

야스민 공과 헤지르 대주교의 눈빛이 불탔다.

먼저 포문을 연 쪽은 야스민 공.

“세상에 많은 종족이 있지만, 불로장생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종족이 뭔가. 누가 뭐래도 우리 흡혈귀 아니겠나. 그걸로 끝이 아니지. 강력한 피를 주입받으면 신체 내부가 최상의 상태로 ‘재정립’된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 아닌가. 환골탈태를 이룬 무인들조차 흡혈귀가 되기를 바라는 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네. 흡혈귀가 된다면 그 호흡기 문제 정도는 바로 해결할 수 있을 걸세.”

눈을 가늘게 뜬 헤지르 대주교가 야스민 공의 논리에 파고들었다.

“한때 많은 무인이 흡혈귀가 되기를 선망했던 적이 있던 걸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흡혈귀가 된 이들 중 만족할만한 효과를 얻은 건 극소수 아닙니까. 일반적인 흡혈귀에게 물려서는 안 된다는 게 밝혀졌지요? 말씀하신 ‘강력한 피’를 부여할 흡혈귀는 많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가문의 힘이 분산되는 것을 염려하기에 아무에게나 ‘주입’하지 않기도 하고요. 설마 야스민 본가의 족보에 아기 하나를 늘릴 셈이십니까?”

특유의 위엄과 여유를 잔뜩 입가에 머금은 채로 야스민 공이 답했다.

“자네 말이 맞네. 누구나 그런 축복을 누리는 건 아니지. 또한 새로운 식구를 늘리기는 힘들어. 따라서 본가에 편입시키지는 못하겠지만―”

승기를 잡았다는 듯 밝은 표정의 헤지르 대주교에게 야스민 공이 손을 들어 올려 아직 자신의 말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렸다.

“레이먼드의 가계家系에 들이지. 피만 홀스릭 가문에게서 받을 뿐, 본가에서 책임지고 양육할 것도 약속하고.”

집사 레이먼드의 가문인 홀스릭은 아주 오래전에 야스민 가문에서 떨어져 나간 방계이자 대대로 집사 자리를 맡는 가문이라고 신시아가 설명해 준 적이 있었다.

수는 적지만 흡혈귀로의 능력이나 위상이 아주 높아서 상위 다섯 가문의 바로 아래에 위치할 정도라고.

품격 있게 앞에 놓인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신 야스민 공이 그때까지도 헤지르 대주교를 향해 세웠던 손바닥을 비스듬히 틀었다.

무언가를 권하는 손짓.

얘기할 게 있으면 해보라는 여유가 묻어나왔다.

크흠하는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헤지르 대주교가 나를 바라보며 입을 뗐다.

“당장이라도 호흡기 전체를 교체할 수 있네. 물론 아기가 지닌 특성에 맞게 완벽히 커스텀해서. 성인이 되기 전까지 점검만 몇 번 받으면 되는 정도고, 성장이 끝나 완전히 자리 잡게 되면 유황이나 독성 가스를 호흡해도 문제가 없을 걸세. 교체할 수 없는 만약의 경우에 선택할 수 있는 방안도 많지.”

“필터 중요하지. 나처럼 마스크 쓰고 다니기 싫다면 더욱더.”

한 마디 얹는 테오릭 경을 향해 야스민 공이 째려보며 경고했다.

“테오릭 자네가 기계 교단과 친밀하게 지낸다는 건 알고 있지만 여기서는 자중하게.”

“주의하겠습니다.”

헤지르 대주교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은퇴가 예정되어 있네. 곧 세상의 관심에서 멀어질 거고, 그렇게 되면 아이를 돌보기가 더 쉬워질 건 당연한 일이지. 사제가 되라고 강요하지도 않겠네. 그저 늙은이의 소일거리이자 소소한 즐거움이 되겠지. 아기가 성장하는 걸 보는 게 말일세. 영원한 현역이라 사람들의 입에서 계속 화제가 되는 야스민 가문과는 다르지 않겠나. 정서적인 안정이라는 면을 얘기하고 싶은 것이네.”

마지막 말을 하면서 헤지르 대주교는 야스민 공을 바라봤고, 야스민 공은 왠지 모르게 헤지르 대주교의 시선을 피했다.

기세를 잡았다는 듯, 대주교의 말이 빨라졌다.

“불로장생 좋지요. 그런데 피를 주입 당한 그 당시의 상태로 늙지 않는 것 아닙니까? 왜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중요하지요. 흡혈귀라고는 해도 평생 아기인 상태로 살아가야 하는데요. 이런 선택과 결정권 문제 때문에 미성년자에 대한 주입을 금지하고 있는 걸로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공께서 직접 가규家規로 선포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래서 야스민 가문은 다른 가문들에 비해 외형이 어린 흡혈귀 숫자가 적지 않습니까.”

야스민 공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아이의 부모가 흡혈귀고, 지금처럼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에 한해서는 조치를 먼저 행한 뒤에 가문 회의에 안건을 올릴 수 있네.”

“오메가는 흡혈귀가 아니고 가문에 속해있지도 않습니다.”

“내 대리인이니 법리상 흡혈귀라고 봐도 무리가 없네.”

이건 누가 봐도 야스민 공이 억지를 쓰고 있는 거였다.

똑같이 느꼈는지 테오릭 경이 자르고 들어와 내게 물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하던 아기가 퓨어가 아니게 될 텐데, 그건 상관없나?”

“오히려 감사할 일이죠. 퓨어라는 이유로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요. 상관없습니다. 아기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성장할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합니다.”

입맛을 다신 테오릭 경이 뭔가를 중얼거렸다.

“상대가 야스민 가문이랑 기계 교단만 아니었으면 나도 여기에 참전하는 건데······에잉······.”

“예?”

“아닐세.”

그때까지도 야스민 공과 헤지르 대주교의 시선 사이에서 불꽃이 튀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로 헤지르 대주교가 내게 말했다.

“잠깐 다른 곳에 가 있게. 어른들끼리 얘기를 좀 해야겠어.”

“어······영감님, 저도 어른인데요.”

역시나 고개도 돌리지 않은 야스민 공이 반지 낀 손을 들고 나지막이 읊조렸다.

“레이먼드, 오메가를 잠시 다른 방으로 안내해주게.”

저도 어른이라고요.

하지만 곧 문을 열고 들어온 레이먼드가 나를 자연스레 밖으로 유도했다.

고개를 돌려 마지막으로 본 장면은 야스민 공과 헤지르 대주교가 테오릭 경도 다가오지 못하게 막은 채 둘이 머리를 맞대고 숙덕거리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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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뒤, 다시 응접실로 향한 내게 헤지르 대주교가 말했다.

“자네만 동의한다면 아기는 교단에서 맡게 될 걸세. 서류로는 복지 사업으로 처리되겠지만 내가 직접 데리고 있을 거고, 수술은 당장이라도 준비시킬 수 있네.”

재빨리 야스민 공이 끼어들었다.

“일 년에 두 번 정기검진은 우리가 맡게 될 거고, 무엇보다 성인이 된 이후에 아이의 의사를 물어 본인의 의지가 있다면 조금 전 말했던 대로 홀스릭 가문의 일원으로 들이겠네.”

“두 분간의 합의가 이루어졌다면 저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과분할 정도의 도움, 감사드립니다.”

“자네에게 받은 게 더 많으니 신경 쓸 필요 없네.”

“나도 대주교와 같은 뜻이라네.”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였다.

대림 에어리어로 돌아오자 기계 교단 마크가 새겨진 수직이착륙기가 건물 위에 떠 있었다.

제법 높아 보이는 의복을 입은 사제가 방에 내려와서 앨리스가 안고 있는 아기를 받아 갔다.

그가 내게 말했다.

“강남 에어리어에 있는 기계 교단 산하의 병원으로 이동할 겁니다. 수술이 끝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연락은 제게 주시면 돼요!”

사제가 앨리스의 연락처를 받아갔다.

벡이 깨서 손을 휘저었다.

녀석의 손에 내 손가락 끝을 쥐여주니 꼭 붙잡는 것이 느껴졌다.

“건강해져서 보자.”

벡의 손을 놓았다.

수직이착륙기에서 내려진 로프에 벡을 안고 있는 사제가 팔을 연결하자 천천히 위로 끌려 올라갔고, 벡과 사제가 탑승한 수직이착륙기가 머리를 강남 에어리어로 돌렸다.

아래로 내려와서 신시아와 이수련, 젠을 불러 모았다.

“우린 우리가 할 일을 하죠.”

“뭐든 말만 하거라. 이런 천인공노할 자들에게 벌을 내리는 일이라면 아낌없이 돕겠노라.”

이수련의 말에 신시아와 젠도 무게감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에게 말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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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민 저택에서 나서는 테오릭 경의 차 안, 뒷좌석에는 테오릭 경과 헤지르 대주교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야스민 공과 헤지르 대주교 간의 밀약 내용을 듣지 못한 테오릭 경이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대주교님, 무슨 말씀을 하셨길래 야스민 공이 그렇게 쉽게 뜻을 접은 겁니까. 야스민 공이 그렇게 져주는 모습은 처음 봤습니다. 원하는 건 무엇이든 품에 넣어야 만족하는 사람이 야스민 공 아닙니까.”

테오릭 경을 흘끗 바라본 헤지르 대주교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원하는 것은 현재의 것이니 미래의 가치를 제시하면 되네.”

“예?”

“야스민 가의 영애가 오메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테오릭 경이 눈을 크게 떴다.

“아뇨, 몰랐습니다. 저는 타이린드라는 루트 전투원이랑 좋은 관계인 줄 알았는데요.”

“거기까진 모르겠고, 어쨌든 야스민 가의 영애와 오메가 사이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기로 했네. 교단 차원이 아니라 개인 차원이 되겠지만.”

“야스민 공이 오메가를 마음에 들어 하긴 하나 보군요.”

테오릭 경을 스윽 쳐다본 헤지르 대주교가 코웃음을 쳤다.

“자네가 할 소리는 아니지 않나? 잘 모르는 사람들은 오메가를 페룬 마탑 소속으로 알고 있던데.”

“허허허······.”

“얼핏 떠보니 오메가와는 계약 관계일 뿐이라 어떻게든 더 엮이고 싶어서 야스민 공이 몸이 달았어. 그리고 다른 이유 하나는.”

잠시 고민하던 대주교가 테오릭 경에게 뜬금없어 보이는 질문을 하나 던졌다.

“자네 신생아나 영유아 본적 별로 없지?”

“예······그렇습니다만.”

“신생아는 3~4개월 정도가 되어야 시력이 어느 정도 형성되고 손과의 협응이 가능해진다네. 1년이 지나야 성인과 비슷한 시야를 가지지. 그런데 야스민 공이 말하길 의사의 소견으로는 아기가 생후 12개월 정도의 발달 정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군. 정말 신생아라면 발달 속도가 굉장히 빠르지만, 그 개월 수의 아이라면 몸무게가 덜 나가는 것 외에는 건강하다는 말도 있었고. 인공 자궁에서 오래 머무른 것인지, 아니면 밖에 나와서 성장 속도가 빨라진 것인지 세심한 조사가 필요해. 기계 교단의 병원 시설이라면 장기간의 조사와 대응이 가능할 걸세. 호흡기 문제도 바로 대처할 수 있는 건 물론이고.”

“그런 조사라면 야스민 가에서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쪽에서 소유한 생명공학 관련 연구소나 제약 기업도 상당히 많을 건데요.”

“그 점 때문일세. 네오-서울에 야스민 공의 손이 닿지 않은 생명공학 기업과 연구소가 없을 텐데 이런 일이 물 밑에서 일어났다는 것에 대해 야스민 공이 매우 분노했어. 게다가 영애가 현장에 있는 걸 알면서도 습격이 이루어졌다지? 곧 의심 범위 내의 기업들에게 강도 높은 압박이 들어갈 걸세. 말이 의심 범위 내지, 사실상 네오-서울에 있는 생명공학 기업 전수조사라고 봐야지.”

“신용의 문제군요.”

“그렇네. 교단은 생명공학 기업들과 사이가 그리 좋지 않으니 아기를 우리가 데리고 있는 편이 더 안전하고 오메가에게 신뢰를 줄 수 있다는 데 서로의 이해가 닿았네.”

감탄하던 테오릭 경이 다른 걸 물었다.

“그런데 대주교께서는 어떻게 그렇게 아기에 대해 잘 아십니까. 자녀도 없으시면서.”

뿌듯한 표정을 지은 헤지르 대주교가 답했다.

“내가 집전한 신생아, 영유아 세례가 몇 건인 줄 아나? 척 보면 아기들 개월 수부터 몸무게까지 맞출 정도는 될 걸세. 종족 관련 없이.”

“의외의 면모군요.”

고민하던 테오릭 경이 결국 또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오메가의 피가 섞여서 받아들이신 건 아니고요?”

대주교는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오메가를 닮은 아이가 양손으로 전기톱 모형을 들고 뛰어다니는 미래를 상상하고 있었다.

‘기계 장치의 신이시여. 대전사의 아이를 길러낼 영광 주셔서 감사하나이다. 막중한 임무, 부족함도 과함도 없이 해내겠나이다.’

한편, 테오릭 경은 얼마 전 공공 집행본부를 방문할 일이 있었다.

선물이랍시고 여다함이 남산 페룬 마탑 앞에 버려두고 간 장갑차의 처분 문제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노덴스에게 들은 얘기는 자못 충격적이었다.

요새 오메가의 사무실에서 자주 보이는 구미호 소녀가 최후의 수호자이며, 퓨전 코퍼레이션의 총수일지도 모른다는 추측, 오메가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것 같다는 말까지.

이걸 야스민 가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한 대주교에게 말해줘야 하나 테오릭 경은 고민했지만,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때로는 모르는 것이 좋은 쪽인 경우가 있는 법이니까.

세상 많은 일 대부분은 그런 경우가 많으니까.

#

네오-서울 항공안전본부.

운항관리사 두 명이 그날 예정된 비행 리스트를 훑어보고 있었다.

“선배, 오늘 항로 변경 신청 있는 거 알았어요?”

“무슨 변경.”

“강동 에어리어 비행장에서 출발하는 수송기인데, 잠시만요······야스민 가문 거네요.”

“거긴 웬만해서 변경 잘 안 할 텐데? 뭐 어떻게 하겠다는데.”

“상해 권역으로 가는 항로인데요. 원래는 네오-서울 서쪽으로 빠져나가서 인천 권역 남쪽으로 내려가는 경로였는데, 우회하지 않고 최대한 직선거리로 바꾸겠다나 봐요.”

“그럼 비행장에서 바로 남서로 잡겠다는 거야?”

“네. 썬더 콜링 필드 위를 지나가겠대요.”

“누구 실업자 만들 일 있나. 거부해. 평소에 잘 다니다가 갑자기 왜 그런다니.”

“시장님 직인 찍혀있는데요?”

“······.”

“유사시에 발생하는 모든 책임은 야스민 가에서 지겠다는 약정서도 왔어요.”

“승인.”

“넵.”

강동 에어리어에서 떠오른 수송기가 썬더 콜링 필드 위를 지나갈 때, 수송기 꽁무니 쪽의 문이 열렸다.

방풍 고글을 쓰고 몸에 부적을 덕지덕지 붙인 오메가, 그리고 결속 상태로 그의 주위에 서 있는 퓨전 코프의 원격 조종 로봇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송기 바로 옆에서 번개 한 줄기가 지나갔다.

위아래 할 것 없이 사방천지 번개가 가득 치는 모습을 본 오메가가 불어닥치는 바람 때문에 목소리를 크게 키워 귀걸이를 통해 외쳤다.

“젠! 이거 맞아요? 아무리 진법을 흔드는데 강력한 힘이 필요하다고 해도 여기서 뛰어내리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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