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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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면······.”
신시아의 연락을 받고 한달음에 달려온 젠이 의자에 앉아 자신의 허벅지 위에 벡을 앉혔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벡의 등과 목을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린 뒤 몸을 살살 흔들자―.
신생아용 분유를 잔뜩 먹은 벡이 ‘프후’하는 소리와 함께 트림을 했다.
젠이 정한 여성 거부 심리적 한계선 때문에 방의 반대편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앨리스와 이수련이 그런 젠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봤다.
“평생 여자랑은 관련 없을 것처럼 행동하더니 아기는 잘 다루는구나. 사실은 어디에 자식이라도 감춰두고 있는 것이더냐?”
트림한 벡을 안아서 등을 토닥거리던 젠이 이수련의 말을 듣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레비와 신시아는 제가 업어 키웠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유모들 품에서 칭얼거리던 아이들이 제 품에만 안기면 그렇게나 잠을 잘 자더군요. 아마 제 기운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싶지만요. 이것도 참 오래된 일입니다. 족히 백 년은······.”
“오빠!”
다급히 젠의 입을 막는 신시아.
그런 신시아를 향해 젠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허! 애 놀랄라!”
배가 부르니 잠이 오는지 벡의 눈이 껌뻑이다 감겼다.
나를 가까이 다가오게 한 젠이 속삭였다.
“조용하고 춥지 않은 방에 데려다 놓으면 될 겁니다. 여긴 창이 깨져서 아기한테는 좀 추울 것 같군요. 그리고 아마 2~3시간 간격으로 깨서 울 거라서 누군가가 계속 봐줘야 합니다.”
벡을 받아 안은 내가 앨리스에게 가서 젠이 말한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앨리스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인간 신생아 케어 시트랑 육아 매뉴얼 다운로드 받았어요. 육아용 안드로이드만은 못해도 잘 할 수 있어요.”
“그래. 다른 방 하나 불 들어오게 해서 비워놓으라고 후앙한테 말했으니까 정리되면 거기서 애 좀 봐줘.”
“네.”
어쩔 줄 모르던 아까와 다르게 제법 능숙한 손길로 벡을 받은 앨리스가 조용히 속삭였다.
“3시간마다 깨서 밥 먹이고 기저귀 갈고 몸 닦아주고······. 보통 손이 많이 가는 게 아니네요. 아기 때부터 태양광 필름 피부 이식이나 인간용 변색 엽록소 주입 수술을 왜 하는지 알 것 같아요.”
그러더니 내게 물었다.
“아까처럼 침입하고 그런 일은 없겠죠?”
자신 있게 답했다.
“대림 에어리어, 아니 네오-서울에서 지금 이 건물처럼 집중 케어 받는 곳 별로 없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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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만 생각했으면 당장이라도 야스민 저택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동 중에 습격당할 위험, 딜런과 신시아가 조심히 다뤘다고는 하지만 비를 맞은 벡의 몸 상태가 어떨지 모르는 점, 무엇보다 침입자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 등의 이유를 들어 이곳을 뜨지 않기로 했다.
안전에 소홀히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과잉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신경을 썼다.
일단 젠이 데리고 온 흡혈귀들이 근처 일대에 숨어들어 경계망을 갖췄다.
다른 흡혈귀들을 차치하더라도 능력 제한 법령 대상자 중 가장 강할 것으로 예상되는 젠이 온 것만으로 든든했다.
안타란을 구해준 흡혈귀 의사가 와서 벡의 몸 상태에 이상이 없다는 것을 알려준 것은 덤이다.
분명 진찰 과정에서 벡이 퓨어라는 것을 알아챘을 텐데,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
마치 자기는 아무것도 보고 듣지 못하며 그저 가문 어른의 부탁을 처리하러 왔다는 태도.
가문 구성원들에 대한 야스민 공과 젠의 영향력을 여실히 볼 수 있었다.
야스민 가문뿐만이 아니다.
강철 질감이 역력히 드러나는 우비를 입은 마법사들이 가슴에 페룬 마탑의 문장을 단 채로 건물의 보안설비 구축에 도움을 주고 있었다.
그중에는 학교 괴담 작전에서 내가 진입해 있던 동안 외부의 출입을 막아선 직계 제자들도 몇몇 있었고, 나를 향해 신뢰의 눈빛을 보내왔다.
이제 와 말하지만, 처음 테오릭 경이 나를 지원하기 위해 폐교로 직계 제자들을 보냈을 때 그들이 영 탐탁지 않은 눈길로 나를 여러 번 훑었던 것에 비하면 정말 상전벽해, 장족의 발전이었다.
테오릭 경은 여전히 나를 페룬 마탑의 일원으로 소개하기를 멈추지 않았고, 여다함도 거들고 있으니 저들이 내게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일 것 같기는 했지만.
게다가 지하에서는 스콰이어의 친위대가 헤지르 대주교가 보낸 기계 교단의 전투 사제들과 함께 건물 아래로 지나가는 수로를 틀어막고 있었다.
네오-서울에 신고, 등록하지 않은 전투 로봇도 성당 지하에 있으니 필요하면 얘기만 하라는 헤지르 주교의 말.
든든하긴 했지만, 위험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백호 수인에 대한 정보도 모든 경로를 통해 최대한 빨리 파악해 전달하겠다는 루트의 의사가 스냅샷을 통해 내게 전해진 상황.
“무슨 일인지 제대로 설명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다양한 집단에서 힘을 보태다니······. 힘을 보태는 정도가 아니지. 어떻게든 더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을까 달려들고 있는 수준 아니더냐. 이런 일이 가능할 것이라고 본좌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느니라.”
이수련마저 놀랄 정도의 연합 작전.
나는 그런 이수련에게 말했다.
“제가 좀 괜찮게 살았나 보네요.”
그리고 농담으로 덧붙였다.
“퓨전 코퍼레이션 총수님이랑도 좀 아는 사이인 줄 알았는데 그쪽에서는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네요.”
“기, 기다려보거라!”
쿵쿵거리면서 이수련이 밖으로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퓨전 코프의 경호 특화 원거리 조종 로봇 여러 대가 거대한 트레일러에 실려서 건물 앞에 도착했고, 퓨전 코프 본사에 대기 중인 S급 파일럿들과 동조한 로봇들이 앨리스와 벡이 있는 방을 지키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이니 사실상 건물을 사용하고 관리하는 후앙 패거리는 입을 다문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가는 사람들의 꽁무니만 바라보는 실정이었다.
마탑주인 테오릭 경의 성정을 그대로 보고 배워 다른 마탑의 마법사들을 똥으로 아는 페룬 마탑의 직계 제자들이 내게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 뒤에 건물에 손을 좀 대야 할 것 같다고 말할 때는 목소리도 못 내고 눈만 굴리더니, 흡혈귀들에게 감시 구역을 지정해 준 젠이 건물 안으로 들어설 때는 ‘혀······혈뇌진인!’ 하는 소리와 함께 주저앉은 후앙이 내쪽을 향해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더······대단한 사람이었어······.”
“이렇게 보니 네 말이 맞네. 나 좀 대단한 듯?”
여전히 주저앉아 있는 후앙이 혼란에 빠진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걸······본인 입으로······.”
열심히 일한 탓인지 살이 제법 빠지긴 했지만, 아직 투실투실한 녀석의 엉덩이를 걷어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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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됐습니다.”
방에 남겨진 흔적을 읽던 젠의 부풀었던 소맷자락이 원래대로 가라앉았다.
“신시아가 제대로 본 게 맞습니다. 도가 계통의 인물이 있군요. 부적술에 능한 것 같은데, 얼마나 오래 공을 들였는지는 몰라도 귀환부까지 사용할 정도면 쉽게 볼 수준은 아닙니다. 진법이나 결계에도 조예가 높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니, 거의 확실하다고 봐야죠. 그래서 정찰기 사진에도 아무것도 안 잡히는 겁니다.”
딜런이 말한 위치의 상공을 향해 야스민 가의 무인정찰기가 날아갔지만 보내진 사진에는 아무것도 찍혀있지 않았다.
예측하기 힘든 번개 폭풍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젠의 생각은 괴한 중 하나가 그곳에 광범위한 진법을 펼치고 있다는 쪽인 것 같았다.
“도道와 술術 중에서 술에 집착하는 도사들이 흔히들 잘못된 길에 발을 들이곤 합니다. 직접 징치하고 싶지만······. 제 입장이 입장인지라 움직이기 어려울 것 같군요. 네오-서울 경계 밖의 일이기도 하고요.”
젠은 야스민 가문의 첫째일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도관의 장문인 이상의 대접을 받는다.
그의 어깨 위에 올라간 상징성이 너무 크다는 얘기.
만사 제치고 여기까지 와준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인데 더 이상의 부담을 지울 수는 없었다.
감사할 일이 그 전에 하나 더 있기도 했고.
“아닙니다. 에브레를 받아주신 것만 해도 제가 크게 감사할 일인데요.”
결국 미래시 능력자인 에브레는 다른 권역으로 가서 스콰이어와 떨어지는 것보다는 도관의 속가제자가 되는 길을 택했다.
말이 도관의 속가제자지 실상은 젠의 직속 제자나 다름없었다.
다만 사항이 사항이라 모든 것이 비밀일 뿐.
스콰이어도 에브레의 아버지인 만큼 모든 사정을 알아야 한다고 판단되어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다 한 뒤에 내린 결정이었다.
젠 얘기를 하니 에브레도 동자공을 익혀야 하냐며, 자기는 손자손녀를 보고 싶다길래 속가제자는 상관없다고 하니 안심하는 스콰이어의 표정이 일품이었다.
“아주 점잖고 총명한 아이라 가르치는 맛이 있습니다. 오메가 씨와의 대련을 통해 제게도 가르치는 재능이 있는 게 아닌가 했는데 그 생각이 맞았나 봅니다.”
에브레도 죽어라고 구르고 있다는 소리와 다르지 않았다.
정말 아무런 악의 없이 순수하게 웃고 있는 젠이라서 더 무서웠다.
“그래도 썬더 콜링 필드를 지나갈 정도의 도움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요?”
“제가 번개를 좀 다루지 않습니까. 준비가 좀 필요하니 그쪽으로 가기 전에 말씀만 해주시면 됩니다.”
아직 방에 남아 있던 신시아가 젠에게 칭얼거렸다.
“오빠, 아직 안 끝났어? 나랑 이수련도 여기서 할 거 많아. 사람이 죽은 곳에서 흔적 찾는 건 오빠보다 내가 낫지 않을까?”
순순히 양손을 들고 자리를 양보한 젠이 내게 물었다.
“이제 슬슬 저택으로 가실 시간 아닙니까?”
“네, 가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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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야스민 저택으로 향해 응접실로 안내받았다.
나를 안내하던 집사장 레이먼드가 응접실의 문 앞에서 멈춰서서 말했다.
“다른 분들은 이미 도착하셨습니다.”
절도 있고 정중한 동작으로 문을 여는 레이먼드.
안쪽에 모여있는 인물들이 보였다.
야스민 공, 테오릭 경, 헤지르 대주교.
각자 야스민 가문, 페룬 마탑, 기계 교단 대림 교구를 대표하는 인물들.
네오-서울의 거물을 꼽으라면 못해도 열 손가락 안에는 꼽힐 인물들이었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하고 기다리게 만들어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내 말에 별일 아니라는 듯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사람은 테오릭 경이었다.
“안 오고 배길만 한 일이었어야지. 자네 아들 일이라며. 그것도 갑자기 생긴 아들. 그리고 원래 늙은이에게는 젊은이의 고민을 들어줘야 할 의무가 있다네.”
테오릭 경이 야스민 공과 헤지르 대주교를 한 번씩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나이 많은 두 노친네 사이를 내가 중재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어리지만 테오릭 경도 노인이긴 하다.
노인치고는 근육이 과하게 많아서 그렇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제 유전 정보를 가져다가 인공적으로 퓨어를 만들어낸 연구소가 있습니다. 한 연구원이 완성된 아기를 데리고 탈출했고, 아기는 지금 제가 보호하고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는 제가 아버지가 되는 셈이죠.”
“자네한테 애가 생겼다고 젠이 가봐야 한다고 했을 때, 신시아를 두고 잘도 그런 짓을 한다 싶었지만 이건 예상을 벗어나도 너무 벗어나는 일이군.”
황당하다는 야스민 공의 목소리.
“당사자의 동의를 받지 않은 유전 정보를 활용한 일체의 행위가 금지되어 있는데 잘도 그런 미친 짓을 자행하는 자들이 있군. 퓨어 섭식? 시대가 어느 때인데 그런 걸 믿는단 말인가.”
화를 내는 헤지르 대주교.
둘을 진정시킨 테오릭 경이 내게 묻는다.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서늘한 목소리가 번진다.
“연구소에 관련된 놈들을 잘근잘근 밟아 죽일겁니다. 아기를 회수하려다 실패했으니 그쪽에서도 뭔가 행동을 보일 것이고, 저도 빠르게 행동해야겠죠.”
“우리가 도울 일이 있으면 말하게.”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네오-서울 밖에서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고, 제가 깊게 얽혀 있는 만큼 스스로 해결하고 싶습니다. 다만.”
숨을 한 번 골랐다.
“미리 말씀드렸지만 모여주십사 한 건 아기의 처우에 관해서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입니다. 아기는 호흡기 쪽에 문제가 있어 열흘 후면 사망합니다. 비록 진짜 제 아기는 아니지만 제가 아니었으면 그런 결말을 맞을 일도 없는 아기이니 도의적인 책임을 다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가 하는 해결사 일의 특성상 갓난아이를 맡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문에서 데려가지.” / “교단에서 맡겠네.”
야스민 공과 헤지르 대주교의 발언이 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