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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캐여도 너보단 강함-86화 (87/258)

086.

086.

여전히 어두운 방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깨진 창문 너머로 번쩍이는 네온사인 불빛, 그리고 방의 한 가운데 눕혀진 딜런의 시신이었다.

딜런의 주위에는 깨진 유리 조각으로 바닥을 긁어내서 만든 문자들이 가득했는데, 단 한 글자도 읽을 수 없었다.

“원래라면 사망 직후 초혼된 망자는 언어를 통해 의사소통할 수 있지만,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미간을 찌푸려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신시아가 말했다.

“무당이 계속해서 망자의 넋을 불러들이고 있거든요. 지금도 힘 싸움 중이에요.”

말을 마친 신시아가 조금 전 원혼을 소환할 때와 같이 몸속 깊은 곳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를 끌어올렸다.

다만 원혼을 부를 때 냈던 소리가 일부러 불편함을 유도하는 것 같은 소리였다면, 지금 내는 소리는 어딘가 구슬픔이 담겨 있었다.

신시아가 입천장에 혀를 부딪쳐 소리를 맺었다.

딱-

그러자 문자들이 움직이며 딜런의 시체 곁으로 모여들었고, 종국에는 시체 위로 떠 올라 무언가 형체를 만들어냈다.

깨진 안경을 쓴 남자.

망자가 된 딜런이었다.

딜런의 영혼이 손을 뻗어 자신의 몸을 만지려 했지만, 그 애달픈 손이 무색하게도 손은 몸을 통과해버렸다.

우리를 바라본 딜런의 입이 뻐끔거렸다.

“미안해요. 조금 더 완전하게 불러오고 싶었지만 방해가 있어서 이 정도가 한계였어요.”

신시아의 말을 들은 망자가 깨진 안경 너머로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한순간 그의 몸 일부가 흩어졌다가 다시 뭉쳤다.

“다른 쪽에서 간섭하려고 시도하고 있어요. 약식으로 초혼한 거라 이대로 묶어두기는 힘들어요.”

신시아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지금 딜런과 얘기할 수 있는 건 저뿐이니 제 손을 잡고 말씀 나누셔야 할 거예요.”

어느새 잠든 벡을 앨리스에게 넘겨주었다.

웬만한 일에는 긴장도 하지 않는 앨리스가 잔뜩 굳은 채로 벡을 넘겨받았다.

신시아의 손을 잡자 딜런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딜런, 연구소에 있었다고 했죠?”

끄덕.

“그곳에 벡과 같은 아기들이 더 있나요?”

끄덕.

“얼마나 있죠?”

뻐끔거리던 딜런이 주먹을 앞으로 내밀고 손가락을 하나 하나 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다섯이나 있다는 사실에 놀랄 무렵, 딜런의 다른 주먹도 앞으로 나왔다.

새로운 주먹에서 손가락 네 개를 더 편 뒤에야 딜런의 손이 멈췄다.

“아홉?”

끄덕이는 딜런.

“그 중 벡만 데리고 나온 이유는 뭐죠?”

말을 해놓고 답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얼른 덧붙였다.

“가장 가벼워서?”

고개를 젓는 딜런.

그가 몸을 웅크린다.

천천히 손과 다리를 뻗었다 접는 동작을 반복했다.

나와 신시아가 전혀 감을 잡지 못하자, 딜런이 자신의 배꼽 근처에서 뭔가 줄 같은 것을 잡아당기는 시늉을 했다.

“배꼽 근처의 줄······. 탯줄?”

신시아의 말에 딜런이 고개를 끄덕인다.

“벡······탯줄······. 아까 딜런이 뭐랬죠?”

답은 내가 말했다.

“인공 자궁!”

웅크렸던 딜런이 몸을 펴면서 우는 시늉을 했다.

“자궁 밖으로 나왔네. 태어난 건가?”

조금 우나 싶더니 호흡이 가빠지고, 이내 멎는다.

굳은 표정의 신시아.

“만들어진 퓨어들은 인공 자궁을 벗어나면 죽는다. 하지만 벡은 달랐군요.”

딜런이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그때, 허공에서 손 하나가 생기더니 우악스레 딜런의 어깨를 쥐었다.

“이게 아직도!”

신시아가 손을 뻗어 허공의 손을 부스러트렸다.

“무당이 어떻게든 막으려고 용을 쓰네요. 아! 이거라면!”

허공의 손에서 흩어지는 가루를 신시아가 그러모아 딜런의 몸에 넣자 딜런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 아! 말할 수 있다!”

“말을 하지 못하게 막은 것도 무당이니까 말 할 수 있게 하는 것도 무당의 힘이겠죠. 길게 지속되지는 않을 것 같으니 얼른 마무리 지어야 할 거예요.”

연구소의 위치와 소속을 물으려는데, 딜런이 더 빨랐다.

“벡도 오래 살지는 못할 겁니다.”

이번에는 신시아 뿐만 아니라 나도 굳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잠든 벡을 안고 있는 앨리스와 그런 벡의 뺨을 살짝씩 만져보는 이수련이 보였다.

#

“후우······.”

분만 조력용 안드로이드가 조심스럽게 인공 자궁에서 팔뚝을 빼냈다.

안드로이드의 팔뚝을 타고 양수가 흘렀다.

유리창으로 분리된 출산실 너머, 딜런을 비롯한 연구원들이 숨소리 한 번 크게 내지 못한 채 안드로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인공 자궁이 수축과 이완을 몇 번 반복했고, 마침내 팔을 다 빼낸 안드로이드의 손에 아기가 들려있었다.

육안으로 봤을 때 이상한 점은 없었다.

이미 초음파로 몇 번이나 확인한 사항이었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연구원들 사이에서 안도감이 퍼졌다.

수석연구원인 딜런이 거센 어투로 연구원들을 다잡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정말 중요한 건 이제부터야.”

정말 저 아기가 퓨어인지가 중요했다.

힘차게 울어대는 아기의 손가락 끝에서 채혈을 마친 안드로이드가 피를 분석기에 돌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연구원들이 있는 곳의 화면에 분석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혈중 나노봇 수치 : 0

<혈중 약물 검출: 0

<신체 변형: 0

.

.

.

모든 항목이 지금 태어난 아기가 퓨어라고 말하고 있었다.

마침내 연구원들 사이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됐다!”

“보너스다!”

“보너스뿐만이겠냐! 이제 우린 부자야!”

퓨어를 만들어내기 위해 어긴 연구윤리강령과 법제가 몇 개인지 셀 수도 없다.

책으로 만든다면 책장 몇 개를 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이 일은 소수의 주문자만을 위한 비밀로 남아야 한다.

한편, 아이의 유전자 검사 시트를 들고 온 연구원 하나가 머리를 긁적였다.

“퓨어는 맞지만, 오래 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어째서.”

“호흡기 쪽이 약해요. 모체의 유전인자가 강하게 발현된 게 아닐까요.”

딜런은 입술을 꽉 물었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유전자를 만져야 하나?'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퓨어가 아니게 되고 상품 가치는 0에 수렴한다.

게다가 배아 상태가 아니라 이미 분열과 성장이 진행된 대상에게 유전자 조작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열흘은 충분한 시간이라 하기 어려웠다.

딜런이 한탄했다.

“다른 실험체를 만들 때도 호흡기가 속을 썩여 인공 자궁 밖으로 나오는 족족 죽어 나가더니, 이번에도 말썽이야?”

어쩌면 그것이 아기를 안을 수조차 없는 어머니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일지도 모르는 일.

딜런이 시트를 뺏어 들고는 동시에 물었다.

“얼마나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열흘······정도일까요.”

“그 정도면 충분해. 배송 중에 죽지는 않겠네. 유통기한이라고 생각하자고. 위에 보고해.”

“알겠습니다. 이름은 뭐라고 할까요?”

“이름도 붙여야 하나?”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어서요.”

“벡Beck이라고 해.”

작은 강이라는 뜻이다.

강이 흘러 바다로 모이듯, 이 작은 아이를 만들어낸 업적이 자신을 바다라는 큰 세상으로 데려다줄 것이라고 딜런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음 날, 딜런은 아기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내려갔다가 다른 연구원에게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되었다.

“한 번 안아보시죠.”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는데······.”

그러자 곁에 있던 연구원이 웃으며 말했다.

“벡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건 딜런 박사님 덕이니까 아버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생물학적 아버지라는 뜻은 아니지만요.”

고민하는 사이, 연구원이 벡을 안아 딜런에게 안겼다.

아기 특유의 높은 체온이 감겨있는 천 너머로도 생생하게 전해졌다.

종이로 받아보던 데이터가 아니었다.

생생히 살아 숨쉬는, 하지만 열흘 후면 그 뜨거운 숨을 뱉지 못하게 될 ‘생명’이었다.

“아······.”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늪에 빠진 것 같았다.

애써 외면했던 감정의 진창이 차오르고 있었다.

발목을 넘어 무릎, 허벅지, 하반신이 잠겨들었다.

가슴, 목, 마침내 코와 눈까지.

전신이 진창 속으로 잠겼다.

"딜런 박사님?"

연구원의 부름에 딜런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한 건지 자각했다.

벡이라 이름 붙인 이 아이가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실험체가 실패라는 이름으로 폐기처분 되었나.

수정란에서 성장하지 못한 아이, 인공 자궁에 착상하지 못한 아이, 착상은 했으나 성장하지 못하던 아이, 신체 일부가 기괴하게 자라던 아이······.

당장 지금도 인공 자궁에서 꺼내면 곧바로 죽을 것으로 예상되어 나오지 못하는 아이들이 아홉이나 있었다.

그들에게는 마땅히 붙여줄 이름도 없었다.

알파벳과 숫자의 조합이 그들을 부르는 명칭이었다.

딜런의 품에서 벡이 뒤척였다.

조그만 손이 딜런이 입고 있던 연구원 가운을 꼭 쥐었다.

아직 쭈글쭈글하고 작은 손이었다.

그걸 보고 있으니 욕지기가 올라왔다.

그것은 과학, 탐구, 명예 따위의 말로 억눌러온 무언가가 밀려 나오는 징조였다.

"받아."

"네?"

"받으라고!"

옆에 있던 연구원에게 벡을 넘겨준 후, 딜런은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를 안고 속에 있던 것을 게워냈다.

게워낸 것이 얼마 전에 먹은 식사인지, 공명심과 욕망이 섞인 덩어리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한참이나 계속된 구역질로 식도마저 따끔거릴 때, 딜런은 변기물을 내렸다.

오물을 내려보낸 변기에 다시 물이 차올랐다.

딜런은 변기에 비친 자기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몸을 일으켰다.

입가에 묻은 오물을 씻기 위해 세면대 앞에 섰을 때, 딜런은 결국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울었다.

하염없이 울었다.

과학자, 수석연구원 딜런은 없었다.

높으신 양반들의 욕심을 위해 만들어내서는 안 될 것을 만들어낸 괴물만 남아 있었다.

아기의 남은 생에 ‘유통기한’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괴물이.

과학의 발전을 위해 음지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말로 스스로를 세뇌하던 괴물이.

부서져라 세면대를 쥔 딜런의 손이 덜덜 떨렸다.

지은 죄가 너무나 컸다.

벡을 안았을 때 느껴지던 따스한 감촉이 여전했다.

그것은 무겁게 딜런의 양심을 짓누르고 있었다.

‘조금이나마 속죄하는 길은······.’

딜런이 실험체를 들고 탈주했다는 소식이 연구소의 보안 책임자인 비글로우에게 전해진 것은 몇 시간 뒤였다.

#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저처럼 더럽고 추악한 놈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벡이 얼마 살지 못할 걸 알면서도 데리고 나왔습니다. 이런 일이 자행되고 있음을 알려서 더 이상 희생되는 아이들이 나오지 않게 하려고도 생각했습니다.”

딜런이 슬픈 표정으로 우리에게 말했다.

“무책임하고 염치없다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더 이상 퓨어가 만들어지지 않게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그 연구소, 어디 있습니까.”

딜런의 설명을 들은 신시아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곳에 그 정도 규모의 연구소를 지었다고요?”

“네. 연구소를 운영하는 사람이······.”

콰드드득-

공간이 뒤틀리며 아까보다 훨씬 더 커진 손이 튀어나왔고, 신시아가 수인을 맺어 막아냈으나 딜런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의식이 끝나가는 것인지 딜런의 몸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신시아가 벌컥 화를 냈다.

“젠장!”

딜런이 뻐끔거렸다.

뭔가를 반복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소리가 없어서 추측이 쉽지 않았다.

“난앙란?”

딜런의 말을 추측하는 사이, 결국 딜런의 몸을 이루던 글자들이 부스러져 흩어졌다.

남은 것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양심에 귀를 기울인, 그렇지만 양심을 위해 목숨까지 걸었던 어느 과학자의 시신이 전부였다.

손에서 뭔가 꼼지락거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신시아의 손이 내 손에 잡혀있어서 놓은 후에 앨리스에게 다가갔다.

내게 벡을 내밀며 앨리스가 말했다.

“인간의 아기는 참 따뜻하네요.”

엉거주춤 받아 안았다.

“그래, 따뜻하네.”

이 온기와 무게가 사라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신시아.”

“네.”

“젠에게 연락해서 아까 놈들이 사용하던 그 부적 같은 것에 대해 물어봐 줄래요? 백호 수인에 관한 것도 야스민 공께 여쭤봐 줬으면 해요. 피곤할 텐데 미안해요.”

아니라며 고개를 저은 신시아가 통신을 위해 밖으로 나섰다.

이수련이 내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어찌하려는 셈이더냐.”

“제 허락도 없이 제 애들을 만드는 곳이라는데―”

잠시 생각한 뒤.

“다시는 그딴 짓 못 하게 해줘야죠.”

시선을 내려 벡을 바라봤다.

녀석은 뭐가 그리 좋은지 내 눈만 보면 방실방실 웃었다.

“아부!”

다시 이수련을 바라보고 말했다.

“얘도 그게 좋을 것 같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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