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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캐여도 너보단 강함-84화 (85/258)

084.

084.

이수련의 허리춤에서 아홉 꼬리가 솟아 나와 풍성하게 펼쳐졌다.

“이 아기, 누가 데려온 것이냐.”

철없는 소녀의 모습이 아니라, 위엄과 완숙함이 넘쳐흐르는 이수련의 분위기.

자못 신령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평소 모습과 달라도 너무 달랐기에 자리에 있는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저, 저요······.”

절대 하지 않던 존댓말까지 하며 신시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디서 데려왔느냐.”

“네오-서울 남쪽 경계······썬더 콜링 필드 근처에서······.”

“늘 번개 폭풍이 치는 그곳 말이냐?”

고개를 끄덕이는 신시아가 누워있는 남자에게 손가락을 뻗었다.

“저 남자가 쓰러져 있길래 괜찮은가 해서 들여다봤는데 품에 있었어······요. 어깨에 관통상이 있더라고······요.”

“저자가 정신을 차려야 진상을 알 수 있다는 말이로구나.”

내가 이수련을 진정시켰다.

“퓨어가 만들어진다는 건 뭐고, 왜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해요. 진정해요.”

이수련이 아련한 눈빛으로 모두를 바라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퓨어는 오로지 인간 종족에게만 존재하느니라. 똑같이 몸에 어떠한 외부 조작을 하지 않았더라도 인간을 제외한 다른 종족에게는 퓨어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지. 왜 그런지 아느냐?”

앨리스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왜죠? 어딜 뒤져봐도 순수한 인간만 퓨어라고 부르는 이유에 대해 명확한 설명이 없던데!”

“가장 약한 종족이기 때문이니라.”

“네?”

“빠르게 달리지도 못하고, 물에서 숨을 쉴 수도 없으며, 다른 종족의 혈액을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삼지도 못하며, 힘이 강하지도 않으며, 소리 없이 움직이지도 못하며, 거대화나 소형화도 할 수 없지. 타종족들에 비하면 인간이 가진 것은 많이 없느니라. 동물군과 비교하면 높은 지능과 지독할 정도로 높은 지구력 정도가 우위의 전부지. ”

이수련의 말이 이어졌다.

“인간 종족의 경쟁 상대가 동물에 국한되었다면 가장 강력한 종족은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지능과 지구력은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기반이 되었을 테니까. 허나 세상에는 인간 종족과 경쟁할 훨씬 더 강력한 종족들이 많지. 엘프, 드워프, 각종 수인, 구미호, 흡혈귀, 목인······당장 댈 수 있는 것만 해도 이 정도니 얼마나 더 많겠느냐. 이 중 인간보다 약한 종족을 하나라도 댈 수 있겠느냐?”

마치 할머니가 해주는 옛이야기를 듣기 위해 앞에 모여앉은 손주들처럼, 우리는 이수련에게서 풀려나오는 이야기보따리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간은 절망하지 않느니라. 어떻게든 스스로를 갈고 닦아 다른 종족이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오르고 말지. 그것이 인간의 잠재력이니라. 신체적으로 강하지 못한 종족이 생존하기 위해 발현하는 삶의 불꽃, 본좌는 그것이 다른 종족이 퓨어에게 어렴풋하게 느끼는 매력의 근원이라 생각하느니라.”

“하지만 그런 시대는 지나갔잖아요. 이제 누구나 다양한 방법으로 신체와 정신을 강화할 수 있어요. 신체적으로 약하다는 인간 종족의 디메리트가 사라진 거 아닌가요?”

“그래, 낭군의 말이 맞다. 시대가 바뀌었지. 돈과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느니라. 디메리트가 사라졌다고 했지? 그것은 인간이라는 종족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으나 동시에 퓨어의 급감을 불러왔느니라.”

“왜죠?”

“본좌가 무어라 했느냐. 인간은 가장 약한 종족이라 하지 않았느냐. 지능과 지구력을 지닌 약한 종족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적응’이었느니라. 세상에 가장 빠르게 변모하고 적응해나갔지. 과학과 마법의 첨단에 서서 몸을 변화시켜 나갔느니라. 그들의 적응력은 여기서도 어김없이 발휘되었으니, 가장 약하고 가장 순수했기에 인간 종족의 몸은 새로운 것을 마음껏 빨아들였느니라. 이전의 몸으로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다음 세대가 원하지 않아도 흔적을 남길 만큼.”

신시아가 재빨리 외쳤다.

“본 적 있어! 부모 중 한쪽이 인간인 신생아의 혈중 나노봇 농도가 높아서 문제가 된다는 토막기사!”

앨리스가 긍정했다.

“요새 나노봇으로 혈관 청소하는 시술은 기본 중에 기본이긴 하죠.”

“나노봇 주입 수술은 신생아 대상으로 하지 못하게 되어 있어.”

“그럼 어떻게······.”

고개를 끄덕인 이수련.

“신시아와 앨리스는 알고 있구나. 언론에서는 쉬쉬하지만, 인간의 아이는 날 때부터 부모의 것들을 강하게 물려받느니라. 태중변형수술을 하지 않았는데도, 태아의 팔이나 다리가 부모의 몸에 장착된 의수의 형태로 자라는 일, 부모의 몸에 주입된 약물이 탯줄을 통해 아기에게 전해지는 일이 그리 드물지 않은 것이 그 예이니라. 변형한 유전자를 이어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고, 앞서 말한 나노봇 또한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겠지.”

이수련이 조금 슬픈 얼굴을 했다.

“날 때부터 그러하니 퓨어의 수는 점차 줄어만 갔고, 거의 볼 수 없게 되었지. 거의라는 말도 많이 쳐준 것이다. 아주 드물게나마 퓨어로 태어난 자들도 성장하며 퓨어가 아니게 되었다. 본좌도 낭군이 아니었다면 퓨어가 다 사라진 줄로 믿고 있었을 정도이니······.”

나를 바라보는 이수련에게 말했다.

“왜 퓨어가 인간에게만 붙는지, 퓨어가 없는 이유는 잘 알겠는데요. 저 아기는 만들어진 퓨어라면서요. 그건 무슨 소리인가요.”

“그건 누워있는 저 인간에게 들어보자꾸나. 정신 잃은 척은 여기까지면 족하지 않겠느냐?”

모두의 고개가 소파에 누워있는 남자에게로 돌아갔다.

남자가 부스스 몸을 일으키더니 연구원 가운 가슴 부분에 넣어두었던 깨진 안경을 썼다.

두려운 눈으로 여기저기 살피던 남자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구미호인데다가 퓨어에 대한 걸 자세히 알고 계신 걸 보니 거짓말은 못 하겠군요.”

콧방귀를 뀐 이수련이 남자에게 말했다.

“그래. 본좌에게 바른대로 다 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걸 본 앨리스가 나를 톡톡 치더니 귀를 이쪽으로 대보라는 식으로 손짓을 했다.

허리를 숙이니 앨리스가 속삭였다.

“오늘 수련 언니 좀 달라 보이네요.”

“그러게. 본업을 하다 와서 그런가? 맨날 우리 사무실에 붙어있지 말고 가끔은 일 좀 하고 오라고 내쫓아야겠어.”

“찬성이에요.”

깨진 안경의 남자가 놀란 목소리를 냈다.

“엇!”

그의 시선이 내게 닿아 있었다.

그리고 물었다.

“혹시 여기 대림 에어리어입니까?”

“그렇습니다.”

“칼자루만 있는 검! 해결사 오메가 아닌지요?”

“맞습니다.”

“세상에······.”

“왜 그러시죠?”

“벡의 생물학적 아버지를 만날 줄은 생각도 못 해서요.”

“벡이 누군데요.”

남자가 손을 들어 여태껏 조용히 자는 아기를 가리켰다.

신시아가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흡! 아니라고 믿고 싶었는데, 역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떨어졌다.

나 아니라고 말하려는 찰나, 옆구리에 강력한 충격이 박혔다.

“우욱!”

달려든 이수련이 내 멱살을 잡고 흔들어댔다.

“그래! 이 아이에게서 어설픈 퓨어의 기운이 나는 것은 맞지만 낭군의 흔적도 느낄 수 있노라! 낭군! 나 말고 누구와 아이를 만들었느냐! 신시아도 아니라면 당최 누구라는 말이냐! 난봉꾼도 이런 난봉꾼이 없느니라!”

그 소동에 깬 아기가 울기 시작했다.

작은 몸 어디에서 그런 기운이 나오는지 엄청난 울음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고, 앨리스가 달려가 안아 둥기둥기를 했으나 아기의 울음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이수련을 옆으로 밀어버린 내게 앨리스가 당황한 얼굴로 아기를 들이밀었다.

“어떻게 좀 해봐요!”

“왜 나한테 줘!”

“저는 육아용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몰라요!”

“나는 알겠냐! 나도 육아용 인간이 아니야!”

“일단 뭐라도 해봐요! 통하는 게 있을 수도 있잖아요!”

엉겁결에 아기를 받아서 어설프게 안기 무섭게 아기가 나를 보고 방실방실 웃었다.

“부······아부!”

신시아가 울면서 외쳤다.

“이거 봐요! 오메가 님이 아빠 맞잖아요!”

애가 다시 울까 봐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로, 안경 남자를 윽박질렀다.

“당장 해명해! 나는 모르는 일이야! 납득 안 가면 죽여놓을 거니까 지금! 당장! 여기서! 빨리! 해명해!”

#

“저 건물이라고?”

기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백호 수인이 대림 에어리어 22구역의 건물 하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신시아, 정확히는 딜런을 추적한 비글로우였다.

어깨에 까마귀 형태의 MCB를 얹은 그의 부하가 답했다.

“예. 청소업체가 쓴다고 하는데 신시아 야스민이 딜런과 실험체를 데리고 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위쪽에 보고는 올라갔지?”

“예.”

“반응은?”

“야스민 가에서 이렇다 할 움직임은 없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냐고 묻길래, 딜런과 실험체의 탈주는 빼고 지역 내에서 신시아 야스민을 발견했다는 정도로만 답했습니다.”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은 부하의 현명함에 감탄한 비글로우가 다시 물었다.

“신시아 야스민이 저 건물을 자주 이용하나? 별장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대림 에어리어에 자주 출몰한다고는 합니다. 다만 목격된 장소는 주로 23구역의 해결사 사무실로 알고 있습니다.”

“해결사?”

“예. 오메가라고, 요새 한창 주가 높은 해결사입니다. 위타천이 자기 후임으로 지명할 거라는 말도 돌더군요.”

“헛소문이겠지. 어쨌든 저 건물이 그 해결사 사무실은 아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쓰고 있는 우산에 빗방울이 토독하는 소리와 함께 부딪혀 튕겨 나갔다.

“신시아 야스민 외에 주의해야 할 인물이 내부에 있나?”

“내부 확인은 못 했지만, 청소업체를 운영하는 이들은 평범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소녀 하나가 안쪽으로 들어간 것 같고, 저희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내부에 있던 사람은 추정이 힘듭니다.”

고민하던 비글로우가 명령했다.

“연구소에 남아 있는 특작대를 불러. 비가 오니 빨리 올 수 있을 거다. 날이 어두워지면 돌입해서 딜런과 실험체를 회수한다. 딜런의 경우, 협력하지 않으려 하면 사살해도 좋다. 하지만 실험체는 무슨 일이 있어도 회수한다.”

“알겠습니다. 작전에 대한 보고는······.”

톡, 빗방울 하나가 튀어 비글로우의 발치를 적셨다.

“하지 않는다. 우리끼리 해결해야 할 건이다. 혹시라도 정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거다.”

“알겠습니다.”

까마귀가 푸드덕하는 소리와 함께 연구소가 위치한 썬더 콜링 필드로 향하기 시작했다.

#

자신을 딜런이라 밝힌 남자의 이야기는 이수련이 했던 얘기 중, 다른 종족이 퓨어에 느끼는 어렴풋한 매력에서 출발했다.

“그것은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실존하죠. 타종족 뿐만 아니라 지금에 와서는 같은 인간들조차 퓨어에게 경외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퓨어는 너무 희소해져 버렸고, 도시 전설 하나가 생겨났습니다.”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이수련이 눈을 질끈 감았다.

“퓨어 중에서도 가장 순수한 상태인 아기를 받아들이게 되면 힘을 가질 수 있다.”

“힘이라면?”

내 질문에 딜런이 답했다.

“모릅니다. 회춘일 수도 있고, 벽을 넘어 새로운 경지에 발을 딛는 것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무언가일 수도 있겠죠. 효과가 있는지도 불분명합니다. 어디까지나 도시전설이니까요. 하지만 그런 전설에 심취하는 자들도 있는 법입니다. 심지어 꽤 많죠.”

해서는 안 될, 꺼림칙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질문을 나는 하고야 말았다.

“그렇다면 받아들인다는 건 뭡니까.”

이수련이 답했다.

“주된 방법은 먹는 것이다. 섭식은 대상의 힘을 취하는 오래된 주술적 방법이니. 원형 그대로, 살아있는 때의 것을 최고로 친다 들었다.”

“이런 아기를······.”

잠시 벡에게 시선이 닿아 있던 신시아가 우욱 소리와 함께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앨리스가 그런 신시아를 따라 화장실로 갔고, 등을 쳐주는 소리가 들렸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본좌의 일족 중에도 저런 낭설에 심취한 자가 있었느니라. 그것은 공존의 길이 아니었기에 모두 본좌의 손으로 직접 죽여야 했다.”

갑자기 듣게 된 어두운 과거사.

이수련의 표정이 쓸쓸했다.

딜런이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네오-서울뿐만 아니라 많은 권역의 권력자들이 퓨어 아기를 원했습니다. 음지, 양지를 가리지 않고요. 결국 인공적으로 퓨어를 만드는 연구가 시작되었지만, 진행은 지지부진했습니다. 연구도 표본이 있어야 하는데, 퓨어는 이미 멸종 상태와 다를 게 없었으니까요. 아무 것도 모르는 원시인에게 설명만으로 비행기 설계도를 그려내라고 하는 편이 더 쉬울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퓨어라고 해서 찾아가 보면 최소한 몇 개의 시술을 했거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모로부터 이물질을 내려받은 상태였습니다.”

딜런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그런데 얼마 전, 대림 에어리어에 퓨어 해결사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더군요. 미심쩍기는 했지만 우리는 암시장에서 그의 혈액을 구했습니다.”

“혈액? 난 헌혈이나 매혈한 적 없는데.”

“한신나 권역에서 구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범죄자의 칼날처럼 생긴 의족에 묻어있었다는데, 꽤 비싸게 주고 구매했습니다. 판매금은 보석금으로 사용할 예정이라더군요.”

위타천을 처음 만나기 직전, 이바르타나라는 이름을 가진 토끼 수인과의 전투에서 그 의족에 가슴을 베인 적 있었다.

피를 흘린 기억은 많지 않아서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게 흘러갔을 줄이야.

“그 혈액에서 추출한 생체정보로 생식세포를 배양하는 데 성공했고, 연구소에서 보관 중이던 어느 인간 여성의 생식세포와의 수정에 성공했습니다. 그나마 가장 퓨어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여성이었죠. 그리고 인공 자궁을 통해 성장시켰고, 그 결과가 벡입니다.”

나는 그때까지도 벡이라 불리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 넘겨주려고 하면 몸을 틀며 일어나 울어대서 별수가 없었다.

딜런의 설명에 거짓이 없다면, 내가 이 아기의 생물학적 부친이라는 것이 틀린 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심지어 내가 아니면 태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아기였다.

눈이 벌게진 신시아가 곁에 와 있었다.

내가 물었다.

“거짓이 섞여 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거기까지는 알겠어요. 그렇다면 그 연구소는 어디에 있고, 어디 소속이며, 당신은 왜 도망쳤죠?”

딜런이 입을 열려는 찰나, 건물의 불이 꺼졌다.

“뭐야!”

“두꺼비집 확인해봐!”

후앙과 함께 일하는 청소업체 직원들이 당황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어둠 속에서 비가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쨍그랑-

깨진 창문을 통해 복면을 쓴 놈들이 진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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