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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캐여도 너보단 강함-83화 (84/258)

083.

083.

비가 내린다.

네오-서울 대림 에어리어의 회색빛 건물들이 비에 젖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흠씬 풍겼다.

빗줄기 사이로 비치는 형형색색의 네온사인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사람들이 옷깃을 세우며 각자의 목적지로 발걸음을 재촉할 때, 대림 에어리어의 남쪽 경계에는 다른 이유로 바삐 발을 놀리는 사람이 있었다.

“허억······허억······.”

인간 남자였다.

두꺼운 안경알 한쪽은 깨져있었고, 안경다리도 부러져 달랑거렸다.

허벅지 언저리까지 내려온 흰 가운 끝이 찢어지고 헤져 있는 것이 급하게 달려온 그의 처지를 대변하고 있었다.

빗줄기가 거세졌다.

남자는 가운의 앞을 잘 여몄다.

그가 소중히 품고 있는 천 뭉치가 움찔거렸다.

“너는······꼭 살아야 한다.”

남자는 강렬한 의지를 담아 말했다.

가운의 안쪽으로 비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남자가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이대로 쭉 가면 네오-서울이다.

거기까지만 가면 사람들 사이에 섞여 추적을 피할 수 있을 거다.

확실하지 않은 가정이지만 남자는 그렇게라도 위안할 수밖에 없었다.

비를 맞아 몸을 덜덜 떠는 남자가 진창이 되어 발을 잡아끄는 땅을 박차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까아악-

빗속에서 까마귀 하나가 날아와 남자에게서 멀지 않은 나무에 자리 잡고 앉았다.

까악거리는 그 소리가 ‘정신 차리고 조금만 더 힘내라’는 것 같아서 남자는 얼굴에 흐르는 빗물을 쓸어내리고 까마귀를 바라보았다.

까마귀의 눈 중 하나가 붉게 번쩍이고 있었다.

까악-

벌려진 까마귀의 입에 보이는 총구.

그리고 총구 끝에 모여드는 작은 빛.

피슛-

동물로 위장한 이동형 블래스터였다.

남자는 추위와 피로로 굳어버린 몸을 억지로 움직여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그는 너무 느렸고, 레이저 탄환은 너무 빨랐다.

“으아악!”

레이저 탄환이 관통한 어깨에서 형용하기 힘든 고통이 번져 올랐다.

하지만 남자는 자기 어깨보다 품고 있던 천 뭉치가 멀쩡한지부터 확인했다.

천 뭉치가 조금 움찔거리기는 했으나 다행히 크게 영향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까마귀에게서 남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딜런, 수석연구원이나 돼서 실험체를 가지고 탈주할 줄은 몰랐어. 그것도 번개 폭풍이 사라지는 때를 노려서 말이지.

남자와 까마귀가 있는 이곳은 과거 네오-서울과 WSS 간의 전쟁에서 격전지였던 곳의 하나로, 각 권역의 대표적인 전격계 마탑인 인드라스와 라이곤의 마법사들이 백 단위로 갈려 나간 곳이었다.

그 여파로 전쟁이 끝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원인 불명의 번개 폭풍이 상시 발생하는 곳이기도 했다.

폭풍이 잦아드는 때는 비가 올 때뿐.

번개 폭풍이 발생하기 때문에 접근하기 힘든 땅이라는 기후적 특성과 네오-서울의 경계 밖이라는 지역적 특성이 합쳐져 내부에는 네오-서울의 법령과 조례를 무시하는 연구가 진행되는 연구소가 있었고, 그 구성원과 연구 내용은 초 극비로 유지되고 있었다.

남자는 까마귀를 향해 덜덜 떨며 말했다.

“비글로우······너도 알고 있잖아. 이건 잘못됐어.”

-알지. 잘못된 연구라는 거 알아. 그런데 그거 모르고 여기 있는 사람 있나? 다 알고 온 거잖아. 차라리 솔직해져. 결과물이 나오니까 욕심나서 들고 도망친 거라고.

비글로우의 말에 딜런이 격하게 반응했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그럼? 실험체에게 감정이라도 생긴 거야?

“실험체라고 하지 마! 내······.”

남자가 말을 마치기 전, 까마귀가 고개를 위로 번쩍 들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남자를 추적 중이던 비글로우가 털 달린 그의 귀를 덮고 있던 헤드셋을 내렸다.

“뭐지?”

MCB(Movable Camouflage Blaster, 이동형 위장 블래스터) 크로우 타입을 조작하고 있던 그의 부하가 조작기기 위에 달린 스크린을 몇 번 두드린 뒤 답했다.

“타겟에게 접근하는 인원이 있습니다.”

“여기까지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고? MCB 띄워 올리고 스크린 내 디바이스로 연결해.”

까마귀가 날개를 퍼덕거리며 날아올랐고, 까마귀의 시야가 비글로우의 손목시계를 통해 투사되었다.

비로 인해 잔뜩 젖어버린 땅 위, 새카만 뱀 하나가 거대한 몸을 마치 부드러운 리본처럼 움직이며 블래스터를 맞은 연구원이 있는 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부하의 물음에 비글로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내 천자川를 만들어냈다.

그의 전신에 있는 무늬에 묻혀 주름은 티가 잘 나지 않았지만, 부하들은 달라진 비글로우의 분위기에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딜런은 몰라도 실험체는 회수해야 해. 내가 직접 간다. 주시하고 있다가 특이상황 발생하면 바로 알려.”

곧바로 비글로우는 양손을 바닥에 댔다.

두 다리와 두 손이 바닥에 닿기 무섭게 그의 근육과 뼈들이 우두둑소리를 내며 자리를 새로 잡았다.

몸의 형태를 변화시키는 기공인 역근축골공易筋縮骨工이었다.

비글로우는 한 마리 백호가 되었다.

원래부터 백호 수인이니 이상할 것은 없었다.

기공을 익힌 수인들 사이에서는 흔히 폼 쉬프팅Form Shifting이라 불리는 기술로, 본래의 형태로 돌아가는 것이 깨달음을 얻는 방법이라는 무리武理를 가진 원형방原形幇이라는 방파에 의해 전승되고 있었다.

비글로우가 내공이 실린 네 발로 땅을 밀어내자 그의 주변 풍경이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몇 번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작은 언덕을 넘어선 비글로우의 몸 주변으로 빗방울이 튕겨 나갔다.

실체화된 기의 막이 그의 몸을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호신강기護身罡氣를 전신에 두르고도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것으로 비글로우의 경지를 엿볼 수 있었다.

그 사이, 뱀은 딜런에게 근접해있었다.

피로와 고통을 이기지 못한 딜런은 기절해버린 상태.

비글로우가 몸을 웅크렸다.

원래 손이었던 두 앞발에 푸르스름한 권강拳罡이 맺혔다.

뱀이 딜런에게 조금만 더 접근한다면 곧바로 뛰어들어 머리통을 으스러트릴 작정이었다.

극한까지 웅크려 마치 용수철을 연상케 하는 그의 근육이 반응하기 직전―.

-안 됩니다!

비글로우의 통신 디바이스를 통해 다급한 부하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저 뱀이 누군지 알아낸 거냐?”

-뱀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뒤에 박쥐가 따라오고 있습니다.

“박쥐?”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박쥐 하나가 빠르게 날아들더니 모습을 바꿨다.

그걸 본 비글로우가 중얼거렸다.

“흡혈귀인가.”

-신시아 야스민으로 추정됩니다.

“젠장. 야스민이라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신시아가 뱀을 혼냈다.

“프사이! 여긴 위험해! 비도 오는데 너무 멀리 왔잖아! 쓸만한 백골 없나 찾으러 왔다가 이게 무슨 일이야.”

백골에 서린 영혼에 한이 많을수록 사령술사의 부름에 쉽게 응했고, 그런 백골이 많은 곳이 바로 옛 전쟁터였다.

신시아도 이렇게나 깊게까지 들어 올 생각은 아니었지만, 평소 번개 폭풍으로 쉽게 들어 올 수 없는 지역이라 욕심을 내긴 했다.

주인에게 좋지 못한 소리를 들은 뱀이 잠시 움츠러들었다가, 자기가 뭘 발견했는지 보라는 듯 스르륵 앞으로 이동했다.

뱀의 정체는 오메가가 신시아에게 선물한 황천사였다.

마음 같아서는 이 황천사에게 오메가Ω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었던 신시아였지만, 진짜 오메가가 달가워할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에 오메가의 바로 앞 알파벳인 프사이Ψ라는 이름을 붙였다.

신시아가 제공하는 양질의 사기를 듬뿍 섭취한 프사이는 쑥쑥 커졌고, 지금은 길이가 3m에 달했다.

팔찌로 돌아갈 때는 원래 그랬던 것처럼 작아진다는 게 다행이었다.

신시아와 프사이의 모습을 본 비글로우가 입술을 깨물었다.

-개입할까요?

“가만있어. 야스민 가는 연구소의 존재를 몰라. 괜히 얽히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프사이가 딜런의 주위를 맴돌았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뭐 하는 사람이길래 이런 데서 죽은 걸까.”

딜런의 곁으로 접근하던 신시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살아 있잖아? 이봐요! 괜찮아요?”

정신을 잃은 딜런의 어깨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본 신시아가 딜런의 가운을 벗기려다 품속에 있던 천 뭉치를 열어보고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천 뭉치를 다시 잘 여민 뒤 소중히 안고 프사이에게 말했다.

“들 수 있겠어?”

주인이 뜻하는 걸 안다는 듯 프사이는 꿈틀거려 딜런을 자신의 등 위에 올렸다.

신시아의 손가락에 있던 반지가 빛나며 공간이 열렸다.

“가마로 가져와.”

좀비 넷이 어깨에 이는 가마를 가지고 포탈링을 통과해 나왔고, 신시아가 위에 올라앉았다.

“가자.”

신시아와 프사이가 멀리 사라진 후, 모습을 드러낸 비글로우가 심각한 목소리로 지시를 전달했다.

“영상 찍혔지?”

-그렇습니다.

“그대로 위쪽에 보고 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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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저 사람이랑 이 아기를 데려온 이유라고요?”

후앙의 청소업체 사무실이 입주해 있는 건물, 비도 오는데 갑자기 성인 하나와 아기 하나를 들고 나타난 신시아에게 내가 되물었다.

“네.”

“왜······죠?”

“멀지 않기도 했고, 여기 방도 많잖아요. 어차피 사무실 다 지어지기 전에는 여기에 주로 계실 거라면서요.”

“그렇긴 하죠.”

깨진 안경을 쓴 남자는 옷을 갈아입히고 상처 부위를 소독한 뒤 안 쓰는 소파에 눕혀 놓았다.

상처 부위가 괴사하기 시작하는 것이 심각해 보였지만, 소독할 때 잠깐 정신이 들어서는 아무데도 연락하지 말라고 간절하게 부탁하다가 다시 실신했다.

사정이 있는 것 같아 일단 응급처치만 해놓은 상황.

“귀엽다아······.”

천에 싸인 채로 쌔근쌔근 자는 아기를 보며 앨리스가 말했다.

“무슨 일인 걸까요?”

“모르지. 와이프랑 양육권 문제로 싸우다가 총 맞은 걸 수도 있고.”

“에이. 설마요.”

“설마가 사람 잡아.”

“어떻게 해야 총 맞고 권역 경계에서 발견이 되는데요.”

“와이프가 죽으라고 실어서 거기다 버려놨나 보지.”

“아기랑 같이요?”

“아기도 미워진 거 아닐까.”

“사장님 상상은 정말 끔찍하네요. 최악 중에 최악.”

“현실은 늘 상상보다 더하다? 바닥인 줄 알았는데 반지하가 있는 곳이 현실이야.”

앨리스와 둘이서 이런저런 추측을 하고 있었는데, 신시아는 평소답지 않게 우리 대화에 한마디도 끼지 않았다.

어딘가 고민이 있는 표정 같았다.

“어디 아파요?”

“아, 아뇨.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요.”

“뭔데요.”

“저 아기······아니에요. 이수련 오늘 오죠?”

“그렇다고 들었어요. 왜요?”

“아······이수련 오면 말씀드릴게요.”

그때, 아래쪽이 왁자지껄하더니 우리가 있는 방의 문이 벌컥 열렸다.

“본좌가 돌아왔노라!”

한신나 권역에서 돌아온 이수련이었다.

“응?”

소파에 누워있는 남자를 본 이수련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고, 아기를 볼 때는 눈꼬리가 위로 치켜 올라갔다.

“본좌가 없는 동안 오메가와 아기를 만든 것이냐, 신시아! 이것은 반칙이니라! 오메가의 정자는 본좌의 것이라 하지 않았더냐!”

푸후-하고 한숨을 쉰 신시아가 말했다.

“네오-서울에 네가 며칠이나 없었다고 저런 애가 생겨. 아니야.”

“아니긴! 오메가와 비슷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벌떡 일어선 신시아가 이수련 앞으로 다가갔다.

“그렇지?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거 아니지? 근데 조금 이상해.”

“드물디 드문 퓨어의 기운 아니더냐 이걸 어찌 모를 수······.”

방에 들어올 때부터 킁킁거리던 이수련이 말을 맺지 못했다.

삽시간에 굳어지는 얼굴.

그녀의 두 귀가 쫑긋하고 섰다.

그리고 이수련은 아기를 향해 몸을 훌쩍 날려 뚫어져라 보다가 툭하고 한마디를 던졌다.

“이 아기, 만들어진 것이로구나.”

"뭔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요. 그럼 애가 자연 발생해요? 비오면 땅에서 자라니까 캐다가 키우는 거 아니잖아요. 다 영차영차해서 만들어 지는 거지."

내 말을 들은 이수련이 답답하다는 듯 꼬리를 한 번 휘저었다.

"그런 말이 아니다! 강제로 만들어진 퓨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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