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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캐여도 너보단 강함-80화 (81/258)

080.

080.

얼굴로 들이치는 바람은 너무나 차가워서 당장이라도 코와 귀가 떨어질 것만 같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전신으로 피를 밀어 보내지만, 분명 뜨거웠을 피는 신체 말단으로 향하며 온기를 잃는다.

하지만 그 냉막함이 지금의 내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흡착]을 사용해 100층 높이의 건물 외벽에 발바닥을 대고 있는 지금의 나에게는.

각막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바람에 저항하며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아래쪽에서 나를 향해 달려드는 고릴라 수인이 보인다.

어깨와 등, 허벅지 뒤와 오금 등등.

놈의 몸의 뒤편에서 솟아난 노즐이 화염을 뿌려대며 건물 외장재와 유리창을 뒤집어엎었다.

떨어져 나간 것들이 아래로 낙하하는 모습이 보인다.

높이가 높이인지라 한참이나 긴 낙하 끝에 잔해들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내게 달려드는 그 짧은 순간에도 고릴라 수인은 상의 안쪽에서 앰플을 몇 개 꺼내 입에 넣고 씹었다.

그렇지 않아도 커다랗던 놈의 몸이 부푸는 것과 동시에 노즐에서 분사되는 화염의 양이 늘었다.

[업화]

나이누안이 폐교의 한 층을 그대로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 마법.

그때와 똑같은 마법진이 내 주위에 생겨나고, 고릴라가 있는 아래쪽을 향해 화염 줄기를 토해냈다.

“이크!”

노즐 각도를 조절한 고릴라가 믿기 힘들 정도로 유연한 움직임을 보이더니 화염 줄기를 스쳐 지나갔다.

놈이 다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볼 때쯤, 내 주위에 완성된 마법진은 한 개가 아니었다.

복잡하게 얽힌 화염 줄기가 쏟아졌다.

그러나 고릴라는 그대로 돌파했다.

“이 정도쯤이야!”

그의 새카만 털과 검은 양복이 녹아내리며 몸에 흉측한 자국을 남겼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

재와 불티를 흩날리며 나를 향해 접근하는 고릴라를 보고 혼잣말했다.

“무슨 약을 처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로는 안 된다 이거지.”

손을 휘둘러 마법진을 없앴다.

검을 칼자루 형태로 되돌린 뒤 왼쪽 옆구리에 가져다 댔다.

몸에 힘을 빼고, 눈을 감는다.

바람 소리가 귀를 파고들어 고막을 긁어댄다.

포기해도 소용없다, 갈기갈기 찢어 죽일 거라는 고릴라의 목소리가 잠깐 들리는 것도 같지만 곧 흐릿해졌다.

감각이 가라앉는다.

.

.

.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것은 발도 스킬인 [찰나지간]의 사용.

기본적인 검술 스킬이기도 하고, 보기에도 꽤 멋있어 많은 유저들이 익히고 즐겨 사용했던 스킬.

하지만 내가 지금부터 사용하는 것처럼 쓰는 사람은 드물었다.

‘파괴력은 있지만, 뒤가 없다.’라는 평가 때문.

뒤가 없다.

그것이야말로 내게 어울린다는 최고의 찬사가 아닐까.

.

.

.

눈을 뜨자 고릴라는 이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흡착]을 해제하자 순식간에 몸이 앞으로 쏠렸다.

자유낙하가 시작되기 직전―

[각력脚力 강화]

[공기 저항 최소화]

[목표 고정]

[중량화]

[추진]

그대로 아래를 향해 몸을 날린다.

순식간에 고릴라와의 거리가 좁혀진다.

놈이 주먹을 휘둘러 나를 쳐내려 하지만 내 간격이 놈의 간격에 파고드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칼자루를 두 번 비틀자 칼등과 검날이 거의 동시에 밀려 올라왔다.

[발도 – 찰나지간]

한줄기 직선이 되어 놈의 정중앙을 파고든다.

뿌득하는 소리와 함께 놈의 가슴에 검이 박히고, 곧이어 내가 배에 내려서자 엄청난 무게 때문에 굉음과 함께 놈의 몸이 접혔다.

푸헉-

놈이 피와 함께 뱉어낸 토사물의 색이 기묘하다.

아까 씹어먹은 앰플 병에 들어있는 강화용 약물 때문일 터.

검을 비틀자 고통에 찬 비명이 울려 퍼졌으나 곧 바람 소리에 잡아먹혔다.

“으아아아아!”

이제 슬슬 올라가야 할 때였다.

너무 많이 내려와 버렸다.

저 위쪽의 외부 난간에 타이린드와 스냅샷이 조그마하게 보였다.

“혼자 죽을 수는······없지!”

고릴라가 노즐의 분사를 조정하며 균형을 잡으려고 애썼다.

그 와중에도 손을 뻗어 자기 배 위에 있는 나를 잡으려고 용쓰면서.

어레스트를 채우기에는 너무 거대하다.

주머니에서 씨앗을 꺼내고 [과생장]을 사용해 자라난 식물로 놈의 두 팔을 옭아맸다.

칼자루를 단단히 쥐고 서서히 뽑아냈다.

[중량화]를 해제했다.

“크아아아!”

귀를 찢는 비명을 무시하고 위를 바라봤다.

“죽이겠다고 기세등등하더니 이렇게 약하게 굴면 내가 당황스럽잖아.”

고릴라가 뭔가를 더 말하려고 했지만 들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팔 다시 붙였을 때 못하겠다고 하고 도망갔어야지.”

[유성승천流星昇天]

검이 반원을 그리며 고릴라의 몸을 가르는 것과 동시에 밟고 있던 놈의 배를 반석 삼아 위로 치솟았다.

바람이 워낙 거센지라 생각만큼 위로 확 올라가지는 못했다.

건물 외벽에 검을 박고 다시 [흡착]을 사용해 외벽에 발을 붙였다.

아래쪽으로는 고릴라가 묶인 팔을 힘없이 휘저으며 아래로,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지는 여러 액체가 바람에 흩날렸다.

그의 노즐이 다시 가동되는 일은 없을 것 같아 다시 위로 향했다.

그렇게 바람을 맞아가며 한참을 걸어 외벽에서 120층 내부로 향하는 통로의 진입로에 다가가니 타이린드와 스냅샷이 있었다.

둘은 고개를 내밀어 한참 아래를 보다가 나를 보는 것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 눈빛에 민망해져서 말했다.

“원래 고릴라는 고층 빌딩에서 떨어지고 그러는 거야. 그래야 그림이 산다고.”

#

루트 건물 120층의 중앙에는 4면이 유리벽으로 된 대회의실이 있다.

120층에 있다면 개별 사무실에 들어가서 블라인드를 내리지 않는 이상 어디든 대회의실이 보이는 구조.

그곳에 모여있는 해로즈와 그의 측근들은 얼굴에 긴장감이 가득했다.

단 한 명만이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여유가 넘쳤는데.

그건 물론 술을 홀짝이고 있는 엘림이었다.

“권력이란 이렇게 덧없는 것이랍니다.”

엘림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오바산조가 패배하고 건물에서 떨어진 것이 알려지자 검은 양복들은 건물 곳곳으로 숨어버렸다.

게다가 루트 내의 다른 파벌들도 건물 주위로 몰려와 있었다.

그야말로 사면초가.

“일이 이렇게 될 줄은······.”

간신히 한 마디를 내뱉는 해로즈.

그런 해로즈를 바라보는 엘림에게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배가 풍랑을 버텼다. 아니, 버틴 정도가 아니라 짓밟아버렸지.’

엘림의 생각에 해로즈의 계획은 나쁘지 않았다.

자신을 먼저 확보해서 정통성을 확보했고, 생체 허브 중 가장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는 스냅샷을 생포하거나 제거해서 루트의 데이터베이스를 틀어쥐겠다는 생각도 충분히 할만한 생각이었다.

루트의 간소화, 지하 조직화를 구상하고 있으니 외부 영입 인사의 선봉 격인 타이린드의 기세를 꺾는 것도 충분히 그럴듯하게 들리는 일이었고.

해로즈가 계산의 범위 내에 두지 못했던 것은 해결사 오메가 하나다.

오메가가 막대한 이권보다 의리와 신의를 선택할 거라는 점, 단 하나.

그 작은 변수 하나 때문에 모든 계획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엘림은 보고 있었다.

엘림이 중얼거렸다.

“애초에 배가 아닐 수도 있겠군······풍랑 따위에는 영향을 받지 않는 거대한 고래 정도였으려나.”

스스로도 오메가의 역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게 아닐까 하는 반성.

엘림이 그러거나 말거나 해로즈는 신경이 잔뜩 곤두서서 측근들에게 빼액거리며 소리를 지르기에 바빴다.

“놈이 어디로 오는지 파악해, 당장! 도망친 놈들도 끌고 오고!”

“오바산조 님은 어떻게······.”

“명줄이 길면 살아 있겠지! 지금 그 고릴라한테 신경 쓸 때가 아니야! 빈츠나 그린필드에게도 연락해봐! 그쪽 몫을 적당히 떼어줄 테니 협력하라고······!”

루트 내부의 다른 파벌들의 우두머리들에게도 연락해서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나가는 와중―

쾅하는 소리와 함께 대회의실 입구에서 바로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이는 환풍구의 입구가 떨어져 나갔다.

여유로운 몸짓으로 착지하는 오메가.

얼굴에는 짜증이 잔뜩 묻어있었다.

“해로즈라는 놈이······너겠네.”

측근들이 각자 지닌 보호용 오브젝트에 손을 올리려고 했으나 오메가 다음으로 떨어진 타이린드가 총을 변형시키며 살벌하게 읊조렸다.

“동작 그만. 움직이는 놈은 그대로 머리 날아간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불을 뿜는 총구.

여성 아수라 하나의 귓불이 날아갔다.

“아악!”

“손이 여섯 개라서 몇 개는 안 보일 줄 알았어? 이번엔 귓불이지만 다음엔 머리통이야. 한 번에 세 개 다 터트릴 거니까 더 움직여봐.”

대회의실이 단숨에 공포 분위기로 물들었다.

“어이쿠!”

환기구에서 떨어진 스냅샷이 앞선 둘과는 달리 중심을 잡지 못하고 쓰러졌다.

길게 늘어선 책상 위로 올라간 오메가가 가장 앞, 해로즈가 앉아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황소 수인의 피가 말라붙은 그의 신발에서 나는 발소리가 해로즈의 심장을 조여왔다.

책상 위에 늘어져 있던 엘림도 오메가가 지나가자 슬쩍 몸을 기울여 길을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오메가는 해로즈의 앞에 도달했다.

도통 넘어가지 않는 침을 꿀꺽 삼킨 해로즈의 눈에 오메가는 악마 그 자체로 보였다.

하지만 악마 앞에서도 살아나갈 방법은 있을 터.

억지로 담대한 척 미소를 지은 해로즈가 말했다.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겠습니다.”

“그게 끝이야?”

오메가의 물음.

해로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혼잣말인지, 대화인지 모를 말을 오메가가 흘렸다.

“여기 올라오면서 고릴라 하나를 봤단 말이지. 100층 정도에서 배가 잘린 채로 아무런 안전 장비 없이 떨어졌어. 죽었을까? 살았을까? 대답해. 그 잘난 대가리랑 입으로.”

“오, 오바산조는 약물과 수술로 강화된 몸을 가져서 빠른 조치를 취했다면······.”

해로즈의 말을 오메가가 잘랐다.

“그래? 기술이 좋긴 좋네. 그런데 모르긴 몰라도 분명 죽은 사람들이 있을 거야. 검에 베였던지, 마법에 먹혀버렸다든지 혹은 총에 맞았든. 안 그래?”

해로즈를 바라보는 오메가의 눈에 감정은 깃들지 않았다.

벌레를 바라보는 눈, 딱 그 정도였다.

“내가 피에 미친 살인광이라서 그들을 그렇게 했나?”

대회의실에 엘림이 술을 홀짝이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대답해, 고블린.”

살기가 해로즈를 틀어쥐고 있었다.

“그, 그건······.”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내가 죽었겠지. 서로 목숨을 걸었다는 소리야. 죽이지 않으면 죽는 칼날 위에 있었다고.”

감정 하나 없던 오메가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런데 뭐? 여기까지고 물러나? 그렇게 쉽게 발을 뺄 수 있던 거 였어? 네 눈에는 이 모든 게 되면 좋고 안 되면 무르고 마는 거냐? 게임도 그따위로는 안 해.”

오메가가 칼자루를 비틀었다.

판결을 내리는 판관의 날 선 이성처럼, 광자 검날에 살기가 흘렀다.

“죽은 자들에게도 그렇게 말하고 말 건가? 여기까지였다고?”

“으으으······.”

해로즈가 몸을 뒤로 붙이다 의자 채로 뒤로 넘어갔다.

그런 해로즈를 한심하게 보던 오메가가 내뱉었다.

“잘난 듯이 위에서 다른 이들을 내려다봤으면서, 스스로의 목숨을 걸지는 않았군.”

공포에 질린 해로즈가 바닥을 기어 도망치려 하기 직전, 광자 검날이 움직였다.

데굴-

“어······?”

해로즈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두 팔과 두 다리를 바닥에 댄 자기 몸이 옆으로 쓰러지는 모습이었다.

이제는 술을 홀짝이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오메가가 검을 역전개했다.

짝, 짝, 짝

박수 소리.

엘림이 기쁜 얼굴로 오메가를 바라보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대단합니다. 정말 대단해요. 저는 오메가 당신이 얽혔다고 했을 때, 야스민 가문이나 위타천에게 도움을 요청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혼자서 헤쳐가기에는 힘든 문제였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해버렸군요. 놀랍습니다!”

몸과 목이 분리된 채 죽어버린 해로즈, 박수를 치며 이 사태의 원흉을 칭찬하는 엘림.

대회의실에 모인 다른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오메가 당신 덕에 루트는 더욱 도약할 겁니다. 대가는 절대 서운치 않게 드리겠습니다.”

오메가가 계속해서 박수를 치고 있는 엘림에게 다가섰다.

“그쪽이 엘림?”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한번 만나 보고 싶었는데―.”

오메가는 손을 들어 엘림의 말을 끊은 뒤 그의 옆에 놓여 있던 술잔을 들었다.

“한 잔 줘 봐.”

잠깐 얼빵한 표정을 짓던 엘림이 술이 담긴 호리병을 들었다.

“재미있는 분이시군요. 그런데 이건 도깨비용으로 특수하게 주조된 거라······.”

“달라고.”

그 분위기에 못 이겨 결국 오메가에게 술을 한잔 따라준 엘림.

쭉 들이키자 목에서부터 배까지 타는 느낌이 선명했다.

인상을 찡그린 오메가가 잔을 내밀었다.

“받아.”

“허허 이거 참······.”

엘림이 잔을 받기 무섭게 오메가가 호리병을 들어 술을 채웠다.

쪼르륵-

그걸 입가로 가져가는 엘림의 귀에 오메가가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술 마셨으니까 나는 심신미약이다.”

“예?”

술잔을 입에서 뗀 엘림은 자신의 미간을 향해 날아드는 호리병을 보았다.

퍼억-

대회의실에 있는 모두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파악도 못 하는 사이, 엘림의 미간에 호리병을 찍어버린 오메가는 계속해서 호리병을 들어 엘림의 머리통을 향해 내리치고 있었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힘주어 한 단어를 내뱉으며.

“네가. 지랄맞은. 스탠스를. 취해서. 이. 지랄이. 났는데. 뭘. 잘했다고. 관람. 끝난. 관객. 처럼. 박수나. 치면서. 구경. 하고. 있. 어!!!”

아래 부분은 다 깨져서 사금파리가 되고 목만 남은 호리병을 쥔 오메가의 포효가 대회의실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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