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
078.
고블린이 손목시계를 만져 뭔가를 하려는 눈치길래 단숨에 손목을 베어버리자 개 수인은 양손을 들어 올려 전투의지가 없음을 알렸다.
“살려주십쇼!”
“이 근성 없는 새끼!”
피가 울컥울컥 솟는 팔목 절단면을 부여잡은 고블린이 개 수인을 향해 욕을 내뱉었다.
그 짧은 사이에도 출혈이 멎는 것으로 봐서 이 고블린도 몸에 뭔가를 한 모양.
하여튼 뭘 안 한 놈이 없다.
잘린 손목에서 또 다른 고블린이 만들어지고 그런 건 아니겠지?
꺼림칙함에 한 번 눈길을 줬지만, 손목시계가 채워진 채로 엘리베이터 바닥에 뒹굴고 있는 고블린의 손목은 별 움직임이 없었다.
비협조적인 고블린에게 어레스트를 채울 때쯤, 타이린드와 스냅샷도 엘리베이터 안으로 내려와 상판 뚜껑을 닫았다.
그러자 엘리베이터가 제 속도를 찾아 고속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개 수인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보던 스냅샷이 고개를 저었다.
“별로 아는 게 없는 말단 같습니다.”
“그래 보이더라.”
개 수인에게도 어레스트를 채워 구석에 밀어놓았다.
“이건 80층까지밖에 안 간다며. 120층까지는 어떻게 가지?”
“80층에서 별도의 엘리베이터가 있어. 내려서 조금 거리가 있는데―”
타이린드가 엘리베이터 구석을 가리켰다.
작은 감시카메라의 렌즈가 빛나고 있었다.
“아마 저쪽에서도 우리가 여기 타고 있는 건 파악했으니 내리면 환영 인파가 어마어마하겠어.”
말을 마치자마자 타이린드가 총을 들어 감시카메라를 터트려버렸다.
“제어실이나 이런 곳에서 엘리베이터를 멈출 수는 없나? 그러면 우리는 진짜 곤란해지잖아.”
스냅샷이 내 의문을 해소해주었다.
“엘리베이터가 가동된 이상 외부에서 멈출 수는 없습니다. 고층을 고속으로 왕복하는 엘리베이터라 이동 시에 외부 간섭을 최소화하게 만들어놨다고 합니다.”
“그건 120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도 같고?”
“네.”
“그런데 그 엘리베이터는 지금처럼 몰래 접근하는 게 아니잖아. 무턱대고 타기엔 위험할 것 같은데.”
“80층에서도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위로 향하는 통로가 있긴 있습니다.”
“비상계단 같은 건가?”
“아뇨. 아까 저희가 이용했던 것과 비슷한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좀······.”
스냅샷이 말을 흐리면서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개 수인과 고블린 수인을 바라봤다.
혹시라도 저들이 들을까 봐 걱정되는 눈치.
일반적인 엘리베이터에 비하면 분명 큰 엘리베이터였지만 그래도 넓지 않은 공간에서 스냅샷을 반대편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타이린드도 개 수인과 고블린에게 총을 겨눈 채로 우리 곁으로 와서 스냅샷을 채근했다.
“뭔데. 얘기해봐.”
스냅샷이 여전히 반대편 구석을 힐끔이며 속삭였고, 그걸 들은 타이린드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개고생 확정이네.”
엘리베이터의 속력이 차츰 느려지고 있었다.
문 위의 숫자가 80에 가까워졌다.
“그 개고생은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지금 펼쳐질 개고생부터 처리하죠.”
76층.
“나가서 좌측으로 쭉 직진입니다.”
스냅샷의 말.
77층.
“아직 외부랑 통신 안 되지?”
“네. 내부망은 작동하는 것 같은데, 접속했다가는 바로 저희 위치가 들통날 겁니다.”
78층.
“내가 먼저? 아니면 오메가 네가 먼저?”
“타이린드가 먼저 할래요?”
“그래. 평탄화를 한번 해 줘야 뒷사람이 편하지.”
타이린드가 건물 로비에서 보여줬던 것처럼 총 두 자루를 합쳐 기관총 형태로 변형시켰다.
총의 일부가 분리되어 떨어져서 타이린드 곁에 작은 참호를 만들었고, 개머리판에 연결되어 있던 머리카락이 더욱 길어져 바닥을 파고들어 타이린드의 뒤를 지지했다.
스냅샷을 엘리베이터 버튼이 있는 곳 바로 앞, 밖에서 들어왔을 때 왼쪽으로 돌아야 보이는 사각지대에 숨게 했다.
나는 스냅샷의 반대편, 그러니까 밖에서 들어왔을 때 오른쪽으로 돌아야 보이는 곳에 몸을 숨겼다.
79층.
탄약 상자를 뜯어 기관총에 때려 붓는 타이린드에게 말했다.
“된 것 같으면 얘기해요. 바로 튀어 나갈 테니까. 스냅샷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타이린드 뒤에 있어. 생각하지 말고 타이린드가 하라는 대로 해. 알겠어?”
스냅샷이 턱을 달달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띵-
80층.
문이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타이린드가 엘리베이터 문의 그 작은 틈새로 포화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스쳐 갈 뿐인데도 열기가 훅하고 밀려올 정도의 레이저 탄환 세례.
“엘리베이터 계속 잡아놔!”
타이린드의 외침에 스냅샷이 손을 덜덜 떨면서도 쭉 뻗어 열림 버튼을 눌렀다.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손톱 아래가 허옇게 변할 정도.
엘리베이터 너머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맞대응해! 쏴!”
“으아아악! 내 팔!”
“들고만 있지 말고 던져!”
뭔가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데구르르 굴러왔다.
스냅샷이 외쳤다.
“행동압박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지만 터져서 좋을 게 없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는 이름.
곧바로 몸을 낮추고 칼등을 이용해 그걸 바깥으로 쳐냈다.
그리고―
[흐림수르사르]
엘리베이터 문과 문 사이에 무릎 높이의 얼음벽을 세워 그쪽으로 굴러 들어오는 투척물들을 막았다.
레이저 포화를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 있는 스냅샷에게 말했다.
“버튼에서 손 떼도 돼.”
스냅샷이 뭐라 반응하기도 전, 타이린드가 외쳤다.
“가!”
얼음벽을 훌쩍 뛰어넘기 무섭게 정체를 알 수 없는 투척물 두어 개가 날아들고 있었다.
[역려건곤]
잘린 투척물들이 폭발하려는 듯 빛이 반짝했으나, 역려건곤에서 쏟아지는 흰 포말에 집어삼켜져 쓸려가 버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귀를 찌르는 듯한 소리가 퍼졌다.
‘영창?’
소리의 근원지인 검은 양복을 입은 엘프 곁에서 공간이 찢어지며 괴악하게 생긴 생명체가 기어 나오고 있었다.
소환술사인 것 같았다.
[추진]
이미 고릴라를 상대할 때도 사용했던 스킬이라 아직 채 풀리지 않은 무릎과 허벅지의 피로가 그대로 밀려왔다.
몸을 돌려 손에 든 검에 회전을 실었다.
눈으로는 소환물을 담았다.
이런저런 동물을 합쳐놓은 모양새라 어디가 약점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대가리를 베면 어떻게든 되겠지!’
눈이 있을 것 같이 생긴 움푹 팬 곳 아래쪽, 내가 보기에 그것의 목 언저리라고 생각되는 위치를 겨냥했다.
[연하일휘]
광자 검날이 거칠 것 없이 나아갔다.
스걱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소환물이 위아래로 분리됐다.
“큐티!”
엘프의 외침이었다.
하수구에서 건져 올린 것 같이 생긴 이 소환물의 이름을 큐티라고 짓는 엘프의 작명 센스와 미적 감각에 놀라 검을 놓칠뻔했다.
눈에 눈물을 머금은 엘프가 이를 악물고 수인을 맺자 그의 어깨 옆에서 다시 한번 공간이 벌어졌다.
샛노란 깃털, 주황색 부리.
카나리아의 머리였다.
다만 카나리아의 머리가 바로 옆에 보이는 엘프의 머리보다 훨씬 컸다.
그리고 카나리아의 눈은 마치 잠자리의 겹눈처럼 작은 눈이 겹겹이 박혀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어지럼증을 유발했다.
“뭘 자꾸 꺼내는 거야!”
카나리아의 머리통을 [히미르]로 얼려버리자 카나리아 너머의 공간이 닫혀버렸고, 엘프가 다시 한번 절규했다.
“스위티마저!”
구제와 갱생이 불가능한 놈이라고 판단해서 베어버렸다.
꿈틀대는 엘프를 옆으로 치웠을 때, 그때를 기다렸는지 나를 향해 날아드는 놈이 있었다.
코에 피어싱을 한 황소 수인이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오함마가 놈의 손에 들려있었다.
“죽어어어!”
오함마의 헤드가 넓게 변했다.
검을 들어서 막아냈다.
무엇으로 만들어진 건진 모르겠지만 분명 광자 검날에 닿아있는 오함마의 헤드는 녹거나 잘리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황소 수인이 콧김을 내뿜자 검을 통해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힘싸움 좋지.”
황소 수인 말고도 나를 향해 달려드는 놈들이 몇몇 있었지만,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타이린드의 지원사격 덕에 픽픽 쓰러지고 있었다.
타이린드가 달려오며 격하게 소리쳤다.
“시간 쏟을 여유 없어!”
엇갈린 검과 오함마 너머의 황소 수인에게 말했다.
“저 목소리 잘 기억해.”
눈썹을 움찔하는 황소 수인.
“너네 새로운 전략실장이거든.”
[혈계조검술 – 컨플루엔시아]
[에스피나]
손등에서 상처가 생기며 피가 검을 타고 올라가서 고릴라 수인 때처럼 체인소드를 만들어냈다.
[로타시온]
피의 체인소드가 회전하며 오함마를 파쇄하기 시작했다.
또다시 몰려오는 어지럼증.
빈혈증세다.
이건 오래 유지할 스킬이 못 된다.
[취중실천지]
오함마의 헤드를 다 부순 체인소드가 그대로 황소 수인의 미간을 긁고 지나갔다.
당황한 황소 수인이 오함마를 놓쳤다.
[혈계조검술]을 해제하자 조금 살 것 같았다.
나를 향해 주춤거리는 다른 검은 양복과 얼이 빠진 황소 수인이 보였다.
[에피시]
곧바로 검날을 타고 오르는 불.
아래에서 위로, 검이 올곧은 대각선의 궤적을 그렸다.
황소 수인의 배와 가슴에 길고 깊은 상처가 그려졌다.
충격 때문인지 눈을 까뒤집고 무너지는 황소 수인의 미간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찰박-
그 피를 밟고 걸어가자 앞에 있던 검은 양복들이 혼란에 빠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와! 나오라고!”
“저런 걸 무슨 수로 죽여!”
“해로즈 개새끼야! 네가 와서 상대해! 존만한 고블린 새끼야!”
코를 킁킁거렸다.
어디선가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나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불타는 검이 지나간 황소 수인의 상처에서 냄새가 솔솔 올라오고 있었다.
소의 배 부위면······.
“업진살 살살 녹는다.”
“뭔 헛소리야!”
얼이 빠진 스냅샷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뒤쪽을 향해 총을 갈겨대는 타이린드가 가까이 와 있었다.
뒤로 고개를 돌려보자 씹다 뱉은 풍선껌 같은 고무 질감의 무언가가 복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검은 양복들은 그걸 넘어오려다가 넘어지고 자빠지고 아주 슬랩스틱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저건 뭐죠? 타이린드가 한 건가요?”
“아니. 아까 엘리베이터 안에서 네가 밖으로 쳐낸 거야.”
“수류탄 같이 생겼는데, 저렇게 된다고요?”
“실내에서 저런 게 부풀어 오르면 꼼짝도 못해.”
“그래서 스냅샷이 아까 행동제한탄이라고 그랬구나? 무슨 소리인가 했는데.”
“어쨌든 잘 쳐냈어. 저게 엘리베이터 안에 있었으면 아무것도 못 하고 잡혔을 거야. 저걸 쓰는 걸로 봐서 우릴 죽일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글쎄요. 저는 기를 쓰고 죽이려고 하던데요.”
“오메가 너는······저질러 놓은 게 많아서 그런가?”
“저보다는 타이린드가······.”
“틀린 말은 아닌데, 모르겠다.”
넘어지려 하는 스냅샷의 뒷덜미를 잡아 세운 뒤에 타이린드에게 말했다.
“그런데 아까 고릴라를 제외하면 생각보다 무력 수준이 높지는 않은 것 같아요.”
뒤쪽을 향해 총을 몇 발 쏜 뒤, 팔뚝에서 꺼낸 탄환으로 재장전하며 타이린드가 긍정했다.
“루트에서 전투원이나 조사원같이 무력을 담당하는 인원들은 대부분 나처럼 외부에서 영입해왔으니까. 이놈들은 아마 해로즈가 데리고 있던 놈들 같은데, 정예는 몇 없지 싶네.”
“생각보다 일이 어렵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긴장은 풀지 말자고.”
나와 타이린드 사이에서 숨을 몰아쉬던 스냅샷이 문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깁니다.”
가장 앞에 있던 나는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수유실?”
타이린드도 목소리에서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거 맞아?”
“여기까지 와서 제가 거짓말하겠습니까!”
스냅샷이 수유실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